아는만큼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④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8천년 전 항법을 체득하다
“항법: navigation , sailing , 航法
선박을 출발지에서 목적하는 곳까지 안전하고 가능하면 빠르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 방법 등을 말한다.”

 

8천 년 전에 뱃사람들의 항법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초적인 몇 가지 항법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항해 중에 중요한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함으로서 목적지와 본선의 관계 위치를 알아내거나, 연안(해안) 가까이 거리를 유지하며 해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항해 중에 해와 달, 별과 같은 천체를 관측하여, 그 관측 값과 관측한 시점에 따라 현재 위치와 방향을 가늠하는 방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항법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어렵게 생각되겠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항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 혹은 전철역을 찾고 학교나 회사에 출근하고 마트나 약국을 찾아가는 모든 활동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항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항법을 구사합니다.

특히 길에는 각종 표지판과 건물의 간판들이 우리가 희망하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도록 참고물 역할을 해 줍니다.

 

하지만, 바다라는 공간은 방향만 가늠해서 안전할 수 없는 곳입니다.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서 연안은 물의 깊이가 주기적으로 달라집니다.

눈에 잘 안 보이지만 ‘조류潮流’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류가 힘들이지 않고 배를 밀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배를 떠내려 보내기도 합니다.

수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암초와 작은 바위섬들은 조류와 합작하여 배를 위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의 흐름은 시간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하고 날씨에 따라 강약이 달라집니다.

‘물길을 안다’는 것은 물의 흐름과 변화를 기억하고 이용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 선조들은 끊임없이 배를 만들고 깊은 물로 나아갔다고 생각됩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내고 ‘항법’을 체득해 냈습니다.

그 덕분에 울산 바다에서는 거대한 고래를 사냥했고, 멀리 있는 섬들까지 사람이 갈 수 있었으며, 일본 열도까지 넘어가 날카로운 도구 ‘흑요석’을 싣고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비봉리 목선은 이렇게 8천 년 전 선조들의 도전적인 삶을 엿보게 해 줍니다.

‘신석기’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8천 년 전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8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미개인이나 원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봉리 목선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와 수준 높았던 기술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땅을 의지해서 더불어 살았던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8천 년 전 비봉리 목선을 만들고 바다를 누비던 사람들은 지혜로웠으며 높은 수준의 기술을 축적했던 자랑스러운 선조들입니다.

 

배와 관련된 선사 고대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너무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7천7백 년 전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판재형 죽변리 목선, 일본 열도로 기마 군단을 실어 날랐던 가야의 배, 22담로를 개척하여 동아시아의 로마를 재현했던 백제의 배, 황해의 제왕 장보고가 탔을 신라의 배. 수많은 깨우침과 역사 진실을 가르쳐 주는 한민족의 해양개척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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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③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노를 저어 배를 조정하다

8천 년 전 배 만드는 기술자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타도 물에 뜨는 배를 만들었다면 그 다음 고민은 배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곳으로 갔다가 다시 뭍으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배를 움직이게 하는 힘,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얕은 물가라면 긴 장대로 바닥을 밀어서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것이라면 양쪽 뭍에 매어 둔 밧줄을 당겨서 오고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수, 강, 바다처럼 깊은 물에서는 장대나 밧줄로 건너기는 어렵습니다.

필요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게 합니다.

사람이 헤엄칠 때 손과 발로 물을 밀어 내듯이, 오리 같은 새들이 물갈퀴가 달린 오리발로 물을 밀어 내듯이 ‘노’라는 도구는 자연스럽게 고안되고 발명되었을 것입니다.

 

비봉리 목선은 4~5미터 길이의 배인데, 적어도 4~6명이 노를 저었다고 추측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흡을 맞춰 노를 저으면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기도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물 위에서 방향을 가늠하다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노를 장착하면, 물 위에서 방향을 잡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항법”이 필요해집니다.

비봉리 목선이 발견된 곳은 8천 년 전 바다와 육지가 인접했던 곳입니다.

바다나 넓은 호수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있다면, 더구나 한밤중에 무사히 뭍에 도착하려면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까요?

물론 나침반은 없던 시절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상 사람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잡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려면 오랫동안 자연을 관찰하여 지식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정말 고맙게도 북극성과 북두칠성은 깜깜한 밤하늘에 오랜 세월 변함없이 북쪽을 알려 주고, 해는 떠오르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동쪽을 알려 주며 해가 지면서 서쪽을 알려 줍니다.

 

8천 년 전 선조들은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기억했습니다.

산의 모양, 해변의 모양, 바위의 위치, 숲의 위치를 기억합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해를 보고, 해가 지면 밤하늘의 달과 별을 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살펴온 해, 달, 별의 운행 규칙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천지 자연을 보고 배워 자연스럽게 방향(방위)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었을 것입니다.

나침반도 등대도 없던 시절, 8천 년 전 선조들은 바다 위에서 하늘과 땅을 의지해 방향을 가늠하여 배를 몰고 물고기를 잡아 생활했습니다.

 

태고 시절부터 이 땅에 세워진 수많은 고인돌에 별자리가 새겨져 전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섬기고 그 안에서 삶을 영위했기에, 천지 부모 그리고 사람이라는 사상(천지인天地人 사상) 혹은 신앙(삼신三神 신앙)이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었을지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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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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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분업적 조직 사회

기술 이야기에 덧붙여서 8천 년 전 배 만들기가 알려 주는 다른 면모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나무를 다루는 지혜, 배를 만드는 기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시야를 조금 더 확대해서, 배를 만드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00년 된 소나무라면 둘레만 해도 대충 어른 둘이 마주 안아야 손을 잡을 정도였을 겁니다.

비봉리 목선에서 가장 두터운 부분의 폭이 62cm였으니 적어도 지름이 80~90cm 정도에 길이가 5m는 되어야 배를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하면, 나무 무게가 얼마나 될까요?

 

어떤 TV 프로에서 150년 된 소나무를 옮기는데 무게가 22톤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200년 된 소나무 5m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한두 사람이 옮길 수 있는 무게는 아닙니다.

배를 만들 목재를 옮기는 데 적어도 수십 명이 동원됐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통나무 하나로 실패하지 않고 배 한 척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배는 한 척만 만들었을까요?

이런저런 상황을 유추해 볼 때 마을 단위 노동력이 배 만드는 작업에 투입되었다고 봅니다.

그 당시 한 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온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야 할 대규모 선박 건조 사업이었습니다.

 

물가에 목재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제 배를 만들어야 하는데, 연장이 필요합니다.

그제서야 돌 도구 연장들을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적당한 돌을 채취하고, 돌을 깨거나 갈아 내고, 다시 나무로 만든 손잡이에 고정시키는 일련의 작업들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재를 옮기는 노동과는 별개로 연장을 준비하는 작업은 분업적으로 병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재를 선별하고 잘라 내서 운반하고, 연장을 마련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봐도, 배 만들기는 조직화된 집단 사회를 그려볼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8천 년 전 비봉리에서 발견된 통나무배는 단순한 배의 파편이나 나무 조각이 아니라 우리에게 조직화된 집단의 체계적인 활동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증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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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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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정글의 법칙’에서도 하지 못한 배 만들기

‘정글의 법칙’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오지에 가서 생존하는 것이 주 내용인데, 강물을 건너거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뗏목을 만드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무를 베어서 배를 만드는 장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출연자들이 먹거리를 구해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내용이 중심이다 보니 ‘배 만들기’ 같은 고된 노동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제는 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전문적인 연장과 도구 없이 손칼 몇 개 가지고는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배 만들기가 정말 힘든 일일까? 정말 힘든 일입니다!

비봉리 목선은 통나무를 잘라서 사람이 탈 공간을 파내 만든 배였습니다.

배를 만들 수 있는 목재를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습니다.

아름드리나무 베어 내기는 가장 큰 난관입니다.

 

특히, 8천 년 전 비봉리 목선이 만들어졌던 시기는 금속 도구가 없던 시절(신석기 시대)입니다.

돌 도구만 가지고 사람 몸통보다 두터운 나무를 베어 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어찌어찌해서 나무를 베었다면 물가로 큰 나무를 옮겨야 합니다.

2~3미터 길이의 사람 몸통 두께만 한 나무 무게는 한두 사람이 쉽게 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써야 합니다.

숲에서 물가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힘들겠죠.

 

큰 나무를 물가로 가져오면 그 다음부터는 도구 혹은 연장과의 싸움입니다.

돌 도구만으로 나무의 절반을 들어내고 다시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을 파내야 합니다.


8천 년 전 배의 가치

잠시 생각해 봐도 배 만들기는 아주 고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8천 년 전 선조들께서 해 내셨습니다.

강철 도끼나 끌, 대패 같은 금속 도구도 없이 말입니다.

 

8천 년 전 배 만들기는 그 당시 선조들의 지혜와 수준 높은 기술(High Technology)이 응축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그 당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보여 주는 기록물(Time stamp)입니다.

 

비봉리 목선은 전문 용어로 환목선丸木船 혹은 독목주獨木舟라고 하는데요.

굵고 긴 나무를 통째로 배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봉리 목선은 200년 된 소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수령 2백 년 된 나무를 잘라서 4~5미터가 넘는 배를 만들었습니다.

거대한 소나무를 돌 도구로 베어 내고 다듬어 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들의 지혜를 만나게 됩니다.

 

나무는 생각보다 가공하기가 아주 까다롭습니다.

특히 굳은 옹이 부분을 가공하려면 금속 도구를 가지고도 생각대로 다듬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조들께서는 불을 사용하여 목재를 가공하였습니다.

 

비봉리 목선에는 ‘초흔焦痕(불에 태운 자국)’이 발견됩니다.

가공하려는 부분을 불로 태우면, 탄 부분이 부스러지기 쉬워서 훨씬 수월하게 나무를 다룰 수 있습니다.

지금도 나무 판재를 휘거나 가공하기 위해서 불을 사용합니다.

 

특히 특정 부분만 잘 태우면 쉽게 부스러뜨릴 수 있습니다.

어렵게 손으로 깍아 내는 수고를 덜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정교하게 불을 놓을 수 없기에 돌을 뜨겁게 가열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아 부분적으로 태우는 방법을 사용했을까요?

 

불을 사용해서 통나무 속을 U자형으로 파내 사람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고 배 밑바닥과 외형을 잡았다고 추정합니다.

이렇게 배가 완성됩니다.

추측하건대 거대한 소나무를 베어낼 때도 불을 사용했다고 보여집니다.

 

지금 현대 목공 기술보다는 어설프고 세련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나무를 다루는 지혜와 기술은 이미 8천 년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보다는 많이 느렸겠지만, 차근차근 지식을 축적하고 지혜와 노력을 모아 배를 완성시켜 내고 그 흔적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선조들께 깊은 고마움이 스며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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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⑤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간단하게 말하면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에서 끝에 ‘지도’라는 것은 ‘~하는 그림’이란 뜻이다.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천문현상天文現象의 줄임 말이다.

열차列次란 하늘 별자리를 구획으로 나누어 펼쳐 놓았다는 의미이고, 분야分野라는 것은 하늘 구획을 땅의 특정 지역과 대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공간을 방위와 방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3차원 우주 공간에 퍼져 있는 별들을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상의 방위와 방향에 맞게 2차원 평면에 펼쳐 놓은 것이 천문도이다.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들을 12구역으로 나누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조선 백성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지침서로서 ‘표준 천문도’였다.

이 표준 천문도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천문학

고려 시대의 천문 관측 기록은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

정밀한 관측 기계가 아니면 관찰이 어려운 천문 현상까지 남기고 있다.

고려는 다양한 국가 천문 기관에서 30명에 가까운 천문 학자와 관리들이 활동했다.

 

고려 왕조 475년 동안 천문 관측 기록은 〈고려사〉, 〈천문지〉, 〈역지〉, 〈오행지〉 등에 집약되어 있다.

무려 6,500건에 달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 중 일식 138회, 혜성 87회 같은 비교적 쉬운 관측에서부터 태양 흑점을 관측한 기록도 38회나 있다고 한다.

한 예로 1151년 3월 2일에 ‘일중유흑자日中有黑子’ 즉, ‘태양 속에 검은 것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그 크기가 계란만 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자세한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고려사〉에 오윤부伍允孚가 천문도를 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 기록에서 평양에 천문도가 있다고 한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천문도를 고려가 이어받아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남아있는 정교한 천문도는 없지만 고구려의 별자리 특징을 볼 수 있는 것이 고려 희종의 무덤 천장에 있는 별자리 그림이다.

가운데 북두칠성이 있고 주변에 28수를 그려 넣었으며 태양과 달도 그렸다.

 

무엇보다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에는 북극성과 두 개의 별이 조합된 북극삼성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북극삼성은 고구려 때부터 이어진 특징이다.

동시대에 중국 천문도는 북극오성이 유행이었다.

집안시 씨름무덤(각저총), 춤무덤(무용총), 통구 사신총, 평양시 진파리 4호분 등 고구려 벽화에서 북극삼성이 보인다.

 

또 다른 고구려 벽화의 별자리 전통은 일월, 북두칠성, 그리고 남두육성의 조합이다.

동서쪽에 그려진 해와 달에는 삼족오와 두꺼비가 그려져 있고 북쪽에는 북두칠성 남쪽에는 남두육성이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부터 고려로 전해진 독특한 별자리 체계는 또 있다.

 

고려로 계승된 대표적인 특징은 카시오페아 별자리이다.

주변 국가 천문도에서는 W모양의 카시오페아 별자리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에서는 W모양의 별자리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고려 석관에도 북두칠성과 함께 짝으로 W모양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 천문과학을 전수한 고조선

고조선 영역에는 수많은 고인돌이 있다.

그 중에는 별자리가 그려진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었다. 불

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인돌에 새겨진 구멍들을 별자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조선 때부터 별자리를 관측했음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유물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고인돌에 별자리로 보이는 홈을 적게는 1~2개에서 많게는 400개까지 새긴 것들이 나타난 것이다.

1978년 충북 청원군 아득이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 유적에서 크고 작은 별이 60여 개 이상 새겨진 돌판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아득이 돌판의 점들이 진짜 별자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진파리 4호 무덤(6세기경)의 별자리와 기원전 15세기 지석리 고인돌의 별자리와 기원전 5세기 북극성 주변의 별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해서 서로 비교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득이 돌판의 별 배치가 다른 예들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아득이 돌판은 진짜 천문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돌판에 새겨진 별들의 지름이 별의 밝기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별이 밝으면 크게, 흐리면 작게 표시하는 고구려 천문학 전통이 이미 고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원본을 만든 고구려인들은 아득이 돌판을 만들었던 고조선으로부터 세계 최초의 천문 관측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수천 년의 천문 관측 기술과 역량이 드러난 걸작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이자, 세계의 자랑거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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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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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간단하게 말하면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에서 끝에 ‘지도’라는 것은 ‘~하는 그림’이란 뜻이다.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천문현상天文現象의 줄임 말이다.

열차列次란 하늘 별자리를 구획으로 나누어 펼쳐 놓았다는 의미이고, 분야分野라는 것은 하늘 구획을 땅의 특정 지역과 대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공간을 방위와 방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3차원 우주 공간에 퍼져 있는 별들을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상의 방위와 방향에 맞게 2차원 평면에 펼쳐 놓은 것이 천문도이다.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들을 12구역으로 나누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조선 백성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지침서로서 ‘표준 천문도’였다.

이 표준 천문도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다.

 

일월오봉병(도)日月五峯屛(圖)

자미원에 있는 ‘옥황상제’가 북두칠성이라는 수레를 타고 1년 동안 온 우주를 돌며 다스리는 것을 칠정七政이라고 한다.

옥황상제는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자이자 신神이다.

북두칠성은 상제의 명령을 받아 4계절마다 각 7수(28수 중 7별자리)를 지휘한다.

 

각 7수는 북두칠성의 지휘 아래 맡은 바 영역에서 정해진 시기(계절)에 맞게 활동을 한다.

7수의 활동은 다시 온 우주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가 속한 태양계의 일월과 오행성(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까지 이르게 된다.

일월과 오행성은 7수의 지휘 아래 각기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이 땅의 만물에 낳고 기르고 결실시키고 죽이는 작용을 한다.

 

이처럼 자미원에 있는 상제(혹은 천제)가 온 우주를 다스리듯 천제의 대행자인 임금은 하늘로부터 인간 세상의 통치권을 부여받았기에 하늘을 본받아 이 땅의 백성들을 다스린다.

이것이 천상의 칠정을 본받아 임금이 인간 세상에 펼치는 정치政治이다.

그래서 역대 제왕들은 하늘의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1년 365일 일월 오행성의 움직임과 별자리들을 관찰하고 기록하게 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자미원에 계신 상제의 뜻을 알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천제)은 말도 몸짓도 없기에 임금께서는 하늘의 기색(상象)을 살펴서라도 천심을 알고자 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이라는 관청을 두어 천문을 관측하고 기록하여 임금님에게 주요 사항을 보고하게 했다.

이렇게 천문을 관측하고 그 기록과 역량이 축적되면서 달력을 만들어 냈고 이는 어로, 수렵, 목축, 채취, 농사 등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앞서 소개한 여러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하늘의 이치대로 사람들이 살아야 했기 때문에 천문도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

이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었던 이유인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②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간단하게 말하면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에서 끝에 ‘지도’라는 것은 ‘~하는 그림’이란 뜻이다.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천문현상天文現象의 줄임 말이다.

열차列次란 하늘 별자리를 구획으로 나누어 펼쳐 놓았다는 의미이고, 분야分野라는 것은 하늘 구획을 땅의 특정 지역과 대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공간을 방위와 방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3차원 우주 공간에 퍼져 있는 별들을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상의 방위와 방향에 맞게 2차원 평면에 펼쳐 놓은 것이 천문도이다.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들을 12구역으로 나누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조선 백성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지침서로서 ‘표준 천문도’였다.

이 표준 천문도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다.

 

하늘의 명당을 땅에 내린 경복궁

풍수란 하늘의 명당과 닮은 땅의 명당을 찾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어디가 명당일까?

 

북극성과 북두칠성에는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의 제왕(천제天帝 혹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이 머문다고 믿었다.

그래서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별자리 영역을 명당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가장 안쪽 원 내규內規인 ‘자미원紫微垣’ 혹은 ‘자미궁紫微宮’이 최고의 명당이다.


하늘의 28개의 별자리를 땅에 적용한 내용

자미원에 기거하는 하늘의 제왕이 있으면 하늘의 신하도 있고 하늘의 백성도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하늘 임금 아래에서 우주 정치를 수행하는 정부기관이 있는 곳을 ‘태미원’이라 하며, 하늘 백성들이 사는 곳을 ‘천시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은 삼원三垣이라 하며, 뒤에서 이야기할 28수와 더불어 동아시아 천문 사상의 특징이다.

즉 동아시아 천문도의 특징은 3원 28수이다.

조선을 만든 사람들은 하늘의 삼원을 지상에 배치시켰는데 자미원은 경복궁, 태미원은 육조거리로 지금의 광화문 광장에 해당한다.

육조 거리엔 중앙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이외에 조선 시대 국가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의정부를 비롯하여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감사원격인 사헌부 외에 정부 중앙 관청인 6조가 있었다.

천시원은 현대적인 의미로 백화점과 쇼핑센터가 있어서 종로의 시전이 바로 천시원에 해당한다 하겠다.

천상열차분야지도①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대 반짝이는 별을 보거든...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혹시 지갑에 일만 원권 지폐를 가지고 있다면 꺼내서 천문도를 찾아보기 바란다.

세종대왕이 그려진 뒷면에 천체 관측 기구가 그려져 있고 그 배경을 별자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번은 들어 봤을 이 천문도의 이름은 ‘천상열차분야지도’로서 동아시아에서 최고로 정밀한 별자리 그림이다.

무심코 지갑 속에 넣어 다니고 있지만 알고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우주의 그림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다.

태극기에 우주의 이치를 그려 넣었다면 만 원의 지폐 속에는 별자리를 담았다.

우리가 주머니에 우주를 들고 다니게 된 것은 한민족이 오랜 세월동안 별과 친하게 지내온 결과물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이 좀 어렵다.

간단하게 말하면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에서 끝에 ‘지도’라는 것은 ‘~하는 그림’이란 뜻이다.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천문현상天文現象의 줄임 말이다.

열차列次란 하늘 별자리를 구획으로 나누어 펼쳐 놓았다는 의미이고, 분야分野라는 것은 하늘 구획을 땅의 특정 지역과 대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공간을 방위와 방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3차원 우주 공간에 퍼져 있는 별들을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상의 방위와 방향에 맞게 2차원 평면에 펼쳐 놓은 것이 천문도이다.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들을 12구역으로 나누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조선 백성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지침서로서 ‘표준 천문도’였다.

이 표준 천문도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다.


분야설分野說
목성은 공전 주기가 약 12년(정확히는 11.86년)으로 매년 천구상의 황도 둘레를 약 30도씩 운행한다.

이 목성의 12년 1주천 주기를 12등분 한 것을 ‘십이차 분야설’이라 한다.

이 12차는 천상의 공간을 구획하는 분야론으로 전개되었으며 지구로 확장되어 12주, 12국에 배속되었다.

『환단고기』의 ‘12환국’과 동학의 ‘12제국’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복잡한 듯 간단한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에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별자리가 그려졌다.

그래서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라고 분류한다.

돌에 새긴 석각본, 나무에 새긴 목판본, 종이에 찍은 필사본으로 제작되어 조선 백성들에게 다양하게 보급되었다.

별자리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별은 총 1,467개이고 별자리는 모두 295개이다.

 

이 천문도를 언뜻 보면 아주 복잡하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쉽게 다가온다.

 

먼저, 이 천문도에서 네 개의 원을 구별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가장 바깥쪽 첫 번째 큰 원을 외규外規라고 부른다.

바깥쪽에서 중심부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 보면 중간 크기 원이 2개가 겹쳐진 채로 보인다.

 

중심 쪽에 있는 원은 천구(밤하늘)의 적도이다.

그리고 중심이 어긋난 원은 태양이 1년 동안 별자리를 지나는 경로를 나타내는 황도라고 한다.

 

네 번째로 가장 중심부에 있는 작은 원 안쪽이 ‘자미원紫微垣’이라고 부르는 내규內規이다.

이 4개의 원이 보이기 시작하면, 자미원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방사선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황도 근처에 배열된 28개의 대표적인 별자리를 중심으로 구획을 나눈 것이다.

자미원을 중심으로 360도를 28개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방사선으로 뻗어나간 선의 각도가 일정하지 않아 더욱 복잡해 보인다.

대표적인 별자리를 두고 그 크기만큼 나누었기 때문에 어떤 구획은 폭이 넓고 어떤 구획은 좁다.

이렇게 28개의 대표적인 별자리를 28수宿라고 한다.

박물관에서 본 우리역사-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왜곡⑤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 왜곡 부분

 

국립중앙박물관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국립 박물관이다.

1946년에 개관했으며 2005년 현재의 위치인 용산으로 신축 이전 개관을 하였다.

한 해 350만 이상이 방문하는 곳이고 약 100만 명의 외국인이 다녀가는 곳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규모면에서는 세계 6대 박물관이라고까지 얘기하는데,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외국 박물관에 못지않은 외관과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의 유물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은 대한민국의 바른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전해 주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박물관에 담겨진 역사는 왜곡된 사실을 그대로 반영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러 갔다가는 어느 것이 맞는지 헤맬 수 있다.

그렇기에 우선적으로 박물관에 진열된 왜곡된 역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원삼국 시대로 표기하는 박물관들

‘원삼국시대’ 라는 용어는 고故 김원룡 박사가 1973년 한국고고학개설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고고학계에서 일반화됐다.

그는 1970년대 초에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Proto-Three Kingdoms Period’라는 용어를 주창하였다.

이후 한국고고학에서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절대 연대로 환산하면 기원 전후에서 서기 300년 무렵까지는 원시삼국이라는 얘기다.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원삼국시대론이라든가, 서력기원 전후부터 서기 300년 무렵까지 백제와 신라의 초기 역사를 인정하지 않은 문헌 사학계를 겨냥해 “후기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맹비판을 했다.

 

신라와 백제는 엄연히 기원전 1세기에 건국했음에도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두 왕조의 실질적 건국시기를 4세기 이후로 보는 일본 식민사학을 답습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원삼국론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09년 고조선실을 만들면서 사라진 듯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지방 국립박물관 등에는 아직도 일부 쓰이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도 몇몇 기증 유물을 소개하는 곳에는 ‘원삼국 시절’이라는 표기가 뚜렷이 되어 있다.

 

이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몇 가지 왜곡된 부분을 알아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여러 차례 답사를 한 결과 이 박물관은 한사군 한반도설, 낙랑군 평양설을 고착화시키기 위한 장치가 여러 곳에 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는가 보다.

그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중심, 중국 중심이라는 것이 문제다.

거짓의 역사라 하더라도 이를 수정하거나 고치지 않고 기득권만을 유지하려는 것이 또한 문제다.

 

박물관은 우리 역사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진실을 알고 바르게 유물유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진실된 역사를 알리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사실 그 외에도 왜곡된 것은 너무나 많다.

고조선실은 개설이 되었지만 그 안에도 많은 왜곡이 있다.

고조선과 청동기 시대를 동일시하는 문제, 청동기의 연대 문제, 고조선과 진국의 문제, 고조선과 한나라의 문제, 고인돌 문제, 명도전을 중국 화폐로 보는 문제 등 숱한 왜곡의 문제들이 고조선실에 존재한다.

박물관에서 본 우리역사-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왜곡④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 왜곡 부분

 

국립중앙박물관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국립 박물관이다.

1946년에 개관했으며 2005년 현재의 위치인 용산으로 신축 이전 개관을 하였다.

한 해 350만 이상이 방문하는 곳이고 약 100만 명의 외국인이 다녀가는 곳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규모면에서는 세계 6대 박물관이라고까지 얘기하는데,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외국 박물관에 못지않은 외관과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의 유물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은 대한민국의 바른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전해 주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박물관에 담겨진 역사는 왜곡된 사실을 그대로 반영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러 갔다가는 어느 것이 맞는지 헤맬 수 있다.

그렇기에 우선적으로 박물관에 진열된 왜곡된 역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어 설명에만 낙랑군을 몰래 넣은 의도

전시실 내부에는 고조선과 한漢이라는 설명문이 있다.

이 설명문의 영문을 보면 국문에는 나와 있지 않은 부분이 들어가 있다.


“Gojoseon fell in 108 BCE, after a year-long war with Han China. As a result, Han set up Lelang Commandery as an outpost in the former Gojoseon territory.”

 

바로 고조선이 한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곳에 낙랑(Lelang)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한국사 연대표에는 낙랑(Nakrang)이라는 우리말식 표기를 쓰더니 이 설명글에는 중국어 발음으로 르랑(Lelang)으로 표기해 놓았다.

중국 식민지라는 얘기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박물관을 가면 그냥 지나치는 데 비해서 외국인들은 고대로부터 한국은 중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으로 알고 지나가게 된다.

 

일본인 기증자들이 기증한 낙랑군 유물

중앙박물관 2층에 가면 몇 일본 기증자 현판이 있다.

이 일본인들이 기증한 것이 우리에게 무슨 기여를 했는지 모르겠다.

진짜 가관인 것은 이들이 평양에서 도굴한 유물을 한사군 낙랑군 것이라고 떡하니 적어 놓은 것이다.

 

대부분 처음 박물관을 방문하면 2층의 기증관까지는 둘러보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낯 뜨거운 설명들이 담겨 있다.

 

상설전시관에는 ‘낙랑’이라고 쓰고 ‘낙랑군’이라고 읽어야 한다며 기증관에는 버젓이 ‘낙랑군’이라고 써놓고 있고 도장, 옥, 쇠뇌, 수막새 등 낙랑군 유물이 나왔다고 진열해 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