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티베트 역사①

진실의 역사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에서 만난 창세 신화
티베트 고원은 수백만 년 전에 형성된 비교적 젊은 지형으로 알려졌다. 티베트 민족은 1만 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티베트 고원은 티베트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다. 티베트의 동부, 남부, 북부 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최소 1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이미 이 지역에 인류의 활동이 있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비교적 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참도의 카룹, 라싸의 곡공曲貢 유적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유적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티베트 고원에 인류가 생활하며 살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티베트 민족은 다른 지방에서 이주한 민족이 아니라 바로 티베트 고원에서 형성된 민족이다.

 

티베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창세 신화에 따르면 티베트 민족은 원숭이와 나찰녀羅刹女의 후예다. 현지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나찰녀는 마녀나 요괴가 아니라 바위 동굴에 거주했던 유인원類人猿이었다. 그 유인원과 원숭이가 교합하여 자식을 낳아 인간이 되었다는 내용은 다윈의 진화론과도 상통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원숭이 후예 티베트 민족, 역사 시대로 가다
기원전 3세기 전후, 티베트 고원에는 세 개의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산난 지역의 얄릉雅隆 계곡에 자리 잡은 얄릉 왕국, 중부 지역의 숨파 여인국, 그리고 서부 지역의 장중 왕국이 그것이다. 얄릉 왕국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4세기, 얄릉 계곡에서 티베트 민족의 고유 신앙인 뵌뽀本敎를 신앙하는 12명의 유목민이 방목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들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유목민과 소년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소년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유목민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소년을 어깨에 태워 부락으로 데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년을 우두머리로 삼고 네치짼뽀聶赤贊普라고 불렀다. ‘목덜미에 앉아 있던 왕’이라는 뜻이다. 네치짼뽀는 티베트 최초의 왕이다. 네치짼뽀 왕에서 시작하는 이 왕조를 토번 왕조吐蕃王朝라고 한다. 토번(투푀·토번)은 티베트Tibet土伯特의 어원이 되었다. 뵌뽀 경전은 네치짼뽀를 색계色界의 13대 광명천자光明天子가 속세에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신화로 묘사되고 있으나 네치짼뽀는 실존 인물이다. 티베트 역사 기록에 따르면 네치짼뽀는 티베트 동부의 보미 지역 출신이다. 그는 눈과 피부가 녹색을 띠었고 손발에 물갈퀴 같은 것이 달렸고 힘이 장사였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악귀의 화신이라고 의심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얄릉으로 와서 토번 최초의 왕이 된 것이다. 네치짼뽀는 얄릉 부족을 통일하고 윰부라캉궁雍布拉康을 세웠다. 티베트인이 세운 최초의 궁전이다. 이곳에서 토번 왕조가 시작되어 32대까지 이어졌다.

 

제1대 왕 니치짼뽀로부터 제7대 왕 십치짼뽀塞赤贊普까지 토번 왕국의 임금은 뵌뽀 무당의 지배를 받았다. 토번 왕국이 일종의 신교神敎국가였다는 얘기다. 이 시기의 왕들이 남긴 업적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기록이 전한다. 일곱 왕은 모두 임종 직전에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무덤조차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군주 송짼감뽀松贊干布
7세기 초, 송짼감뽀松贊干布(617∼650)는 다른 십여 개 지역을 병합하고 티베트 고원의 통일 정권인 토번 왕조를 건설했다. 이때가 티베트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기다. 이 시기를 이끌었던 송짼감뽀야말로 티베트 민족의 영웅이다. 송짼감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자 조손삼대법왕祖孫三代法王의 으뜸으로 칭송되고 있다.

 

송짼감뽀는 푸갈 세계世系의 제32대 짼뽀贊普(군주)로 라싸 동쪽 마이조쿵가르에서 태어났다. 당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부왕인 남리송짼은 위기를 맞았다. 안으로는 신하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밖으로는 닥포, 공포, 장중, 숨파 등지에서 침공을 해 왔다. 마침내 남리송짼은 신하들에 의해 독살당하고 말았다. 629년 13살이던 왕자 송짼감뽀가 왕위에 올랐다. 영민했던 어린 왕은 정치적 수완을 한껏 발휘했다. 그는 암살자를 보내 부왕을 독살한 숨파 지역 냥망보쩨娘芒布杰를 제거하였다. 이어서 군대를 동원해 망보쩨 마을을 병합시켰다. 숨파 지역뿐만 아니라 티베트 전 지역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633년 송짼감뽀는 수도를 얄룽장뽀강 북쪽에 위치한 라싸로 옮겼다. 중앙의 마르포리 산 위에 아름다운 궁궐도 세웠다. 이때부터 라싸는 티베트 전 지역을 통치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송짼감뽀는 이어서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다. 주요 호족들을 중앙 관리로 임명하고 등급을 정했다. 부왕 남리뢴짼까지만 해도 임금과 부족장들의 회맹 관계에 불과하였던 것이 비로소 왕과 신하 관계로 바뀐 것이다. 이어서 군사 제도를 개편했다. 전국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고 한 구역에 한 군단을 설치했다. 전 인구의 군사화였다. 당시 한 구역의 인구가 4천여 호였다. 왕의 친위대는 1천 호였다. 토번 왕국의 백성이라면 평민이 농민이거나 유목민이면서 동시에 군인이었다. 법률도 제정했다. 지금까지의 왕들은 뵌뽀를 통해 통치했다. 법률 제정에 의해 토번은 왕이 직접 통치하게 된 것이다.


토번 왕국의 왕비가 된 당나라 문성공주
634년, 송짼감뽀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2년 뒤에 다시 사신을 보내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청혼했다. 당나라 공주를 아내로 요구한 것이다. 이세민은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土谷渾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638년 송짼감뽀는 군사를 일으켜서 북부 티베트 지역인 토욕혼을 정벌했다. 이어 여강麗江 등지를 점령했다. 같은 해 8월 송짼감뽀는 친히 20만 군사를 이끌고 당시 토번과 당나라의 국경 지역이던 송주松州(현재의 중국 쓰촨 성 송번松蕃)를 점령했다. 송짼감뽀의 군사력에 놀란 이세민은 마침내 구혼을 받아들였다.

 

당시 송짼감뽀의 왕비는 넷이 있었다. 첫째 왕비는 토번 출신이었다. 둘째와 셋째는 병합을 계획하고 있던 이웃의 작은 왕국 출신이었다. 송짼감뽀가 일종의 혼인 정책을 썼다는 얘기다. 넷째 왕비는 네팔 출신 브리쿠티bhrikuti(赤尊)였다. 브리쿠티는 ‘공주’라는 뜻이다. 브리쿠티 왕비는 불교 신자였다. 그녀는 토번으로 올 때 석가 8세 등신불을 가져왔다. 그녀는 송짼감뽀에게 석가 불상을 모실 사원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송짼감뽀는 작은 사원을 지어 주었다. 지금도 티베트 불교의 성지로 남아있는 조캉 사원大昭寺이 바로 그 사원이다.

 

641년 당나라 문성공주文成公主가 송짼감뽀의 왕비가 되기 위해 토번 왕국에 왔다. 그녀는 토번에 오면서 천문역법·음양참위·의학 등의 서적들을 가져왔고 각종 기술자들도 데려왔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녀는 석가 12세 불상을 가져왔다. 왕비가 된 그녀는 남편 송짼감뽀에게 석가 불상을 모실 사원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송짼감뽀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 사원이 조캉 사원 북쪽에 건립된 라모체 사원小昭寺이다. 이 사원 역시 오늘날에도 티베트 불교의 성지 중 하나다. 오늘날 불교를 빼놓고 티베트를 얘기할 수는 없다. 송짼감뽀가 두 왕비의 요청에 의해 세운 조캉 사원과 라모체 사원은 티베트 고원에서 불교가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710년 조캉 사원과 라모체 사원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 불상은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송짼감뽀는 650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던가. 티베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자리매김되는 송짼감뽀의 뒤는 손자인 망송망짼芒松芒贊(재위 650∼676)이 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한 살이었다. 재상 까르통짼이 대신 국정을 관장했다. 이로부터 약 50년 동안 토번 왕조는 통짼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다. 토번 왕국은 9세기 이후 마지막 왕인 랑데르마가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됐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베트 역사③  (0) 2017.09.27
티베트 역사②  (0) 2017.09.26
신비와 조화의 땅 티베트  (0) 2017.09.24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④  (0) 2017.09.21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③  (0) 2017.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