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평창 동계올림픽 문화코드 백호

진실의 역사

한국의 문화유산 22종

 

동굴 속에서 비채가 혼천의에 손을 갖다 대자 우주의 질서가 나타난다.

선기옥형을 상징하는 혼천의가 빛을 내면서 동굴 속에 홀로그램으로 한국의 문화유산 22종이 등장한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 사신도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신비로운 모습으로 뛰어나온다.

그중에서 백호가 아이들을 인도한다. 백호는 흰색의 금金 기운을 상징하므로, 계절로는 가을이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후천 선경세계 미륵님의 제자는 초립동草笠童”이라는 증언 말씀처럼, 가을을 상징하는 백호가 나타나 어린 초립동들을 우주의 가을 세계로 인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획자들이 거기까지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 마스코트가 호돌이였고 30년 만에 다시 열린 평창 동계 올림픽의 마스코트 중 하나로 등장한 것도 호랑이를 가리키는 ‘수호랑’이었다.

사신도 속의 백호가 등장해 한국인의 기백과 정신을 보여 주고, 동계 올림픽의 다섯 아이들을 이끄는 모습은 벅찬 감동이었다.

 

선기옥형璇璣玉衡 순임금이 제위에 오른 뒤 제일 먼저 선기옥형을 정비하였다 한다.

북두칠성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선기璿璣는 북두칠성의 앞쪽에 있는 네 별로서 혼천의를 상징하고, 옥형玉衡은 북두칠성의 나머지 세 별로 혼천의의 횡통을 상징한다.

선기옥형 도수는 천인합일하는 진법 도운의 도정道政과 군사부 일체의 새 시대를 여는 인사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 도전道典 5:196 각주

 

『환단고기』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이러한 오방색이 신의 본질을 광명으로 여기는 신교 시대의 삼신문화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신교 삼신관에 따르면, 오제五帝가 삼신의 명에 따라 오행을 맡아 다스린다.

“삼신께서 다섯 방위의 주재자인 오제를 통솔하여 저마다 그 맡은 바 사명을 두루 펴도록 명령하시고, 오령에게 만물화육의 조화 작용을 열어서 공덕을 이루게 하셨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는 것이다.

 

오행은 천지 성령의 영묘한 기운이기에 오령五靈이라 불린다.

천지의 다섯 신령한 조화 기운은 순전히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삼신과 오제의 주재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다. - 환단고기 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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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문화코드 오행

진실의 역사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韓문화코드

 

성공 기원 타종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가운데에 자리한 보름달 모양의 원형 무대 중간에 상원사 동종 모형의 ‘평화의 종’이 표현됐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한 줄기의 빛과 함께 평화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무대와 객석이 동계 올림픽을 상징하는 얼음으로 변하며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같은 시간 서울 조계사, 평창 월정사, 예산 수덕사 등 전국 1,800여 개 사찰에서도 범종을 울리며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했다.

서울 보신각과 임진각에서도 동시에 타종됐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제야에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것은 33천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모든 하늘을 울린다는 뜻이다.

우주는 수직으로는 9천天 구조와, 수평으로는 33천天 문명권이라는 입체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종소리를 통해 온 우주에 동계 올림픽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개막식 주인공, 다섯 어린이와 오행 철학

깊은 산골에 사는 강원도의 다섯 아이가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평창 동계 올림픽의 개막식은 기본적으로 오행五行을 코드로 하고 있다.

 

오행은 우주의 운동 원질(運動原質)로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다.

 

개막식장 자체가 오각형으로 설계되어 올림픽의 오륜과 오행을 동시에 보여 주는데, 다섯 아이가 그 상징이다.

 

아이들의 이름은 해나래, 아라, 푸리, 비채, 누리라는 고운 이름이다.

해나래는 해의 날개(화), 아라는 바다(수). 푸리는 풀(목), 비채는 비추다(금). 누리는 땅(토)이라는 뜻이다.

 

이 다섯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도 오행에서 비롯된 오방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섯 아이가 조화를 상징하는 구슬(아마도 여의주)을 발견하게 되고 구슬을 만지자 여행의 지도가 펼쳐진다.

아이들은 종소리를 따라 과거로 통하는 시간의 동굴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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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문화코드

진실의 역사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韓문화코드

92개국 2,920명의 선수가 참가해 동계 올림픽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하며 17일간 열전을 펼쳤던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과 동계 패럴림픽이 3월 18일 밤 패럴림픽의 폐회식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동계 올림픽 신청 3주 만에 개최지로 결정된 이후, 평창 동계 올림픽은 수많은 난관을 뚫고 대회 운영을 무난히 마무리함으로써 성공적인 올림픽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CNN, CBS 등 각국의 방송국에서 “5G 기술이 평창을 사상 최대 하이테크 올림픽으로 만들었다”고 보도할 만큼, 이번 제23회 평창 동계 올림픽은 세계 최초 5세대(5G) 이동통신 시범 서비스를 비롯하여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사물인터넷(IoT) 등을 망라한 ‘하이테크 올림픽’으로 자리매김했다.


선수촌 온돌과 음식
이번 대회에서 외국 선수들은 경기 외의 요소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로 숙소와 음식이었다. 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선수촌의 난방과 편의 시설에 만족해 했다.

 

침대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바닥이 따뜻하게 데워져 운동으로 피로한 몸을 노곤하게 풀어 주는 온돌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공기나 덥히는 정도인 그들의 난방 문화에 바닥 자체가 난방이 되는 온돌은 놀라움 자체였다고 한다.

고조선의 주거 문화이면서 우리 한민족 고유의 난방 시설인 온돌은 함경북도 웅기와 평안북도 강계, 자성, 영변 등의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 형태가 확인된다.

 

최근에는 알류산 열도 곳곳에서도 발견되고 베링해협 너머의 알래스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알래스카 온돌을 발굴해 연구하고 있는 영국 에버딘대 고고학과 리차드 크넥 교수는 정교한 돌들의 조성과 구조가 한국의 온돌과 똑같은 모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온돌 문화의 종주국이라는 역사를 지닌 이 땅에서 수천 년 후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 선수들을 환호하게 한 것이다.

음식 또한 매일 420여 가지 메뉴를 아침, 점심, 저녁, 야식까지 네 끼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고, 할랄 푸드Halal food와 알러지 방지 음식까지 6성급 호텔에 못지않은 식당은 ‘엄지척’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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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 출몰

진실의 역사

이양선異樣船의 출몰

“이제 동양의 형세가 누란(累卵)과 같이 위급하므로 내가 붙들지 않으면 영원히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리라” - 도전 5편 4장


이양선異樣船은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 바다에 출몰해서 통상을 요구한 서양의 배로, ‘모양이 이상한 배’라는 뜻이다.

당시 서양의 배가 우리나라의 배와 모양이 달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국선異國船, 이단선異團船, 황당선荒唐船이라고도 하였다.

18세기 무렵 서구의 열강들은 산업혁명을 겪고 나서 자원과 노동력을 약탈하기 위해 식민지植民地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이다. 아프리카, 아시아를 거쳐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깃발이 휘날리게 되는데, 그 당시의 약소국 중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한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이디오피아, 아시아에서는 타이가 유일하였을 정도다.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 국가에 대해 참혹한 수탈과 인종 학살을 자행한다.

 

이러한 국제 정세가 천상에 계신 상제님이 인간으로 탄강하시는 역사적 배경이다.

‘영원히 서양으로 넘어간다’는 말씀을 통해 당시 동양 민족들이 패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붙들지 않으면’이라 하신 상제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이신 상제님의 조화권이 아니었다면 식민지 해방의 역사가 펼쳐질 수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 역사에 대해 새로운 통찰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대국 중국이 영국을 필두로 한 미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본 등에게 짓밟히고 있었고, 일본은 일찍이 미국에게 개항의 문을 열어 국가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기대고 의지하고픈 이웃 나라 중국은 늙은 고목처럼 쓰러져 가고 있던 반면에, 신흥 강국 일본은 칼을 숨긴 채 핏발 선 눈으로 조선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양선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중반 영조 시대부터 보이기 시작했으며 특히 순조 이후로 급증했다.

고종 때에는 128건이 등장한다. 대부분의 이양선이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고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이양선의 출몰은 집권층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민심의 동요도 생겨났다.

당시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하고 ‘침범하는 양이洋夷와 화친和親할 수 없다.’라는 뜻을 새겨 넣은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그 결과 통상 요구를 위해 연해를 찾은 외국 선박과 조선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으니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1866),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이 대표적이다.

운요호 사건

진실의 역사

운요호Unyo(雲揚)號 사건


“일본 사람이 3백 년 동안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와 모든 부강지술(富强之術)을 배워 왔나니 너희들은 무엇을 배웠느냐. 일심(一心)으로 석 달을 못 배웠고 삼 년을 못 배웠나니 무엇으로 그들을 대항하리오. 그들 하나를 죽이면 너희들은 백이나 죽으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 - 도전 5편 4장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말한다.

300년 전이면 16세기 무렵이다.

 

일본은 16세기부터 네덜란드와 통상을 하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을 통해 조총鳥銃(화승총火繩銃)을 수입하여 군대를 조련한 것도 1543년, 그 무렵이다. 이때부터 부국강병이라는 국가 어젠다Agenda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維新은 그 꿈을 이루는 근대화 개혁의 시발점이다. 유신으로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고 난 1870년대부터 일본 조야朝野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불을 뿜듯 일어났다. 말 그대로 이웃 나라 한국을 정복하여 힘을 기르고 그 힘으로 대륙으로 진출하자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조선은 어땠을까?

관료들은 고루한 유교 이념에 매몰되어 서로를 난정亂政이나 사도邪道로 낙인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쟁은 상대방이 죽고 사라질 때까지 집요하게 계속됐다. 연산군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필두로 벌어진 네 번의 사화가 모두 그 참혹한 결과물이다.

70여 년에 걸쳐 거듭된 사화로 인해 조선은 인재의 씨가 말라버렸다. 이러고도 나라가 기울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척화斥和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문을 닫기에 급급했다. 그 바탕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서열과 양반과 상놈을 차별하는 지배층의 신분 제도가 서양 문명에 의해 침식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은 신분제의 벽에 갇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국제 장님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관리들은 힘없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서로 경쟁하듯 토색질에 여념이 없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으니 요샛말로 ‘도대체 이게 나라냐?!’는 푸념이 나올 법 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포함외교砲艦外交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개국)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그들이 미국에게서 배운 방법을 그대로 써먹는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운요호(雲楊號) 사건이다. 운요호는 일본이 영국에서 수입한 배다. 전장 35미터이고 배수량은 249톤으로 1869년에 취역한 군함이다. 160㎜ 포 1문과 140㎜ 포 1문을 탑재하여 근대식 화력을 갖췄다.

1875년 9월 20일 함장 이노우에가 이끄는 운요호는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난지도에 도착하였다.

이노우에는 일본군 수십 명을 데리고 담수 보급의 명목으로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다. 이때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 수병은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일본군은 모함으로 되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영종진永宗鎭(오늘날의 영종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과 격전을 벌여,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기도 다량 탈취하였다. 그리고 주민에 대한 방화, 살육을 하고 퇴각하였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나타나,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 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6년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대륙 침략의 단초端初였으며 신호탄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사하기 일보 직전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환자와도 같았다. 과연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을 나라는 누가 될 것인가? 일본이냐 러시아냐, 아니면 저 멀리 영국일까? 미국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국제 정세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서 결판날 문제였지 당시 조선의 선택지는 제로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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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갑오동학농민전쟁

진실의 역사

근대사 갑오동학농민전쟁

 

“전명숙(全明淑)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고 상민(常民)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 주고자 하여 모든 신명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느니라. 전명숙은 만고(萬古)의 명장(名將)이니라.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어나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한 자는 만고에 오직 전명숙 한 사람뿐이니라.”
- 도전 4편 11장

 

사진은 전봉준全琫準(전명숙全明叔) 장군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시점은 1895년 2월 27일 (이하 양력)이고 장소는 서울이다. 서울의 일본 영사관에 갇혀 있던 전 장군이 심문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한다. 압송에 참여한 일꾼들의 심드렁한 표정에서 이번 행차가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들이 아직 겨울 추위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실패한 거사의 모든 책임을 지는 패장이건만 그의 기상은 여전히 세상을 뒤흔드는 혁명가의 그것이다. 아직 체념하기에는 분노가 너무 컸을까. 아마도 참혹하게 죽어간 동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부족에 대한 한스러움도 되씹고 있었으리라.

 

혹시 몰락해 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선천 상극의 세상, 모든 것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천도 섭리를 원망하고 있었다면 너무 사치스런 추측일까?

 

1894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 아마도 근대사에 이 사건만큼 우리 민족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 비극도 없을 것이다.

동학은 1870년대 후반부터 경상·충청·전라의 삼남 지방에 뿌리를 내렸다.

열강들의 침입, 중앙 정부와 지방 수령의 탐학으로 조성된 불안하고 원망 어린 사회 배경을 타고 동학은 농촌과 지식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 갔다.

 

종교 운동으로 시작한 동학이 사회 변혁 운동으로 돌변하도록 불을 놓은 인물은 단연 탐관의 대명사 고부 군수 조병갑이다.

1894년 2월 전봉준은 1천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아전들을 처단하고 양곡을 몰수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사실상 혁명의 시작이었다. 잠시 진정되는 듯했던 혁명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다시 폭발했다.

 

1894년 4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든 농민군들은 이후 황토고개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인근 고을을 점령해 나갔다. 5월에 전주 감영을 점령하고 6월 초순에는 전라도 일대가 사실상 농민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정부와 농민군은 휴전 교섭을 벌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점점 불안하게 꼬이고 있었다. 청군이 아산만을 통해 들어오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일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청·일 양국군의 대치 상태는 드디어 7월 25일 전쟁으로 비화됐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부당한 내정 간섭에 분개한 농민군은 이해 10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했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反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남접과 북접의 연합으로 수십만으로 불어난 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에 이르렀다.

 

약 1주일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곳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이후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에 쫓겨 금구, 원평으로 후퇴했다. 국토의 구석으로 내몰린 생존 병력은 일·관군의 소탕 작전에 지리멸렬하게 되고 결국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된다. 1895년 4월 23일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년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한때 60만에 달했던 동학농민군들 중 30만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면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농민군들은 애국적이고 애족적인 동기에서 거사했지만 당시의 시대 과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혁명 전략도 정확하게 세우지 못했다. 결국 외세의 개입과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예정된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일찍이 동학은 1860 경신년 4월 초 5일 경주 사람 최제우 선생이 천상의 상제님과 문답을 통해 도통을 받고 창시하였다.

이후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 그의 외침은 민초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다시 개벽’ 사상으로 세상의 변혁을 꿈꿨고, ‘무극대도’가 다스리는 ‘오만 년’ 조화 세상을 염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학의 핵심에는 ‘시천주侍天主’가 있다.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을 모신다’는 이 메시지는 너무나 큰 파격이기에 오히려 민중들의 의식에 접속되지 못했다. 천주님이 누구신지, 천주님은 언제 어디로 오시는지, 왜 천주님이 오셔야만 하는지 등 천주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문화 운동으로 채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천주에 대한 이해 부족은 이후 전개된 동학 운동의 치명적 한계였다.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는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도전 5:205)”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상제님은 전명숙 장군의 정신만은 높이 평가하셨다. 동서양 창업군주와 명장들의 반열에서 전명숙을 제일 첫머리에 놓으신 것이다. 또 그를 천상 조화정부造化政府의 조선 명부대왕冥府大王에 임명하시어 신명으로나마 후천 선경 건설에 역사하게 하셨다.

 

상제님은 그가 잡힌 피노리에 직접 가시어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그의 한을 풀어 주셨다. 사명기는 임금이 각 영營의 대장에게 내리는 지휘기다.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왕정王政을 바로 세우고자 거사한 그에게 왕의 신임을 상징하는 사명기가 없는 것은 천추의 한이었다.

상제님께서 직접 사명기를 꽂아 주심으로써 동학혁명은 상제님의 천명으로 후천개벽의 문을 열어 놓은, 천도혁명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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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지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진실의 역사

을미지변乙未之變,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弑害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8장

작전명 ‘여우사냥’이 시작됐다.

1895년 새벽 5시경 광화문 앞에 일단의 일본인 낭인浪人들이 일본군 수비대, 조선 훈련대와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새벽 3시경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아소정我笑亭)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어 궁으로 향했다. 대원군과 훈련대를 끌어들인 것은 향후 사건을 조선인들에 의한 반란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들이 노리던 목표는 조선의 왕비 민씨(사후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추존, 이하 ‘황후’로 칭함)였다.

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후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황후에게 바쳤다.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계산된 연극인 셈이다.

 

또한 일본은 고무라의 딸을 황후의 양녀로 들여보냈는데 이는 황후의 얼굴과 궁궐의 지리를 익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는 사건 발발 20일 전에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를 대신하여 이노우에가 추천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가 1895년 9월 1일 부임했다. 행동 대장 이노우에의 주도하에 10월 3일 공사관 밀실에서 을미지변乙未之變의 구체적 실행을 위한 모의가 이뤄졌다.

 

낭인 일행이 도착하자, 광화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는 경비병과 순검들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은 함성을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을 향해 돌진했다. 궁을 지키던 300~400명의 시위대가 총격전을 벌였으나, 이미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흉도들은 건청궁까지 오자 대오를 정렬하여 합문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으며, 낭인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마침내 건청궁의 안채 곤녕합坤寧閤에서 황후를 찾아냈다. 흉도들은 황후를 내동댕이친 후 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 흉도들은 자신들이 죽인 여인이 황후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황후와 비슷한 용모의 세 궁녀들도 살해했다. 이들은 이미 황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여러 장 들고 있었고, 나중에는 고무라의 딸을 대동하여 황후인지를 확인하였다. 그것도 미심하여 최종적으로 태자를 불러 황후의 죽음을 확인했다.

 

「고종실록」에는 황후가 죽은 시각은 묘시卯時라고 되어 있다. 대략 새벽 6시경이었다고 한다. 황후의 시신은 그날 아침 궁에 들어온 미우라 공사에 의해 재확인되고, 그의 지시에 의해 화장되었다. 아예 증거를 인멸하기 위함이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으로 운반한 다음 장작더미에 옮겨 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타다 남은 유골은 날이 밝은 뒤 훈련대장 우범선이 궁궐을 순시하다가 발견하여 연못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어떤 일본 측 보고서에 의하면 흉도들은 황후의 시신에 능욕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문 앞에 나와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우리 할아버지 대에 나라의 국모가 살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인류 역사를 전쟁이 반복되어 온 ‘피의 목욕탕’이라고 한다지만 일본이 저지른 을미년의 만행은 동서고금에 그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국가 간에도 도덕률이 존재한다면 일본의 범죄는 배은망덕의 극치에 해당한다.

 

일본이 이렇게 대담한 사건을 저지른 배경은 무엇일까?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하여 청의 요동반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895년 4월 일본의 중국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일본에 압력을 넣어(삼국간섭)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한다. 이를 지켜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 대안 세력으로 러시아를 선택하고 이해 8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 친러 정책을 추진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공들인 조선을 자칫 러시아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속에 폭력으로 정국을 뒤집어 놓기 위해 직접 황후를 시해하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을미지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일본의 흉계는 실패하고,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닥친 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서기관 등 사건에 개입한 일본인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음 해 1월에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석방된다. 을미지변 이후 친일 세력이 주도한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고 을미개혁乙未改革이 실행된다. 태양력太陽曆 사용, 단발령斷髮令 등이 이때 공포됐다.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만행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 각처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다음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俄館播遷)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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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의 입장에서는 국면 전환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갑오년甲午年(1894)에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기세가 함경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휩쓸었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십만 동족이 참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을미년乙未年(1895)에는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조선의 왕비 중전 민씨가 시해당하는 전고에 없던 사변事變이 발생했다.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건만 망해가는 나라 조선에게는 마땅한 응징 수단이 없었다.

1896년 2월 11일(이하 양력)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俄館播遷).


“내가 이제 조선의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나니 이는 수륙병진(水陸幷進)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원일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먼저 서울에 들어가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 써서 남대문에 붙이라.” 하시니 원일이 명을 받아 일행을 거느리고 태전으로 떠나니라. - 도전 5편 121장(1906 병오년 공사)


조선의 입장에서는 먼저 땅에 떨어진 국가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이를 대내외에 알리는 게 시급한 과제였다. 이어 오랜 궁핍과 절망감에 빠진 백성을 일으키고 보듬을 수 있는 개혁 정치도 절실했다.

당시 실록을 보면 고종이 과신戈臣(관료), 백성百姓(일반 양민), 군오軍伍(군대), 시정市井(상인 집단)으로부터 칭제稱帝 요청을 받았고, 이에 대한 전국적인 상소도 5개월간 빗발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여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국민적 요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제 정치의 상황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각서(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5.14)를 맺어 일본을 견제해 주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높일 수 있었던 기회였다.

드디어 1897년 8월 16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그해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圜丘壇에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즉위식은 다름 아닌 ‘황천상제皇天上帝’께 올리는 고천제告天祭였다.

 

환구단은 정방형의 땅에 화강암으로 3층 단을 만들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표현이다.

환구단의 지붕은 원추형 모양에 색깔은 금색으로 칠해 천자의 위상을 높였다.

 

고종의 고천제는 환국, 배달, 조선 이후 역대 제왕들이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등극을 알리고 천자天子(天帝之子)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皇穹宇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라는 당시 신위가 보관되어 있다.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대한은 옛 조선 곧 삼한三韓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황제 즉위식 이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12월 23일 가장 먼저 대한제국을 승인했고 잇따라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도 대한제국을 승인했다.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청산했으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곳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렇게 독립 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후 고종 황제는 황실이 중심이 된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를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1910년 대한제국은 끝내 패망했고 고종 황제 역시 1919년 1월 21일 당시 경운궁慶運宮 함녕전咸寧殿에서 돌연 68세로 붕어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주독립 국가 대한제국의 정신은 항일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역시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과 대한제국의 ‘민국民國’ 이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국호에 담았다.

사실상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대한제국인 셈이다.

고종의 천제 복원과 황제국 선포는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1860 경신庚申년 최수운 선생의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을 놓칠 수 없다.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은 최수운 선생은 민족과 인류를 향해 우주적인 대선언을 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학의 ‘다시 개벽’ 사상이다.

이는 선천 개벽으로 탄생한 인류가 앞으로 후천 개벽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참동학 증산도에서 알려주는 가을대개벽이다.

가을개벽의 역사 정신은 ‘뿌리를 찾아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앞으로 인류는 뿌리 역사와 원형 문화를 되찾아 지구촌 통일 문화 시대를 열게 된다.

천자 문화는 곧 동방 한민족의 뿌리 역사이면서 인류의 원형 문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선포는 동방 역사의 종주권 선언이면서 다가오는 개벽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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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 침입 막아낸 충장 정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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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낸 국난의 해결사, 충장 정세운鄭世雲 (1361년)

고려는 연이은 전쟁과 내란에도 불구하고 500년의 역사를 지속한 나라이다.

고려의 대외관계를 보면 11세기에는 거란과, 12세기에는 여진과, 13세기에는 몽골과 전쟁을 벌였고 14세기에는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쳤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서 홍두적紅頭賊, 홍건적紅巾賊이라 불렸다.

홍건적은 원의 반격에 쫓겨 1359년 12월 고려를 침범하여 압록강 연안의 백성들을 짓밟았다.

이듬해 초가 되서야 최영崔瑩 장군의 큰 힘으로 고려는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1361년 10월에는 홍건적이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2차 침략을 감행했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런 국난의 상황에서 해결사로 등장한 이가 정세운 장군이다.

원래 정세운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수행원으로 있 었고 공민왕이 귀국한 뒤에는 왕궁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시작할 때 걸림돌이 된 친원파의 핵심인물 기철을 죽인 인물이다.

고려국본기에는 정세운의 성품을‘ 충성스럽고 청백하다[忠淸]’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파천播遷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고 임금 또한 그를 믿고 총병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빨리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자使者를 보내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소서”라고 임금에게 여러 번 청원했고 마침내 20만명의 군사를 모았다.

 

반격준비를 마치고 전선으로 출발하려 할 때 수문하시중이었던 이암이 격려의 말을 전했다.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삼한三韓의 치욕이로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어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리니, 사직이 다시 편안해지고 왕업이 중흥함이 이번 한판 싸움에 달려 있도다. 우리 임금과 신하는 밤낮으로 공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로다.”

 

정세운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개경을 완전 포위하여 총공격을 퍼부었고 홍건적 20만명 중에 10만명이 죽고 남은 무리는 패주함으로서 전쟁은 끝이 났다.

 

정세운이 아니었다면 몽골의 피해를 당한 고려의 백성들은 다시 한번 약탈과 살육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세운은 승전 후에 김용金鏞의 시기심으로 인해, 김용의 사주를 받은 안우安祐에 의해 죽게 된다.

 

김용은 다시 공민왕을 죽이려고 했으나 최영 장군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 고 결국 처형되었다.

나라를 구하자마자 시기질투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장군.

그나마 환단고기에 그의 역사가 기록되어 그의 한을 달래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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