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갑자기 나타난 수메르문명

진실의 역사

갑자기 나타난 수메르문명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영국학자 '크래머' 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Black Headed People)' 동방의 동아시아인들이

문명을 다가지고 들어와 수메르문명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다.

 
수메르(Sumer) 문명의 진면목을 밝혀 주는 무수한 점토판들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수메르인들은 검은 머리의 용모에 한국어(한글)와 같은 교착어인 수메르어를 사용했었다.

또한 "지구라트"라는 제천단과 그들이 남긴 유적들에서 우리 문화와 같은 문화의 흔적들이 뚜렷이 남아있다.

초가잠빌의 지구라트, 에람, B.C.3000년경 - 후에 이집트 문명에 전파되어 피라미드로 다시 나타난다.

이는 우주를 다스리시는 삼신상제님께 제를 올리는 제천의식을 위한 제단인 것이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니, 환국(桓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동의 고대 언어와 역사를 연구하는 시친Zecharia Sitchin은 동서 신화의 12신이 유래한 근원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웠던 수메르문명으로 지적한다.

수메르 신들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신은 남자 여섯, 여자 여섯으로 정확히 12명이다.

그렇다면 수메르의 12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수메르문명에 대해 서양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주 갑작스럽고, 전혀 앞선 문명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말한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어디에서 왔고, 그 문명은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것이 수메르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이라 지적한다.

 

근동(지금의 이라크) 일대에서 발굴되는 토기의 연대를 비교한 결과,

수메르인은 이란 북쪽에 있는 카프카스 산맥 인근 지역에 정착하였다가

나중에 남쪽으로 메소포타미아 평원에 이주하여 문명의 꽃을 피운 것으로 밝혀졌다.

 

수메르의 점토판 기록에 따르면, 수메르인은 '안샨Anshan으로부터 넘어왔다'고 말한다.

수메르 말로 안An은 하늘, 샨shan은 산을 의미한다.

안샨의 한자식 표기, '천산'이 환국 문명의 중심이었던 천산天山과 동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메르의 창세 신화를 보면 수메르인은 후두부가 평평하고 머리카락이 검은 인종이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결혼 전에 함을 지는 풍습이 있었고, 동북아의 60갑자처럼 60진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수메르어는 현대 언어들 가운데 한국어와 유사성이 가장 크다.

우리말과 같이 토씨(은, 는, 이, 가)로써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연결하고,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서로 문장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엄마·아빠를 비롯한 많은 단어들이 한글과 똑같거나 아주 유사하다.

그들의 철학과 사상 또한 동방문화와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그들은 우주를 '안키Anki(천지)'라 불렀다.

“우주는 둥근 하늘, 안An과 평평한 땅, 키Ki로 이뤄져 있다”고 믿은 그들의 사상은

동양의 천지인 삼재론에 근거한 천원지방 사상과 다를 바 없다.

 

수메르인의 천지론은 대자연에 대해 깨친 가장 위대한 사고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양 제왕문화에서 나타나는 천명天命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수메르 역대 왕의 이름을 기록한 『왕명록王名錄』의 1단 1행은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 왕권은 에리두에 있었다”라고 말한다. 하늘로부터 왕권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특이하게 학교 선생을 '학교 아버지(school father)', 학생을 '학교 아들(school son)'이라 불렀다.

동양에서만 볼 수 있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군사부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수메르인들의 점토판을 해독하여 그들의 생김새, 사회 제도, 풍습, 언어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크레이머Samuel Kramer 박사는

5,500년 전에 수메르문명을 연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 '동방에서 왔다'라고 결론지었다.

 

그 동방문명의 정체는환단고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만여년 전 지금과 같은 기후가 되어 환국 문명이 생겨난 후, 약 6천년 전 다시 한 번 기후에 큰 변동이 생겨

환국 백성들은 더 따뜻한 곳을 찾아 대대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 환국의 서남쪽에 위치한 우루국과 수밀이국 사람들이

이란의 산악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남하하여 개척한 문명이 바로 수메르인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수메르인들이 건립한 지구랏트이며,

유대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바로 이 수메르 문명권의 중심지인 우르(Ur)에서 수메르문화를 가지고 가나안으로 이주한 것이다.

 

수메르에서 갈려 나간 서양 문명

수메르 신화가 서양 신화의 근원인 것처럼 수메르문명은 서양 문명의 모체로 일컬어진다.

BCE 1500년경 지금의 이란 북쪽 카프카스 산맥 지역에 살던 고대 종족,

즉 초기 수메르인의 일부가 남쪽의 인도로 이주하였고, 또 다른 일부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를 거쳐 그리스로 이주하였다.

이집트문명은 수메르보다 500년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집트의 건축, 기술, 문자 등은 모두 수메르문명에서 유래하였다.

 

유대문명은 수메르인들이 강을 건너 가 개척한 것이다.

갈데아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이 하란을 거쳐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하려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야 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강을 건너온 자(hebrew)'라 불리는 것이다.

 

『구약전서』에는 이집트인, 가나안인, 히타이트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등 고대 중동의 주요 문명집단이 다 거론되지만, 수메르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메르인이 자기네 조상인 까닭에 이방인들의 이름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창세기』

 

수메르문명은 유럽으로도 전파되었다.

수메르 사람들이 인도와 그리스로 이주 할 때, 그 중 일부는 흑해를 돌아 러시아 평야지역을 거쳐 유럽으로 이동하였다.

 

인도, 그리스, 이집트, 유대, 유럽 문명 등의 근원으로 밝혀진 수메르!

서양 학자들은 아주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메르문명을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환단고기』의 기록과 고고학의 발견을 종합하면, 수메르는 환국의 열 두 나라 중 수밀이국과 결코 무관한 문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환국의 열 두 나라(12수 의미)

진실의 역사

환국의 열 두 나라

환국은 모두 아홉 족속[九桓]으로 나뉘었고, 이 9환족은 열 두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

12환국의 이름은 이러하다.

 

『단군세기』를 보면 양운국, 일군국, 수밀이국, 구다천국 등은 고조선의 21세, 27세 단군 때까지 나라 이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고조선 시대의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네 나라의 이름은 12환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 문헌에서도 12환국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에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들은 2만~5만 호戶정도를 가진 소국으로 시베리아 등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당서唐書』「 북적전北狄傳」에는 우루국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구다천국과 매구여국이 구다국句茶國과 매구곡賣溝谷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환국이 열 두 나라로 이루어진 배경에는 심오한 우주론적 원리가 있다.

동양의 천지(음양)론에 의하면 하늘의 질서는 10수[十干]로 펼쳐지고 땅의 질서는 12수[十二支]로 펼쳐지므로,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12수를 한 주기로 하여 일어난다.

그래서 삼신상제님의 나라가 땅에 이식된 첫 나라인 환국도 열 두 나라로써 그 역사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12수는 동서양의 여러 고대신화에 나오는 신의 숫자와 일치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전의 신은 언제나 열둘이었다.

새로운 한 명의 신이 추가되면 기존의 한 신이 빠지는 방법으로 항상 12수가 유지되었다.

인도의 고대 경전『 베다』에 나오는 중요한 신도 12명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 신들의 아내,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그리스인과 인도인이 갈려 나간 근원으로 추정되는 소아시아 지역의 히타이트족도 12신을 모셨다.

고대 히타이트의 수도 외곽(현재 야질리카야Yazilikaya라 불리는 곳)에서 나온

반원형으로 된 석조 조각물에 12명씩 짝을 지어 행진하는 신이 새겨져 있다.

 

이집트에서도 위대한 신들은 12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최고의 신, 라(Ra, 창조자)가 12명으로 된 신들의 회합을 주관한다.

그리스, 인도, 소아시아, 이집트와 같은 동서양 고대문명 발상지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

열 셋도 열 하나도 아닌 열 두 명이었다는 것은 인류 문명이 하나의 시원처에서 뻗어 나왔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환국이 12분국으로 구성된 것은 땅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원리인 12지지(地支)의 이치에 따른다.

환국의 12분국 중 서양문명을 일으킨 12번째의 <수밀이국>을 살펴보면

이 분국이 바로 서양사람들이 인류문명의 뿌리로 여기는 수메르(Sumer)문명국이다.

 
서양문명의 시원으로 여겨지는 수메르 제국이 환국 12분국중의 하나인 '수밀이국'의 이주민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 근처에 있던 수밀이국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환국말기인 약 6천년 전에 인구가 증가하고 기상이변으로 시베리아 지역이 점점 추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2환국의 한 갈래가 성지 태백산(백두산)으로 이동하여

환국의 정통을 지켜 내려온 것(환웅의 배달국)이 바로 오늘날의 한민족이다.

인류문명의 시원국가 환국

진실의 역사

인류문명의 시원국가 환국

사람은 누구나 어느 종교를 믿고 어떤 분야를 연구하고 일을 하든지 인류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을 안고 살아간다.

 

「환단고기」<삼성기>하편에는 현인류의 조상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시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현생 인류의 아버지 어머니, '나반'과 '아만'

광명족의 환국의 9환족은 바로 인류의 시조인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 인류의 시조인 한 남자(나반)와 한 여자(아만)가 바이칼호에서 서로 떨어져 살다가

꿈에 천신의 가르침(神敎)을 받고 바이칼호를 건너 바이칼호 부근 아이시타에서 만나 결혼했다는 것이다.

나반과 아만 이 두분이야말로 유대민족이 말하는 약6천년전의 아담과 이브보다도 수천년이나 앞선

현 인류의 진정한 시조인 것이다.


     알타이어 전문 연구가에 의하면,  “아빠”, “엄마” 의 어원이 
     바로 나반과 아만이라고 한다.    
     나반-> 나바이-> 아바이-> 아빠
     아만-> 아마이-> 어마이-> 엄마            - 중앙일보 기재-
 

최초의 인류는 '루시'라 이름 붙인 화석인류가 발견됨으로써 밝혀진 약 35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그 후 약 20만년 전 불을 사용할 줄 알고, 사냥을 하며, 사회를 이루어 서로 보살피며 살았던

'직립인(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우리가 인간다운 특징이라 생각하는 것을 처음으로 가진 존재였다.

그 다음으로 출현한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이라고도 불리는 '슬기 인간(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사용하였고, 처음으로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널 줄도 알았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5만년 전에 오늘날의 인류인

'슬기 슬기 인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나타나 지구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프랑스 아키텐주州의 크로마뇽 동굴에서 맨 처음 발견되어 크로마뇽인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이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우주1년과 생멸을 같이하는 인류 문명사

동양의 '우주 1년 선후천 개벽론'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 1년을 한 주기로 하여 출현하고 소멸한다.

다시 말해서 약 13만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우주 1년에서 인간은 우주년의 봄에 태어나 여름, 가을 동안 번성하다가

우주년의 겨울, 즉 빙하기 멸절한다.

때문에 크로마뇽인 이전의 인간은 지나간 우주년의 인간이고,

크로마뇽인으로부터 시작된 현생 인류는 약 5만년 전 이번 우주년의 봄개벽 때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환단고기』는 오늘날 인류의 탄생에 대해 어떻게 전하고 있는가?

현 인류의 역사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두 분은 북극수北極水의 조화로 생겨났다고 전한다.

북극수는 천도의 변화 운동이 시작되는 북극에서 생겨난 생명 창조의 물이다.

삼신의 조화 손길로 북극수가 인간을 낳는 생명의 씨가 되어 인류의 첫 조상을 낳은 것이다. 태백일사』

 

북극수는 '인류 탄생의 바다'라 불리는 바이칼호를 가리킨다.

바이칼호는 주위로부터 360여개의 물줄기가 흘러 들어와 생겼는데, 물의 성분이 어머니의 양수와 비슷하다고 한다.

바이칼호는 인간을 탄생시킨 지구의 자궁이다.

북극수의 조화로 생겨난 두 분은 꿈에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혼례를 올려 인류의 어버이가 되었다.

그런데 알타이 산맥과 바이칼호 주변에서 2만5천~4만5천년 전에 인간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환단고기』의 기록에 비추어, 그것은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 살았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9,200년 전에 한민족이 건국한 세계 최초의 국가인 환국은 바이칼호의 동쪽

천산(天山.파나류산)을 수도로 하는 대제국이었는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국토를

다스렸으며 환국의 백성들은 천산에서 천해에 이르는 넓은 땅에 흩어져 살면서 문명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점차 분파하여 아홉 족속이 이루는 열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이 12분국을 총칭하여 나라 이름을 환국(桓國)이라 하였다.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이번 우주년의 봄이 시작되고도 계속 남아 있던 얼음 층이 약 1만1천년 전에

북쪽으로 완전히 물러가면서 오늘날과 같이 따뜻한 기후가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인류가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여 약 9천년 전에 형성된 새로운 문명 집단이 바로 ‘환족桓族’이다.

환족은 나반과 아만의 후손으로, 모두 아홉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성기 하』

 

환족은 중앙아시아의 천산(일명 파내류산)을 중심으로 인류 최초의 국가인 환국을 세웠다.

현 인류가 처음 화생한 곳은 바이칼호이지만, 첫 문명을 일군 곳은 그 보다 아래쪽인 중앙아시아 동쪽 지역이었다.

환국은 천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가 그 영토가 동서 2만여 리, 남북 5만 리에 달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 만주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이었다.

BCE 7000년경 천산을 터전으로 한 '우리 환족의 나라 세움[吾桓建國]',

이것을 『삼성기 상』은 현 인류의 건국사에서 '가장 오래된[最古]'사건이라 선언한다.

그런데 인류의 첫 나라 이름이 왜 환국이었을까?

 

환국의 환은 '밝을 환桓'자로 광명을 상징한다.

특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하게 빛나는 광명', 천광명天光明을 상징한다.

환국 사람들은 태양을 광명이 모이고 삼신이 머무는 곳으로 여겼다.

광명은 곧 삼신상제님의 신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이로 볼 때, 환국은 다름 아닌 천상 삼신상제님의 나라가 인간 세상에 이식된 첫 나라이다.

 

환은 단지 나라 이름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환'이라 불렀다.

당시의 인간은 삼신상제님의 신성을 그대로 발현하며 천지와 같이 환하게 빛나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환을 다스리는 사람을 인仁이라 불렀다. 그래서 환국의 통치자를 환인桓仁이라 했다.

 

'어질 인仁'을 써서 환인이라 부른것은 사람을 구제하고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어진 마음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환인은 오가五加 부족장 중에서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선출되었다.

그것은 9환족이 모두 대동단결하여 한마음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환인은 정성과 믿음, 공경과 근면, 효도와 순종, 청렴과 의리, 겸손과 화평이라는 오훈五訓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환국의 초대 통치자는 안파견安巴堅 환인천제였다.

안파견은 '하늘을 계승하여 부권父權을 세운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는 뜻으로 '아버지'를 뜻한다.

안파견 환인 이후 환국은 7세 환인천제까지 계승되었으며 총 3,301년(BCE 7197~BCE 3897)동안 존속하였다.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한 한글의 우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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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유학생이 꼽은 '한국의 경쟁력' 1위는 '문화예술'

5월 16일 뉴스에서

경희대 국제교육원과 연합뉴스가 설문조사하여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로 꼽은 것은 '문화예술'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점,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늘고 있는 점,

한글·전통문화 등 콘텐츠가 풍부한 점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우주원리를 담은 문자, 한글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한,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할 당시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이런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천지 자연(우주만물)의 원리는
 오로지 음양오행일 뿐이다.


 坤復之間爲太極 而動靜之後爲陰陽.
 곤(坤)과 복(復)의 사이에서 태극이 생겨나서 움직이고,
 멈춘 후에 음양이 생겨나는 것이다


 凡有生類在天地之間者 捨陰陽而何之.
 무릇 목숨을 가진 무리들로 하늘과 땅의 사이에

   있는 것들은 음양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그러므로, 사람의 소리는 모두 음양의 이치가 있는데,
 사람들이 살펴서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다.


 今正音之作 初非智營而力索
 이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슬기로 마련하고, 애써서 찾은 것이 아니라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다만 그 (원래에 있는) 성음(의 원리)을 바탕으로
 이치를 다한 것뿐이다.


 理旣不二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음양의)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자연,
 (변화를 주관하는) 귀신과 그 사용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훈민정음 해례본』)

 

동양문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은

한글이 음양오행 원리,

즉 우주자연 섭리를 얼마나 잘 담고 있는 문자인가에 감탄할 것입니다.

아스테카인은 상투한 백의민족

진실의 역사

아스테카인은 상투한 백의민족

 

14-16세기 멕시코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아스테카(Azteca)인이 한민족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학계에 반향을 일으킨 배재대 손성태 교수가

"그들이 상투에 흰옷을 즐겨 입고 윷놀이도 하는 등

우리 민족과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손 교수는 고려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가 주관하는 추계 학술 세미나를 앞두고 발표한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간 우리 민족의 문화적 문헌적 증거 : 아스테카인, 그들은 상투한 백의민족이었다'라는 논문에서

"아스테카인이 남긴 문헌이나 유물을 조사해본 결과

이들은 흰색을 숭상하고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우리의 전통놀이와 똑같은 윷놀이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그들의 윷놀이 방식은 우리의 것과 흡사해 윷판에 사용한 돌도 '말'이라 불렀고

단번에 '모' 자리에 오면 '좋다'라고 외쳤다."

"또한 그들이 남긴 그림을 보면 남자들의 머리는 상투했고,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 우리들의 모습과 일치할 뿐아니라

의상도 4세기 고구려 무영총 벽화에 나오는 의복의 특징과 일치한다."

"아스테카인들의 제사 의식도

각종 음식을 차려놓고 먼저 향을 피우고 땅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는 방식으로 진행돼 우리와 비슷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어인 '나와들어(語)'와 우리말의 '고어(古語)'를 비교하면

어순과 발음, 문장의 구조적, 형태론적인 면 등이 일치하고 있으며,

이는 아스테카인이 한민족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해 학계의 관심을 끈 바 있습니다.

 

아스테카인은 멕시코 북방의 아스틀란 지방에 살다가

12세기부터 남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해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강력하고도 독자적인 인디오 문명을 세웠으나

1520년 스페인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했습니다.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과 독립운동

진실의 역사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과 독립운동

 

한민족은 지난 1세기 남짓 동안 엄청난 역사의 횡포에 시달려 왔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경쟁적 횡포에 농락당하고, 이어서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들어가는 역사적 치욕을 당했다.

식민통치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 민족은 분단으로 귀착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리고 6.25라는 민족상쟁의 아픔을 겪게 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통일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통일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 세력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일제의 강점기에 조작된 식민사학과 해방이후에 우리문화와 역사를 배타적 시각으로 바라본 외래종교의 사대적 시각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통일이 진행되면 우리의 민족은 극도의 사회혼란과 분열만을 조장할 것이다.

 

열강들의 잇권노름으로 시작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그만큼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이러한 국권 상실의 운명 앞에 민족종교는 후천개벽사상을 주창하며 미래의 희망과 확신을 표출한다.

이는 역사의 횡포에 민족의 희망과 열망으로 분연히 일어난 민족종교의 핵심 사상이었다.

그 효시가 1860년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이었다.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민족종교는 당연히 격렬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주체가 되었다.

갑오동학혁명, 3.1운동, 그리고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 등과 같이 한국 근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은 모두 후천개벽사상과 보국안민의 사상적 기치아래 전개되었던 운동이었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민족주체의식의 사회적 실체였다.

 

그러므로 조선 총독부는 민족종교를 민족정기의 온상이며 항일정신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탄압을 가했다.

오직 순수한 민족애와 민족 정체감만이 천도교, 불교, 기독교 같은 특정종교의 세계관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한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가 있었다. 가령 유교,불교와 같이 오래된 외래종교라 해도 그 사상이 우리민족 정체성의 핵심을 반영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일천한 기독교는 아직 민족문화 전통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민족종교는 망국의 한에 빠져있는 국민에게 커다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민족의 통합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일제는 민족종교의 탄압을 가속화 했다.

 

민족종교가 일제치하에서 독립과 민족정신의 회복을 기도했다면 일제는 민족종교를 말살했다.

양자는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정책적 의도에 의하여 설정된 개념의 범주 안에서 아직도 우리사회가 민족종교를 이해하고 있다면,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배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충격적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 민족종교를 신흥종교,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 심지어는 사교라는 용어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관행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적 시대가 바로 일제시기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양으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정책은 타문화에 대해 일방적 통행을 강요했다.

우리의 전통가치는 근대화라는 명목하에 멸시되었고 파괴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서양사상과 종교가 합리적이라는 근거는 더 더욱 없었다.

과학발전은 오히려 서양종교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본다면 깨어난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신권에 도전한다는 명목하에 탄압을 받았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구를 깨운 것은 중세의 신권사회에서 부터의 이탈인 르네상스였다.

오히려 서구의 근대화란 탈신권주의의 각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근대화란 서양화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동안 발전의 모델인 서양을 모방하다 보니까 서양의 종교는 합리적이고 다른 종교는 비합리적인 태도로 대응을 해왔다.

일제는 우리문화는 온통 미신으로 매도해 놓고 자신들은 아직도 수많은 신을 모시는 신도(신사)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위장된 문화정책은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민족종교에 대한 이런 냉소적 태도는 불과 반세기 전 일제하에서 우리민족이 겼었던 수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더군다나 일제하에서 민족종교가 어떤 역사적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우리역사를 왜곡한 것만큼이나 민족의 정신의 산물인 민족종교 역시 철저히 곡해되어 왔던 것이다.

민족종교에 대한 잘못된 일차적 이해는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서 비롯된다.

일본총독부는 처음부터,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보천교) 등 사회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한국민족종교들을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

다만 이들을 종교와 유사한 단체라는 뜻에서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로 규정했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처음부터 존재를 거부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는 정략적으로 민족종교를 거세시켰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공인된 종교는 일본의 신도, 불교, 기독교만이 공인되고 그 외의 종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이는 식민지정책을 수행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편리했다.

민족종교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종교는 사회에서 제거해야할 단체로 취급되었다.

슬픈일이지만, 해방이 된지 오래건만 노예적 사관에 사로잡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이 개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서 오히려 장려를 하였다.

식민지국가에서 민족종교가 기댈 수 있었던 세력은 오직 한국 민중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민중역시 총독부의 수탈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민족종교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무자비한 탄압정책에 희생되어 만신창의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친일파들이 실권을 쥐면서 오히려 민족사학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숙청을 했다.

국권을 잃은 민족에겐 힘없는 국가의 민족정신을 철저히 짓밟히는 고통이 뒤따라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사상과 가치 종교,역사 모두 철저히 멸시되었다. 국가와 민종종교는 외세 앞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서 철저히 유린당하고 희생된 한국 민족종교의 비극적인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무능하다고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가해자는 신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승리의 찬가를 불러야 하는가. 가

치관이 결여되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지금의 일본의 아베정권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건강한 가치관에 의해서 일관되고 통일된 도덕적 태도만이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용기를 갖게 한다.

과거 역사의 올바른 교정은 자기를 반성하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국민은 용기 없는 가해자를 만난 불행한 처지에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위해하는 악의적인 가해자를 역사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공동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지성은 인간사회에서 단순피해자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인간의 양심은 정의를 지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신은 정의의 편이기 때문이다.

강자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유대율법과 로마강권에 항거한 해방자로서의 예수의 삶, 부귀를 버리고 불성을 회복하라는 부처의 삶, 인의를 바탕으로 한 대인군자의 삶을 살으라고 했던 공자도 역시 패권놀음에서 벗어나 본질을 지향해라 했다.

그러나 그 사상을 믿는 사람들은 성자들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패권놀음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나온 일류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종교역사도 제국주의 패권역사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강대국의 종교패권을 약소국에 행사하여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올바른 인간, 참된 가치관 등 그동안 인류가 지향해온 숭고한 가치가 일반적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과 성숙된 인격이 필수 조건이다.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식민학자 거두 이병도 참회의 글

진실의 역사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식민학자 거두 두계 이병도 참회의 글

-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이병도 박사가 죽음을 삼년 앞둔 시점에서

평생 자신의 학설을 뒤집고

단군 조선의 실재를 인정한 기사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당시 사학계의 거두였던 두계 이병도의 이 참회기사는

조선일보 특집기사로 1면에 실릴만큼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식민사관과 친일파들에게 의해 숨겨졌던 한민족의 고대사가

해방 후 세상에 처음 드러났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단군신화' 운운하며 강단사학은

우물 안 개구리마냥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실증적 존재가 있는데

그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마흔 일곱 분 단군이 2096년 단 동안 다스린

고대 한민족의 전성기를 가졌던 고조선을

아직도 신화라 치부함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고인돌의 반이상이 한반도에 있다-바이 코리아(BUY KOREA)

진실의 역사

'세계 고인돌의 반이상이 한반도에 있다'

 

"나는 원래 비교역사학의 대가가 아닌가.

 

처음 내가 이 신비한 민족과 맞닥뜨린 것은 고인돌을 통해서였어.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더군.


이상하지 않나? 이 넓은 지구상에 그 좁은 한반도라는 지역에


세계 고인돌의 70%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고인돌에 미쳐 있던 나는 한국어를 아주 열심히 공부했어.


그러고는 무작정 한국에 갔어. 뭐라고 얻어보려고 말이야."


"호,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는 줄은 저도 몰랐는데요."


사나이는 약간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니 아무도 모르는거야.


학자든 뭐든 아무도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자기 나라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 나라 역사를 샅샅이 뒤졌어.


그러면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어."


"왜요?"


"흐흐,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자기 나라에 있으면


그 역사란 건 무서울 정도로 오래됐다는 얘기가 아냐?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줄이지 못해 안달이더군.


고인돌이란 강력한 부족국가의 상징인 것은 자네도 잘 알테지.


그런데 이 사람들은 중국에서 누군가 내려오기 전의 한반도란


그저 미개인들이 흩어져 살았던 것으로 생각하더군.


모든 역사책도 그렇게 만들고.


그러면 그 많은 고인돌들은 세계 각지에서 수입해 갖다 두었단 말인가?


이렇게 온 나라 전체가 잘못된 역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나라는 처음이었어."


"그게 신비하단 말씀인가요?"


"아니, 더 신비한 일이 있었어."


사나이는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랐다.


폐허에서 위스키와 거위간을 즐기는 이 사나이에게서는


알 수 없는 풍자와 허무가 묻어 나왔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비교역사 연구가이면서 성서 전문가야.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두 눈동자가 튀어나올 뻔한 발견을 했어.


바로 그 한국에서 가장 신비하다는 인물의 저서를 읽을 때였지.


나는 그 책에서 성서의 요한계시록과 똑같이 씌어진 구절을 찾아낸거야."


"네? 언젯적 책인데요?"


"한국에 성서가 처음 소개되기도 전의 책이야.


그 책에는 놀랍게도 성서의 요한계시록과 같은 숫자가


문장 하나 틀리지 않고 나왔어."


글렌은 아직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눈길로


자신의 상전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문화의 뿌리가 같다는 얘기지.


한국인들이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전,


본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는 수메르족하고 뿌리를 같이하는 거란 얘기지.


이스라엘이 수메르족의 후예이듯 말이야."


"수메르란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물론.


그들은 바이칼 호 부근에 살다


일부는 시베리아를 동진해서 한반도로 들어가고


또 일부는 서쪽으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중근동으로 들어갔어.


일부는 그냥 바이칼호 부근에 남아 있었고.


이들은 자꾸 이질화되어 갔지만 아직도 어느 부분에서는


동질의 문화를 갖고 있어.


요한계시록과 그 예언서에 나오는 숫자가 같다는 점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거지."


"오오, 그거야말로 인류사상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군요."


"과제? 그렇지, 과제지.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실망하고 말았네.


나는 한국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가 되어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실망스럽게도 전혀 없었어."


"그럴리가요?"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라네."


"오오."


"처음 나는 한국을 좋아했어.


그러나 차츰 한국이 너무도 싫어지기 시작했네."


"왜요?"


"그들은 인류의 유산을 죽여 버린 게 아닌가.


그들 자신이 활발하게 연구해 세계에 내놓아야 할 고대의 신비한 유산을


모조리 묻어버리지 않았나?


그들은 범죄자야.


인류의 유산을 탕진한 범죄자라구."


"이상하군요.


그 나라에도 학자와 연구자들이 있을텐데요."


"그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여 미치광이 취급을 받아.


내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자 갑자기 한국의 학자들이 모두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어."


"네? 미워하다니요?


고맙게 생각했으면 했지."


"그게 한국이라는 나라야.


모두가 패거리로 나뉘어 있어.


연구는 하나도 안 하는 놈들이 패거리끼리 뭉쳐가지고


나를 공격하는데 나중엔 인신공격까지 하더군."


"......."


"자기네 나라에 고인돌이 그렇게 많으니 굉장히 강성한 고대국가가


있었을 거라고 했더니 그런 나라는 중국에나 있었지 자기네 나라는


고구려니 뭐니 하는 나라가 최초의 고대국가였다고


떼를 지어 달려드는데 나는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네.


알고 봤더니 그건 일본인들이 식민 지배 때 조작해 가르친 역사였어."


"한국은 아직 일본의 식민지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나라는 먹고사는 것 밖에는 모르는 나라야.


모두가 돈에만 관심 있고 역사니 문화니 하는 것은 껍질밖에 없는 나라야."


<김진명 작 - 바이 코리아(BUY KOREA) 中>

 

 

 

이것은 소설이 아닌 실화입니다.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면
고대에 엄청난 국가가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한글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자 서열로 1위라고 합니다.
문자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하는데

그건 뛰어난 정신 문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위대한 역사는 가르쳐주지 않고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게 되고

찬란한 역사는 감추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세계사 속에서 한국 고대사는 사라졌습니다.

한반도의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시원 역사는 왜 이토록 왜곡된 채 방치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한결 같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든 채 너무도 안일 무도하여

제 나라 역사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는 민족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 도적질을 나무랄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를 훔친 민족보다

지키지 못한 민족이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국토는 그 민족의 육체고 역사는 그 민족의 영혼입니다.

우리 민족이 혼 빠진 민족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 우리 스스로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역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이 얕보고 역사를 빼앗아 가는 것 입니다.
이젠 우리가 역사 왜곡의 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일본신사 한국 조상신 모시고 백제 곤지왕 제사 지내

진실의 역사

일본신사 한국 조상신을 모시고 백제 곤지왕 등 제사 지낸다

뉴스 기사(세계일보)가 예전에 나왔었습니다.

 

"일본의 신사들이 고대 한반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생겨났으며,

지금껏 한국의 조상신을 모시고 있는 사실이 한일 연구진에 의해 확인됐다.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이끄는 한일 사학자 4명은

지난해 도쿄와 교토(京都) 등 일본 전국의 50여곳을 방문,

‘한국 신을 모시는 일본의 신사’라는 제목의 연구서를 펴냈다.

 

연구서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온 한국인들은 정착한 뒤

고향에서의 관습대로 제단을 세워

조상신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정기적으로 지내면서,

한반도 계통의 신사가 일본에 기원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사이타마(埼玉)현의 ‘고마(高麗)신사’

‘고구려’의 준말인 ‘고려’의 일본식 발음 ‘고마’ 읽었다는 사실에서

한반도계 신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신사가 있는 사이타마현 히타카(日高)시에도 서기 716년 고구려 사람들이 세운 고마군이 있었다.

 

오사카(大阪)부의 아스카베(飛鳥戶)신사는

일대에 거주하는 백제계 아스카베 노미야코(飛鳥戶造) 일족의 조상신인

‘아스카 오가미’(飛鳥大神)를 제사지내고 있다.

‘아스카 오가미’는백제의 곤지왕이다.

동남부 도쿠시마(德鳥)현에 있는 ‘신라신사’도

신라에서 전해진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烏尊)라는 신을 모시고 있다.

 

일본 신사를 관장하는 ‘신사본청’에 따르면

현재 일본 열도에는 8만7000여 신사가 있다.

비등록 신사까지 합치면 10만곳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신종원 교수는 “이번 연구의 수확은 일본 전국에 산재한 다수의 신사가

고대 한반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왜 잃어버린 역사를 꼭 알아야 하는가?

진실의 역사

 

 

"역사를 잃어버린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한민족의 근세사를 보면, 마지막 조선 왕조가 몰락의 위기에 내몰리던 무렵,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꺼져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13년 만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일본 식민통치 35년 동안, 환국-배달-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상고사는 모두 말살되었고, 약 8백만 명이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왜 잃어버린 역사를 꼭 알아야 하는가?

왜 우리 한국 문화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역사를 잃어버리면 과거를 알 수 없고 과거를 모르면 현재 사물을 보는 눈이 뒤틀려서 제대로 미래를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민족의 패망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역사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게 뭐가 급하냐? 나는 관심이 없다."하는 한국인은 진정으로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위 대국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마치 사상누각과 같아서 우리의 장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역사와 국통國統의 중요성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나라는 국통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은 이 국통으로 인해 흥하였나니, 역사를 배움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리오?"

 

한민족의 태고시대 인류 창세 문화와 역사를 개창한 동방 문화의 주역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서려면 시원 역사를 복원하고 국통맥을 바로 세워 잃어버린 민족혼을 회복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뿌리 기운으로 태어나 매순간 뿌리 기운으로 살고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결국 소멸이 있을 뿐입니다.

 

국가와 민족도 그렇습니다. 뿌리 역사를 잃어버리고 국조를 부정하면 영원한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역사의 근원과 뿌리를 송두리째 잃어러비린 한민족의 역사 광복운동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이요 구국운동입니다.

 

나라는 1945년에 해방되었으나 한국의 창세 역사와 원형문화는 아직 식민시대의 어둠 속에 갇혀 있습니다.

마지막 역사혁명이자 진정한 독립운동은 지금부터입니다.

 

모두 대한사람으로 거듭나 지구촌 전 인류가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여는 자랑스러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