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읽고-이덕일

진실의 역사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읽고 - 이덕일

사마천 사기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자.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사마천 [송미자세가宋薇子世家]》 사기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나라도 동이족 나라이거니와  중화사대주의자들인 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미천 사기에는 고조선은 중국의 은나라에서 봉한 제후국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 은나라의 제후인 기자가 평양에 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자조선설은 허구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북한 평양이 기자조선의 도읍도 아니다.

(사실은 기자를 봉한 사실이 없는 것이다. 제후국으로 봉하면 신하는 당연한 것인데 신하로 삼지못했다고 앞뒤가 안맞는 기록을 하고 있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 屬幽州(漢書 地理志)
낙랑군-무제원봉삼년개.망왈낙선, 속유주
☞낙랑군은 무제원봉 3년에 열었는데 낙선군이라 말하였고 유주에 속하였다.(유주는 현재 북경이다.)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括理志)
고려치평양성 본한낙랑군왕험성 즉고조선야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時朝鮮王滿據之也(사기정의)
고려치평양성,본한낙랑군왕험성, 즉고조선야,시조선왕만거지야
☞고려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인데 곧 고조선의 땅이다.

 

樂浪郡故朝鮮國也 在療東(후한서 광무제본기)
☞낙랑군은 옛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療東君 秦置 屬幽州요동군진치 속유주(한서지리지)
☞요동군은 진나라때 설치되었고 유주에 속한다.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한서 지리지)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는데 패수의 동쪽이다. 이것이 험독이다.

 

王險城在樂廊君浿水之東왕험성재낙랑군패수지동(사기조선열전)
☞왕험성은 요동군에 있는데 패수의 동쪽이다.

 

應召注 地理志療東險瀆縣 朝鮮王舊都응소주 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구도(응소주 사기조선열전 주석)
☞후한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 때 인물인 응소는 험독현에 주석을 달면서.

지리지를 인용해서,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지다”라고 했다.

즉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은 창려현에 있었고 패수의 동쪽이며 왕험성의 서쪽에 패수가 흘렀다는 뜻이다.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창려현의 서쪽을 흐르는 험한 강은 지금의 난하다.

곧 지금의 난하가 패수가 되는 것이고 이 강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다.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의 원리에 의해 삼조선체제로 국가를 운영했는데 바로 번조선의 수도가 왕험성(험독)이다.

결코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중국 사서에도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사학자들은 고조선을 마치 족장 시대로 기술하고 위만이 조선을 침탈하며 철기문명이 전해져서 조선이 크게 번창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사기 조선열전)
집해서광왈 창려유험독현야(사기집해주석)
☞서광이 말하길, 창려에 혐독현이 있었다.

 

浿水療東塞外패수요동새외(사기 조선열전)
☞패수는 요동의 새외에서 나온다.

 

長岑縣屬樂浪君 其地在療東장잠현속낙랑군 기지재요동(후한서 최인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長城所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起태강지리지운 낙랑수성현유갈석산 장성소기(史記 夏本記)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遂城,秦築長城之所起也수성 진축장성지소기야(晉書 지리지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에서 쌓은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水經注,絫縣碣石山 枕海有大石如柱形 世名天橋 絫縣古城 在昌驪縣西南(大東地志 방여총지)

수경주 류현갈석산 침해유대석여주형 세명천교 류현고성 재창려현서남
☞수경주에는 류현 갈석산은 바다에 기둥처럼서있는데 세상에서는 천교라한다. 류현은 고성인데 지금은 창려현 서남쪽에 있다.

 

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五君十一縣:龍城,廣興,定荒,屬昌黎君(수서 지리지)

수성구왈무수 후위치남영주.준영주치오군십일현;용성,광흥,정황,속창려군
☞수성현은 옛날에는 무수로 불렸다. 후위에 와서 남영주로 행정개편 되고 영주는 5군11현을 두었다. 용성,광흥,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正義 括地志云 “易州遂城 戰國時武遂城也.方城故在幽州固安縣南十七里(史記 趙世家)

정의 괄지지운 역주수성 전국시무수성야. 방성고재유주고안현남십칠리
☞괄지지에는 이주 수성현은 전국시대의 무수성이다. 그 성의 위치는 옛 유주 고안현 남쪽 십칠리에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명증하고 있는 책이 『환단고기』이다.

일본은 일제치하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의도적으로 남긴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는 신라입장에서 기술되면서 오히려 고구려를 당에 대항한 교오불손한 나라로 기술하고 연개소문을 왕을 시해한 패륜영웅으로 그렸다.

사대주의에 입각해 쓰여진 이 책은 대진국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 삭제했다.

김부식이 경주김씨로 우리의 북방사를 절단해 버린 것이다.

왜 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일천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 했는지 알아야 한다.

강력한 국풍과 다물사상을 지녔던 묘청이 패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사대주의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기록이지 우리의 고대사 기록이 아니다.

삼국유사 또한 불교적 견해로 기술했고 신화적 요소로 처리된 부분이 많다.

이로 인해 일제는 우리역사 왜곡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오히려 삼국유사의 미진한 기록을 명확히 밝힌 책이 『환단고기』이다.

 

우리나라는 외래종교와 사상이 들어오면 그들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했다.

지금은 기독교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는 철저히 신화로 치부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랜 우리 역사적 사실이 문헌고증과 유물을 통해 확연히 밝혀졌는데도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믿음이란 명목하에 독선과 고집으로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자신의 역사는 어두워도 이스라엘 역사는 줄줄 외우는 현실이다.

 

뿌리를 잃은 민족이 얼마나 번성할 것인가.

신채호는 그것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 사람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한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외래종교,외 래사상에 물들어 우리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사대주의를 이렇게 개탄했다.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역사적 시각)
오랜 기간 반란의 수괴로 이미지가 각인되었던 묘청이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에 의해서였다.

 

신채호는 망명지에서 쓴 [조선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여 조선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 년래 조선사가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 점령

진실의 역사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을 점령하다.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치명적 독버섯 중의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李丙燾이다.


이병도는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후예로 태어났다.

보광학교와 일본인이 운영하던 불교 고등학교를 다녔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후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한 국내 최초의 대학 출신 역사학자이다.

일본 유학은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병도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廣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요시다를 꼽았다.

이병도가 서양사를 전공하려다가 한국사로 방향을 바꾼 계기는 바로 요시다가 쓴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이었다.

요시다는 일본이 조선 국권 강탈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

이병도와 그의 선후배 한국 유학생들은 요시다에게,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지’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다는 “단시일엔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 50년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드시 동화가 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고 한다. (김정희,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사관’, 『청산하지 못한 역사』 3집)

 

이병도는 요시다 후임으로 온 쓰다 소우키치 밑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국사를 연구해 보겠다는 뜻을 굳히고, 쓰다의 지도 아래 역사 연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쓰다의 소개로 동경제국대학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를 만나 사적인 지도를 받았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는 실증사학을 창시한 랑케의 제자 리스L. Riess를 초빙하여 창설한 학과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실증사학이 일본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케우치는 만주를 일본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만철조사부라는 기관에 학문적으로 참여한 제국주의 사학자이고,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도록 추천하였다.

이병도가 제국주의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데에서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학문적 연구를 시작했다.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함께 고려 이전 시기를 담당했고 자연히 주로 고대사를 연구했다.

그런데 이병도는 “우리 사회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 시대로 들어온 일종의 변칙적 발전”을 하였다고 확신하였다.

한사군 이전은 미개사회이고 한사군이 우리나라에 철기 문화를 전래한 이후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고, 고려 시대까지도 낙후한 도참사상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문명이 중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니,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연구 결과를 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결과는 모두 일본 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고대사를 부정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병도는 와세다 대학 동창,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과 함께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만들었다.

그 주요 구성원은 조선사편수회 활동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단학회도 일본의 논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해방 후 이들이 국사학계를 주도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백남운白南雲(1894~1979)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安在鴻(1891~1965)과 정인보鄭寅普(1893~1950) 같은 민족사학의 거목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였다.

해방 이후 이병도의 주요한 근거지는 ‘국사편찬위원회’였다.

이병도는 신석호, 김상기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 양성에 앞장섰고, 국사편찬위원회 창설에 일등 공신 노릇을 했다.

 

그런데 광복 후 국내 사학계를 이처럼 식민사학자들이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 배경도 작용하였다.

일본이 물러가고 이 땅에 들어선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이 친일파 관리와 학자를 기용한 것이다.

미군정 3년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숙청 건의를 묵살하고, 심지어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 국회에 설치한 반민특위反民特委 의 활동도 무산시켰다.

해방 후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렇게 친일파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국내 사학계도 이병도 일파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2차대전이 종결된 후 나치에 협력한 사람 70만 명을 체포하고, 1만 8천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중국도 중일전쟁 당시 일본에 협력한 민족반역자 십 수만 명을 총살하거나 처벌하였다.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역시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자국의 친일파를 청산하였다.

무려 35년 동안 일제의 악랄한 지배를 받은 대한민국은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하기는커녕, 친일파를 등용하여 출세의 기반을 만들어 준 유일한 나라이다.

이병도 후손들은 3대 동안 11명의 교수진을 배출하며 말 그대로 황금계보를 이으면서 서울대총장 ,문화재청장등을 역임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심각한 부패는 이런 부도덕성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이기백, 김철준, 변태섭 등 2세대 사학자를 양성하였다.

2세대는 노태돈, 이기동 같은 3세대를 양성했고, 3세대는 송호정으로 대표되는 4세대를 배출하였다.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서 교편을 잡아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 교사를 대거 양성하고 있다. (김종서, 『신화로 날조되어 온 신시·단군조선사 연구』, 72~74쪽)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쓰다의 조선사 이론에 조선 후기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이론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노론사관이란 한국 학계가 조선 후기사를 인식하는 사관을 말한다.

노론의 뿌리는 광해군을 명나라의 배신자로 몰아 축출하고 그 대신 인조를 앉힌 서인들이다.

서인이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남인에게 역모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주동자 그룹이 노론이다.

조선 멸망 때까지 거의 늘 정권을 장악한 노론의 상당수가 일제의 조선 침탈에 협력하였다.

이 노론 출신의 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 한국 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노론사관은 또 다른 사대주의 사관이다<한겨레신문>,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2009. 7. 18)

그들은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는 무조건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역사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이병도의 호를 따서 두계斗溪학파라 불리는 그들의 파렴치하고도 부끄러운 일화가 있다.

1979년 충북 중원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데 비문의 여러 부분이 풍상으로 마모가 심해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였다.

이병도는 이 비석 앞면 상단의 잘 보이지 않는 제액題額을 건흥建興 4년이라 판독하였다. 

다른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이병도는 “오매불망 끝에 꿈에 건흥 4년이 나타났다”라고 답했고, 제자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아니라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실제 사건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건흥은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이다.

건흥 4년이 장수왕의 재위 4년이라면, 이때는 CE 416년이다.
이것은 스승이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이 그것을 말릴 수 없고, 더욱이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학계의 풍토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이다.

 

자신들의 견해에 도전하는 무리들은 재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면서, 이병도의 말도 되지 않는 ‘현몽’ 논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그 제자들의 학문적 양심이다.

역사가가 정확하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다.

그러나 한국의 국사학계, 특히 두계학파는 그러지 못했다.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우리나라 사학계,특히 고대사 학계를 장악했다.

군함도-일제 만행과 한국 근현대사

진실의 역사

군함도 외의 또 다른 일제의 만행과 한국 근현대사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수하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견을 바탕으로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본은 체질 인류학적 연구를 시행했다.

 

당시의 연구 자료를 보면 ‘조선인들의 두골이 작고 골격이 두꺼워서 뇌 중량이 작기 때문에 야만인에 가깝다’, ‘일본인에 비해서 동작이 활발하지 못하고 안면 표정이 섬세하지 못하여 조잡한 음식을 먹는 까닭에 소화기관이 발달했다’는 등 편견으로 가득 했다.

그런데 그 연구결과, 일본국내 지역 간 인종적 차이가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차이점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한국인이 열등하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체질인류학 연구가 나중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가 같다는 일선동조론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열등한 민족으로 낙인찍은 한국인을 일제가 어떻게 대접했는지 보여주는 시화가 있다.

일본은 1907년 3월에 메이지 왕 40주년을 기념하는 도코 박람회를 거행하였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아시아 최강 제국으로 올라선 일본의 국력을 자랑하는 무대였다.

이 박람회에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전시물이 있었다.

조선 사람 두 명이 살아 있는 동물처럼 전시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전시한 이 반인륜적인 박람회에서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 동물 두 마리가 아주 우습다”라는 반응까지 보였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비친 한국인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아베총리는 “중국은 어처구니없는 국가지만 아직 이성적인 외교 게임이 가능하다. 한편, 한국은 단지 어리석은 국가”라는 조롱을 하였다.

이 조롱을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최근 한국의 정치 사태를 보면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에서 추진하는 국정교과서에 뉴라이트 친일사관을 반영한 국정교과서가 나오고,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자위대 창설기념식에서부터 일왕생일 축하 파티까지 여는 실정이니 말이다.

얼마만큼 우리 선조들의 찬란했던 자주독립역사관이 붕괴가 되어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본의 한국인 참살 만행은 어떠한가?
약자를 억압하여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제국주의 사조로 말미암아 6백만 유태인이 학살되었다고 하는데,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8백만명의 한국인을 무참하게 죽였다.
우선 1894년 갑오 동학혁명을 진압하면서 동학군과 양민을 합쳐 최고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을 학살했다.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양민 대학살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수행하고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1894년 9월부터 1895년 7월 까지 10개월 동안 수도를 동경에서 히로시마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그들의 비밀 문건을 보면, 동학군이 함경도 방향으로 도망하지 못하도록 전라도 방향으로 몰아서 섬멸한다는 치밀한 작전까지 적혀있다.

그때 일본은 저항하지 않은 동학군과 양민까지 무참하게 학살을 했다.

‘우지개’라 불리는 볏짚으로 만든 농기구를 머리에 씌우고 불을 질러 죽이기도 했다.

동학혁명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던 우금치 전투에서는 계곡과 산마루에 동학군의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개천에는 핏물이 여러 날 흘렀다.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수많은 의병이 죽어 갔고, 만주에서는 양민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1920년 일본군은 3~4개월 만에 조선인 5천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간도 일대에서 자행된 한국인 학살을 지켜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을 하였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일제가 벌인 온갖 만행을 복도한 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는 이렇게 고발하였다.

“부인의 다리를 양편으로 벌려 생식기를 검으로 찔러 일신을 사분오열로 가르며, 여자는 이렇게 죽이는 것이 묘미가 있다고 웃으면서 담화하였다. 우리 동포를 전차 궤교軌橋 아래 목을 매달고 양다리를 끈으로 묶어 좌우에서 다수인이 끈을 잡고 신호하며 호응하면서 ‘그네’같이 흔들어 죽인 일도 있다. 신체는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고통스런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갈라 죽인일도 있다. 기차에서는 다수의 왜놈들이 조선인 사지를 잡고 창밖으로 던져서 역살을 하였고, 남녀 수십 인을 발가벗겨 보행시키고 또 춤을 추게 하여 수 시간 동안 동물처럼 희롱을 한 후 찔러 죽인일도 있었다. 이런 괴악한 수단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바이다. (김상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또한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른바 마루타 생체실험을 행하였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731부대가 중심이 되어 세균성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을 상대로 무려 31종류의 실험을 강행했다.

고속원심분리기를 사용해 생사람의 피를 짜고, 사람 몸에 말을 피를 넣었을 때 어떻게 죽는지도 관찰하였다.

각종 독가스를 살포하여 얼마 만에 사람이 죽는지도 측정하고, 페스트와 콜레라균을 주입시켜 체내 장기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도 생체해보로 알아냈다.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생사람을 한증막에 넣고 쪄서 수분을 빼는 실험을 감행하고, 사람에게 전혀 물을 안주고 빵만 먹이면 6~7일째 가서 퉁퉁 부운 채 피를 토하고 죽는 다는 것도 알아냈다.

아직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일본의 생체 실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반인륜적 범죄 행위였다.

 

한국인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음모의 절정은 1933년 흥아 연구소라는 특수 조직에서 ‘도요카와 젠요’라는 자가 작성한 경성천도京城遷都 공작이다.

이 문건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들어, 일본이 세계를 경영하려면 동경은 수도로서 부적당하고 조선의 경성이 가장 적함한 곳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만약 일본인 1천만 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킬 계획이 실행되었더라면 한국은 완전히 일본인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혈통이 섞이고 언어와 역사도 완전히 빼앗겨 한민족이란 인종자체가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민족의 역사가 난도질 당하고, 당시 한국 인구의 1/3에 달하는 8백만 명이 살해되고 자칫 민족의 씨종자까지 말라 버릴 뻔했던 참담한 과거를 너무도 쉽게 잊고 산다.

한국인이 일제에게 겪은 수난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의 사건이 결코 아니다.

우리들의 부모형제가 당한 그 고통은 오늘날에도 우리 한민족 정서 속에 깊은 한으로 새겨져 있다.

 

이런 역사를 쉽게 망각하고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을 미화하는 뉴라이트 친일사관 국정교과서가 다시 활개치고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동아시아 패권을 다시금 쥐려고 하고 있다.

구한말 국망의 위기에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출세와 부귀에 눈멀었던 노론 친일 사대세력들은 해방 후 청산이 되지 않고 이승만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그 권력을 다시금 계승하였다.

일제시대는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과 출세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들이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 주장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역사와 국권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몸부림치던 독립지사들은 가난하여 후손들 교육을 못시킨 결과로 여전히 가난하고, 친일파들은 부일을 해서 생긴 부귀로 후손을 교육하여 다시금 부와 권력이 계승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상류층 권력의 주류가 되었다.

이것이 청산되지 않은 한  한국의 미래는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심각한 부패는 이런 불의와 부도덕성을 바탕으로 근현사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는 제국주의의 유산인 일방적이고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며 조작과 공작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역사를 바로잡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거대한 물결이 촛불시위와 더불어 새로운 희망과 새 역사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한국의 민중들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억압과 독재의 역사를 넘어 희망의 새 역사를 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 시대는 그 가치관을 실현시킬 새로운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진실의 역사

#한국사 :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 한민족 뿌리역사를 도려낸 일본

 

19세기 중반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면서 한국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식민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식민주의 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관이다.

조선인을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민족으로 묘사하여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요지이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정립과 실현을 위하여 일제는 조선침략을 군사적으로 준비함과 동시에 자국의 쟁쟁한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게 하였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결국 한반도 지배를 위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학에는 ‘조선사 강좌’가 설치되고 논문과 저서가 속속 간행되었다.

일본인이 한국사를 이른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내세워 주관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 연구를 반석에 올려놓은 일본의 식민 사학자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1854~1922),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65~1942),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1874~1930) 등이다.

이 세 사람은 독일에 직접 유학을 하거나 일본 내 대학을 다니면서 실증주의 사학을 공부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조상의 무덤과 집터를 파헤쳐 꺼낸 유골과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려 한다. 그리고 고증되지 않은 기록은 대부분 불신한다.

 

이러한 실증사학의 정신에 따라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국-배달-고조선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하야시 다이스케가 『조선사』와 『조선근세사』에서 정한 한국사의 시대 구분이다.

한사군 이전은 태고太古, 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는 상고上古, 고려 시대는 중고中古, 조선 시대는 금대今代로 구분하였다(김용섭, 같은 책, 498쪽)

이후 그들은 만철滿鐵조사부를 세워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조사를 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 역사를 말살하고 그 자리를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채우는 데에 있었다.

 

마침내 1910년에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자국의 식민주의 사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데려왔고, 192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면서 그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일제 관학자들은 조선 역사를 본격적으로 변조하여 조선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상고 이래의 한일교섭사 중에 일본에 불리한 사실은 모두 은폐하였다.

임진왜란을 마치 일본이 승전한 것처럼 기술하고, 광개토태왕비의 비문과 칠지도 명문을 조작하는 등 우리 역사와 문화재에 손대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일본이 왜곡한 사례 중에서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한민족사의 밑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것으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작한 “석유환인昔有桓因”이다.

1903년 동경제국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후 조선에 파견된 이마니시 류는 조선 역사를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역사로 깎아 내리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내 조선의 한 사서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 사서가 바로 『삼국유사』이다.

그는 조선 중종 1512(壬申)년에 간행된 『삼국유사』 임신본에 적힌 “석유환국昔有桓国”의 ‘국国’ 자를 ‘인因’ 자로 변조시켰다.

‘국’ 자와 ‘인’ 자는 서로 모양이 비슷하여 변조하기가 쉽기도 하지만, 일연이 붙인 ‘제석을 말한다謂帝釋也’는 주석에 힘입어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과감히 변조한 것이다.

이리하여 환국을 불교 신화에 나오는 나라로 둔갑시키고,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 고대사의 핵을 도려낸 사건’이다.

이로써 한국사의 영혼이 뿌리 뽑히게 되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7천 년 상고사가 통째로 잘려 나간 것도 통탄스럽지만,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마저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환인·환웅·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전락시킨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중국은 최근 홍산유적이 발굴되면서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中華古代文明探源工程을 진행하였다.

이 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보다 한 술 더 떠서 중국 역사의 시발점을 1만 년 전으로 끌어 올려 중화 문명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중국은 만리장성 밖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이 오랑캐문화라 하여 한족문화권으로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만리장성밖에서 황하문명보다도 수천년 앞선 홍산유적이 대량 발굴되자 이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옥기문화, 청동유물, 석관묘제, 천원지방형의 원형신전, 용봉유물, 옥웅룡, 웅녀여신상, 수행하는 여신상, 주문읽는 토우, 곰발바닥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홍산유적은 북방유목문화의 전형이자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웅족 토템기록을 명확히 증언해주고 있다.

동이문화의 전형적 특성을 보여줌에도 한국학자들은 고조선 문화와는 관계없다고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가 신화시대로 치부하고 연구조차 하지 않는 작금에  중국은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고 중국의 고대사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식민사관
1945년에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지만, 이 땅의 사학은 여전히 식민사학의 잔재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 땅의 역사 광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식민사학의 주구 노릇을 하던 몇몇 학자와 그 후예들에게 잠식되었다.

그들은 지난 식민통치시기에 8백만 이상의 조선인을 참살한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 아래 교묘히 숨겨 그대로 수용하였다.

 

지금도 식민사학계는 이런 홍산유적에 대한 실질적 연구는 외면하고 이미 학계에서는 검증이 끝났다면서 곳곳에서 여론과 인터넷을 통해 실증사학으로 고증이 되지 않는다고 몰면서 식민사학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고대사를 신화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역사상 가장 반인륜적이고 파괴적인 역사관인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변론하였다.

이것은 자국의 역사를 자국민이 파괴하는 해괴한 행위로, 세계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한사군 재在한반도설’이다.

한사군설은 고조선 말기 한반도 땅에 한나라가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설치하였다는 주장이다.

일제는 대동강 유역에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라는 조작된 유물을 심어놓고, 그 비석을 한사군 유물로 내세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한국 사학계는 그 조작설을 그대로 따랐다.

최근 그 비석의 화강암 재질을 분석한 결과 위조된 유물임이 드러났지만, 한국인들은 한반도 내 평양 주변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배우고, ‘낙랑·임둔·진번·현도’라는 이름을 반세기가 넘도록 열심히 외우고 다녔다. (이병도李丙燾 등이 참여하여 설립한 진단학회에서 1965년에 간행한 『한국사』 7권에 수록)

 

그리고 일제가 내세운 한사군설을 그대로 따라 우리 역사학자들의 손으로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정한 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는 지금 다시 중국에게 역사를 빼앗기고 있다.

중국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설을 동북공정에 적극 활용하여 2,100여 년 전 한나라 때의 중국 영토를 한강 이북까지 확장하였다.

중국의 이 황당한 주장이 서양의 세계사 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리려면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한국사의 뿌리를 뽑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화 패권주의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은 남의 역사를 강도질하는 패악의 근원이다.

 

초·중·고 교과서에서 우리는 일제가 꾸민 역사 사기극의 잔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환국과 배달의 역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족장이 다스리던 부족 사회가 있었다고 서술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고조선의 출현에 대해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라고 하면서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서술한다.

 

얼핏 보아도 너무나 싱거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는 이 서술조차도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2009년에야 겨우 개정된 내용이다.

그 전까지는 “건국되었다고 한다” 또는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남의 나라 역사를 말하듯이, 설사 우리 역사라 해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듯이 서술하였다.


그런데 비단 학교 교과서뿐 아니라 국가공무원 수험서, 육·해·공군의 역사 교재, 아동용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모든 역사책에는 일제가 조작한 잘못된 한국사가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제 식민사학의 여독이 오늘날까지도 모든 한국인의 뼛속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표절의혹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
◉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의혹에 대한 반론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들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환단고기가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 국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교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는 700년이고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 왕의 13세손’이라 하였다.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이러한 부정확한 내용을 비판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부정한 『신당서』의 기록, ‘가언충의 고구려 900년 유국설留國說’을 근거로 할 때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 200년을 삭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요동을 시찰한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올린 보고 중에 “『고구려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팔십 먹은 장수에게 망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한 대목을 가리킨다.

‘고구려 900년’은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고 오가의 공화정을 폐한 BCE 232년에서 고구려가 망한 CE 668년까지를 뜻한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그 진실이 명쾌하게 밝혀진다.

환단고기의 기록으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의 내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북부여기」·「고구려국본기」를 통해 고구려 제왕의 초기 혈통계보가 천제자天帝子인 제1세 해모수(BCE 239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주몽(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으로 정립됨으로써, 고구려 900년 유국설이 입증되는 것이다.

삼성기 상 원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扶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사 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이라하시니 是爲高句麗始祖也시니라. (삼성기 상)
⇒해설 :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 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삼성기』 상)


즉 광개토대왕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광개토대왕비에 정확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부여 4세+고구려13세를 더하면 광개토 대왕이 17세손임을 밝혀주는 유일한 사서는 바로 환단고기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오히려 환단고기를 통해서 완벽히 광개토대왕 비문의 해독이 가능해졌다. 결코 조작된 위서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는 데에 그치지만, 『환단고기』는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 기록의 본래 진실까지 담고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900년 유국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현現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이순근은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라는 구절이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의 내용과 유사하므로, 『환단고기』는 박은식의 책을 베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기존에 전수되어 내려오던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를 묶어서 1911년에 발간되었고,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1915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역사관을 전개하기 위해 댓구적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베낀 것이란 말인가.

오히려 『한국통사』의 문장이 ‘옛사람(古人)’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라와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형식이므로 박은식이 다른 역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원문 자체를 분석하지 않고, 글의 전체 논리 흐름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유사한 한 구절을 떼어다가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원문은 이렇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망할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라[古人云 ‘國可滅, 史不可滅’, 蓋國形也, 史神也](박은식, 『한국통사』 서문).

이때 박은식이 인용한 ‘옛 사람의 말’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또 『환단고기』 범례에 ‘낭가’라는 말이 나온다.

위서론자들은 ‘단재 신채호가 처음 사용한 낭가라는 말을 환단고기 서문을 쓴 계연수가 따온 것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그 후에 성립됐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사실 『환단고기』는 낭가 문화의 원형인 삼랑三郞과 그 이후의 낭가 맥을 최초로 전해 주는 책이다.

 

이순근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논리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광용 또한 “교리체계에서도 환인(하느님)의 조화, 환웅(예수)의 교화, 단군(성령)의 치화를 생각나게 하는 삼신(삼위)일체론 부분은 … 기독교에 대한 단군신앙의 교리적 대응에서 나온 것이다. 또 영혼, 각혼, 생혼의 성삼품설聖三品說이 보이는 부분도 『천주실의』에서 마테오리치가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군세기』의 삼신일체 사상과 삼혼 논리가 명나라 때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말한 성삼품설聖三品說을 흡수한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환단고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서 신관의 중심 언어인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란 무엇인가?

‘조물주로서 얼굴 없는 하나님인 삼신과 한 몸이 되어 직접 우주 만유를 낳고 다스리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말한다.

비인격적인 삼신만으로는 이 우주에 어떠한 창조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 질서의 주권자이신 삼신일체상제의 조화손길이 개입될 때 비로소 천지만물이 창조되고 변화한다.

삼신일체상제, 이 한 마디에는 조물주가 어떤 원리로 우주를 다스리는지 그 해답이 담겨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位格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말하는 동방의 ‘삼신일체상제’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또한 마테오리치 신부가 말한 성삼품설의 영혼·각혼·생혼은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의 삼혼설에서 말하는 영靈·각覺·생生과 용어는 같으나 그 의미와 사상적 배경이 다르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삼신설이나 삼혼설은 고대 동북아 문화의 우주론, 삼신관을 바탕으로 한 ‘삼수 원리’에 토대를 둔 것이고, 생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이것을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던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하면서 수용한 것이다.

 

반면 마테오리치 신부의 성삼품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혼설에 토대를 둔 것이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서 말한 “영각생靈覺生 삼혼三魂”은 삼혼칠백三魂七魄의 삼혼을 말한다.

 

위서론자들은 삼신, 칠성 문화, 용봉 문화, 천지 광명의 환단 문화에 대한 기초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전통 문화의 기반인 삼신 우주관에 대해 치밀한 문헌 고찰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의식 자체가 없고,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지성과 우주론이 결여된 자들이다.

원전 자체를 체계적으로 읽지 않고, 그 가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논리를 만들어 아전인수 격으로 부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불순한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동방의 오랜 전통문화와 한민족의 숨겨진 원형역사가 담긴 환단고기를 이단과 사이비로 몰고 갔다.

무당, 민족사학, 샤머니즘, 오방낭 등을 거론하면서 민족종교와 민족사학을 도매급으로 사이비로 매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통문화를 사이비나 미신으로 매도한 것은 일제 강점기이후 민족종교 말살정책의 일환이였으며 해방이후에는 개신교계의 세력 확장 전략이었다. 

 

특정종교와 언론이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바탕으로 타문화, 타종교에 배타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며 동방문화와 역사를 배척하고 타도하려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국정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나오기 전부터 ‘환빠교과서’라고 엄청난 음해를 하는 여론몰이를 하더니만 뚜껑을 열고 보니 정작 실린 것은 찬란했던 우리의 상고사 환단고기 내용은 한 줄도 없고 여전히 식민사학 논리를 고수하며 친일 뉴라이트 역사관과 식민사학을 더욱 공고히 뿌리를 내리도록 기술을 하였던 것이다.

최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는 일본 극우 단체들의 지원금이 국내 유수대학과 일본 유학파 출신들에게 지원하여 신친일파를 만드는 정책이 상당히 성공하였다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의 극우교과서를 추진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한국의 뉴라이트 단체와 상당한 친선교류를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식민사학자와 외래사대주의, 그리고 자학사관자들이 매도하는 『환단고기』는 국정교과서 농단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와 음해를 당했다.

자국 역사를 어떻게든 깍아내리려는 이들은 일본 극우 단체의 자금을 받고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찬란하게 실존했던 한국의 고대사는 기술도 하지 않으면서 언론을 통해서 국정교과서는 환빠교과서로 여론몰이를 했다.

이들은 교활하게 민족사학을 매도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반영했다.

뉴라이트는 오히려 이전의 친일식민사학자들보다도 한술 더 떠서 친일을 미화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성공기반이 친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 사건은 한국사학계가 식민사학이 주류임을 다시 한 번 입증을 한 셈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②-영고탑진실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 - 영고탑진실
◉ 영고탑 기록이 청나라때 나오므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의 진실
환단고기 위론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영고탑’이 청나라(1644~1911)의 시조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므로,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고 주장한다.

조인성은 『단군세기』의 저자인 이암과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은 고려말 사람이고,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은 조선 중기 사람이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이도학 또한 『만주원류고』의 한 가지 기록을 근거로(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이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라 주장한다.

즉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대 이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료만 가지고 어떻게 그런 섣부른 주장을 한단 말인가.

제주대 명예교수 안창범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오는 영고탑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여 이도학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즉,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特이라 한다.

영고탑은 본래 영고특寧姑特에서 영고태台로, 영고태台에서 영고탑塔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다”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영안의 옛 탑’이라는 뜻이며, 단군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보면 ‘영고탑’을 ‘영안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이익(1681(숙종 7)∼1763)은 『성호사설』에서 ‘영고탑’은 ‘오랄烏剌, 애호艾滸와 함께 동삼성東三省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해자垓字가 깊다’고 하였다.

 

중국문헌에서는 영고탑을 탑이 아니라 옛 지명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其實並不像字面意思那樣是一個塔,而是一個古地名,原位於今黑龍江省海林市,後在公元1666年遷到黑龍江省寧安市。寧古塔是清代寧古塔將軍治所和駐地,是清政府設在盛京(瀋陽)以北統轄黑龍江,吉林廣大地區的軍事、政治和經濟中心,是向朝廷提供八旗兵源和向戍邊部隊輸送物資的重要根據地,也是十七世紀末到十八世紀初,東北各族向朝廷進貢禮品的轉收點,因此寧古塔與盛京齊名《 滿語寫法參見在線滿漢詞典》 , 《寧古塔紀略》,見《續修四庫全書》本

영고탑은 글자의 뜻과 달리 탑이 아니고 옛 지명이다.

원래는 지금의 흑룡강성 해림시에 있다가 뒤에 서기 1666년 흑룡강성 영안시로 옮겼다.

영고탑은 청나라 때 영고탑장군의 치소이며 주둔지로써 청나라 정부가 설치했던 성경(심양)이북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광대한 지역의 군사 정치 경제를 통치 관할하던 중심지였다.

조정에 대해서는 8기병의 군사를 제공했고 국경주둔부대에게는 물자를 수송하던 주요근거지였다.

또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까지 동북지역의 각 민족이 조정에 예물을 바칠 때 거두어들이던  장소였다.

따라서 영고탑은 성경과 명성을 나란히 했다.《만어사전》,《영고탑기략》,《속수사고전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요동이 본래 조선의 고지(故地)이며, 숙신(肅愼)·예맥(穢貊)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 조선에 복속했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오랄(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강역(疆域)임을 모르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위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명실록』을 인용하여 명나라 초기에 ‘영고탑로寧古塔 路’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명칭은 적어도 명나라 초기(1368)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고탑은 원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영고 ‘迎鼓터’란 지역으로 북부여 이후 황폐화 되고 고구려 대진국의 멸망으로 역사기록이 사라지면서 그 유래에 대해 정확이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다만 간신히 이름만 전해지다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맞물려 ‘영고탑 寧古塔’으로 기록이 된 것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민족의 발흥지역으로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내던 영고제천을 지내던 영고터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조 이전에 쓰인 용례가 있다면, 위서론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지 주장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기록이 존재한다.

청조 이전부터 영고대 혹은 영고탑이란 명칭이 존재했다.

중국 문헌에서 ‘명대 초기에 여진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곳을 동해와집영고탑로東海窩集寧古塔路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명대 초기 사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암이 살던 고려말에 영고탑이란 명칭이 통용되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배달과 고조선의 제천행사를 이어받은 부여의 영고迎鼓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16세 위나단군이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44세 구물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렸다고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영고탑’은 원래 탑의 이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탑이 사라지고 지명으로 남았다고 보아야 한다.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이다.

후대에 청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고迎鼓의 원래 의미와 표기법이 잊혀져 영고寧古가 되었고, 우리말의 ‘터’를 특特, 태台, 탑塔 등으로 음사하면서 영고탑寧古塔이란 말로 정착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고탑지寧古塔志』를 보면 “만주어로 6은 ‘寧公’이라 하고 ‘자리[坐]’는 ‘特’이라 하는데, ‘寧公特’ 다른 말로 ‘寧公台’라고 부르다가 점차 ‘寧古塔’으로 불렀다[滿呼六爲寧公, 坐爲特, 故曰寧公特, 一訛爲寧公台, 在訛爲寧古塔矣]”라고 하였다.

우리말의 ‘터’도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特(만주어로 타)’이 우리말의 ‘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역주

 

◉ 寧古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淸)나라 때 지명. 
1653년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을 두었고, 62년 영고탑장군(將軍)으로 고쳤다.

그 뒤 팔기부도통(八旗副都統)을 두었으나, 청나라 때에는 죄인의 유형지(流刑地)가 되었다.

1910년 영안부[寧安府]로 되었다가, 중화민국 이후 닝안현으로 고쳤다. (두산백과)

고조선 1왕조시대 수도 송화강 아사달 (하얼빈), 북부여 발흥지 웅심산. 고구려 발흥지 졸본. 만주일대를 발흥지 삼아서 한민족은 국통을 계승하며 천자국으로서 삼신상제께 천제를 올렸다. 영고는 부여의 삼신제천행사였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①
위서론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문제는 사서 조작의 문제, 지명과 인명 문제, 근대 술어 사용 문제, 다른 사서와의 관련 문제, 저자 문제 등으로 정리된다. 위서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환단고기를 활발하게 연구하는 의식 있는 학자들의 의견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사서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위서론자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환단고기는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편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다.

이 사실은 환단고기 범례의 내용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연수를 가공 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환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위서를 만들어서 그동안 식민사학의 거짓을 덮으려는 음모에 불과하다.

 

환단고기는 엄청난 깨달음과 깊이 있는 역사를 보는 혜안이 어떠한 사서보다도 뛰어나다.

만약에 환단고기를 조작을 했다면 조작한 사람들은 만세의 학자며 성인들로 추대해도 모자랄 정도의 깊은 소양이 가진 인물들로 느껴질 정도다.

 

이번 국정교과서가 환단고기 내용이 진짜 반영이 될 것이라고 몰아붙이는데 그런 일은 아마도 털 끝 만큼도 없을 것이다.

집필진 대다수가 식민사학계열로 구성이 되었고 이들은 환단고기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데 환단고기 내용을 과연 반영하겠는가.

국정교과서에 환단고기 반영한다는 여론몰이는 언론조작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국정화는 뉴라이트 세력의 역사관이 반영된 일제식민지 근대화론이나 해방이후 친일건국 세력에 대한 미화거나 식민사학자들 주장이 반영되면 되었지, 식민사대주의자들이 뭐가 좋다고 자승자박하는 한민족 국통을 계승한 자주독립역사학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책이었던 환단고기 내용을 집어 넣겠는가?
 
다시 계연수에 대해 알아본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은 그 제자인 이유립의 증언과 여러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와 그가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서술되어 있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20) 등이 있다.

계연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환단고기를 1980(庚申)년에 세상에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만약 환단고기가 조작된 책이라면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진 오형기가 필사를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조작 사실을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선생은 1966년부터 이유립의 제자로 환단고기를 배웠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고등학교 때 몇 명씩 일주일 단위로 이유립의 집에 모여서 역사를 배웠는데, 그때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짚어 가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언론에서 가장 위서론을 극렬하게 확산하고 있는 이문영 주장처럼 환단고기가 1980년대 이유립이 조작한 책이 전혀 아닌 것이다.

양종현은 종이의 질과 색깔, 책 표지 상태까지 말하였는데, 책을 묶은 끈이 떨어져서 여러 번 고쳐 매고 풀로 붙였던 사실도 기억하였다.

이 같은 양종현의 증언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원본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최순실 사건이 터지면서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행촌 이암의 國猶形史猶魂 形可失而保乎(국유형 사유혼, 형가실혼이보호) 즉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할수 있겠는가.

이 구절을 박 전 대통령이 인용했다고 위서를 인용했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잘못을 왜 환단고기에 뒤집어 씌우는가.

성경조차도 19세기 후반 예수의 말씀이 후세에 조작이 되었다고 서양 학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위서론에 시달린 적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가르침과 가치가 인류사에 도움이 된다”라고 하여 종식이 되었다.

 

환단고기 내용이 인류사에 그리 해악이 되는 내용인지 읽어보면 스스로 알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또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이 바뀌었으므로,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유립은 <자유>에 ‘환단유기桓檀留記’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다.

박창암이 1968년 5월 창간한 월간지로서 2010년 7월, 통권 443호를 발행하였다.

이유립이 <자유>에 원고를 기고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위서론자들은 이 <자유>에 게재한 내용과 『환단고기』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1979~80년에 썼거나 교정을 보면서 조작했다는 것이다.

 

박성수는 “환단유기의 내용이 『환단고기』에 담겨 있다. 그래서 ‘환단유기’를 하나의 필명으로 쓴 건지, 아니면 책 제목이 바뀐 것인지 판단은 못하지만,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환단유기로 바꾼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곧 『환단고기』라는 책이 이미 있었다는 뜻이 된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본 책을 직접 본 양종현이, 책의 제목은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다.

또한 임채우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곰과 범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고 “환단고기의 각 권에서 그 내용을 서로 다른 의미로 기록한 점이 환단고기가 한 사람의 저서가 아님을 반증한다”라고 주장한다.

즉 이유립이 독자적으로 창작한 것이라면 그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환단고기 편찬 과정에 의문을 품는다면, 계연수 편집본, 오형기 필사본, 오형기 필사본에 대한 영인본,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더구나 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역사를 공부하였다는 양종현의 진술 또한 거짓이라 해야 하는데, 이는 위서론을 주장하기 위해 한 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벌어진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허구라고 몰아붙이면서, 위서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민족사학을 부정하고 식민사학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환단고기 역주』

올바른 역사관이란?① - 이홍범박사

진실의 역사

올바른 역사관이란?① - 이홍범박사

 

강력한 선진민족의 공통점은 자기에 맞는 가치관을 추구하는 목적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힘을 미치는 것은 민족국가라고 봅니다.

선진국가의 공통점은 민족국가를 완성한 나라입니다.

미국은 민족국가를 완성했습니다. 일본, 독일, 영국, 러시아도 마찬가집니다.

반대로 식민지 독립하지 못한 국가는 민족혁명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민족혁명 성공국가는 자주 민족 통일을 완성한 국가들입니다.

그 나라 고유한 민족국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통합 국제관계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개인 자유의 실현입니다.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야마토의 이상을 건설하는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렇게 민족이 통합돼서 국가를 만들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반고, 삼황오제 그들의 고유한 역사정신에 기초해, 소위 중화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뭉쳐진 국가입니다.

한족의 중화역사관에 기초해서 타민족을 중화로 동화시키면서 중국을 통일시키면서 국제관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독일, 영국, 러시아도 민족 통일 혁명을 완수했습니다.

이들의 통합을 저해하는 방해하는 요소는 식민사관이었습니다. 역사는 자아투쟁 중심으로 세웠습니다.

 

언제나 강력한 민족은 역사의 진실에 기초하던지 아니면 신화적으로 허위적인 역사를 만들다던지 그래서 강력한 자신들의 역사정신에 기초하여 민족을 통합해서 타민족과 경쟁해서 세계를 팽창 정복해갔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서 국가 종교로 선포된지 게르만에 의해 로마가 붕괴됐습니다.

그때 오거스틴의 신학적 역사관을 가지고 게르만 카톨릭을 살렸습니다.

독일적 기독교가 식민사관과 투쟁을 해서 영광스런 독일의 고유한 역사에 기초하여 통합기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민족들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그들의 역사관으로 남의 민족 역사관을 파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족은 멸망하고 피부색만 남아서 피지배 민족으로 하락했습니다.

오늘날 조국의 현실을 볼 때 어떠한 현실에 처해 있다고 보십니까.

하나의 민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공통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8천만이 뭉쳐야 하는데 남북이 외국의 적과 싸우는 적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근대적 민족이 형성이 되지 않았고 우리역사에 기초한 공통의 역사관 정립이 안됐다는 것입니다.

아직 민족자아가 미완성된 상태입니다. 분열 대립 투쟁하는 상태입니다.

식민사학이 일신과 일파의 권익을 의해서 민족 권익을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아직 근대 민족국가 정립이 안 되고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역사관이 들어와서 한민족의 정신을 분열투쟁 시키고 있습니다.

공통의 가치관과 이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극적으로 나타난게 남북문제, 종교가치관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걸 통합하는 최선의 방법은 민족자아를 확립해서 통일 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뭉치는 게 최선의 방법이란 게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 우리 역사 정신을 가지고 뭉쳐야 합니다. 그 역사정신의 핵심이 홍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외세는 민족이 철저히 분열할수록 한민족을 간섭하고 다스리기 쉽습니다.

대표적인게 일제 식민사관, 중화 식민사관 그리고 다양한 외세 종교역사관이 ‘단군은 신화다’해서 한민족 민족사관을 파괴해서 자주 민족통일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걸 못하게 하는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귀중한 역사관을 가지고 민족 자주와 통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홍익 역사관으로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사건건 반대하면서 민족사관을 패배시키는 세력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세력이 소위 식민 강단사학입니다.

외래 식민사관이 방해하고 파괴하고 그러면 결국 약한 민족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역사투쟁, 역사전쟁에 있습니다.

군사경제는 쉽게 알아보지만 보이지 않은 역사관은 역사 통찰력이 없으면 보기가 어렵습니다.

외래사관이 구원이든 사랑이든 평화든 경제번영을 사용하고 실증적인 용어를 들고 나오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밑에 흐르는 진리정신을 통찰하기 쉽지 않습니다.

 

위대한 민족만이 역사정신권력을 만들어 세계사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천만 민족을 통합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한다면 영광스런 조국통일을 이루고 세계 선진대국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는 주동세력이 미약했기에 민족혁명을 지금까지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동학이 민족을 통합시키고 외세를 타파하려 노력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실패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력 부재, 국제사회 흐름 간파하고 지혜롭게 활용하는 국제적 협력을 함께하면서 결국 자주 독립 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게 동학정신을 계승한 참동학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지 않은 훌륭한 분들이 역사 중요성에 강조를 하고 많은 고귀한 분들이 역사 연구를 발표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이런 역사 연구에 기초해서 실질적 역사권력의 힘을 가지고 현실차원의 경제발전 자주독립 통일을 할 수 있는 막강한 민족역량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상당수 강단사학자들은 학술대회를 통해서 계속 민족사학을 파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중요한 이론은 실증주의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외래에서 들어온 실증사관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역사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진리고 재야사학은 실증주의에 기초를 하지 않고 비과학적인 사이비다'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료, 일본의 사료에 기초해서 '단군은 신화다, 환단고기는 위서다.' 이게 실증주의의 결정적 문제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중국이 귀중한 역사사료를 없앴기 때문에 중국, 일본이 제공한 역사사료를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전래되는 전설, 신화, 고고학적인 자료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환단고기』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서가 파괴돼서 전승된 수많은 전설의 기록이 『환단고기』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역사, 한자 역사, 주역을 모르고는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강단사학자들은 한자 해독 역량이 약하고 주역周易과 역학易學이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자 실력과 역학 실력이 선행돼야 하는데 한국의 강단사학계, 하버드를 포함한 국립대학은 역사연구에 선행된 역학, 주역을 가르치는 것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실증주의 역사관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흑이다, 백이다. 청이다, 홍이다. 창조다, 신화다는 둘이 아니다, 하나다.

이런 걸 이해하지 않고 한국인의 역사정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강단사학의 결정적 연구 문제점은 외래에서 온 이원적 3차적 연구를 벗어나지 못했고 일본, 중국이 만든 식민사학에 기초해서 이게 진실이다 그러고, 재야사학의 진실된 역사사실은 거짓이고 위서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촛불 정치혁명이 일어났듯이 식민사학 청산혁명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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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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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친일 후손들은 선대가 물려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에 힘입어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선대의 신산한 삶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의 할아버지인 친일파 이명세 등에 의해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쫓겨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창숙 선생의 첫째 아들 김환기는 아버지와 함께 상해 망명길에 올랐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불과 19살이었다.

둘째 아들 김찬기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몇 차례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이후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망명하였으나 망명 도중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 31살이었다.

셋째 아들 김형기는 다행히 살아남았으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고 생활이 곤궁했다.

말년의 김창숙 선생이 이명세 등에 의해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축출당하고 여관 방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때, 셋째 아들 김형기가 자동차 운전사를 하며 부친을 부양했다.

이 당시 세상 사람들이 심산의 아들이 운전사 노릇을 한다고 비웃자, 김창숙 선생이 아들을 위해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두 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셋째 아들에게 조차 변변한 경제적, 사회적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었으리라.

 

아들에게
내 아들이 차를 끈다고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고 조롱하네.
다시 그 아비를 비방하여
거짓 꾸밈 잘하게
자식을 가르쳤다 이르네.
비웃고 헐뜯은들 무엇이 상심하랴.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라.
가정의 생계를 돌보는 이 없다면
하루아침 당장에 망하고 말 것이라.
옛적에 연암(燕巖)공은 전을 지어 기렸다.
예덕(穢德)선생을 너희들 조금도 슬퍼하지 마라.
천한 직업 그것이 바로 천직(天職)이니라.

 

《독립운동가 후손은 4분의 3이 월 소득 200만원 이하》
한국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조사를 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모임인 광복회 회원 6,381명 전원을 대상으로 생활 실태 조사를 한 것이다.

조사 응답자는 1,115명으로, 뉴스타파가 조사한 친일 후손의 전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조사에는 독립 유공자 1대가 58명, 자녀 대인 2대가 469명, 손자 대인 3대가 509명, 증손자 대인 4대가 53명 참여했다.

 

독립 유공자 가족들은 ‘사회적 무관심’과 ‘경제적 빈곤’을 토로하고 있었다.

복수 응답으로 ‘과거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44.6%가 ‘사회적 무관심’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러나 33.9%가 ‘생활의 어려움’을, 33.3%가 ‘연금 승계가 끊길 우려’를 지목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기에 이런 설문 결과가 나왔을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월 개인 소득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50만원 미만이 10.3%, 50~100만원이 20.9%, 100~200만원이 43%였다. 2015년 3분기 기준으로 2이상 평균 소득이 월440만원 남짓이고 4인 가구 최저 생계비가 166만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실질적 소득을 따지고 보면 빈곤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한 자산 역시 국민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70% 이상이 자산 2억원 미만이었다. 다산 5천만원 이하가 28.3%였고, 5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21.1%, 1억원 이상 2억원 미만이 20.9%였다. 2013년 기준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가구당 순자산 3억 3,085만 원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친일 후손 1,177명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 그것도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다.

이같은 결과는 주관적 계층인식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응답자 중 자신이 ‘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이 73.7%을 차지했다.
친일 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조적인 인생행로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학력의 차이였다.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학력이 중졸 이하인 사람이 40%나 됐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 4.7%, 초졸이 22.8%, 중졸이 12.8%였다.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25.7%로, 전체적으로 고졸 이하가 3분의 2이다. 66%에 달한다.

 

친일파 후손 1,177명 중 학력 전수 조사에서는 서울대 출신이 268명으로 22.8%였다. 연대는 68명, 고려대 51명으로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1,177명의 친일 후손 중 유학을 다녀온 비율은 27%였다. 이 수치는 일반인의 유학비율과 비교하면 150~300배에 이른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이들은 부가 대물림 되었다. 당대 누구 못지않은 지식인들이었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배움의 가치를 잘 알았을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지하에서 자신의 후손들과 친일파의 후손들을 비교해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정의가 구현될 리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는가.

그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 속에 매국행위를 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가르쳐 온 것밖에 더 되는가.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정부가 건국 되었음에도 국가에서 예우는 못할망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렸다. 

친일파와 매국노가 성공하는 세상이라면 누가 올바른 정의와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기회주의자와 사대주의자가 성공의 표상이라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국법이 흔들린다.

 

한국사학계의 현주소도 위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 강점기시절 친일과 일본유학을 발판으로 식민 역사학계의 대두가 된 이병도는 2,3세대 제자들을 길러서 대학과 국사편찬위, 한국학 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포진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유롭게 역사연구를 하지만, 민족사학은 '유사사학', '사이비사학'이란 매도와 모멸을 당하면서 정부지원은 커녕 자기 돈을 써가며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사학이 정통사학으로 자리 잡고, 민족사학이 사이비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후에 사가들은 한일 병탄이후 100년사를 친일 100년사로 기록할 것이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섰다. 이제는 지난 묵은 티끌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친일과 망각』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②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

식민사학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판하는 학자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살수있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비정해서 한국인의 입으로 일제 식민사학의 고대사 체계를 완성시켜 주었다는 말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 영토를 반도내로 축소하고 고조선의 수도는 항상 평양으로 귀결이 된다.

 

이기백은 고조선이 평안도 일대의 작은 소국이 아니라 만주와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땅이 넓다고 강대국이라는 논리는 낡은 역사관이라며 영토가 광대했던 고조선을 오히려 비판을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매국, 이적행위는 그 동안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그 뿌리는 물론 식민사학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받은 역사 교육은 조선총독부 시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고조선은 미개한 사회라고 가르친 반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한사군은 찬란한 역사로 가르쳤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학자들이 국민들의 세금을 독식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사학자들은 주로 국고로 운영되는 서울대와 교원대,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 역사재단 같은 국가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이기동이다. 동북아 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라는 정책 목표로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그런데 2012년 경기도 교육청 소속 역사 교사 17명이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라는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단군 사화를 고조선 개국 신화는 여전히 신화적 범주에 속하며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자명하다며 서술 내용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었다.

뿐만 아니라 간도협약이전에 간도가 우리 영토에 편입된 사실이 없다. 백두산 경계비는 국제법적 인식이 등장하기 전이라 내용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순사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앞장서서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고문하던 한국인 앞잡이들의 행태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북아 역사재단은 일본학자들의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았다고 언론에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를 주목하는 학자와 민중 인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한사군은 버젓이 한반도 내로 기술을 해놓고서 말이다.

그래서 한사군이 만주 서쪽에 있었다는 견해가 어디 있냐고 따지자 말 바꾸기를 시도했다.

이런 기관에 연간 수백억의 국민 세금이 지원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냥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 동북공정의 한국 지부이자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의 국내 전초기지라고 보면 정확하다.

동북아 역사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김용덕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출신이며, 2대 이사장 정재정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출신이며, 3대 이사장인 김학준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출신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4대 이사장은 김학준 이사장의 제자로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현대일본학회장을 한 지일파로서 김호섭 이사장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별위원회가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편찬심의회 수당 지급 내역'에 따르면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 교육부가 임명한 16명의 편찬심의위원은 국정교과서 심사수당 5465만원을 받았다.

김학준은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만주쪽이 다 우리가 지배했던 땅이었다. 이것을 강력히 부르짖은 사람은 5공이었습니다. 5공이 그걸 장려를 했어요. 왜냐하면 쟁점을 돌리려고 애국심에 호소하고 5공이 전적으로 그것을 부채질 했는데 그때 그것에 편승했던 사람들은 학계에서 지금 얼굴을 못 들고 다닙니다.”

김학준의 전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김학준이 5공 민주화 운동을 한사람으로 오인할 것이다.

그러나 김학준은 5공 시절 12대 민정당 소속 국회위원이었다. 이때 민정당 총재가 전두환이었는데 그 당시 전국구 의원이었다. 자신을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지명해준 전두환에게 갑읍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던 김학준이 5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후안무치란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대주의 유학자나 일제 식민 사학, 서구사대주의자들이 먼저 없애고 싶어했던 대상은 단군이었다.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에서 왔다는 箕子기자를 우리 민족의 시조로 삼고 싶어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조직적으로 말살하고 신화로 전락시켰다.

동북아 역사 재단를 비롯한 한국의 식민사학자들도 단군을 말살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이런 식민 사학자들이 해방후 깨끗이 청산되고 상식적인 역사학이 발전했다면 지금쯤 우리는 단군은 말할 것도 없고 고조선이전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조선을 의도적으로 없애기 위해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등이 각기 다른 나라처럼 기록을 했다.

사실 이 나라들은 고조선내의 제후국들이었다. 으레 중국은 한족외에 다른 이민족을 오랑캐로 폄하를 해서 기록을 하고 자신들이 진 전쟁은 아예 빼버리고 승리한 전투는 부풀리는 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교원대 역사교수인 송호정은 이미 골수까지 식민사학으로 가득찬 인물인지라 고대 사료자체를 부인하고 들어간다.

한마디로 역사학의 기본 방법론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한국사의 강역을 축소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물이다.

또한 식민 사학자들의 고질적 병폐는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들이 나오면 오히려 그시대에 기록된 1차 사료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송호정은 단군을 신화라고 규정짓는다. 삼국유사에도 위서를 인용해서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는데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송호정은 단군역사를 신화로 만들고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다. 국민들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말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1차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말투도 아주 단정적으로 기술을 하고 있다.

 

다음 송호정의 글을 보자.

"재야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실재한 역사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오류를 낳고 있다."

그의 논고를 보자.

“단군 조선의 연대는 신화에 나타나 있는 대로를 믿을 수가 없음은 분명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역사학자가 느낌으로 분명하다라고 전제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요, 공상가인 셈이다.

박은식선생은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다”라며 행존 이암선생의 단군세기 서문을 인용했다. 재미 있는 사실은 고조선이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사료근거대로 고고학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초기 청동기 문화의 상한 연대가 서기전 2500년까지 올라간다. 그러자 송호정은 ‘고조선식 동검’이 만주일대와 한반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사실이 식민사학에 큰 위협이란 사실을 느끼고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이 아니라 산융. 동호 등의 북방이민족이 만든 것이라는 논리다. 물론 산융, 동호는 고조선의 다른 명칭이다. 중국에서 으레 고조선을 깍아내리기 위해 오랑캐로 기록을 한 것이다. 그렇건만 송호정은 1차적 사료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이 청동기가 산융, 동호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식민사학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논리이다.

 

침략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정치논리이며 동북공정의 논리로 바라본 정치논리이기에 대한민국은 이 식민사학을 반드시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아무런 1차 사료적 근거가 없는 삼류소설임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부여, 비류, 옥저, 신라, 고구려, 옥저, 예, 맥 등 70여 국의 혈통이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은 중앙에 천자가 있고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대제국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청동기는 10세기, 철기는 서기전 3세기에 중국의 한나라에서 들어왔다고 아무 사료적 근거도 없이 우기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고조선의 제철기술은 서구와 비교할 때 무려 1천년 이상이나 빨랐다. 고조선을 연구할수록 만주일대와 한반도는 물론 산둥반도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식민사학의 앞잡이들은 고조선이 부여, 예맥, 진번 등과 같은 계통의 한 소국으로 대동강 유역에 건국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한중 수교 후 만주 대륙에서 수많은 고조선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슬그머니 중심지 이동설을 내놓았다. 물론 아무런 문헌, 고고학적 근거 없이 나온 이론이다. 창작소설인 것이다.

중국기록에 발조선, 숙신으로 기록된 것은 전부 조선의 명칭이다. 이는 정약용, 신채호, 정인보, 리지린 등이 모두 같은 의견을 기술했다. 그러나 송호정은 고조선을 무조건 축소하고 반도북부내로 쑤셔넣기 위해서 숙신은 여진족이고 고조선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고조선을 전공한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 재직을 하면서 국민세금으로 고조선 역사 말살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국 기관인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그토록 그를 떠받드는 것이다.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가 나오면 사료가 틀렸다고 한다. 『후한서』에는 평양성을 고조선의 수도 왕험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사기열전에는 '위만이 왕험성에 도읍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조선의 옛 도읍에 세운 험독현이 요동군 소속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고조선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이라는 논리는 설 곳이 없다. 또한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樂浪郡故朝鮮國也 在療東(후한서 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括理志)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時朝鮮王滿據之也(사기정의)☞고려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인데 곧 고조선의 땅이다. 浿水療東塞外패수요동새외(사기 조선열전)

☞패수는 요동의 새외에서 나온다. 결국 중국 사료를 종합해보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평양성도 현재의 평양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한국사를 축소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인보다 더욱 우리역사를 반도내로 국한지우고 고조선의 건국사를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국록을 축내면서 한국사 깍아내리기를 하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조선사를 축소시키고 신화를 만들기 위해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모든 작업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한다는 것이다. 국민세금으로 먹고 살면서 정작 행위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강역을 팔아먹는 매국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에서 가야사 복원을 지시하고 그동안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해오던 도종환 의원이 문체부장관으로 지명되자 이들은 본격적 흔들기에 나서고있다. 이번 정권에서 이를 확고히 대청소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