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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②-영고탑진실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 - 영고탑진실
◉ 영고탑 기록이 청나라때 나오므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의 진실
환단고기 위론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영고탑’이 청나라(1644~1911)의 시조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므로,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고 주장한다.

조인성은 『단군세기』의 저자인 이암과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은 고려말 사람이고,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은 조선 중기 사람이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이도학 또한 『만주원류고』의 한 가지 기록을 근거로(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이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라 주장한다.

즉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대 이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료만 가지고 어떻게 그런 섣부른 주장을 한단 말인가.

제주대 명예교수 안창범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오는 영고탑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여 이도학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즉,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特이라 한다.

영고탑은 본래 영고특寧姑特에서 영고태台로, 영고태台에서 영고탑塔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다”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영안의 옛 탑’이라는 뜻이며, 단군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보면 ‘영고탑’을 ‘영안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이익(1681(숙종 7)∼1763)은 『성호사설』에서 ‘영고탑’은 ‘오랄烏剌, 애호艾滸와 함께 동삼성東三省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해자垓字가 깊다’고 하였다.

 

중국문헌에서는 영고탑을 탑이 아니라 옛 지명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其實並不像字面意思那樣是一個塔,而是一個古地名,原位於今黑龍江省海林市,後在公元1666年遷到黑龍江省寧安市。寧古塔是清代寧古塔將軍治所和駐地,是清政府設在盛京(瀋陽)以北統轄黑龍江,吉林廣大地區的軍事、政治和經濟中心,是向朝廷提供八旗兵源和向戍邊部隊輸送物資的重要根據地,也是十七世紀末到十八世紀初,東北各族向朝廷進貢禮品的轉收點,因此寧古塔與盛京齊名《 滿語寫法參見在線滿漢詞典》 , 《寧古塔紀略》,見《續修四庫全書》本

영고탑은 글자의 뜻과 달리 탑이 아니고 옛 지명이다.

원래는 지금의 흑룡강성 해림시에 있다가 뒤에 서기 1666년 흑룡강성 영안시로 옮겼다.

영고탑은 청나라 때 영고탑장군의 치소이며 주둔지로써 청나라 정부가 설치했던 성경(심양)이북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광대한 지역의 군사 정치 경제를 통치 관할하던 중심지였다.

조정에 대해서는 8기병의 군사를 제공했고 국경주둔부대에게는 물자를 수송하던 주요근거지였다.

또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까지 동북지역의 각 민족이 조정에 예물을 바칠 때 거두어들이던  장소였다.

따라서 영고탑은 성경과 명성을 나란히 했다.《만어사전》,《영고탑기략》,《속수사고전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요동이 본래 조선의 고지(故地)이며, 숙신(肅愼)·예맥(穢貊)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 조선에 복속했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오랄(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강역(疆域)임을 모르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위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명실록』을 인용하여 명나라 초기에 ‘영고탑로寧古塔 路’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명칭은 적어도 명나라 초기(1368)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고탑은 원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영고 ‘迎鼓터’란 지역으로 북부여 이후 황폐화 되고 고구려 대진국의 멸망으로 역사기록이 사라지면서 그 유래에 대해 정확이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다만 간신히 이름만 전해지다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맞물려 ‘영고탑 寧古塔’으로 기록이 된 것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민족의 발흥지역으로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내던 영고제천을 지내던 영고터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조 이전에 쓰인 용례가 있다면, 위서론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지 주장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기록이 존재한다.

청조 이전부터 영고대 혹은 영고탑이란 명칭이 존재했다.

중국 문헌에서 ‘명대 초기에 여진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곳을 동해와집영고탑로東海窩集寧古塔路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명대 초기 사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암이 살던 고려말에 영고탑이란 명칭이 통용되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배달과 고조선의 제천행사를 이어받은 부여의 영고迎鼓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16세 위나단군이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44세 구물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렸다고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영고탑’은 원래 탑의 이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탑이 사라지고 지명으로 남았다고 보아야 한다.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이다.

후대에 청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고迎鼓의 원래 의미와 표기법이 잊혀져 영고寧古가 되었고, 우리말의 ‘터’를 특特, 태台, 탑塔 등으로 음사하면서 영고탑寧古塔이란 말로 정착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고탑지寧古塔志』를 보면 “만주어로 6은 ‘寧公’이라 하고 ‘자리[坐]’는 ‘特’이라 하는데, ‘寧公特’ 다른 말로 ‘寧公台’라고 부르다가 점차 ‘寧古塔’으로 불렀다[滿呼六爲寧公, 坐爲特, 故曰寧公特, 一訛爲寧公台, 在訛爲寧古塔矣]”라고 하였다.

우리말의 ‘터’도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特(만주어로 타)’이 우리말의 ‘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역주

 

◉ 寧古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淸)나라 때 지명. 
1653년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을 두었고, 62년 영고탑장군(將軍)으로 고쳤다.

그 뒤 팔기부도통(八旗副都統)을 두었으나, 청나라 때에는 죄인의 유형지(流刑地)가 되었다.

1910년 영안부[寧安府]로 되었다가, 중화민국 이후 닝안현으로 고쳤다. (두산백과)

고조선 1왕조시대 수도 송화강 아사달 (하얼빈), 북부여 발흥지 웅심산. 고구려 발흥지 졸본. 만주일대를 발흥지 삼아서 한민족은 국통을 계승하며 천자국으로서 삼신상제께 천제를 올렸다. 영고는 부여의 삼신제천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