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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진실의 역사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일제는 패망했지만 우리 민족의 온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일본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지배한 미국과 소련은 삼팔선을 그어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공산정권과 자유정권(반공)을 세워서 분할 지배했다.

소련의 영향하에 세워진 북쪽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북한 정권은 기독교 교회가 가진 토지와 재산 등을 몰수했다.

수많은 이북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북한의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밀려 내려왔다. 그들은 수많은 반공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그 유명한 서북청년단도 북한의 박해로 재산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쳐 온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된 단체였다.

월남으로 늘어난 기독교 신도들 덕분에 남한의 기독교 신자 수는 해방 이후에 더욱 늘어났다.

이들 반공 청년단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극렬한 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제주 4.3사건과 1950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때 무고한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아서 수십만명이나 학살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을 했다. 그들의 이념에 반대되는 자들은 좌익시 되었다.

이러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관은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 성향으로 드러났다. 

중세 마녀사냥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노예사냥 및 중남미 원주민 학살이 자행된 이유도 이런 분명한 선악논리로 인해 타문화를 제거 내지는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에는 남한 기독교인들도 한몫을 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의 젊은 남자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된 조직이었다.

기독교와 반공을 외치며 폭력으로 좌익을 탄압하는 반공 청년단들은 당시 남한을 세계 반공 전선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는 미국과 남한 정부에게 아주 훌륭한 도구였다.

이런 이유로 미군과 한국군은 제주 4.3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반공 청년단을 무장시켜 좌익 탄압을 위한 보조 무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 청년단들은 거칠고 난폭한 면이 많은데다 살인, 강간도 서슴없이 자행을 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정치 깡패로 나서면서 국민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래서 훗날 1961년 5.16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구악 일소를 외치자 반공 청년단들은 정권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자진 해산했다. 청년단 중 상당수는 목사가 되어 개신교로 흡수되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이 강경한 반북정책을 옹호하고 북한을 공격해서라도 공산정권을 무너뜨리자는 강한 반공 성향을 보이는 이유도 그들 중 상당수가 반공 청년단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재산(적산)을 미군이 몰수했다가 대부분을 기독교 교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해방 직후, 재산을 급격히 불리면서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말 그대로 기독교에게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보수 개신교계에서 일제 강점기는 하나님의 뜻이며 축복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는 기독교 성장의 토대를 깔아 주었다. 일제 강점기는 그야말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기회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일제 강점기에 대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을 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기독교 부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미국이 적산을 한국의 기독교 교회에 넘겨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일부 기독교 성직자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서 미군과 말이 통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미국의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미군은 한국 기독교에 정보 제공의 대가 겸 이해관계에 철저히 따를 하수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의 적산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1979년 1월 8일 미국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인 리처드 홀부르크는 주한 미국대사인 윌리엄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민주화 시위에 나선다면 그들은 더 이상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이는 한국의 여러 기독교 단체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대가로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약 3년 동안 한국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이 와중에 미군에게 잘 보여 출세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갔다.

특히 미군이 만든 한국군에서는 영어를 잘하고 개신교를 믿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개신교가 강세였다.

한국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때도 바로 미군정 시기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기독교는 또 한 번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미국이 보낸 식량과 구호물자가 대부분 기독교 교회를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분배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옥수수 가루라도 얻으려면 교회로 가서 개신교 종교 행사에 참여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기독교 신자 수는 급증했다. 식량을 나누어 주는 교회에 고마움을 느끼고 또 그런 일을 하는 기독교에 호감이 생겨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해방 직후, 전체 인구의 고작 3퍼센트에 머물던 기독교 인구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증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를 전부 합치면 12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한국 전체 인구인 5천만명의 약 24퍼센트에 해당한다. 인구 대비로 따지자면 필리핀과 동티모르를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한국만큼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는 없다. 지금은 해년 20만명씩 줄어드는 추세다.

 

정리하자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따른 결과였다.

많은 조선인은 세계를 주도하던 강대국인 미국을 동경했고, 그런 미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발달된 문물의 혜택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미국이 믿는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만약 미국이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를 신봉했다면, 지금 한국 곳곳에는 교회대신에 모스크가 가득하지 않았을까?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중국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사상인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유교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자주파 VS 사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