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예수는 없다를 읽고②

진실의 역사

『예수는 없다』를 읽고②


이 책은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접근 하고자 하는 책이다.

율법주의적 믿음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순종, 불순종으로 따지는 것이다.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지면 내가 충실한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순종, 불순종의 잣대로 잴 뿐 아니라 신앙마저 같은 잣대로 재게 된다.

 

조건부적, 이기적 신앙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믿는 자기들에게 복을 만 배나 더하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에 찬송을 드린다. 과연 이런 생각은 온당한 것인가?

주님의 뜻이 강자가 되고 부자가 되는 것인가?

예수님의 기도를 보자.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즉 예수님의 경우처럼 ‘내 뜻을 완전히 비움’이 가능 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성령이 사역한다.

그런데 대개 기도를 할 때 아뢸 것만 죽 나열하고 아멘하는 일방통행식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문제는 이런 신앙태도가 대인관계에서 나타날 때의 문제이다.
만사가 하나님의 뜻이라며 증오심과 공격과 싸움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등에 업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주님의 뜻으로 여기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긴다는 것은 결국 나를 하나님 자리에 앉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곧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 주님의 뜻을 업고 나오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은 스스로 하나님이 된 ‘신들의 전쟁’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돌이나 나무로 새겨진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두고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에서 상대적인 나를 절대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자기 우상숭배’가 얼마나 더 엄청나고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식대로 이해한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내가 내리는 결단은 불완전한 결단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지 말아야한다.

 

하나님의 뜻이란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기다리는 일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무엇이다.

이렇게 얻어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지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남을 공격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지 말고 우선 나 자신에게 적용하여 스스로를 더욱 깊이 살피는 일에 써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 대문에 싸우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내가 죽고 우리사이에 평화가 깃들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뜻 아닌가?

무엇보다도 내 뜻을 함부로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함으로 나도 모르게 나 스스로를 우상화 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성서무오설과 영자축감설은 영원한 진리임을 뒷받침하는 확고부동한 설인가.

 

미국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마커스 보그란 신학자가 펴낸 『우리가 모르던 하나님』이란 저서에서 보그는 자신이 신관이 정립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즉 하나님이 직접 들려주신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나 초기 기독교인이 자 들대로 이해한 바를 적어놓은 것이란 말이다.

 

또한 신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예수“이다.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 했다는 것.

세상의 죄를 위해 죽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기독교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에 동의 할수 없음을 발견한다.

전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느 한가지 종교만을 택해서 그 종교에서만 자기를 알게 하고 다른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몇천년간 암흑속에 방치하셨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논리이다.

그러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 오기전 그러면 구원받은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는 얘기다.

보그는 새롭게 신관에 눈을 뜬다. 즉 신의 초월적 존재와 내재적 존재이다.

 

현재는 성서 고고학과 문헌 비교종교학의 발전으로 예수도 결혼을 하였음이 분명해졌다.

예수님을 이야기 할 때 명심해야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와 구별하는 일이다.

최근 신학계의 동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예수님의 믿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4대 복음서는 역사적 기록이기 보다는 믿음의 기록이다. 객관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쓴 역사문헌이 아니라 ‘신앙고백서’이다.

상당수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역사적 비극중 하나가 예수의 가르침 보다 예수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라고 본다.
신학자가 역사적 예수를 중요시 하고 그 역사적 예수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훌륭한 일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데 까지는 알아보고 그의 삶과 행동과 가르치심과 죽음에서 오늘 우릭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표를 찾는 것이다.

 

예수탄생에 대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은 다르다.

대개 동정녀 탄생설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동서양의 보편적 현상이다.

고대 영웅 신화에서도 영웅의 위대함을 묘사하기 위해서 보편적 사실을 신화적 묘사로 기록을 하였다.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을 했기 때문에 위대한 분이 아니라 위대한 분이었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이 정설이 된 것이다.

동정녀 탄생 사건이 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한다면, 바빌론 왕이나 이집트 희랍 신화에 나오는 영웅이나 로마의 신이 예수님과 동격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도 성관계 없이 옆꾸리에서 나오고 물위를 걷고 적은 음식으로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행한다.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구성된 족보를 열거한다.

누가는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 선지자로 구성된 족보를 만든다.

성령 잉태라면 족보가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마태복음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마1:23)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almah)로 기록하고 있다.

almah는 ‘젊은 여자’란 뜻이다. 결혼을 안한 처녀란 뜻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인 히랍어 번역과정에서 파르테노스(parthenos)라고 오역을 하였다. parthenos는 처녀란 뜻이다.

 

희랍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히랍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신의 아들로 믿기 원했다.

그들의 소원에 따라 예수도 다른 신들처럼 처녀 탄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위하고 예수님을 위해서이지 교회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만유의 주(pantocator,World Ruler)로 보는 것은 로마황제 콘스탄틴 시대에 생겨났다.

삼위일체설도 이때에 정립되었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이 정립된다.

아직도 삼위일체론은 완성된 이론이 아니다.

동방정교에서는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서만 나온다고 한다.

카톨릭과 개신교에선 아들에게서도 성령이 나온다고 보고 있다.

 

이제 인류는 숱한 종교전과 문화충돌을 겪은 진통과정을 넘어 성숙된 신관과 종교관이 필요하다.

이제 신학적 변화를 요약하면 배타주의에서 포용주의를 넘어 다원주의에 귀착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교회의 성공을 교인의 머리수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초등학교 학생 수가 대학원 학생 수보다 많다고 하여 초등학교가 대학원보다 성공적이고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성숙된 신앙인으로서의 독립적 사고, 독립적 믿음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절대적인 확신과 독단은 무지한 자의 특권이다. 우리만 진리를 알고 우리 교회만 진리 교회라는 그 착각과 오만은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특권이다.

인류는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모두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자이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제국주의적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걸림돌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길벗’이라 생각하고 서로의 의견에 성실하게 귀 기울이는 성숙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포스트 모던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원주의적(多元主義的)시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엇이나 자기만, 자기 것만 옳고, 그것만 판을 쳐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치졸한 착각 이었던가 하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와 다른 여러 견해, 여러 주장의 상대적 타당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다원주의적 시각으로 특정 지어지는 세상에서는 어느 한 가지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지배해야 한다고 하는 종래까지의 제국주의적 발상은 설자리가 없어진다.

어느 한나라 문화가 다른 나라나 문화를 지배해야한다는 정치적, 문화적 제국주의는 물론, 어느 한 종교가 다른 종교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종교적 제국주의’도 용납될 수 없다.

 

이광수, 최남선, 김활란, 모윤숙 등이 일제 말기 조선의 젊은이들도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성전(聖戰)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이들마저도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에 기독교만, 혹은 내 교회만, 유일한 참종교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신명을 바치라고 ‘자발적’으로 선전하고 다니는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태목음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온다.

강도에 피흘리는 사람이 쓰러져 있었으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 지나간다.

유대인이 다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그를 구해준다. 그러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누구인가?

그 당시 사회에서 소위 가장 잘 믿노라고 자처하던 정통파 종교인이 아니던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종교란 그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종교가 아니다.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에는 극락을 가지 않겠다는 유마거사 같은 보살과 자비의 실천이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수피의 성녀 리비아의 기도를 느끼면서 올바른 구도자와 종교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김이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면
저를 지옥에서 불살라 주옵시고,
낙원의 소망 때문이라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주님만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제게서 거두지 마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