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예수는 없다를 읽고①

진실의 역사

『예수는 없다』를 읽고


이 책은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접근 하고자 하는 책이다.
그리스도인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성경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로 일점일획의 틀림도 없다는 것.
둘째,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로서 그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셋째,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로서 세상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위해 선교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
넷째, 우리교회에서 가르치는 신학만 유일한 진리라는 것, 특히 역사 비평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글로벌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기독교만 유일한 진리요, 오직 예수만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생각을 벗어나 모든 종교들을 모든 종교와 구원의 길에 함께 동반자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상하구조에서 평등구조로.”
성경에서 당연시하는 노예제도라든지 남녀차별, 장애자차별 및 일체의 인종차별이나 빈부차별 같은 것이 없는 평등사회를 이루는데 노력해야한다.
셋째,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에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넷째, “교리중심에서 깨달음 중심으로.”
다섯째, “죄 강조에서 사랑 강조로.”
여섯째, “육체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일곱째, “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여덟째, “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아홉째, “분열에서 연합으로.”
열째, “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계에는 이웃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옹고집과 독선 때문에 서로 정통파라 주장하는 이들일수록 더욱 사불오열 찢겨 나가고 있다.

성경은 월경을 부정한 것으로 보며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며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야 하고 성차별을 인정하고 있다.

 

다음은 창세기를 살펴보자
창세기 1장과 2장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제사문서는 하나님은 엘로힘이고 야훼문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야훼다.
엘로힘 하나님과 야훼하나님은 이름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각각 천지를 창조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엘로힘 하나님 창세기를 보면 첫째 날 혼돈에서 빛이 생긴다. 둘째 날 하늘이 생기고, 셋째 날 바다와 육지, 그리고 식물. 넷째 날에는 해와 당과 별들을, 제5일에는 물고기과 새들을, 제6일에는 모든 짐승들과 사람을 지으신다. 그리고 7일에는 안식일이다.

 

다음은 야훼 하나님의 창세기를 보자.
삭막하기 그지없는 사망에 야훼가 등장한다. 그러다 땅에서 물이 솟아 땅을 적시자 드디어 창조사업에 착수한다.

손수 흙을 빚어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코에다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니 생명체로 바뀐다. 그는 아담이다.
그런 다음 사람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든다. 거기에는 선악과도 있었다.

그리고 홀로지내는 것을 좋지 않게 보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이브를 만든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두 창세기중 어느 것을 정말로 믿어야 하는가이다.

첫째 이야기에서는 5일에 새들을 6일에 짐승들을 만드시고 나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둘째 이야기는 사람을 먼저 창조하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 짐승을 지으시고 새를 지으셨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어느 쪽 순서를 믿어야하는가? 아무리 상징이라 하더라도 식물이 먼저 생기고 해, 달, 별이 생긴다.

 

노아의 홍수는 진실일까.

도끼나 톱 같은 연장도 없던 철기 시대 이전의 그 시기에 그 큰 잣나무를 자르고 운반하고 판자로 제재를 하고 짜 맞추어 그 많은 동물들을 다 싣고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한 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노아가족 8명이서..

자연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미 지구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다 한 쌍씩 방주에 들어와서 어떻게 여덟 가족과 동물들, 그리고 식성이 각기 다른 그들에게 날마다 먹이를 주었을까, 곰과 호랑이 염소 토끼가 한곳에 얌전하게 동숙을 했을까.

식성도 각각이다. 배안에 이런 식량 저장이 가능한가. 동물들의 배설문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성경은 사실보단 신화로 봄이 마땅하다. 신화를 사실과 역사로 인식하는데서 모순이 일어난다.

한국 기독교인 중 상당수가 단군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단군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한갓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 누구도 가타부타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독교인으로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하는 것만은 확실히 지적할 수 있다.

 

현재 기독교 신학자로서 고집불통의 몇몇을 제외하면 기독교인이 그들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아브라함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이라 간주하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가 실제 사건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브라함은 실제인물 여부를 떠나 그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다.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노자 도덕경에는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신비의 여인.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 끊길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른다.” 하여 도를 ‘여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인의 신비성, 생산성, 개방성, 창조성 등이 남성의 공격성, 진취성, 지배성, 경쟁성보다 도의 본성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남성이어야 하는가.

 

기독교의 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신, 힌두교의 시바신, 중국의 上帝, 한국전래의 하늘님, 등이 별도의 존재가 아니다.

각 종교 문화적 차이로 인해 동일인물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기독교 하나님이 따로 있고 다른 종교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기독교인이 섬기는 하나님과 이웃 종교에서 섬기는 절대 신이 생판 다른 신들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유일신론이 아닌 다신론 내지 단일신관을 받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먼저 버려야 할 신관은 부족신관이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은 어느 특정 민족과 종교에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란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히브리 유대 부족의 민족신관을 글로벌시대에 적용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야훼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를 통해 구출을 계획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모세는 이적의 지팡이를 들고 애굽의 왕를 만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보내라.” 했으니 놓아 달라고 요구한다.

왕은 일거에 거절한다. 애굽왕은 여호와를 알리가 없다. 그러자 여호와는 열 가지 재앙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한다.

우선 애굽에 있는 모든 물이 피로 바뀌는 재앙이었다.

강의 모든 고기가 죽고 거기서 나오는 악취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어서 개구리, 이,파리,우박,메뚜기,우박, 등등 재앙이 계속 된다.

 

그래도 왕은 이스라엘 박성을 놓아주지 않는다. 드디어 열 번째 재앙이 내린다.

애굽 전역에서 처음난 것들, 처음난 자식, 가축,짐 승이 죽게 되는 재앙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에서 제외된다.

그들에게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으면 “개가 그 피를 볼 때 너희를 넘어가리라” 한다. 드

디어 밤이 되자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다.

성경에는 애굽천지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은 그날 밤 모세를 불러 애굽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으니 어서 이 땅을 떠나라고 간청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면 무엇이나 다 주도록 한다.

그들은 떠나면서 애굽인의 은붙이, 금붙이와 의복을 모두 빼앗아가지고 나온다.

도합 2백만이 넘는 유대민족의 대 탈출기였다. 이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에 이른다.

애굽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홍해의 기적이 일어난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손을 바다위로 내밀자 홍해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길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한가운데를 육지처럼 건넌다.

그 뒤를 쫓던 애굽군대가 바다 가운데 이르렀을 때 물이 다시 합쳐져 그들을 모두 수장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주변국가 사료와 너무 어긋나서 유대족의 신화나 설화로 봄이 마땅하다.

즉 구약은 인류 보편적 세계사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유대민족의 여호와일 뿐이다.

그런데도 유대족과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출애굽기를 역사로 고집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

 

현재 고고학의 발굴과 이집트의 사료를 철저히 검증결과 출애굽기에 대한 기록은 언급초차 없고 홍해에 수장되어야할 람세스 2세는 미이라가 발견되어 물에 빠져 죽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성서의 내용은 유대인의 종교적 믿음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 역사가 아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과연 사랑과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동안 이스라엘 백상이 죽도록 고생할 때 야훼는 뭘 하고 있었을까.

꼭 이렇게 무차별한 재앙을 내리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이유 하나로 생명을 구하고 애굽인에 속했다는 이유 한가지만으로 무조건 죽임을 당하도록 하는 이런 극단의 인종차별정책이 도대체 사랑과 공평의 하나님일까?

가나안의 정복의 첫관문 여리고성에서의 대살육과 방화, 아이성에서의 성주민들의 전멸살육, 이스라엘만 좋아하신 하나님이 진정 인류의 하나님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인류의 하나님으로 짙은 가면을 쓰고 둔갑돼 있지는 않는가?

고대 부족사회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관은 그 당시 교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런 신관을 21세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있는가?

 

그 당시 중동 사막을 떠돌던 유목민의 생활과 문화 역사적인 인식은 그들의 신을 그런 식으로 믿고 그 믿는 바를 기록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인의 신앙고백의 기록인 것이다.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神觀, 그들의 눈에 비친 하나님일 뿐인 것이다.

몇 천 년 전 처절한 생존경쟁의 부족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이런 신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신을 모신 것이 아니라 신을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 능해야하는 전투 사령관인 것이다.

또한 자신들을 미워하는 부족에 증오의 신이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는 이 부족의 신관을 뛰어넘어 인류 보편적 신관과 사랑과 박애를 선언했기에 세계종교로 부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예수님은 신약에서는 야훼를 거론한 적이 없다.

야훼는 분명히 말하면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몇 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던 부족신관에 목줄을 매고 살야야 할 필요가 있는가?

진정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시려면 이런 부족 신관을 뛰어 넘지 않고서는 인류공존번영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이런 부족신관을 거부하고 자비의 하나님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런 부족신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아니 죽여야만 한다.

만에 하나 기독교에 이런 부족신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부족신의 망령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류전체의 역사로 오인해선 안 된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여라 한다.” 그 허상을 깰 때 진리와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비교종교학계의 대가 오강남 교수의 명저들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