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진실의 역사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한국에는 어찌 보면 진정한 보수가 없다.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주세력은 친일파였고 그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내내 친미주의자로 전향되었다.

일본은 자신의 고유정신에 기초하여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고유문화에 기초해 선진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우리의 전통가치를 멸시하고 배척하였다.

외세를 등에 업은 사대주의 세력들은 우리 전통가치를 미신과 근대화란 미명하에 쌍그리 부셔버렸다.

정의보다는 개인적 시세의 이로움에 밝은 이들에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묘청의 난 이후 사대주의자들이 천년 역사의 대권을 잡으면서 우리고유의 정신문화, 역사문화는 무시되고 처절히 파괴되고 말았다.
  
일제 침략기를 거쳐 해방이후 한국의 주요 권력을 잡은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친일행위를 철저히 숨기고 조선인 800만이 학살된 일제시대를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우리선조 8백만이 무참히 살육되고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해방된 조국에서 왜 그들의 역사학을 고수하려하는가.

자신의 민족을 무능하다고 비하하고 가해자를 찬양하는게 말이 되는가.

이는 자기 집안에 도둑이 들어서 강제로 훔쳐간 것을 재산을 간수 못해서 뺏겼다고 하는 것과 같다.

 

뉴라이트는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을 하기까지 한다. 그도 그럴만하다. 역사와 전통가치가 파괴된 한국인에게 외세 식민사대사상이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기때문 아니었겠는가. 한국사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외세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한국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지금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일제에 의해 한번 죽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지만 부일세력이 주권을 잡으면서 오히려 정부의 위정자들에 의해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들의 명예와 신원은 아직도 복원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이런 나라에 위기가 온다면 누구나 나라를 위하는 것보다는 기회주의자가 되어 매국노 편에 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란 것을 국가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의를 바로 세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근원적 사건은 단재 신채호의 지적처럼 묘청의 난 이후 유교 사대주의자들이 국권을 쥐면서 우리 스스로 유교이념에 어긋난다고 한민족 정통역사와 문화를 이단과 사문난정으로 몰아버렸기 때문이다.

유교 국시인 조선시대 세조, 예조, 성종 때는 사서수서령이 내려지고 우리 고유사서를 소장하면 목을 벤다고 왕명을 내렸으니 누가 우리 역사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조선중기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친명 사대사상은 더욱 고착되고 이 사대주의자들이 결국 나라를 일본에 파는 매국노가 된다.

 

결국 명이 강하니 명에 붙었다가, 일본이 강하니 일본에 붙고, 미국이 강하니 미국에 붙으면서 물타기로 천년의 권력을 누리면서 강건한 선비정신의 국풍파 민족주의자들을 정치적 정적으로 몰아서 숙청한 것이다.

사대파와 국풍파의 천년전쟁 중이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장 정채산의 명언처럼

"나는 다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입니다.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 위에 올릴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독립군은 시세의 이로움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쉬운 길을 선택했어도 됐을 것이다.

남들이 왜 그리 험난한 길을 가냐고 할 때도 그들은 그런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안중근의 명언인 見利思義처럼 말이다. 이익을 볼진대 의로운지 생각을 하라.

그러나 친일파는 그렇지 못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국난의 위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얼룩진 반역의 역사를 매듭 짓고 고유의 민족역사정신에 기초한 민족 대화합과 한민족 통일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사대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영원히 사대주의를 지향할 수는 없다.

이제 100년의 일제의 잔재를 떨고 분연히 일어날 때이다. 결국은 자주 독립국가로서 역사와 문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진실의 역사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고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시대가 개막되었다.

이어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그 당시 국제적인 정세를 보아 한민족의 운명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3년간 한국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분단은 더욱더 골이 깊어져 쉽게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현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친미적인 단독정부를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 민중으로부터 가로챈 과거 일본인 재산을 고스란히 친일파와 이승만 정부에 넘기게 된다.

친일 경력을 소유하고 있던 대다수 친일파들이 해방 후 골수 친미파로 전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였을 적에는 한결같이 열렬한 반미투사로 활약하던 자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 정부 수립과정에서 가장 큰 과오는 친일 매국노 청산을 하지 않고 등용함으로써 후에 한국사가 불의의 역사가 전개되도록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기득권을 획득하면서 오히려 친일역사를 옹호하고 합리화해갔다.

특히 역사부분에서는 친일 식민사관은 세계보편주의 사관으로 둔갑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학자들의 역사관은 “국뽕”이나 “환빠”라는 모멸을 당하면서 사이비 역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비방하는 재야사학•민족사학에서도 환국•배달의 역사까지 교과서에 들어가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사료나 유물 검증이 가능한 단군조선사는 복원해서 가르쳐야 한다.

특히 단군조선에 대한 사료는 충분히 고증이 가능한데도 오히려 단군조선을 고증하는 사료나 유물이 나오면 이들은 상투적으로 “학계에서 교차검증결과 위서나 위증으로 판정 났다.” 라고 확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언론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

이들이 사료를 부정하는 방법은 유물고증이라는 방법인데 그 유물도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그 시대 유물이라는 확실한 고증도 되지 않은 것이 부지기수임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제국주의 친일사관이 더 세계주의 사관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 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미,소,중,일 같은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고유의 역사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역사관을 정립했던 것일까.

유대인들이 인구수는 적어도 전 세계의 모든 분야를 장악한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바로 그들의 뿌리역사를 철저히 가르치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 고난을 이겨온 조상들의 삶과 지혜, 신앙의 힘에서 희망을 품고 미래를 열어나가기 때문이다.

과거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통일한국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위해서 반드시 식민역사관은 반드시 털어내야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진 주권국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식민사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과거의 강대한 역사와 찬란한 역사가 21세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의식 속에는 통사적 역사가 단절돼 있다. 이런 자들이 역사학자를 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고 뿌리 없는 식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들은 자신들의 식민사관이 무너질까봐, 자신들만의 학문 카르텔을 형성하고 온갖 언론매체를 통해서 민족사학을 죽이기에 여념이 없다.

『아시아 이상주의』 저자인 이홍범 박사는 이런 한국의 식민사학계를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한국은 한국 사람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상당수 식민사학자들이 왜 사사건건 한민족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신화고 위서다 ’라고 합니다. 국수주의라고 말합니다.

자기 민족의 역사 파괴를 합니다. 유대인은 역사정신 권력을 가지고 위대한 유대역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그러기 위해서 대학에서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권력, 독립을 가르치는 길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사학은 친선 한일을 통해 간접, 직접적으로 역사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강단의 식민사학계열을 연구해보면 한중일간의 학문교류, 한일 친선, 한중 친선, 종교사랑 실행, 아름다운 용어를 사용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우리 학계와 역사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강단의 식민사학 학계가 얼이 빠져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국이 되려면 역사가 독립이 돼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지배하지 못하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강단식민사학계가 그동안 뭐를 했냐. 이겁니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국가 민족의 번영의 문제이기 때문에 용기 있는 역사혁명의 횃불이 필요합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친일반미투사에서 친미분자로 변신하는데까지는 그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필요치 않았다.

익히 알다시피 해방직후 친일파들은 그들의 엄청난 죄과로 인해 민중의 엄청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은 파산 상태에서 이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미군의 진주덕분이었다.

미군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친일파들을 건져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미국의 반공노선에 적극 협조하면서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세탁하게 된다.

 

오늘날 뉴라이트는 김진홍 목사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기위해 보수기독교 단체를 주동으로해서 결성한 단체다.

일제강점기가 “하나님이 준 축복이다”라고 하여 오히려 김구, 안중근, 신채호, 윤봉길,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제국주의 질서를 흔든 좌파세력 내지 테러리스트로 비하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조국은 일본이었던가 보다.

오직 자신들의 논리와 다르면 빨갱이와 좌파로 모는 극열분자들의 뿌리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민족반역자들이었던 이들이 해방 후에 친일 청산이 되기는 커녕 반공노선에 합류하면서 수많은 민중과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좌파로 몰아서 숙청하고 이승만 정부의 개국공신으로 둔갑을 했다.

이들은 오로지 사리사욕에 의해서 미국을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들을 계속 자신들의 주위에 거느린 채 충성스런 하수인으로 부려먹기 위해 이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적당한 권세와 부를 안겨다줌으로써 이들을 구워삶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서로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이로부터 부정부패가 이들 매국노 집단의 본격적 속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권력 있는 자리는 미국으로부터 던져지는 온갖 특권을 가장 손쉽게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정부패와 권력이 결부되어 출세를 위한 경쟁이 더욱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장기집권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은 이러한 부도덕성을 바탕으로 했기에 당연히 온갖 불법과 사기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정의 세력에 대한 폭력 깡패의 고용과 유권자 매수가 서슴지 않았고, 유세장은 폭력배의 기습을 받아야 했다. 자신들의 부패와 불의에 항거하는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교사한 운동이라고 매도를 하였다.

이승만은 시민들의 불의에 대한 항쟁을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기회를 주는 것이니 거기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신의 잘못은 고칠 생각이 없었다. 항상 잘못은 민중의 몫이었다. 폭력으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고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폭발을 하자 미국은 표면에 드러난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기로 작정하고 이승만의 사임을 종용한다.

이승만 정권에서 오직 침묵과 굴종만을 강요받았던 이 땅의 민중들은 얼어붙었던 가슴을 뜨거운 투쟁의 열기로 녹이며 저항의 기세를 높여갔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유와 인권을 향유하는데에는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민중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반성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과거가 어찌 되었던 한국현대사가 걸어온 길이었다. 한민족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역사의 인물도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보는 성숙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교훈 삼아서 미래에는 정의의 역사를 지향해야 한다.

역사가 플럼J. H. Plumb은 『과거의 종말The Death of the Past』에서 “과거의 착취와 구속력에 대한 해방 선언이 과거의 종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왜곡된 과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바로잡힐 때, 그리하여 진정으로 과거의 종말이 올 때, 오늘의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바르게 보고 희망찬 미래를 창조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유사역사학vs.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도종환 의원

진실의 역사

유사역사학 vs. 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인터뷰들을 인용)

 

1. 도종환 의원을 유사역사학 신봉자로 몰아부치는 목적은?
▷ 도종환 반대세력이 노리는 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교과서 국정화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와 연관된 한국사 정통성과 대한민국 정통성을 통합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을 지닌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2. 동북아역사지도는 도종환 의원의 압력 때문에 취소되었나?
▷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근본 목적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양대 역사 침탈, 즉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사군을 지금의 평양으로하고, 독도를 빼버림으로써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철저히 유린하였기에 동북아역사재단 내부 재심사 결과에 의해 폐기된 것이다.

3.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다?
▷ 국가주의는 국가권력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희생이 전제된다는 관점이라면, 민족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주체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근대사의 동력은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독립운동을 우리가 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데 민족주의가 아니면 통일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다.


4. 유사역사학의 굴레를 씌워서 몰아내기
▷ 역사학의 본질은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데 있다. 다양한 해석은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역사학의 특징을 부정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 독재다.

국민들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학자들이 강요 할 수 없는 시대가 돼 버렸다. 그런데 자기네들 이론을 반대하면 ‘환빠’로 매도한다.

특히 이덕일씨 주장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반발이 도종환 의원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5. 한사군 평양설은 정설이다?
▷ 한사군 연구는 끝난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서로의 학설을 존중하면서 격조 있게 연구를 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 본다.

고대사의 일부 연구자들이 한사군 연구는 국내설로 귀착되었다는 주장은 '역사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역사학 자체를 부정하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양설이 다수설로 볼 순 있다. 그러나 정설이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조선후기 영조대의 『동국문헌비고』에 한사군의 영역이 요동까지 뻗쳤다고 나와 있는데, 관찬 사서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설이었다는거다.

패수 압록강설을 주장하지도 않은 정약용을 내세워 한사군 국내설을 강화 하였지만, 정약용은 정작 패수 대동강설 주창자였다. 정약용의 주장대로라면 한사군 국내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6. 단군을 인정하지 않는 주류사학
▷ 역사학의 기본은 민족의 근원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한다. 학계 주류는 ‘고조선 국내설’을 주장하고 단군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군을 인정하지 않으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대한민국은 현대에 새로 출발한 국가에 불과하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진보적’ 역사학은 남북통일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지 퇴행적 역사관이 아니다. 이는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으로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7. 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 고대사 하는 분들을 막을 세력이 국내에 전혀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걸린 거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다고 하니까 이들이 겁을 먹은 거다. 혹시 자기네들한테 불이익이 될까봐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난 거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를 언급하자 그것도 역시 두려움이 있는 거다. 자기네들 주장이 권력에 의해서 제거될 두려움이 있는 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틀에 갇힌 주류 강단사학이 가야가 포함된 ‘4국시대’의 도래로 위기에 처한 셈이다.

학문 용어로 성립될 수 없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안(정준)씨 등의 행위는 마치 일제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대종교를 ‘유사종교’라는 라벨을 붙여 탄압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진실의 역사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일제는 패망했지만 우리 민족의 온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일본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지배한 미국과 소련은 삼팔선을 그어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공산정권과 자유정권(반공)을 세워서 분할 지배했다.

소련의 영향하에 세워진 북쪽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북한 정권은 기독교 교회가 가진 토지와 재산 등을 몰수했다.

수많은 이북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북한의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밀려 내려왔다. 그들은 수많은 반공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그 유명한 서북청년단도 북한의 박해로 재산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쳐 온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된 단체였다.

월남으로 늘어난 기독교 신도들 덕분에 남한의 기독교 신자 수는 해방 이후에 더욱 늘어났다.

이들 반공 청년단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극렬한 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제주 4.3사건과 1950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때 무고한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아서 수십만명이나 학살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을 했다. 그들의 이념에 반대되는 자들은 좌익시 되었다.

이러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관은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 성향으로 드러났다. 

중세 마녀사냥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노예사냥 및 중남미 원주민 학살이 자행된 이유도 이런 분명한 선악논리로 인해 타문화를 제거 내지는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에는 남한 기독교인들도 한몫을 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의 젊은 남자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된 조직이었다.

기독교와 반공을 외치며 폭력으로 좌익을 탄압하는 반공 청년단들은 당시 남한을 세계 반공 전선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는 미국과 남한 정부에게 아주 훌륭한 도구였다.

이런 이유로 미군과 한국군은 제주 4.3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반공 청년단을 무장시켜 좌익 탄압을 위한 보조 무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 청년단들은 거칠고 난폭한 면이 많은데다 살인, 강간도 서슴없이 자행을 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정치 깡패로 나서면서 국민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래서 훗날 1961년 5.16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구악 일소를 외치자 반공 청년단들은 정권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자진 해산했다. 청년단 중 상당수는 목사가 되어 개신교로 흡수되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이 강경한 반북정책을 옹호하고 북한을 공격해서라도 공산정권을 무너뜨리자는 강한 반공 성향을 보이는 이유도 그들 중 상당수가 반공 청년단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재산(적산)을 미군이 몰수했다가 대부분을 기독교 교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해방 직후, 재산을 급격히 불리면서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말 그대로 기독교에게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보수 개신교계에서 일제 강점기는 하나님의 뜻이며 축복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는 기독교 성장의 토대를 깔아 주었다. 일제 강점기는 그야말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기회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일제 강점기에 대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을 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기독교 부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미국이 적산을 한국의 기독교 교회에 넘겨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일부 기독교 성직자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서 미군과 말이 통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미국의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미군은 한국 기독교에 정보 제공의 대가 겸 이해관계에 철저히 따를 하수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의 적산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1979년 1월 8일 미국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인 리처드 홀부르크는 주한 미국대사인 윌리엄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민주화 시위에 나선다면 그들은 더 이상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이는 한국의 여러 기독교 단체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대가로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약 3년 동안 한국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이 와중에 미군에게 잘 보여 출세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갔다.

특히 미군이 만든 한국군에서는 영어를 잘하고 개신교를 믿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개신교가 강세였다.

한국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때도 바로 미군정 시기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기독교는 또 한 번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미국이 보낸 식량과 구호물자가 대부분 기독교 교회를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분배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옥수수 가루라도 얻으려면 교회로 가서 개신교 종교 행사에 참여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기독교 신자 수는 급증했다. 식량을 나누어 주는 교회에 고마움을 느끼고 또 그런 일을 하는 기독교에 호감이 생겨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해방 직후, 전체 인구의 고작 3퍼센트에 머물던 기독교 인구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증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를 전부 합치면 12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한국 전체 인구인 5천만명의 약 24퍼센트에 해당한다. 인구 대비로 따지자면 필리핀과 동티모르를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한국만큼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는 없다. 지금은 해년 20만명씩 줄어드는 추세다.

 

정리하자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따른 결과였다.

많은 조선인은 세계를 주도하던 강대국인 미국을 동경했고, 그런 미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발달된 문물의 혜택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미국이 믿는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만약 미국이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를 신봉했다면, 지금 한국 곳곳에는 교회대신에 모스크가 가득하지 않았을까?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중국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사상인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유교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자주파 VS 사대파』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진실의 역사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친일 후손들은 선대가 물려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에 힘입어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선대의 신산한 삶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의 할아버지인 친일파 이명세 등에 의해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쫓겨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창숙 선생의 첫째 아들 김환기는 아버지와 함께 상해 망명길에 올랐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불과 19살이었다.

둘째 아들 김찬기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몇 차례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이후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망명하였으나 망명 도중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 31살이었다.

셋째 아들 김형기는 다행히 살아남았으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고 생활이 곤궁했다.

말년의 김창숙 선생이 이명세 등에 의해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축출당하고 여관 방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때, 셋째 아들 김형기가 자동차 운전사를 하며 부친을 부양했다.

이 당시 세상 사람들이 심산의 아들이 운전사 노릇을 한다고 비웃자, 김창숙 선생이 아들을 위해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두 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셋째 아들에게 조차 변변한 경제적, 사회적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었으리라.

 

아들에게
내 아들이 차를 끈다고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고 조롱하네.
다시 그 아비를 비방하여
거짓 꾸밈 잘하게
자식을 가르쳤다 이르네.
비웃고 헐뜯은들 무엇이 상심하랴.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라.
가정의 생계를 돌보는 이 없다면
하루아침 당장에 망하고 말 것이라.
옛적에 연암(燕巖)공은 전을 지어 기렸다.
예덕(穢德)선생을 너희들 조금도 슬퍼하지 마라.
천한 직업 그것이 바로 천직(天職)이니라.

 

《독립운동가 후손은 4분의 3이 월 소득 200만원 이하》
한국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조사를 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모임인 광복회 회원 6,381명 전원을 대상으로 생활 실태 조사를 한 것이다.

조사 응답자는 1,115명으로, 뉴스타파가 조사한 친일 후손의 전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조사에는 독립 유공자 1대가 58명, 자녀 대인 2대가 469명, 손자 대인 3대가 509명, 증손자 대인 4대가 53명 참여했다.

 

독립 유공자 가족들은 ‘사회적 무관심’과 ‘경제적 빈곤’을 토로하고 있었다.

복수 응답으로 ‘과거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44.6%가 ‘사회적 무관심’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러나 33.9%가 ‘생활의 어려움’을, 33.3%가 ‘연금 승계가 끊길 우려’를 지목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기에 이런 설문 결과가 나왔을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월 개인 소득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50만원 미만이 10.3%, 50~100만원이 20.9%, 100~200만원이 43%였다. 2015년 3분기 기준으로 2이상 평균 소득이 월440만원 남짓이고 4인 가구 최저 생계비가 166만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실질적 소득을 따지고 보면 빈곤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한 자산 역시 국민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70% 이상이 자산 2억원 미만이었다. 다산 5천만원 이하가 28.3%였고, 5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21.1%, 1억원 이상 2억원 미만이 20.9%였다. 2013년 기준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가구당 순자산 3억 3,085만 원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친일 후손 1,177명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 그것도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다.

이같은 결과는 주관적 계층인식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응답자 중 자신이 ‘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이 73.7%을 차지했다.
친일 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조적인 인생행로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학력의 차이였다.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학력이 중졸 이하인 사람이 40%나 됐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 4.7%, 초졸이 22.8%, 중졸이 12.8%였다.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25.7%로, 전체적으로 고졸 이하가 3분의 2이다. 66%에 달한다.

 

친일파 후손 1,177명 중 학력 전수 조사에서는 서울대 출신이 268명으로 22.8%였다. 연대는 68명, 고려대 51명으로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1,177명의 친일 후손 중 유학을 다녀온 비율은 27%였다. 이 수치는 일반인의 유학비율과 비교하면 150~300배에 이른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이들은 부가 대물림 되었다. 당대 누구 못지않은 지식인들이었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배움의 가치를 잘 알았을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지하에서 자신의 후손들과 친일파의 후손들을 비교해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정의가 구현될 리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는가.

그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 속에 매국행위를 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가르쳐 온 것밖에 더 되는가.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정부가 건국 되었음에도 국가에서 예우는 못할망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렸다. 

친일파와 매국노가 성공하는 세상이라면 누가 올바른 정의와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기회주의자와 사대주의자가 성공의 표상이라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국법이 흔들린다.

 

한국사학계의 현주소도 위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 강점기시절 친일과 일본유학을 발판으로 식민 역사학계의 대두가 된 이병도는 2,3세대 제자들을 길러서 대학과 국사편찬위, 한국학 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포진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유롭게 역사연구를 하지만, 민족사학은 '유사사학', '사이비사학'이란 매도와 모멸을 당하면서 정부지원은 커녕 자기 돈을 써가며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사학이 정통사학으로 자리 잡고, 민족사학이 사이비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후에 사가들은 한일 병탄이후 100년사를 친일 100년사로 기록할 것이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섰다. 이제는 지난 묵은 티끌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친일과 망각』

친일파와 독립투사

진실의 역사

친일파와 독립투사
한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 사대파는 바로 친일파였다.

이들은 조선에 지켜야 할 좋은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유일한 살 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선진국인 일본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도왔으며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열렬히 일본에 충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친일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 동화되기를 거부했으며,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주적 조선인만의 나라를 만들려 일본과 친일파와 맞서 싸웠다.

그들이 바로 독립투사였다.

 

500년을 넘게 이어져 온 조선왕조는 1910년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두고 여려가지 주장이 있으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구한말 조선 무렵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 일본과 결탁한 친일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대적인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계몽기관이자 언론사로 알고 있는 ‘독립협회’‘독립신문’은 사실 일본과 결탁한 친일조직이었다.

애초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자체가 일본 외무대신과 주한 일본 공사같은 일본의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단체였으니 짐작할만하지 않은가?

일본이 제공한 자금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일본을 열렬히 찬양하는데 열을 올리며, 조선인들 사이에 친일여론을 퍼뜨리는데 주력을 다했다.

고종34년(1897년) 114호자 《독립신문》에는 “사악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난 것은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베푼 은혜”이며,

고종35년(1898년) 별호에는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라는 논설이 실렸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국 국방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2척의 군함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려는 계획을 세우자 “세계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 무엇하러 군함을 들여 오는가? 군대는 그저 도적떼나 평정할 정도의 소규모만 있으면 된다”라고 극렬히 반대했다.

《독립신문》의 논지대로라면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쓸만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고, 자주 국방을 위한 국비 증강도 하지 말아야 했던 셈이다.

아울러 독립신문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의병들을 가리켜  비도匪徒(도적떼)라고 모욕을 하는가 하면, 조선 침략에 열을 올리는 이토히로부미와 내통하던 이완용을 불세출의 천재이자 애국자라고 찬양을 했다.

이런 《독립신문》이야말로 친일 사대주의 언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립협회 역시 친일 행각으로는 독립신문에 뒤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일본과 대립하자 독립협회는 반러시아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종황제를 압박했다. 

고종이 러시아의 협조를 받아 4000명의 장교와 3만명의 병사로 조직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조선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의도를 품은 일이 아니냐며  협박을 했다.

독립협회는 연일 러시아를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고종을 몰아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말로는 ‘독립’을 내세웠으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사실 일본에 종속되기를 원한 위선적인 친일파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보낸 첩자이면서 고종의 측근이었던 배정 같은 경우도 있었다.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아버지가 역모에 휘말려 죽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그의 첩이 되면서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조선을 증오하여 반드시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실행하게 된다.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상류층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친분을 쌓고 뛰어난 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서 그의 측근이 되는데 성공한다.

조선 지배층 깊숙이 침투한 배정자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고급 정보들을 전부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고종이 일본의 손길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던 일이 도중에 무산된 것도 배정자가 그 사실을 알고 일본 공사관에 정보를 전해주어, 일본이 손을 써서 고종의 망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려 밀사들을 보냈던 헤이그 밀사사건도 배정자의 밀고로 인한 내부 기밀 누출로 인해서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배정자처럼 자발적인 친일 사대 매국노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친 일진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약 40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일진회는 독립신문처럼 친일 여론을 퍼뜨리는 한편, 회원들에게 군사 훈련도 시켰는데 이는 일본군을 도와 항일 의병들과 싸우는 전투에 적극 가담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들이야말로 구한말에 활개치던 가장 악독한 친일 사대 매국노들이었다.

일본에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동참한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아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면서 "장차 50년 후, 일본에 조선인 출신 재상이 나올 줄 누가 알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게 조선 권력층 내부에 일본과 내통하는 친일파가 가득 했으니, 조선이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항일 의병들이 무기들 들고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고 해도, 친일파가 그 정보를 모조리 일본에 보고하는 상황이니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정신병자나 패륜적인 악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형세의 이익을 계산한 이들은 “조선은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 빨리 망해서 일본에 흡수하는 일이 옳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확신범들이었다.

구한말 배웠다는 상류층 위정자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초들은 의병으로 거사를 하여 독립투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깨어있는 지식인 중에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지사들도 많았다.

또한 무지렁이 민초들 중에도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하여 친일을 서슴지 않고 한 자들도 많았었다.  

 

오늘날 친일파와 가장 닮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은 이래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 하는 대로 본받아야 한다”라며 세계주의를 가면 쓰고 자국 혐오와 사대주의적 발언을 일삼는 지식인이다. 만약 이들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했다면, 아마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열렬한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까. 『자주파 VS 사대파』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한국 근현대사

진실의 역사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한국 근현대사
한국의 역사, 한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큰 흐름으로 자주파와 사대파의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자주파는 한국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주독립과 국가발전 및 번영을 성취할 수 있으며, 한국의 전통 역사와 문화에서 세계문화를 이끌어갈 훌륭한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사대파는 한국이 주변 강대국에 비해 너무 뒤쳐져 있어서 한국인 스스로 아무것도 해내기 어려우며, 한국의 역사 문화와 가치를 국수주의로 매도하거나 비합리적인 미신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자주파로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나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을 들 수 있다.

반면 사대파로는 한글 창제에 반대한 최만리나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갖다 바친 친일파들이 있다. 대개 자주의식이 약하다 보면 쉽게 외세에 기대어 영달을 꿈꾸지만 대개 남에게 기댔던 인물치고 뒤끝이 좋았던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제 일은 제가 스스로 하여야 하느니라>
하루는 한 성도에게 '무엇을 사 오라.' 명하시거늘 그 성도가 다른 사람을 대신 시켰더니 일러 말씀하시기를 "그 노고(勞苦)의 대가는 그 사람이 받을 것이니라." 하시니라.
선천은 남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바람에 망하나니 너희들은 하다못해 방 벽에도 기대지 말라. 남의 덕 보기를 바라지 말라. 남의 은혜를 많이 입으면 보은줄에 걸려 행동하기가 어려우니라.
낭패(狼狽)란 짐승이 외발이기 때문에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하여야 행보(行步)하게 되나니 남에게 의지하면 낭패를 당하리라. (道典8:27)

 

사대파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대파도 시대에 따라서 유익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고정된 무생물이 아닌 생물이기에 상황에 따라 천변만화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대파보다 자주파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만약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을 해내겠다는 사람과 남의 힘을 빌려 편하게 이루겠다는 사람이 겨룬다면, 사람은 당연히 굳건한 자립정신을 가진자를 응원할 것이다.

 

역사 전체를 살펴보건데 한국의 사대파, 즉 사대주의자들은 대개 똑똑한듯 했지만 무지했다.

조선시대의 친명 사대주의자들은 명나라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은 일본이 패권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이 영원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명나라는 고작 300년 만에, 일본은 겨우 36년 만에 패권을 잃고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남긴 후유증은 대한민국 곳곳을 병들게 하였다.

친일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건국세력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세력이 매국 사대파에 패한 것이다.

이런 사회 구조는 정의가 상실된 한국사회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기는커녕, 사회 각 분야에 이들이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일제가 뿌리고 간 식민사학의 독버섯에 마취되어 자국의 역사문화를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사대주의자들은 항상 스스로 일어나려는 노력보다는 강대국에 기생하여 자국 문화를 깍아내리고 강대국에 아부하며 부귀영달을 누려왔다.

조선에, 명에 기대어 권력을 농단하던 노론계열 인사들은 일제 강점기가 되자 친일매국세력의 주류가 되어 일본에게 잘 보이려고 경쟁적으로 안달을 하였다. 후에 다시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들어서자 반공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이번에는 친미를 외쳤다. 이들에게 정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부귀, 출세 이외에 가치관은 없는 것이다.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까지 최순실 사태에서 이들이 보여준 행동은 비정상적일 정도다.

한국 정치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태극기라면 몰라도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미국이 없다면 한국의 1만년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단군 이래 수천년간 찌질이 국가이던 한국이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기독교국가인 천조국 미국의 원조로 국가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맹종적 사대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2천년 전 거의 부족국가이던 찌질이 한국이 중국 한사군의 지배를 받으면서 철기문화가 전래되면서 고조선이 급속히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시대만 달라졌고 사대의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달라졌을 뿐 똑같은 논리가 아닌가?

 

사실 조선이 일제에 넘어간 건 미국이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서 일본에게 넘겨서 일제 강점기 시대가 열렸던 사실은 알고 있는가? 

1905년 7월 미,일간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은 필리핀을 점유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점유하도록 밀약을 하였다.

미국의 승인을 받은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이완용도 맨 처음에는 친미주의자였다. 그리고 친일주의자로 바뀐다.

 

지금 국제정세의 흐름을 보면 초강대국인 미국이 단일 패권을 빠르게 상실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의 사대파는 여전히 미국이 영원하거나 앞으로 최소한 100년 동안 세계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라 장담을 한다.

정작 미국에서는 중국의 급부상을 막지 못하다면, 2030년이 되기 전에 경제력에서 미국이 중국에 밀리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동안의 역사를 되돌아 보건데 한국의 사대파는 지독하게도 무능했다.

조선시대의 친명 사대주의자들은 “나라는 망해도 명나라를 돕자!”라고 외쳤으나 그토록 숭배하던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일제 말기 친일파들은 자기 재산을 털어서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로 충성을 했으나 일제의 패망을 막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사대파, 즉 미국을 맹종하는 친미 사대주의자들도(합리적 사대주의야 문제가 없지만) 미국의 쇠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역사에서 사대파들은 자신들이 떠받들던 종주국이 망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무지하고 무능한 집단이 한 나라의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을 때 이를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주파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지나친 자주적 성향은 상대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지나친 독선적인 주장은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을 일으켜서 국가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대파라고 해서 항상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광적인 친명사대파는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고, 지금의 맹종적인 친미사대파도 대한민국을 지나친 흑백논리로 이해하고 있다.

자신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에 대해 적대적 선악논리를 적용하여 종북좌빨로 몰아붙이면서 대한민국을 좌우로 갈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외세인 당나라 힘을 끌어들여 통일과 번영을 꿈꿔온 신라의 통일은 결국 북쪽에는 대진국(발해)과 남쪽에는 신라라는 남북 분열시대를 끌고 들어왔다.

지금은 어떠한가. 외세에 휘말린 한반도는 지금 남북이 서로 갈라져 적대를 하고 있다. 이제 주변국과의 슬기로운 외교와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하여 분열된 민족정신을 묶고, 외래 가치관이 아닌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로써 우리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해야 통일한국의 앞길이 활짝 열리지 않을까?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②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

식민사학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판하는 학자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살수있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비정해서 한국인의 입으로 일제 식민사학의 고대사 체계를 완성시켜 주었다는 말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 영토를 반도내로 축소하고 고조선의 수도는 항상 평양으로 귀결이 된다.

 

이기백은 고조선이 평안도 일대의 작은 소국이 아니라 만주와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땅이 넓다고 강대국이라는 논리는 낡은 역사관이라며 영토가 광대했던 고조선을 오히려 비판을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매국, 이적행위는 그 동안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그 뿌리는 물론 식민사학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받은 역사 교육은 조선총독부 시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고조선은 미개한 사회라고 가르친 반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한사군은 찬란한 역사로 가르쳤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학자들이 국민들의 세금을 독식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사학자들은 주로 국고로 운영되는 서울대와 교원대,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 역사재단 같은 국가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이기동이다. 동북아 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라는 정책 목표로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그런데 2012년 경기도 교육청 소속 역사 교사 17명이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라는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단군 사화를 고조선 개국 신화는 여전히 신화적 범주에 속하며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자명하다며 서술 내용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었다.

뿐만 아니라 간도협약이전에 간도가 우리 영토에 편입된 사실이 없다. 백두산 경계비는 국제법적 인식이 등장하기 전이라 내용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순사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앞장서서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고문하던 한국인 앞잡이들의 행태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북아 역사재단은 일본학자들의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았다고 언론에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를 주목하는 학자와 민중 인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한사군은 버젓이 한반도 내로 기술을 해놓고서 말이다.

그래서 한사군이 만주 서쪽에 있었다는 견해가 어디 있냐고 따지자 말 바꾸기를 시도했다.

이런 기관에 연간 수백억의 국민 세금이 지원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냥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 동북공정의 한국 지부이자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의 국내 전초기지라고 보면 정확하다.

동북아 역사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김용덕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출신이며, 2대 이사장 정재정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출신이며, 3대 이사장인 김학준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출신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4대 이사장은 김학준 이사장의 제자로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현대일본학회장을 한 지일파로서 김호섭 이사장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별위원회가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편찬심의회 수당 지급 내역'에 따르면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 교육부가 임명한 16명의 편찬심의위원은 국정교과서 심사수당 5465만원을 받았다.

김학준은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만주쪽이 다 우리가 지배했던 땅이었다. 이것을 강력히 부르짖은 사람은 5공이었습니다. 5공이 그걸 장려를 했어요. 왜냐하면 쟁점을 돌리려고 애국심에 호소하고 5공이 전적으로 그것을 부채질 했는데 그때 그것에 편승했던 사람들은 학계에서 지금 얼굴을 못 들고 다닙니다.”

김학준의 전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김학준이 5공 민주화 운동을 한사람으로 오인할 것이다.

그러나 김학준은 5공 시절 12대 민정당 소속 국회위원이었다. 이때 민정당 총재가 전두환이었는데 그 당시 전국구 의원이었다. 자신을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지명해준 전두환에게 갑읍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던 김학준이 5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후안무치란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대주의 유학자나 일제 식민 사학, 서구사대주의자들이 먼저 없애고 싶어했던 대상은 단군이었다.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에서 왔다는 箕子기자를 우리 민족의 시조로 삼고 싶어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조직적으로 말살하고 신화로 전락시켰다.

동북아 역사 재단를 비롯한 한국의 식민사학자들도 단군을 말살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이런 식민 사학자들이 해방후 깨끗이 청산되고 상식적인 역사학이 발전했다면 지금쯤 우리는 단군은 말할 것도 없고 고조선이전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조선을 의도적으로 없애기 위해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등이 각기 다른 나라처럼 기록을 했다.

사실 이 나라들은 고조선내의 제후국들이었다. 으레 중국은 한족외에 다른 이민족을 오랑캐로 폄하를 해서 기록을 하고 자신들이 진 전쟁은 아예 빼버리고 승리한 전투는 부풀리는 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교원대 역사교수인 송호정은 이미 골수까지 식민사학으로 가득찬 인물인지라 고대 사료자체를 부인하고 들어간다.

한마디로 역사학의 기본 방법론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한국사의 강역을 축소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물이다.

또한 식민 사학자들의 고질적 병폐는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들이 나오면 오히려 그시대에 기록된 1차 사료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송호정은 단군을 신화라고 규정짓는다. 삼국유사에도 위서를 인용해서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는데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송호정은 단군역사를 신화로 만들고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다. 국민들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말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1차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말투도 아주 단정적으로 기술을 하고 있다.

 

다음 송호정의 글을 보자.

"재야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실재한 역사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오류를 낳고 있다."

그의 논고를 보자.

“단군 조선의 연대는 신화에 나타나 있는 대로를 믿을 수가 없음은 분명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역사학자가 느낌으로 분명하다라고 전제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요, 공상가인 셈이다.

박은식선생은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다”라며 행존 이암선생의 단군세기 서문을 인용했다. 재미 있는 사실은 고조선이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사료근거대로 고고학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초기 청동기 문화의 상한 연대가 서기전 2500년까지 올라간다. 그러자 송호정은 ‘고조선식 동검’이 만주일대와 한반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사실이 식민사학에 큰 위협이란 사실을 느끼고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이 아니라 산융. 동호 등의 북방이민족이 만든 것이라는 논리다. 물론 산융, 동호는 고조선의 다른 명칭이다. 중국에서 으레 고조선을 깍아내리기 위해 오랑캐로 기록을 한 것이다. 그렇건만 송호정은 1차적 사료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이 청동기가 산융, 동호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식민사학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논리이다.

 

침략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정치논리이며 동북공정의 논리로 바라본 정치논리이기에 대한민국은 이 식민사학을 반드시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아무런 1차 사료적 근거가 없는 삼류소설임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부여, 비류, 옥저, 신라, 고구려, 옥저, 예, 맥 등 70여 국의 혈통이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은 중앙에 천자가 있고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대제국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청동기는 10세기, 철기는 서기전 3세기에 중국의 한나라에서 들어왔다고 아무 사료적 근거도 없이 우기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고조선의 제철기술은 서구와 비교할 때 무려 1천년 이상이나 빨랐다. 고조선을 연구할수록 만주일대와 한반도는 물론 산둥반도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식민사학의 앞잡이들은 고조선이 부여, 예맥, 진번 등과 같은 계통의 한 소국으로 대동강 유역에 건국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한중 수교 후 만주 대륙에서 수많은 고조선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슬그머니 중심지 이동설을 내놓았다. 물론 아무런 문헌, 고고학적 근거 없이 나온 이론이다. 창작소설인 것이다.

중국기록에 발조선, 숙신으로 기록된 것은 전부 조선의 명칭이다. 이는 정약용, 신채호, 정인보, 리지린 등이 모두 같은 의견을 기술했다. 그러나 송호정은 고조선을 무조건 축소하고 반도북부내로 쑤셔넣기 위해서 숙신은 여진족이고 고조선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고조선을 전공한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 재직을 하면서 국민세금으로 고조선 역사 말살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국 기관인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그토록 그를 떠받드는 것이다.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가 나오면 사료가 틀렸다고 한다. 『후한서』에는 평양성을 고조선의 수도 왕험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사기열전에는 '위만이 왕험성에 도읍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조선의 옛 도읍에 세운 험독현이 요동군 소속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고조선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이라는 논리는 설 곳이 없다. 또한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樂浪郡故朝鮮國也 在療東(후한서 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括理志)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時朝鮮王滿據之也(사기정의)☞고려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인데 곧 고조선의 땅이다. 浿水療東塞外패수요동새외(사기 조선열전)

☞패수는 요동의 새외에서 나온다. 결국 중국 사료를 종합해보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평양성도 현재의 평양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한국사를 축소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인보다 더욱 우리역사를 반도내로 국한지우고 고조선의 건국사를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국록을 축내면서 한국사 깍아내리기를 하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조선사를 축소시키고 신화를 만들기 위해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모든 작업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한다는 것이다. 국민세금으로 먹고 살면서 정작 행위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강역을 팔아먹는 매국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에서 가야사 복원을 지시하고 그동안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해오던 도종환 의원이 문체부장관으로 지명되자 이들은 본격적 흔들기에 나서고있다. 이번 정권에서 이를 확고히 대청소해야한다.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주의 침략의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 식민사학과 그 후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단군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유는 조선은 자가발전의 능력이 없으므로 외세의 지배와 문물전수를 통해 발전되었다는 제국주의 논리를 강변하기 위해서였다.

뉴라이트 역사관도 매 마찬가지다. 기독교 들어오기 전 한국은 미개사회였다가 기독교가 들어오고 선진사회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래서 일제시대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을 문창극이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는 말 그대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니 과거 수천년 전 기독교가 없을 때, 서양보다 더 강대한 단군의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애써 삭제하려 한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과 뉴라이트 역사관은 동색이다. 자국의 역사를 일제와 미국의 입장에서 기술을 하고 자국역사를 폄훼를 하고 자기 조상에 테러를 가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삼국사기 기록이 위배되었으므로 무조건 일본서기는 옳은 역사책이고 식민지 국가의 역사책은 조작된 것으로 몰아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야마토 왜를 지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이 기록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므로 거짓기록이라고 우겼다.

일제는 1916년 총독부 주재로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면서 한국사를 반도내로 축소시켰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비장의 사료를 강탈해서 단군관련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렸다.

이렇게 몰수되어 태워진 사서만 20여만 권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강대국인 일본(?) 미국에는 굴종적이었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에도 자신의 민족과 민족사를 폄훼했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서기만 믿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행동은 성경의 구약창세기는 무조건 믿으면서 우리의 역사서는 위서라고 몰아붙이는 행동과 같다.

이미 모세의 홍해설화는 역사적 대차비교를 한 결과 허구임이 밝혀지지 않았던가. 성경의 모세기적으로 기록된 애굽왕은 버젓이 천수를 누리고 늙어 죽었고, 하물며 접시물에 빠진 사실조차도 없으니 말이다. 이집트의 왕과 병사가 다 죽었다면 국가위기가 와야 함에도 멀쩡히 태평하게 역사가 지속된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과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조선사편수회는 학문조직이 아니었다. 식민지배의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가공한 것이다.

그런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식민사학 논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강단사학에선 단군을 신화라고 폄하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한국사의 시작을 서기 3세기 이후로 끌어 내리고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사이토 총독의 교육시책이다》

1.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2.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춰내 그것을 확장해서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3.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의 사적과, 일본의 인물,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지금 한국인은 사이토의 전략이 적중했음을 알게 된다. 자국 국민이 자국역사를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하다고 폄훼를 하고 일본 미국의 지배를 감사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니 말이다.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매국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후유증은 우리역사와 혼을 잃는 결정적 치명타를 안겼다. 해방 후 식민주류사학자들은 이중적 처신으로 생존해 왔다. 총론에서는 식민 사학을 비판하는 척하고 각론으로 들어가서는 식민사학 일색인 것이다.

박은식은 일제가 단군 조선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는 조선인이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인이 조선사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이웃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한국사를 자국과 외래 종교 성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왜곡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 한국학 연구소에 10억을 주고 한국 상고사 6권을 영문으로 간행했는데 한국의 송호정, 여호규 등 식민사학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는 학자들만 선발해서 편찬했다.

그런데 한결같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일색이다. 이를 보고 우당 이회영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식미사학 해체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식민사학자들이 지금까지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사 또는 한국 문화의 발전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타율성론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는 내적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정체성론이다.

한민족은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없으므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타율성론은 일본인에게는 한국사를 멸시하게 만들었고, 한국인에게는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다. 곧 식민지배가 한국인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15일 한국인 중에서 해방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이들이 한국고대사를 장악해서 자기 멋대로 주무를지를 누가 알았겠는가?

겉으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속으로는 지지하는 이중적 행보가 이들의 실체다.

윤내현교수가 고조선에 대한 시각을 중국의 고대 1차 사료에 근거해서 반박하자 식민사학계는 윤내현을 재야사학자라고 매도했다.

자기해석하고 다르면 무조건 이단이 되고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 되고 재야로 몰리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지키기 위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유사역사학, 사이비사학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자신들의 역사관과 다른 이들에 대하여 온갖 음해를 가하고 있다.

 

특히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인 한사군에 대해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 그 당시에 기록된 1차 사료에는 한사군의 위치를 하나같이 遼東요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 안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그동안 식민 사학자들은 중국 고대 사료가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한 것처럼 사기를 쳐왔다.

 

이병도는 우봉이씨로 항렬로 따지면 이완용의 손자뻘이다. 할아버지는 국토를 팔아먹고 손자뻘 되는 이병도는 역사를 팔아먹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병도가 한사군을 그리 강조한 이유는 일제 식민사학은 정체성론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고대 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간주하고 정복자인 한나라에서 철기 문화가 전래돼서 조선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철기가 전래되었다는 1차 사료는 전무하다. 고조선이 미개사회였다는 것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정신은 일본 극우파이면서 겉으로는 민족사학자로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식민사학자인 이기동 같은 인물이 비난하는 인물은 식민사학을 비판한 학자들이고, 거꾸로 칭찬하면 식민사학을 옹호하는 인물들이라고 보면 100% 들어맞는다.

역사학계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집단이라면 조선총독부의 시각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일정한 세를 형성해야 마땅한데 현실에서는 그런 예를 찾기 힘들다.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을 적대하는 학자들은 바글바글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진출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조폭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식민사학의 태동배경은 학문이 아니라 식민 지배를 위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왜 피땀 어린 국민 세금을 지원해서 이들을 지켜주는 것일까?

동북아에서 넘어간 인디언

진실의 역사

동북아에서 넘어간 인디언

환국의 환족은 베링해협을 건너 남북 아메리카대륙으로도 이주하였다.

이것은 인디언의 언어, 혈액형, 체질, 치아 등을 연구한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눈으로 보기에도 아시아인에 가까운 인디언은 동북아에서 건너 간 사람들인 것이다.

 

인디언과 동북아인의 연관성은 인디언의 생활도구와 풍습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오리건 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는 동북아의 짚신과 흡사한데 약 9천 년 전의 것이라 한다.

9천 년 전이라면, 그때는 환국시대인 것이다.

수년 전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을 들렀을 때 1층 인디언관에서 본 절구, 소쿠리, 베틀, 어망 등은

우리네 것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그곳 전시장의 모습은 마치 한국의 시골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북미 인디언 마을 입구의 장승과 토템 또한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곳 여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업어서 키우며, 어린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하는것과 똑같은 실뜨기놀이를 한다.

중남미에 아즈텍문명과 잉카문명을 건설한 인디언 또한 환족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배재대 손성태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아즈텍어(나와틀어)와 잉카어(케추아어)의 문장 구조가 한국어과 유사하며

조사의 종류와 쓰임새도 한국어와 유사하다고 한다. 우리말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여럿 있다.

환족은 하늘의 광명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아즈텍 사람도 흰 옷을 즐겨 입고 사원 건물도 흰색으로 칠하였다.

그들은 또한 아이가 태어날 때 금줄을 치고,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다녔다.

-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

 

죽은 사람의 입에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옥구슬을 넣어 주고, 자정에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다 마친 후에는 사용한 종이를 불태우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한민족의 육아, 장례, 제사 풍습과 너무도 유사하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문화와 한韓 문화의 관계에 대해 손 교수는

“직접적인 관련 없이 이처럼 공통점이 많기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인디언문명은 한민족의 조상이 베링해협을 넘어 가 개척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이

아시아의 동부지방에서 살던 민족이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이것은 언어, 혈액형, 체질(형질), 치아모양 등의 과학적 연구방법(DNA 추적)을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 부족 최고 지도자 '아파치'는 초대 환인 '안파견'에서 유래된 것.
 - 북미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는 약 9천년 전의 것이며, 동이족의 짚신과 흡사.
 - 인디언 들이 쓰던 나무절구, 소쿠리, 광주리, 삼태기, 베틀, 어망, 물레 등은 우리선조들이 쓰던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 영국 런던대 연구진은 캐나다에서 칠레에 이르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DNA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최초의 이주민은 베링해가 얼어 육교를 이뤘던 1만5천여년 전 빙하기에 처음 시베리아로부터 건너온 아시아인 집단이었고

  이후 두 차례의 이주민은 중국의 한족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집단임이 밝혀졌다고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 인류의이동-Y염색체와 mtDNA로 추적그래프지도.

- 연세대의대 법의학과 신경진ㆍ이환영 교수팀은 1970년부터 2004년까지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 유적지 중

  11곳(구석기시대 1개, 신석기시대 3개, 청동기시대 2개, 백제시대 1개, 고려시대 4개)에서 출토된 유해 35구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유전자형을 분석한 결과를 이 분야 국제저널(Human Biology) 최근호에 게재했다.(2009-01-14)

  초기 선사시대 한국인 집단이 알타이산맥의 북쪽 지역과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부터 기원했다는

  기존의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과라는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한민족은 파미르고원의 동방에 위치하는 천산(天山)산맥을 시원으로 하여, 시베리아에 있는 바이칼호를 근거로

천지(天地)로 이어지는 경천숭조(敬天崇祖) 전통을 지닌 인류시원 문명의 장자(長子)민족이다.  

그리고 이 중앙아시아 천산을 기점으로 북방문명의 시조인 대단위의 부족국가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문헌으로 밝히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