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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진실의 역사

고려 왕조를 뒤흔든 묘청의 난(17세 인종, 1135년)

고려국본기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김부식의 모함에 대해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해표自解表에서 한번쯤 멈추고 갖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묘청이 이끄는 서경파와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파 사이에 얽힌 복잡한 갈등관계를,

그것도 천년 전 격동의 시기에 일어났던 복잡한 사건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기록에 의존해서 큰 맥락을 파악할 수는 있다.

 

윤언이尹彦頤(1090~1149)는 윤관의 넷째 아들로서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김부식金富軾(1075~1151)과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사실 윤언이와 김부식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뒤틀린 관계였다.

 

윤언이는 아버지 윤관이 지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비문을 예종이 김부식金富軾에게 고치게 하자, 김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함부로 고친 것에 대해 섭섭함을 갖고 있었다.

1133년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주역 강의를 했는데 이때 윤언이는 김부식이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반론을 제기하여 이번에는 김부식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서경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경 천도운동이 결국 개경파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자 서경파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묘청이 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인조로부터 묘청 토벌을 명받은 김부식은 먼저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인물들인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김안金安 등의 목부터 베었다.

이것은 개경파가 서경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고 한다.

 

윤언이는 김부식의 부하가 되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이 과정에서 김부식은 윤언이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부대를 작전 방향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이후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함께 진압했던 윤언이에 대해‘ 정지상 등과 결탁하여 칭제건원을 언급하고 붕당을 조성하여 반역을 꾀했다’는 상소를 인종에게 올려서, 윤언이마저 좌천시켜 버렸다.

이로써 김부식은 고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주목사로 좌천된 윤언이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인종은 김부식의 상소문을 윤언이에게 보내 주었고, 이 상소문을 읽어 본 윤언이는 비로소 자신의 억울함을 표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것이 바로 윤언이의 자해표이다.

 

이후 윤언이에게 사면령이 내려져서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되면서 김부식은 수차례 은퇴를 청원한다.

이렇게 은퇴할 때가 된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고 만든 것이 『삼국사기』이다.

 

사실 윤언이는 묘청,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설을 주장하였을 때 서경 천도론에 동의하였으나, 묘청 등이 정변을 기도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은 윤언이를 정지상과 내통했다고 모함한 것이다.

 

또한 김부식은 정지상과도 악연을 맺었다.

정지상은 서경파였기 때문에 묘청과 연결고리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태평스럽게 개경에 남아있었다는 것만 봐도 반란과는 연관이 적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전에 먼저 정지상을 죽여버렸다.

 

약 백년 뒤에 무신집권기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의하면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 날 헛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원한을 품은 정지상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김부식의 불알을 잡아당겨 죽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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