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고려④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8세 의종~31세 공민왕] 무신정권 100년& 몽골의 속국 100년 시대

고려의 18세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시작된 무신정권 시대는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면서 왕의 세력은 무기력해진 상태가 되었다.

 

1225년 몽고의 침입 1225년 몽고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귀국길에 도적에게 피살당하자 몽고는 보복을 선언하고 1231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했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과의 전면전을 벌이며 항전을 계속했지만 몽골의 연이은 침략으로 수많은 고려인이 살상되고 국토가 짓밟혔다.

 

1270년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24세 원종 때는 왕 중심의 친몽파親蒙派와 무신정권 중심의 반몽파反蒙派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고려에 친몽정권이 들어서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면서 고려 조정은 원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며 대몽항쟁을 계속했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에 토벌되고 만다.

 

원의 속국시대 고려 왕실에서는 원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25세 충렬왕(경효왕)부터 26세 충선왕(선효왕), 27세 충숙왕(의효왕), 28세 충혜왕(헌효왕), 29세 충목왕(현효왕), 30세 충정왕(저왕)까지 6대가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忠’ 자를 사용하여 왕호로 삼았다.

또 원나라가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이 내정간섭기구로 바뀌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는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나라 배척운동 그러다 31세 공민왕(경효왕)이 즉위할 무렵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홍건적의 봉기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공민왕은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치면서 원의 1백년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변발, 호복 등 몽고풍속을 금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친원파 권문세족인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제거했다.

당시 기철을 비롯한 일족은 여동생이 원나라 왕후가 되자 고려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려국본기에는 친원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로 정지상鄭之祥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묘청의 난에 연류되어 김부식에게 피살된 정지상鄭知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정지상鄭之祥이 전라도 안렴사로 전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귀화하여 관리가 된 야사불화埜思不花가 고려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그가 전주에 오자 정지상은 이들을 공손히 맞이하였으나, 거만한 야사불화는 극진한 대접과 뇌물을 요구였다. 이를 거절하자 정지상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때 미스테리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정지상이 “나라에서 기씨 일족을 처형하고 원과 국교를 단절하고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고 호통치자 관리들이 정지상을 풀어준 것이다.

정지상의 카리스마에 눌려 거짓말이지만 통한 것이다.

정지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야사불화의 무리들을 잡아가두고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공주에서 야사불화의 동생 서응려徐應呂를 잡아 철퇴로 쳐죽이고 이 사실을 공민왕에게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화들짝 놀라고 원나라의 보복이 두려워서 도리어 정지상을 옥에 가두고 전주목사와 관리들을 체포하고, 야사불화에게 어주를 하사하고 금패를 돌려주었다.

정지상은 옥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반원개혁정치를 펴던 공민왕은 원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다가 다시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공민왕은 대궐에서 잔치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친원파 무리들을 불러들여 처형한 것이다.

이후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쌍성을 수복한다.

또한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다.

 

이후 정지상은 석방되어 순군제공이 되었고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을 거쳐 판사가 되었다.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일삼던 무리를 물리치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자 한 정지상의 뜻이 공민왕으로 하여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게 한 자극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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