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고려①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세 태조 왕건] 후삼국을 통일하다

고려국본기의 시작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에 대한 이 야기이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왕족의 혈통인 안승安勝의 이야기로 서두가 전개되고 있다. 안승은 고구려 28대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 숨어지내던 안승은 검모잠에 의해 후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며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게 된다.

안승은 신라 문무왕에 의해 674년 금마저(지금의 익산) 일대에서 보덕국의 왕으로 봉해지고 680년에는 문무왕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683년(신문왕 3년)에 신문왕은 보덕국을 폐하고 안승을 불러들여 소판蘇判의 벼슬을 주어 신라 귀족을 만들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부하 대문大文의 무리가 금마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 관군에 진압되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시작된 안승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200여년이 지나 안승의 후손 중에 궁예弓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태어날 때 집 위로 흰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치는 것을 보고 신라 일관日官이 불길한 징조로 판단하여 궁예를 죽이려 했으나 어머니가 보물을 주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신분이 밝혀지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때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점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고 궁예는 자신의 천명을 예감했다.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에 대한 원망이 깊게 쌓여 있었다. 특히 궁예는 남으로 순행하다 흥주사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신라 왕의 초상화를 보고 칼로 베어버렸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 상당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를 삼켜버리려는 뜻을 품고 도읍을 멸하리라 부르짖으며 신라에서 귀화해 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896년 송악(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했고 이때 왕건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뒤에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1년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변경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고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직접 경문 20권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聰이라는 승려가 이 경문을 보고 “모두 사설괴담邪說怪談으로 세상 사람에게 가르칠 것이 못 된다”고 한마디 하자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패 죽이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궁예는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며 왕후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이렇게 포악한 정치가 계속되자 918년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궁예와 달리 유화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해 나갔다.

926년부터는 대진국 유민을 받아들이고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문득 ‘이맥 선생은 왜 고려 건국과정에 안승과 궁예의 이야기를 길게 써 놓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고려 건국의 배경에는 고구려 계통의 힘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고구려 멸망의 한, 유민들의 쌓인 한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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