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고려③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6세 예종] 거란과 여진을 정벌하다

고려의 16세왕 예종은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반대로 거란의 힘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거란에 내주었던 압록강변의 두 성(내원, 포주)을 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1107년 예종은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에 임명하여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지역의 여진을 선제공격하게 했다.

윤관은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평윤진 등의 9성을 쌓아 백성을 이주시킴으로서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9성을 유지하는 일이 고려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진이 9성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여진은 동북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공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요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9성을 돌려주는 문제를 놓고 일대 논란이 벌어졌다.

9성 반환론을 처음 제기한 김인존은 9성 때문에 여진과 고려 양측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언급하면서 고려가 비록 9성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거란과의 국경 분쟁을 일으킬 조짐마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고려는 졸지에 여진과 거란을 상대로 불리한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9성을 돌려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대세는 이미 반환파에 기울어져 갔다.

물론 예종은 처음부터 영토확장 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내심 반환반대파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09년 여진에게 9성을 반환했다.

철수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여진과의 전쟁에서 몇번의 패배로 많은 군사를 잃은 윤관과 오연총에 대한 탄핵상소가 이어졌다.

예종은 간관들을 설득하여 결국 오연총은 파면하고 윤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고려가 내부문제를 앓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급속도로 역학구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진은 꾸준히 성장하여 1115년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였고, 여진의 팽창에 따라 압록강변에서 거란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116년 발해 유민들이 고구려의 왕족 고영창을 내세워 대발해국을 세웠다.

 

얼마 후 금나라가 압록강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공략하자 예종은 추밀원에 지시하여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하고 포주성은 고려의 옛 영토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금나라는 고려가 자체 힘으로 포주성을 차지해도 무방하다고 통보해온다.

 

금나라의 묵인을 받은 고려는 내원과 포주에 머무 르고 있던 거란의 야율령과 연락을 취한다.

야율령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두 성을 포기하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며 두 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야율령은 내원과 포주를 고려에 양도한다는 공문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고려는 1117년 거란에 빼앗겼던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찾게 되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록』 266~278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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