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티베트 역사②

진실의 역사

티베트의 역사②

 

몽골(원元)의 통치와 티베트 불교
13세기, 몽골 제국의 등장은 티베트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티베트는 거의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토착 종교 뵌뽀와 외래 종교인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등으로 이미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미 다른 민족에게 빼앗겼다. 1240년 몽골 제국은 장군 도르타를 파견하여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몽골 군사는 파죽지세로 밀려들어 왔다. 티베트 각 지역의 호족들은 앞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당시 몽골은 항복한 뒤에 공물을 바치는 세력들에게는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회유책을 썼다. 물론 저항하는 세력들에게는 강경 진압책을 구사했다.

 

티베트를 제압한 뒤 몽골은 종교(불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많은 불교 종파들이 횡행했다. 몽골 치하에서 각 종파의 지도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종교적 지배권을 잡기 위한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 달라이 라마 5세 롭상 갸초Lobsang Gyatso(1617~1682) 때 티베트는 다시 사캬Sakya파 티베트 불교로 통일된다. 몽골은 불교 지도자를 통해 티베트를 지배했지만, 반대로 티베트 종교에 의해 몽골의 정신계를 지배당하고 있었다.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는 깊이 뿌리를 내렸다.

 

원元나라 최후의 황제인 순제順帝(1320∼1370) 시기에 티베트 정권은 사캬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강력한 몽골 제국(원元)을 등에 업고 티베트를 지배해 온 사캬파는 이미 부패해 있었다. 이때 팍모주빠의 라뵌喇本(한 지방의 정치와 종교 권력을 모두 갖고 있는 호족) 창춥개짼絳曲堅贊(1302∼1364)이 샤카 정권에 대한 타도의 깃발을 올렸다. 1354년 창춥개짼이 이끄는 팍모주빠 군대가 마침내 사캬 사원에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캬 정권이 무너졌다. 각 지역의 만호장이나 개뽀結布(토번 왕국 멸망 뒤 군벌들이 각 지방에서 기반을 잡고 스스로 ‘개뽀’라고 칭했다)들도 창춥개짼을 티베트 최고 지도자로 인정했다.

 

원나라 순제는 창춥개짼 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나라 정부에서는 창춥개짼을 ‘시뚜司徒(정치·종교 권력을 모두 지배하는 수장)’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130년 동안 티베트의 국가 원수의 호칭은 ‘시뚜’였다. 역사는 당시의 티베트 정부를 ‘팍모주빠 정권’이라고 기록하였다. 창춥개짼은 위대한 개혁군주였다. 티베트 역사에서 그는 송짼감뽀에 비교되는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티베트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종카빠
명明나라와 티베트 관계도 몽골 제국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408년 명 태종明太宗(1360∼1424)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 종카빠宗喀巴(1357∼1419)를 북경으로 초청했다. 종카빠는 티베트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1357년 북부 티베트 종카宗喀(오늘날 칭하이靑海 성 서녕西寧)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 칸이 임명한 지방관 다루가치達魯花赤였다. 출가한 뒤에 종카빠는 각 분야의 뛰어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대·소승의 불교 교리를 터득해 나갔다. 21세가 된 1377년, 그는 이미 뛰어난 학자로서 다른 학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8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모두 다 기념비적인 업적이 되었다.

 

특히 『람림 -깨달음에 이르는 길菩提道次諸廣論』은 티베트 불교 연구자에게는 첫 번째 손에 꼽히는 필독서이다. 종카빠는 원래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까담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까귀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티베트 불교사에 따르면 인도 불교의 마지막 법맥은 사캬에게 전해졌고 사캬의 법맥은 까귀에게 전해졌다. 종카빠가 까귀 계사戒師에게 계를 받음으로써 그 법맥은 까담에게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명 태종의 초청을 받았으나 종카빠는 거절했다. 티베트 국민들은 그의 결정에 감동을 받았다. 다른 불교 종파의 지도자들도 그를 존경했다. 1409년 종카빠는 라싸 동쪽 족卓이라는 산에 까땐 사원囑丹寺을 세웠다. 1416년 종카빠의 제자 참양자시빼땐降央扎西貝典이 라싸 서부 지역에 째뿡 사원哲蛙寺을 세웠다. 3년 뒤에는 종카빠의 제자 사캬예세釋迦益西가 라싸 북부 지역에 세라 사원色拉寺를 새웠다. 이 사원들은 현존하는 티베트 3대 사원이 되었다. 이후 티베트 국민들은 종카빠의 제자들을 ‘겔룩格魯’이라고 불렀다. 계율에 밝다는 뜻이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는 90%가 겔룩파다. 까담 종파의 시조는 아티샤였지만, 겔룩 종파의 시조는 종카빠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는 팍모주빠 5대 시뚜 드락파 갈짼(1374∼1432)을 국가의 종교 수령인 천화왕闡化王으로 책봉했다. 명나라는 260년 동안 중국 역사에 존속했다. 티베트의 팍두르 정권도 명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달라이 라마의 탄생

청淸나라의 황제는 티베트 정치·종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Dalai Lama達賴喇嘛를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상징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달라이 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생제도還生制度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티베트에서 처음 이 제도를 만든 사람은 제2대 까마빠(까담의 스승)인 까마박시噶瑪拔希(1204∼1283)였다. ‘튀쿠孜古’라고 하는 티베트어는 스스로 환생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라마(스승)를 가리킨다. 중국어로는 활불活佛로 번역한다.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리빙 붓다Living Buddha’라고 번역한다. 『티베트 비밀역사』에 따르면 중국어 번역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튀쿠는 몸이 변했다는 뜻으로 부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는 살아있는 부처를 인정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부처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다. 튀쿠의 정확한 번역은 ‘화신nirmāa-kāya化身’, 일종의 변화신變化身이라 할 수 있다. ‘환생’은 중국어로 ‘전세轉世’를 가리킨다. 방금 환생한 아기는 영특한 동자이므로 ‘영동靈童’이라고 한다. 따라서 환생한 아이를 ‘전세영동轉世靈童’이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의 특징 중 하나인 전세영동에 대한 이야기는 각종 영화와 소설 등에서 묘사되어 알려지고 있다.

 

13세기 종카파의 제자인 겔룩파 제2대 까마박시가 창시한 전세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각 교파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다. 이후 겔룩파 최고의 활불 중 한 명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활불 중 한 명으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제1대 달라이 라마는 겐둔 드룹(1391∼1474), 2대 겐둔 갸초(1475∼1542), 3대 쇠남 갸초(1543∼1588)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이 쇠남 갸초 때부터였다.

 

라싸 부근에서 태어난 쇠남 갸초는 3세에 겐둔 가문의 전세활불轉世活佛로 인정받았다. 1571년 투메트 몽골의 알탄 칸(1507∼1582)이 그의 명성을 듣고 초청했다. 1578년 5월, 청하이호 부근 찹차恰卜怡에서 회동했다. 쇠남 갸초는 노란 모자에 법복法服을 입었고 알탄 칸은 몽골식 흰색 정장 차림이었다.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 회담장인 몽골식 천막에서 나온 알탄 칸이 「찹차회담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차하르Chakhar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세력이 강성하여 중국과 티베트를 정복했으며, 사캬와 법주法主·시주施主 관계를 수립한 뒤 불교를 넓게 전파했다”고 그동안의 몽골과 티베트 관계를 회상한 뒤에, “백의몽골인白衣蒙古人은 다음과 같은 법을 지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내용은 티베트 불교를 신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알탄 칸은 “오늘부터 우리는 티베트가 하는 그대로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 내용을 보아도 몽골과 티베트는 단순한 정치적 식민 관계가 아니라 서로 믿고 의지하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세계 정복 민족으로서 정쟁과 살인, 약탈, 겁탈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몽골인들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점차 개과천선해 나갔다.

 

행사의 말미에 두 정상은 존호尊號를 주고받았다. 알탄 칸이 쇠남 갸초에게 준 존호는 ‘와치르다라 달라이 라마瓦齊爾達喇達賴喇嘛’였다. ‘와치르다라’는 금강살타金剛薩埵Vajrasttva, 신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달라이Dalai’는 갸초Gyatso(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큰 바다(大海)’를 뜻하고, ‘라마Lama’는 티베트어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달라이 라마’는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티베트 불교 하면 상징적으로 떠올리는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이때 이후로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은 그 법통을 잇는 모든 화신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쇠남 가쵸는 알탄 칸에게 ‘차크라와르 세첸 칸咱克喇瓦爾第徹辰汗’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차크라와르’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세첸’은 현명하다는 뜻이다. 티베트 불교와 정복 국가 몽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였다. 제3대 달라이 라마 쇠남 갸초는 이후 10년 동안 몽골 포교 활동에 진력했다.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
1588년 3월 3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서 입적했다. 그를 이어 4대 달라이 라마가 된 인물은 용텐 갸초(1589∼1616)였다. 그는 알탄 칸의 증손자다. 1603년 제4대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도착했다. 전세영동으로 인정되어 달라이 라마가 되었으므로 계를 받아야 한다. 당시 겔룩파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계를 줄 수 있는 고승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가 바로 티베트에서 또 하나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빤쩬 라마Panchen Lama였다. 제4대 달라이 라마가 라싸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빤쩬 라마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빤쩬 라마는 4대 달라이 라마의 머리를 깎고 계를 주었다. 이때부터 4백 년 동안 달라이 라마가 아직 어리면 빤쩬 라마가 스승이 되어 주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616년 28세의 4대 달라이 라마는 드레풍 사원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5대 달라이 라마가 된 인물은 롭상 갸초였다. 『1만 년의 이야기 티베트』에 따르면 토번의 모든 공적을 송짼감뽀에게 돌릴 수 있듯이 오늘날 겔룩파 정교 제도 수립의 공은 모두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에게 돌릴 수 있다. 그는 겔룩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 초기부터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 1642년 제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국왕에 취임했다. 당시 26세였다. 제4대 달라이 라마까지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한 종파의 지도자였다. 국왕으로 등극한 5대 달라이 라마는 세속과 종교 권력을 움켜쥔 절대 군주가 되었다. 1649년 5대 달라이 라마는 7세기 토번 왕조 시대에 건설되었다가 왕조 몰락과 함께 황폐해진 포탈라Potala궁(布達拉宮)으로 수도를 옮기고 30년에 걸쳐 궁전을 재건하였다.

 

중원을 평정한 청나라 정부가 5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만주인은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티베트가 법주, 몽골이 시주’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아가 몽골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신으로 추앙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원을 통일한 청나라 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싶어 했다. 티베트 역시 중원의 판도를 읽고 있었다. 5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 정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제4대 빤쩬 라마 역시 같은 시기에 초청장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1652년 12월 북경에서 티베트 국왕 달라이 라마가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당시 청나라 황제는 15살의 제3대 순치제였다. 청나라 정부는 몽골 시대 이상으로 티베트 불교를 대우했다. 달라이 라마는 두 달 동안 북경에 머물렀다. 그가 황궁을 방문할 때는 스승으로서 황제의 옆에 앉았다. 당시 중국 문화권의 국가 중에서는 황제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달라이 라마였다. 이후 티베트와 청은 과거 원나라 시기와 같이 ‘법주法主와 시주施主’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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