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436건

  1. 고려⑤
  2. 고려④
  3. 고려③
  4. 고려②
  5. 고려①
  6.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7. 홍산문화 시대 분류
  8. 한국사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9.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10.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⑤

고려⑤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31세 공민왕 이후] 고려의 망국과정

『고려사』 권44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사관의 논평이 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쓸데없는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 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 - 『국역 고려사』, 경인문화사)

 

여기서 말해주듯 공민왕은 1365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이후로 노국공주에 대한 집착으로 병적 증세를 보이며 개혁적인 성향을 잃고 정치를 소홀하게 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국하자 고려는 신흥강국 명왕조와 북원(원왕조의 잔존세력)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난처한 입장에 있었고 백성들은 왜구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1371년 윤3월에는 북원의 요양성 평장사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은 명나라에 귀부하려 하다가 명나라가 이곳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까 우려한 나머지, 요양이 본디 고려 땅이니 고려 조정에서 귀화를 요청하면 이주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려에 사자를 보내 의사를 타진해왔다.

이때 고려 조정은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국사에 어려움이 많아 대응을 못했다.

 

원나라 말기의 지방정권 정복활동을 계속하던 주원장이 대륙 서쪽의 명옥진明玉珍이 세운 왕국을 평정하자 고려는 정몽주를 보내 하례하게 했다.

당시 명나라는 전쟁에 필요한 말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고려는 거부를 못하고 있었다.

 

1374년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천 필을 가져가야 한다면서 채빈과 임밀 등 사신을 보내왔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최영을 시켜 제주도의 말 1천 필을 빼앗아왔다.

 

그런데 이때 공민왕이 내시의 칼에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범을 체포한 이인임일파는 10살 나이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일은 계속 꼬여 이번에는 명나라 사신 호송책임을 맡은 김의金義가 채빈을 살해하고 임밀을 붙잡고 북원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처럼 고려 조정에서 의견이 분열되는 사이 귀화 의사를 타진했던 유익劉益 등 은 명나라에 투항하여 금주, 복주, 개평, 해성, 요양 등을 바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이맥은 고려국본기에서 “오호라! 당시 청론淸論을 떠들던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편안함을 좇기만 일삼아 좋은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뜻 있는 사람의 한恨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구나”라고 통탄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고 최영과 이성계는 왜구 토벌에서 공적을 세워나갔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에 속하던 땅이니 이제부터는 명나라가 차지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우왕은 최영의 뜻을 받아들여 요동정벌 계획을 세웠다.

 

팔도도통사로 임명된 최영은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친명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개경을 접수했다.

이후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보내고 우왕을 내쫓았으며 대신 아홉 살 창왕을 내세 웠으나, 창왕은 1년 만에 강화도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공양왕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500년의 고려 왕조는 문을 닫게 된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성 이씨의 맥  (0) 2017.12.17
묘청의 난  (0) 2017.12.16
고려④  (0) 2017.12.14
고려③  (0) 2017.12.13
고려②  (0) 2017.12.12

고려④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8세 의종~31세 공민왕] 무신정권 100년& 몽골의 속국 100년 시대

고려의 18세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시작된 무신정권 시대는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면서 왕의 세력은 무기력해진 상태가 되었다.

 

1225년 몽고의 침입 1225년 몽고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귀국길에 도적에게 피살당하자 몽고는 보복을 선언하고 1231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했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과의 전면전을 벌이며 항전을 계속했지만 몽골의 연이은 침략으로 수많은 고려인이 살상되고 국토가 짓밟혔다.

 

1270년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24세 원종 때는 왕 중심의 친몽파親蒙派와 무신정권 중심의 반몽파反蒙派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고려에 친몽정권이 들어서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면서 고려 조정은 원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며 대몽항쟁을 계속했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에 토벌되고 만다.

 

원의 속국시대 고려 왕실에서는 원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25세 충렬왕(경효왕)부터 26세 충선왕(선효왕), 27세 충숙왕(의효왕), 28세 충혜왕(헌효왕), 29세 충목왕(현효왕), 30세 충정왕(저왕)까지 6대가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忠’ 자를 사용하여 왕호로 삼았다.

또 원나라가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이 내정간섭기구로 바뀌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는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나라 배척운동 그러다 31세 공민왕(경효왕)이 즉위할 무렵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홍건적의 봉기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공민왕은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치면서 원의 1백년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변발, 호복 등 몽고풍속을 금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친원파 권문세족인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제거했다.

당시 기철을 비롯한 일족은 여동생이 원나라 왕후가 되자 고려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려국본기에는 친원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로 정지상鄭之祥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묘청의 난에 연류되어 김부식에게 피살된 정지상鄭知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정지상鄭之祥이 전라도 안렴사로 전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귀화하여 관리가 된 야사불화埜思不花가 고려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그가 전주에 오자 정지상은 이들을 공손히 맞이하였으나, 거만한 야사불화는 극진한 대접과 뇌물을 요구였다. 이를 거절하자 정지상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때 미스테리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정지상이 “나라에서 기씨 일족을 처형하고 원과 국교를 단절하고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고 호통치자 관리들이 정지상을 풀어준 것이다.

정지상의 카리스마에 눌려 거짓말이지만 통한 것이다.

정지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야사불화의 무리들을 잡아가두고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공주에서 야사불화의 동생 서응려徐應呂를 잡아 철퇴로 쳐죽이고 이 사실을 공민왕에게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화들짝 놀라고 원나라의 보복이 두려워서 도리어 정지상을 옥에 가두고 전주목사와 관리들을 체포하고, 야사불화에게 어주를 하사하고 금패를 돌려주었다.

정지상은 옥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반원개혁정치를 펴던 공민왕은 원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다가 다시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공민왕은 대궐에서 잔치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친원파 무리들을 불러들여 처형한 것이다.

이후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쌍성을 수복한다.

또한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다.

 

이후 정지상은 석방되어 순군제공이 되었고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을 거쳐 판사가 되었다.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일삼던 무리를 물리치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자 한 정지상의 뜻이 공민왕으로 하여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게 한 자극이 된 것이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청의 난  (0) 2017.12.16
고려⑤  (0) 2017.12.15
고려③  (0) 2017.12.13
고려②  (0) 2017.12.12
고려①  (0) 2017.12.11

고려③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6세 예종] 거란과 여진을 정벌하다

고려의 16세왕 예종은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반대로 거란의 힘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거란에 내주었던 압록강변의 두 성(내원, 포주)을 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1107년 예종은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에 임명하여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지역의 여진을 선제공격하게 했다.

윤관은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평윤진 등의 9성을 쌓아 백성을 이주시킴으로서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9성을 유지하는 일이 고려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진이 9성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여진은 동북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공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요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9성을 돌려주는 문제를 놓고 일대 논란이 벌어졌다.

9성 반환론을 처음 제기한 김인존은 9성 때문에 여진과 고려 양측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언급하면서 고려가 비록 9성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거란과의 국경 분쟁을 일으킬 조짐마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고려는 졸지에 여진과 거란을 상대로 불리한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9성을 돌려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대세는 이미 반환파에 기울어져 갔다.

물론 예종은 처음부터 영토확장 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내심 반환반대파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09년 여진에게 9성을 반환했다.

철수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여진과의 전쟁에서 몇번의 패배로 많은 군사를 잃은 윤관과 오연총에 대한 탄핵상소가 이어졌다.

예종은 간관들을 설득하여 결국 오연총은 파면하고 윤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고려가 내부문제를 앓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급속도로 역학구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진은 꾸준히 성장하여 1115년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였고, 여진의 팽창에 따라 압록강변에서 거란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116년 발해 유민들이 고구려의 왕족 고영창을 내세워 대발해국을 세웠다.

 

얼마 후 금나라가 압록강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공략하자 예종은 추밀원에 지시하여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하고 포주성은 고려의 옛 영토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금나라는 고려가 자체 힘으로 포주성을 차지해도 무방하다고 통보해온다.

 

금나라의 묵인을 받은 고려는 내원과 포주에 머무 르고 있던 거란의 야율령과 연락을 취한다.

야율령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두 성을 포기하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며 두 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야율령은 내원과 포주를 고려에 양도한다는 공문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고려는 1117년 거란에 빼앗겼던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찾게 되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록』 266~278쪽 정리)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⑤  (0) 2017.12.15
고려④  (0) 2017.12.14
고려②  (0) 2017.12.12
고려①  (0) 2017.12.11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0) 2017.12.10

고려②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6세 성종]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다

916년 통일국가를 세우고 946년 국호를 요로 정한 거란은 993년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침략의 명분은 고구려의 옛땅을 고려가 침식했으니 내놓으라는 것과 고려가 송과 교류를 끊고 거란을 섬기라는 요구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요에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다.

 

이때 나선 인물이 서희徐熙(942∼998) 장군이다.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된다.

서희는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대해 고려가 고구려의 맥을 이었다는 점과 고려의 도읍이 평양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준다면 친교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조리있게 설명하여, 결국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적진에서 거란과의 기싸움에서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편 강직한 인품에 소손녕이 굴복하여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에 서희를 전송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의 도움으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를 포함하는 강동 6주를 되찾게 되었다.

거란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 치 혀로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둔 서희는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모범이 되고 있다.

거란은 이후에도 계속 침략해왔는데 이때 물리친 대표적 인물이 강감찬姜邯贊(948∼1031) 장군이다.

그는 진주 강씨의 시조이자 고구려 26세 영양제 때 수나라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명장인 강이식 장군의 후손이다.

 

1018년 거란은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이때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곳곳에서 거란군을 물리쳤고 1019년에는 귀주에서 살아 도망간 적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거란군을 섬멸시켰다.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이다.

이후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했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④  (0) 2017.12.14
고려③  (0) 2017.12.13
고려①  (0) 2017.12.11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0) 2017.12.10
홍산문화 시대 분류  (0) 2017.12.09

고려①

진실의 역사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세 태조 왕건] 후삼국을 통일하다

고려국본기의 시작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에 대한 이 야기이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왕족의 혈통인 안승安勝의 이야기로 서두가 전개되고 있다. 안승은 고구려 28대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 숨어지내던 안승은 검모잠에 의해 후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며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게 된다.

안승은 신라 문무왕에 의해 674년 금마저(지금의 익산) 일대에서 보덕국의 왕으로 봉해지고 680년에는 문무왕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683년(신문왕 3년)에 신문왕은 보덕국을 폐하고 안승을 불러들여 소판蘇判의 벼슬을 주어 신라 귀족을 만들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부하 대문大文의 무리가 금마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 관군에 진압되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시작된 안승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200여년이 지나 안승의 후손 중에 궁예弓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태어날 때 집 위로 흰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치는 것을 보고 신라 일관日官이 불길한 징조로 판단하여 궁예를 죽이려 했으나 어머니가 보물을 주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신분이 밝혀지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때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점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고 궁예는 자신의 천명을 예감했다.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에 대한 원망이 깊게 쌓여 있었다. 특히 궁예는 남으로 순행하다 흥주사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신라 왕의 초상화를 보고 칼로 베어버렸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 상당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를 삼켜버리려는 뜻을 품고 도읍을 멸하리라 부르짖으며 신라에서 귀화해 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896년 송악(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했고 이때 왕건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뒤에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1년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변경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고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직접 경문 20권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聰이라는 승려가 이 경문을 보고 “모두 사설괴담邪說怪談으로 세상 사람에게 가르칠 것이 못 된다”고 한마디 하자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패 죽이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궁예는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며 왕후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이렇게 포악한 정치가 계속되자 918년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궁예와 달리 유화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해 나갔다.

926년부터는 대진국 유민을 받아들이고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문득 ‘이맥 선생은 왜 고려 건국과정에 안승과 궁예의 이야기를 길게 써 놓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고려 건국의 배경에는 고구려 계통의 힘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고구려 멸망의 한, 유민들의 쌓인 한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③  (0) 2017.12.13
고려②  (0) 2017.12.12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0) 2017.12.10
홍산문화 시대 분류  (0) 2017.12.09
한국사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0) 2017.12.08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진실의 역사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와 환, 단, 한의 뜻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

 

注(주)에 曰(왈)
桓仁(환인)은 亦曰天神(역왈천신)이시니 天(천)은 即大也(즉대야)며 一也(일야)오

 

桓雄(환웅)은 亦曰天王(역왈천왕)이시니 王(왕)은 卽皇也(즉황야)며 帝也(제야)오
檀君(단군)은 亦曰天君(역왈천군)이시니 主祭之長也(주제지장야)오
王儉(왕검)은 亦卽監群(역즉감군)이시니 管境之長也(관경지장야)니라.

 

『대변경』의「주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인桓仁은 천신天神이라고도 하니 천天은 곧 큼[大]이며, 하나[一]다.
환웅桓雄은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니 왕王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다.
단군檀君은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니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시다.
왕검王儉은 감군監群이라고도 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시다.


환, 단, 한의 뜻

故(고)로 自天光明(자천광명)을 謂之桓也(위지환야)오
自地光明(자지광명)을 謂之檀也(위지단야)니 所謂桓(소위환)은 則九皇之謂也(즉구황지위야)라

韓(한)은 亦則大也(역즉대야)니 三韓曰風伯雨師雲師(삼한왈풍백우사운사)오

加(가)는 卽家也(즉가야)니 五加曰(오가왈) 牛加主穀(우가주곡)하며

馬加主命(마가주명)하며 狗加主刑(구가주형)하며 猪加主病(저가주병)하며
鷄加主善惡也(계가주선악야)니 民有六十四(민유육십사)하고 徒有三千(도유삼천)이라.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환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또 크다[大]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우사·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②  (0) 2017.12.12
고려①  (0) 2017.12.11
홍산문화 시대 분류  (0) 2017.12.09
한국사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0) 2017.12.08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0) 2017.12.07

홍산문화 시대 분류

진실의 역사

홍산문화 시대별 분류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①  (0) 2017.12.11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0) 2017.12.10
한국사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0) 2017.12.08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0) 2017.12.07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⑤  (0) 2017.12.06

한국사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진실의 역사

한국사韓國史와 세계사世界史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중국 내몽골자치구와 요령성의 접경지역에서

세계 4대 문명권으로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보다

무려 1∼2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이 발견되었다.

 

이 만리장성 밖의 문명이 이른바‘홍산문화’, 일명‘ 요하문명’ 또는‘ 발해연안문명’이다.

홍산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내몽골 적봉시의 붉은 산인 ‘홍산’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단군왕검의 옛조선 이전의 상고문화인 환인의 환국과 환웅의 배달 문명을 알아야만 이 문명의 실체를 알 수 있다.

BCE 3500년을 기점으로 만리장성 밖의 홍산문화와 북방 초원문화가

황하 중류 만곡부인 오르도스 지역과 태항산 사이의 노선을 따라 중원으로 전파되었다.

 

이 문화 전수 경로를 중국 학자 쑤빙치蘇秉琦가 ‘Y벨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Y벨트를 따라 동방 신교의 제천문화와 삼족오, 용봉, 칠성과 같은 천자문화의 상징이 중원에 흘러들어 갔다.

 

이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신석기 문화인 앙소문화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한마디로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원류인 것이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0) 2017.12.10
홍산문화 시대 분류  (0) 2017.12.09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0) 2017.12.07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⑤  (0) 2017.12.06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④  (0) 2017.12.05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일제 식민사학과 한사군

 

고고학이 밝혀주는 낙랑군 실체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으로 보는 유력한 근거는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이다.

이 지역 무덤들은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 가지로 다른 지역 무덤과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학자들에 의하면 광복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3,000여기를 발굴 조사한 결과 나무곽무덤은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한漢나라가 출현하기 훨씬 전인 BCE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형태였으며, 귀틀무덤을 거쳐 벽돌무덤으로 발전하고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은 한나라 것과 다른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인 좁은 놋단검(세형동검)을 비롯해 조립식 쇠단검, 조립식 쇠장검, 질그릇과 마구 등이다.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중국계 유물은 무엇일까?

그 유물들을 잘 살펴보면 전한시대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약 2백년 뒤의 후한시대 또는 그 이후의 유물들만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한 시대의 유물들 대동강 유역에서는 〈점제평산군신사비○蟬平山郡神祠碑〉가 발굴되었는데“ ○和二年四月戊午, ?蟬長勃興”으로 시작된다. 첫 자는 읽을 수가 없으나 두 번째 和자가 들어간 중국 연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후한後漢 장제章帝시대로서 CE 85년이다.

 

문제는 낙랑군의 속현 가운데 하나인 점제?蟬현이 있는데 이 비석이 발굴된 지역은 낙랑군 점제현이 틀림없다고 발굴자들은 말하고 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연대가 확인되는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인데, 화천은 왕망王莽 때 주조된 청동제 화폐이다.

왕망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皇后 일족이었다가 황위를 빼앗아 신新을 건국(CE 8)하였지만, 불과 15년 만(CE 23)에 망했다.

 

그런데 이 화폐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통용되다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전한의 무제가 우거정권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BCE 108년 무렵의 유물이 아니라 왕망의 신新나라를 무너뜨리고 후한後漢을 세운(CE 25) 광무제 이후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위조된 봉니 출토되어 보고된 유물 가운데에는 위조품도 있었다.

낙랑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중에서 봉니封泥는 일제가 위조한 대표적 유물로 본다.

 

봉니는 문서를 운송하는 도중에 남이 보거나 위조하지 못하도록 죽간竹簡을 묶은 노끈 매듭에 진흙을 발라 도장을 찍은 것으로 그 서체나 모양도 다양하다.

 

그리고 봉니는 보내는 곳이 아닌 받는 곳인 낙랑군 지역 외에서 발견돼야하며, 문서를 보려면 봉니를 깨트려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은 드물다.

 

그런데 낙랑 봉니라는 것들은 대부분 형체도 온전하고 서체나 형태도 거의 흡사하다. 더구나 낙랑군 치소였다는 토성 터에서 받는 곳인 관할 현에 있어야 할 봉니가 200여 개나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수가 발견된 예는 없다.

 

그러한 봉니가 광복 후 북한이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 일제의 봉니 위조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하나도 없다.

 

오죽하면 한 일본인 역사학자는 위조한‘ 봉니封泥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으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부터 거액을 보상금으로 받았는데, 조선사 왜곡에 앞장섰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마저 그것은 위조라고 반발할 정도였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⑤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일제 식민사학과 한사군

 

대동강 유역의 낙랑국
최리의 낙랑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은 옥저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그 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神王(대무신열제)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딸로써 그의 처를 삼도록 하였다.(『삼국사기』)

라고 한 기록에서 군郡을 다스리는‘ 낙랑태수樂浪太守’라는 한나라 지방 관리의 호칭이 아니라 국國을 다스리는 ‘낙랑왕樂浪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때의 낙랑이 낙랑군이라면 ‘태수太守’라는 호칭을 써야한다.

이것은 대동강 유역이 한漢나라 군현인 낙랑군 지역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또『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 차차웅 원년(CE 3)에 낙랑의 군사가 신라 도성인 금성金城을 포위했는데, 여기서 낙랑을 일컬어 낙랑군이라 하지 않고‘ 이웃나라(隣國)’라 부르고 있다.

 

백제 책계왕조에는 대방의 통치자를‘ 대방의 왕[帶方王]’이라고 한 기록이 보이며, 또 신라 기림이사금 3년에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낙랑과 대방을 국가로 보고 있다.

 

만일 이들이 중국 세력이었다면 중국으로 돌아가야지 신라에 귀복했을리 만무한 것이다.

 

난하에서 건너온 최숭 대동강 부근에 있었던 낙랑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북부여기』에 따르면 BCE 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난하 유역에서 현재의 대동강으로 이주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임신 원년(BCE 169) 정월 낙랑왕 최숭崔崇이 해성에서 곡식 300석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E 195)년 겨울이었다.(북부여기)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낙랑왕 최리는 최숭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최숭이 마한 왕검성(지금의 평양)으로 오기 전 난하 유역에 원래 낙랑이 있었다.

 

최숭이 대동강 부근에 와서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나라이름을 낙랑국으로 삼았다.

난하지역에는 낙랑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그 당대의 기록인『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곳에 조선·낙랑현이 있다고 하였는데 갈석산은 현재도 하북성 창려현에 그대로 있다.

 

갈석산은 연나라 장성의 동쪽 끝인 양평 부근이요,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끝이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대동강이 아니라 난하 하류의 갈석산 부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