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⑤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일제 식민사학과 한사군

 

대동강 유역의 낙랑국
최리의 낙랑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은 옥저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그 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神王(대무신열제)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딸로써 그의 처를 삼도록 하였다.(『삼국사기』)

라고 한 기록에서 군郡을 다스리는‘ 낙랑태수樂浪太守’라는 한나라 지방 관리의 호칭이 아니라 국國을 다스리는 ‘낙랑왕樂浪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때의 낙랑이 낙랑군이라면 ‘태수太守’라는 호칭을 써야한다.

이것은 대동강 유역이 한漢나라 군현인 낙랑군 지역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또『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 차차웅 원년(CE 3)에 낙랑의 군사가 신라 도성인 금성金城을 포위했는데, 여기서 낙랑을 일컬어 낙랑군이라 하지 않고‘ 이웃나라(隣國)’라 부르고 있다.

 

백제 책계왕조에는 대방의 통치자를‘ 대방의 왕[帶方王]’이라고 한 기록이 보이며, 또 신라 기림이사금 3년에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낙랑과 대방을 국가로 보고 있다.

 

만일 이들이 중국 세력이었다면 중국으로 돌아가야지 신라에 귀복했을리 만무한 것이다.

 

난하에서 건너온 최숭 대동강 부근에 있었던 낙랑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북부여기』에 따르면 BCE 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난하 유역에서 현재의 대동강으로 이주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임신 원년(BCE 169) 정월 낙랑왕 최숭崔崇이 해성에서 곡식 300석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E 195)년 겨울이었다.(북부여기)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낙랑왕 최리는 최숭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최숭이 마한 왕검성(지금의 평양)으로 오기 전 난하 유역에 원래 낙랑이 있었다.

 

최숭이 대동강 부근에 와서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나라이름을 낙랑국으로 삼았다.

난하지역에는 낙랑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그 당대의 기록인『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곳에 조선·낙랑현이 있다고 하였는데 갈석산은 현재도 하북성 창려현에 그대로 있다.

 

갈석산은 연나라 장성의 동쪽 끝인 양평 부근이요,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끝이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대동강이 아니라 난하 하류의 갈석산 부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