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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③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한사군 위치의 핵심, 낙랑군樂浪郡

한사군 문제의 초점은 한사군의 위치 문제이다.

이를 규명하는 열쇠는 한漢 군현郡縣 설치의 출발점이자 위만정권의 도읍지 왕험성이 있었다는 낙랑의 위치를 찾는 데 있다.

 

현재 주류학계의 정설로 간주되어온 낙랑군 대동강설(재평양설在平壤說)은 이에 반론을 제기해온 여러 학자들의 문헌고찰을 통해 많은 모순이 발견되고 있다.


낙랑과 평양의 위치
먼저『후한서』「 동이열전」을 보면 111년에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을 쳐서 관리와 백성들을 살상하였다[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樂浪, 殺傷吏民](후한서』「동이열전」 부여조).

 

기존의 주장대로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라고 가정한다면 만주 송화강 유역에 위치한 부여(동부여)가 남쪽으로 진격하여 고구려의 수천 리 영토를 아무 제지도 안 받고 그대로 통과했다는 말이 되며, 개선할 때도 역시 무사통과했다는 말인데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11세 태왕인 동천열제東天烈帝(227~248)는 246년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도읍이 폐허가 되자 이듬해 환도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고구려는 장수왕 때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 기록은 고대의 평양이 여러 곳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주류사학계의 주장처럼 이때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평양=낙랑군)이라면 고구려가 수도를 적국의 땅인 낙랑군으로 옮겼다는 말이 되므로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주류사학계에서는 여전히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 낙랑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무제의 낙랑 공격
대동강 부근의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복속된 것은 CE 37년이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왕망王莽의 신新나라가 멸망하고 한 고조 유방의 후손인 유수劉秀(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가 후한後漢을 건국했는데, CE 44년 광무제는 바다를 건너 낙랑 지역을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 대무신왕 27년(44)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二十七年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之爲郡縣, 薩水已南屬漢](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이것을 기존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빼앗은 낙랑군을 광무제가 다시 빼앗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광무제 때 지금의 난하 유역에는 이미 낙랑군이 따로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국의 잔여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다음의 『태백일사』 기록에서처럼 낙랑국 유민들은 고구려에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대무신열제 20년(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동압록(압록강)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大武神列帝二十年, 帝襲樂浪國, 滅之. 東鴨綠以南, 屬我, 獨海城以南近海諸城, 未下](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해성은 지금의 요동반도 북부에 있다.

당시 해성이남인 요동반도까지도 최씨낙랑국의 기본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와 태백일사의 내용을 종합하면 광무제가 공격한 낙랑은 해성 이남 지역이다. ‘살수2) 이남’의 기록에서 살수는 요동의 주남하를 말한다. 후한 광무제가 대동강 주변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범위와 기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당시 신라가 한반도 북부의 낙랑을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라 일관되게 지칭한 사실과, 낙랑 멸망 후 그 유민이 중국이 아니라 신라에 귀부한 사실만 봐도 넉넉히 입증된다. (윤내현,『한국열국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