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일제 식민사학과 한사군

 

고고학이 밝혀주는 낙랑군 실체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으로 보는 유력한 근거는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이다.

이 지역 무덤들은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 가지로 다른 지역 무덤과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학자들에 의하면 광복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3,000여기를 발굴 조사한 결과 나무곽무덤은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한漢나라가 출현하기 훨씬 전인 BCE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형태였으며, 귀틀무덤을 거쳐 벽돌무덤으로 발전하고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은 한나라 것과 다른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인 좁은 놋단검(세형동검)을 비롯해 조립식 쇠단검, 조립식 쇠장검, 질그릇과 마구 등이다.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중국계 유물은 무엇일까?

그 유물들을 잘 살펴보면 전한시대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약 2백년 뒤의 후한시대 또는 그 이후의 유물들만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한 시대의 유물들 대동강 유역에서는 〈점제평산군신사비○蟬平山郡神祠碑〉가 발굴되었는데“ ○和二年四月戊午, ?蟬長勃興”으로 시작된다. 첫 자는 읽을 수가 없으나 두 번째 和자가 들어간 중국 연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후한後漢 장제章帝시대로서 CE 85년이다.

 

문제는 낙랑군의 속현 가운데 하나인 점제?蟬현이 있는데 이 비석이 발굴된 지역은 낙랑군 점제현이 틀림없다고 발굴자들은 말하고 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연대가 확인되는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인데, 화천은 왕망王莽 때 주조된 청동제 화폐이다.

왕망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皇后 일족이었다가 황위를 빼앗아 신新을 건국(CE 8)하였지만, 불과 15년 만(CE 23)에 망했다.

 

그런데 이 화폐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통용되다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전한의 무제가 우거정권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BCE 108년 무렵의 유물이 아니라 왕망의 신新나라를 무너뜨리고 후한後漢을 세운(CE 25) 광무제 이후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위조된 봉니 출토되어 보고된 유물 가운데에는 위조품도 있었다.

낙랑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중에서 봉니封泥는 일제가 위조한 대표적 유물로 본다.

 

봉니는 문서를 운송하는 도중에 남이 보거나 위조하지 못하도록 죽간竹簡을 묶은 노끈 매듭에 진흙을 발라 도장을 찍은 것으로 그 서체나 모양도 다양하다.

 

그리고 봉니는 보내는 곳이 아닌 받는 곳인 낙랑군 지역 외에서 발견돼야하며, 문서를 보려면 봉니를 깨트려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은 드물다.

 

그런데 낙랑 봉니라는 것들은 대부분 형체도 온전하고 서체나 형태도 거의 흡사하다. 더구나 낙랑군 치소였다는 토성 터에서 받는 곳인 관할 현에 있어야 할 봉니가 200여 개나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수가 발견된 예는 없다.

 

그러한 봉니가 광복 후 북한이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 일제의 봉니 위조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하나도 없다.

 

오죽하면 한 일본인 역사학자는 위조한‘ 봉니封泥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으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부터 거액을 보상금으로 받았는데, 조선사 왜곡에 앞장섰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마저 그것은 위조라고 반발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