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환단고기 수행문화③-배달국 환웅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에서 만나는 수행문화

 

2. 큰 스승, 대인 환웅


주문으로 하나된 배달국의 백성들
7대 환인께서 환국말기의 혼란을 수습할 적임자를 찾을 때 오가의 무리들이 이구동성으로 환웅을 추천하였습니다.

‘용겸인지勇兼仁知’라는 「삼성기 하」의 기록이 말해주듯 이미 환웅은 비상사태를 수습하는 추진력과 반대파를 아우르는 포용력, 그리고 깨달음의 지혜를 겸비한 인물로 큰 인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환웅천왕의 자호自號 거발환居發桓은 ‘지극히 크고 무한히 조화롭고 하나로 통일된다’ 는 대원일大圓一과 같은 뜻입니다.

거발환과 대원일 둘 다 삼신의 자기 현현顯現인 천지인의 광명정신을 상징합니다.

 

환웅은 배달국 건국 초 이주민 웅족熊族과 토착민 호족虎族의 대통합을 위한 방법으로 주문수행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웅족은 무사히 수행기간을 마침으로써 삼신의 계율을 따르는 광명 민족의 일원이 되었고 반면 호족은 세속의 묵은 기운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쫓겨나게 됩니다.

 

雄(웅)이 聞之曰可敎也(문지왈가교야)라 하시고 乃以呪術(내이주술)로 換骨移神(환골이신)하실새
先以神遺靜解(선이신유정해)로 靈其艾一炷(영기애일주)와 蒜二十枚(산이십매)하시고 戒之(계지)하야
曰(왈) 爾輩食之(이배식지)하라 不見日光百日(불견일광백일)이라야 便得人形(변득인형)이리라.

 

역주 환웅께서 이 소식을 듣고 “가히 가르칠 만 하도다” 하시고, 신령한 도술로써 환골換骨케 하여 정신을 개조시키셨다. 이때 먼저 삼신께서 전해주신 정해법靜解法으로 그렇게 하셨는데,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영험하게 여겨 이를 주시며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것을 먹을지어다.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참된 인간이 되리라.” (「삼성기전 下」)

 

「삼성기 상」의 기록을 보면 환웅천왕 스스로도 3·7(21일) 도수를 정해 상제님께 제사지내고 주문을 읽었습니다.

주문을 읽으며 수행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원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문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과 ‘환골이신’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몸의 질병을 치유하고 마음속의 원한을 풀어주는 신력神力이 있습니다.

당시 환웅천황이 내려주신 주문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擇三七日(택삼칠일)하사 祭天神(제천신)하시며 忌愼外物(기신외물)하사 閉門自修(폐문자수)하시며
呪願有功(주원유공)하시며 服藥成仙(복약성선)하시며 劃卦知來(획괘지래)하시며
執象運神(집상운신) 하시니라

 

역주 삼칠일(21)을 택하여 상제님께 제사지내고 바깥일[外物]을 꺼리고 삼가 문을 닫고 수도하셨다. 주문을 읽고 공덕이 이뤄지기를 기원하셨으며, 선약을 드시어 신선이 되셨다. 괘卦를 그어 미래의 일을 아시고, 천지변화의 움직임[象]을 파악하여 신명을 부리셨다[執象運神] (「삼성기전 상」)

동서양 수행론의 원전, 삼일신고
환웅은 개천開天 후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삼일신고」를 직접 지어 내려주셨습니다.

이는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물주 삼신, 그 삼신의 조화권을 자유자재로 쓰시며 하늘궁궐에서 우주 살림을 주재하시는 삼신상제님, 삼신을 근원으로 하여 화생한 인간과 만물의 탄생 섭리, 그리고 인간의 진아 실현 등에 대한 이치를 밝혀 줍니다.

 

환웅은 「삼일신고三一神誥」를 통해 수행문화를 크게 진작시키는 것으로 국초국말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삼일신고」를 통해 이미 상고 시대에 한민족은 우주와 신과 인간에 대한 지극한 깨달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삼일신고의 5장 인물人物 장에서는 인간 마음의 구성에 대해 성명정, 심기신, 감식촉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6천년 전에 마음과 기운, 몸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삼일신고」는 동서양 수행론과 인성론의 원전原典입니다.

「삼일신고」에서 삼진三眞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수행원리는 태고 시절부터 내려오는 신교 삼신수행법의 핵심이자 동·서양 모든 수행법의 기본원리입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삼일신고』는 신교의 세계관과 신관과 상제관, 인간관과 수행관의 정수를 요약한 경전이다.

환웅천왕께서 환국에서 전수된『천부경』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진리의 핵심을 풀어 다섯 개 장으로 지은 것이다.

366자로 구성된 『삼일신고』는 집일함삼執一含三과 회삼귀일會三歸一을 근본정신으로 삼고 있다.

『삼일신고』는 인간과 만물은 삼신 상제님의 조화로 생겨났음을 밝혀 준다.

또한 인간이 삼신의 우주 광명의 본성에 통하여 삼신의 공덕을 완수하고 삼계 우주 역사의 이상을 실현하는 태일太一인간으로 거듭나는 진아眞我 실현의 길을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5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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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수행문화②-태고 시절 황금시대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에서 만나는 수행문화②


1. 태고 시절은 황금시대

 

인간은 살아있는 삼신

우주 만유 생명의 근원을 삼신三神이라고 합니다.

삼신은 일신의 세 가지 작용으로 곧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입니다.

하늘, 땅, 인간은 삼신의 자기현현自己顯現으로 살아있는 삼신입니다.

 

이들 천지인 속에 삼신의 광명과 3대 신성이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天一, 地一, 人一).

특히 인간은 천지를 그대로 닮아 궁극적으로 천지의 꿈과 목적을 성취하는 존재이기에 태일太一이라 하였습니다.

태고 시절은 인간 몸속에 내재한 삼신의 신성을 충분히 발휘하며 살았던 조화의 시대입니다.

 

夫三神一體之道(부삼신일체지도)는 在大圓一之義(재대원일지의)하니 造化之神(조화지신)은 降爲我性(강위아성)하고 敎化之神(교화지신)은 降爲我命(강위아명)하고 治化之神(치화지신)은 降爲我精(강위아정)하니 故(고)로 惟人(유인)이 爲最貴最尊於萬物者也(위최귀최존어만물자야)라.

 

역주 대저 삼신일체(삼신과 하나됨)의 도[三神一體之道]는 ‘무한히 크고 원융무애하며 하나 되는 정신[大圓一]에 있으니, 조화신造化神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성품[性]이 되고, 교화신敎化神이 내려 삼신의 영원한 생명인 나의 목숨[命]이 되며, 치화신治化神이 내려 나의 정기[精]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된다. (「단군세기 서序」)

천지와 하나된 사람들

서양의 고대 문명 연구가들은 인류 역사의 초기를 ‘황금 시대the golden age’라 부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그 시대 사람들은 금속무기가 없이 오직 석기만 쓰면서 전쟁을 꾀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대규모로 살상하지도 않았고, 하늘과 땅에 애정을 듬뿍 쏟으며 살았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법칙에 그대로 순응했고 또 천지의 광명을 체험하는 것을 생활의 목표이자 삶의 화두로 삼았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古俗(고속)이 崇尙光明(숭상광명)하니 以日爲神(이일위신)하고 以天爲祖(이천위조)하야 萬方之民(만방지민)이 信之不相疑(신지불상의)하고 朝夕敬拜(조석경배)하야 以爲恒式(이위항식)하니라 太陽者(태양자)는 光明之所會(광명지소회)요 三神之攸居(삼신지유거)니
人得光以作(인득광이작)하면 而無爲自化(이무위자화)라 하야 朝則齊登東山(조즉제등동산)하야 拜日始生(배일시생)하고
夕則齊趨西川(석즉제추서천)하야 拜月始生(배월시생)하니라

 

역주 옛 풍속에 광명을 숭상하여 태양을 신으로 삼고, 하늘을 조상으로 삼았다. 만방의 백성이 이를 믿어 서로 의심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경배함을 일정한 의식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모인 곳으로 삼신께서 머무시는 곳이다. 그 광명을 얻어 세상일을 하면 함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여,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모두 함께 동산東山에 올라 갓 떠오르는 해를 향해 절하고, 저녁에는 모두 함께 서천西川으로 달려가 갓 떠오르는 달을 향해 절하였다. (『태백일사』「환국본기」)


환인은 동·서양 신선神仙의 비조鼻祖

환국의 역년을 보면 재위 기간이 약 470년에 가깝습니다.

이것을 허구의 기록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동양 의학서의 고전인 『황제내경』 제1장에 나오는 황제와 기백의 대화에서도 먼 옛날에 누렸던 장수 문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어찌하여 백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는가’라는 황제의 질문에, 기백이 ‘그들은 천지의 법칙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라 답하였습니다.

 

수메르 문명의 원형을 보여주는 『구약전서』「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도 노아(900살)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백 살을 살았고, 유대족 믿음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브라함도 175세를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선 계보를 적은 『청학집』에서 동방 선의 최고最古 조상으로 환인을 지목한 것에서도 환국은 사람들이 수행을 생활화하여 선仙의 경지에서 살았던 조화 시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初(초)에 桓仁(환인)이 居于天山(거우천산)하사 得道長生(득도장생)하사 擧身無病(거신무병)하시며
代天宣化(대천선화)하사 使人無兵(사인무병)하시니 人皆作力(인개작력)하야 自無飢寒(자무기한)이러라.

 

역주 처음에 환인께서 천산에 머무시며 도를 깨쳐 장생하시니 몸에는 병이 없으셨다. 하늘(삼신상제님)을 대행하여 널리 교화를 베풀어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셨다. 모두 힘을 합해 열심히 일하여 굶주림과 추위가 저절로 사라졌다. (「삼성기 하」)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태곳적 광명문화와 인류 시원역사를 밝힌 『환단고기』의 모든 구절을 주문에 비유한다면, 그 비자bija(종자) 만트라는 바로 ‘환’이다.

‘환’은 천광명天光明으로 우주의 광명을 뜻한다.

그 환을 빌어 『환단고기』는 현 문명의 시원 인류를 ‘오환吾桓’, 즉 ‘우리환족’이라 부른다.

태곳적 인류를 천지광명이 충만한 존재로 보는 ‘오환’(우리는 누구나 우주의 광명인 환桓이라는 선언)은 인간의 신성神聖과 위격에 대한 최상의 정의라 할수 있다.

인간에 대한 숭고한 선언인 ‘오환’을 담고 있는 『삼성기』 상편의 첫 구절 “오환건국이 최고라”는 온 인류가 암송해야 할 명구이자 주문인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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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수행 문화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수행修行 문화①

 
반가부좌의 여신상

문화유물은 시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문화유물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 문화, 제도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곧 문화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다리입니다.

 

1983년 홍산문화의 우하량 제 2지점의 신전神殿(廟)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소조상塑造像이 발굴되었습니다.

사람의 실물크기 모습에 가슴이 풍만하고 반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 유물을 학자들은 여신상女神像으로 불렀습니다.

여신묘女神廟 주변에 적석총군이 함께 발견되어 이 여신 또한 홍산인들에게 조상신으로 숭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신전 안에서 곰의 턱뼈와 곰 발 모양의 진흙소조가 함께 발굴되었다는 점입니다.

조상신으로 받들어진 여성, 반가부좌 모양을 통해 알 수 있는 수행인, 곰과 관련 있는 사람, 과연 우리 역사에서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여성은 누굴까요?

 

역사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의 수행 이야기’가 연상될 것입니다.

『환단고기』 「삼성기」 하下에 따르면 당시 웅족은 수행기간을 무사히 마쳐 환족의 일원이 되었고 웅족의 우두머리 웅녀군熊女君은 환웅천왕과 혼인하였습니다. 발굴된 여신상은 바로 5,900년 전의 웅녀를 모신 것입니다.


주문을 읽는 남자

지난 2012년 7월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오한기 지역의 집터에서 도소남신상陶塑男神像(흙으로 구운 남신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깨어진 조각들을 붙이고 복원한 결과 높이 55㎝의 남성의 모습이었습니다.

 

5,3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남자 조각상은 땋아 올린 듯한 머리모양에 다리는 반가부좌를 틀고 있습니다.

손은 하단전에 공수자세로 가지런히 모았고 입은 O자 모양으로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남성은 주문呪文을 읽고 있습니다.

앞의 여신상이 반가부좌 모양으로 수행의 자세를 강조했다면 뒤의 남신상은 같은 자세에 입을 벌린 모습을 통해 주문수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여러 수행 방법 중에 주문을 읽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지도층에서 주문 수행법을 제도적, 문화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이 남신상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과연 5,000년 이전의 배달국, 환국의 사람들에게 주문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여신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한 홍산인을 환단 시대의 배달 동이족과 연관지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을『환단고기』에서 전하고 있다.

바로 배달이 세워진 직후, 호족과 웅족이 환웅천황을 찾아와 환족으로 교화되기를 청한 사건이다.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 중심의 사나운 부족이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 중심의 우매한 부족이었다.

삼신의 도를 깨쳐 광명 인간이 되기 위해 두 부족은 일체의 활동을 금하고 수행 공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호족은 공부를 중도에 그만 두었고 웅족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행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262쪽)

 

☞ 주문은 태고 시대부터 전수된 ‘우주 음악Cosmic Music’이요, 인간이 하늘땅과 하나 되어 부르는 ‘생명의 노래’요, ‘천지 광명의 음악’이요, ‘깨달음의 노래’인 것이다.

삼신의 신성과 생명과 지혜가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내려올 때는 ‘빛Light과 소리Sound’로 나타난다.

인간의 눈으로 들어올 때는 빛으로, 귀로 들어올 때는 소리로 전해 온다.

신의 뜻이 시각(visualization)과 청각(auralization), 음양 짝의 두 가지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신의 뜻이 청각화되어 나타난 것, 그것이 바로 주문이다.

주문은 곧 ‘신의 소리’요 ‘우주의 노래’, ‘신의 노래’인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600쪽)

신라 화랑-낭가의 맥②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핵랑의 기원과 전승맥


1. 핵랑의 기원은 삼랑

동방 신교문화의 중심에 핵랑이 있었습니다.

핵랑은 신교의 성직자 그룹이자, 국가 재난 상황을 대비하는 상비군이요, 나라 경영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인재의 보고였습니다.

 

핵랑의 기원은 환웅천황이 개천開天 후 삼랑三郞이라는 관직을 만든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소급해 올라가면 7대 환인 천제가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시고 3,000명의 일꾼을 붙여 주신 것이 그 역사의 시발입니다.

당시 동방 개척에 나선 27세의 환웅과 3,000명의 문명개척단은 역사의 무대를 환국의 삼신산(천산, 삼위산, 금악산)에서 동쪽의 태백산으로 옮긴 역사 혁명가들이요, 동방 역사의 젊은 피였습니다.

 

五加僉曰(오가첨왈) 庶子(서자)에 有桓雄(유환웅)이 勇兼仁智(용겸인지)하고 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상유의어역세이홍익인간)하오니 可遣太白而理之(가견태백이리지)니이다 하야늘 乃授天符印三種(내수천부인삼종)하시고 仍敕曰(잉칙왈) 如今(여금)에 人物(인물)이 業已造完矣(업이조완의)니 君(군)은 勿惜厥勞(물석궐로)하고 率衆三千而往(솔중삼천이왕)하야 開天立敎(개천입교)하고 在世理化(재세이화)하야 爲萬世子孫之洪範也(위만세자손지홍범야)어다.

 

역주 오가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답하였다. “서자庶子에 환웅이란 인물이 있는데 용기와 어짊과 지혜를 겸비하고,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동방의 태백산(백두산)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에 환인께서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종류를 주시며 명하셨다. “이제 인간과 만물이 이미 제자리를 잡아 다 만들어졌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가서,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開天立敎]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을지어다.” (「삼성기 하」)

 

護守三神(호수삼신)하야 以理人命者(이리인명자)를 爲三侍郞(위삼시랑)이니 本三神侍從之郞(본삼신시종지랑)이오 三郞(삼랑)은 本倍達臣(본배달신)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역세습삼신호수지관야)니라. 高麗八觀雜記(고려팔관잡기)에 亦曰(역왈)「三郞(삼랑)은 倍達臣也(배달신야)라」 하니 主稼種財利者(주가종재리자)는 爲業(위업)이오 主敎化威福者(주교화위복자)는 爲郞(위랑)이오 主聚衆願功者(주취중원공자)는 爲伯(위백)이니 卽古發神道也(즉고발신도야)라 皆能降靈豫言(개능강령예언)하야 多神理屢中也(다신리누중야)라

 

역주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郞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發] 신도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郞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2. 핵랑제도의 변천

고조선의 국자랑 배달국을 계승한 단군조선 시대에도 삼랑의 관직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3세 단군 때 한글의 원형 가림토 문자를 창제한 을보륵乙普勒 역시 삼랑이었습니다.

13세 흘달 단군 때 이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여 국자랑國子郞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국자랑들은 천왕랑으로도 불렸는데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 천지화를 머리에 꽂고 다녔기에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라 화랑의 어원과 기원은 바로 천지화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화

랑의 계율 세속오계 역시 소도의 계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소도에 모여 신교 수행과 함께 자기개발에 매진하다가 외적이 침입하거나 병란兵亂이 생기면 무사武士가 되어 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戊戌二十年(무술이십년)이라 多設蘇塗(다설소도)하사 植天指花(식천지화)하시고 使未婚子弟(사미혼자제)로
讀書習射(독서습사)하사 號爲國子郞(호위국자랑)하시니라. 國子郞(국자랑)이 出行(출행) 頭揷天指花(두삽천지화)하니
故(고)로 時人(시인)이 爲天指花郞(위천지화랑)이라.

 

역주 재위 20년 무술(단기 571, BCE 1763)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으셨다. 미혼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단군세기)


源花(원화)는 稱女郞(칭여랑)이오 男(남)은 曰花郞(왈화랑)이니 又云天王郞(우운천왕랑)이라. 自上(자상)으로 命賜烏羽冠(명사오우관)하야 加冠(가관)에 有儀注(유의주)라.

역주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는 화랑花郞이라 하는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였다. 임금으로부터 오우관烏羽冠을 하사 받아 썼는데 관을 쓸 때 예식을 거행하였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蘇塗之立(소도지립)에 皆有戒(개유계)하니 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충효신용인오상지도야)라. 蘇塗之側(소도지측)에 立扃堂(입경당)하야 使未婚子弟(사미혼자제)로 講習事物(강습사물)하니 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개독서습사치마예절가악권박)(並劒術)(병검술))六藝之類也(육예지류야)라.

 

역주 소도가 건립된 곳에는 모두 계율을 두었는데,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이라는 오상의 도[五常之道]가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사물事物을 익히게 하였는데, 대개 독서·활쏘기·말달리기·예절·가악·권박(검술을 겸함)으로 육예六藝의 종류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북부여의 천왕랑 조선의 국자랑은 북부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허리에 칼을 찬 해모수 단군의 모습에서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왕랑들은 머리에 꽃과 더불어 새의 깃털을 꽂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유풍은 바다 건너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깃털로 모자를 만드는 풍습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모자의 깃털은 부족의 상징이면서 전사의 용맹을 상징합니다. 고구려 조의들과 신라 화랑들이 모자에 깃털을 꽂아 그들의 신분과 명예를 표현한 것과 일치합니다.

 

帝(제)는 天姿英勇(천자영용)하시고 神光射人(신광사인)하시니 望之若天王郞(망지약천왕랑)이러시라. 年二十三(연이십삼)에 從天而降(종천이강)하시니 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시단군고열가오십칠년임술사월팔일야라. 依熊心山而起(의웅심산이기)하사 築室蘭濱(축실난빈)하시고 戴烏羽冠(대오우관)하시며 佩龍光劒(패용광검)하시며 乘五龍車(승오룡거)하시니라.

 

역주 해모수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이다. 임금께서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같았다. 23세에 천명을 좇아 내려오시니, 이때는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단기 2095)으로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임금께서 웅심산熊心山 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帝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劒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셨다. (「북부여기」)

 

삼국의 핵랑제도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조의弔意, 무절武節, 화랑花郞이라는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조의에서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걸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 당태종 이세민의 항복을 받아 낸 연개소문과 문무를 겸비한 을파소乙巴素, 명림답부明臨答夫 등이 조의출신이었습니다. 고구려·수나라의 전쟁 당시에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조의 20만’이 전쟁터에 나가 130만이나 되는 수의 대군을 궤멸시켜 인류전쟁사에 기록을 세웠습니다. 신라가 1,000년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화랑도의 정신과 기강이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후기에 와서 불교에 밀려 신교가 쇠퇴해지고 덩달아 화랑 정신도 퇴색하면서 신라는 정치로는 사대事大, 군사로는 유약柔弱에 빠져 망국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自是(자시)로 俗尙(속상)이 叅佺有戒(참전유계)하고 皂衣有律(조의유율)하나니 衣冠者(의관자)는 必帶弓矢(필대궁시)하고 能射者(능사자)는 必得高位(필득고위)하야 善心(선심)은 爲修行之本(위수행지본)하고 貫革(관혁)은 爲假想之惡魁(위가상지악괴)하니라.

 

역주 이때부터 세상에서는 참전叅佺에게 지켜야 할 계戒가 있고, 조의皂衣에게 율律이 있어 숭상하였는데,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착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고 활을 쏘았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乙巴素(을파소)가 爲國相(위국상)에 選年少英俊(선연소영준)하야 爲仙人徒郞(위선인도랑)하니 掌敎化者(장교화자)를 曰叅佺(왈참전)이니 衆選守戒(중선수계)하야 爲神顧托(위신고탁)하며 掌武藝者(장무예자)를 曰皂衣(왈조의)니 兼操成律(겸조성률)하야 爲公挺身也(위공정신야)라.

 

역주 을파소가 국상國相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叅佺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환국 말기에 태동한 제세핵랑과 배달 시대의 삼랑은 그 후 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花郞 →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모두 평상시에는 삼신상제님의 진리를 공부하며 완전한 인격체의 길을 추구하고, 학문과 무예를 동시에 연마하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구국의 선봉에서 목숨을 바쳐 국난을 물리쳤다.

결론적으로 낭가는 신교의 구도자이며 또한 역사 개척의 선봉장으로서 한 시대의 구국청년단이었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85쪽)

              

3. 낭가의 맥이 약해진 계기

고려 시대에도 낭가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신라의 화랑을 계승하여 국가 차원에서 국선國仙·선랑仙郞 제도를 운영한 것입니다.

이 제도는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으로, 대몽항쟁 때는 삼별초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낭가의 맥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으니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역사상 일천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 일컬었던 서경 전쟁(묘청의 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묘청의 반란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묘청과 김부식의 싸움은 평양 천도파 대對 개경 고수파, 칭제북벌稱帝北伐파 대 존화주의尊華主義파, 낭가파 대 유교파, 자주·진보파 대 사대·보수파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이 김부식 일파의 승리로 끝나게 됨으로써 그 이후 역사는 전자前者가 아닌 후자後者의 길로 대세가 꺾이게 됩니다.

 

김부식은 반란군 토벌을 위해 출병하기 전에 정치 라이벌이자 칭제북벌론자였던 정지상과 백수한을 모함하여 피살하고 전쟁 후에는 윤언이를 탄핵하여 귀양보냈습니다.

전쟁 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사서들은 철저히 배제하였고 반면에 춘추필법에 의해 쓰여진 중국 측 기록들은 충실하게 인용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의 자랑스런 낭가의 역사는 대폭 삭제되거나 수정, 폄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후에는 일체의 사료를 궁중에 비장하여 다른 사람이 열람할 길을 끊음으로써 박학자博學者란 자신의 명예를 보전하고 삼국사기를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유행하는 역사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단재는 ‘아 슬프다. 당의 장수 이적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문헌들을 소탕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 사학계에 끼친 재앙이 어찌 김부식의 서경 전쟁의 결과에 미칠 수 있으랴’ 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조의는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한민족의 신교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신교의 종교 군대)이다.

이 조의선인을 한민족 고유의 선비라 말할 수 있는데, 유교·불교·도교 등 외래 사상에 물들지 않은 한민족 고유의 선비상은 문사文士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상무尙武적 무사武士’였다.

조의는 개인적인 완성이 아니라 항상 공도公道와 국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내던지는 살신성도殺身成道를 이상과 목적으로 삼은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이었다. (환단고기 역주본 본문 625쪽 미주)

신라의 힘 화랑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역사의 개척자 핵랑


신라의 힘, 화랑花郞


단기 2993년(기원 660년) 7월, 여기는 백제 땅 황산벌입니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군대는 이곳에서 국가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습니다.

나·당 연합에 의해 당나라 군대는 이미 금강 하구의 기벌포伎伐浦(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상륙하여 동진하고 있으니 백제는 동과 서에서 양국의 협공을 받고 있습니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처자를 자기 손으로 베고 나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왔습니다.

신라군은 김유신과 흠춘, 품일 등이 거느리고 있는 5만 대군입니다.

비록 신라군이 백제군보다 그 수가 10배 이상 많았지만 계백 장군의 뜨거운 충의와 백제군의 기세에 눌려 네 번의 싸움에서 네 번 다 패하였습니다.

신라군으로서는 병사들의 가슴에 전의戰意의 불을 타오르게 할 불쏘시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바로 장렬한 죽음을 통한 병사들의 적개심 고취입니다. 먼저 흠춘이 자신의 아들이자 화랑인 반굴盤屈을 내세웠습니다.

 

반굴과 그의 무리들은 기꺼이 적진으로 돌충하여 전부 전사하였습니다.

이어 품일도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16세로 나이가 가장 어렸던 관창 역시 결국 목이 베이어 그 머리가 애마의 꼬리에 매달린 채 돌아오게 됩니다.

관창의 장렬한 죽음과 아버지의 오열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신라군은 용기백배하여 5천 결사의 저항선을 뚫고 백제의 왕도로 진군하였습니다.

 

황산벌 싸움을 통해 당시 신라의 지도층이 백제의 멸망이라는 국가 ‘아젠다agenda’를 위해 멸사봉공의 자세로 헌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터라지만 아버지가 나이 어린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더해진 신라 화랑들의 가상한 용기와 아름다운 희생은 나라의 백성들도 기꺼이 고통분담의 길에 동참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비록 완전한 통일은 아니지만 변방의 작은 나라 신라의 성공에 화랑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화랑제도는 신라만 운영한 게 아닙니다.

고구려와 백제 역시 이름만 다를 뿐 신라의 화랑과 같은 제도가 있었고 그 기원은 상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낭가郎家라고 하여 우리의 고유한 신앙문화 집단이라고 하였습니다.

      


망국으로 이끈 의자왕의 실정

망국의 패주敗主 의자왕, 흔히들 백제 멸망의 주범으로 이야기합니다.

원래 의자왕은 태자 시절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로 불리울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내치를 다지고 군대를 양육하여 왕성한 정복활동을 벌여 연이은 승전고를 올립니다.

 

고高·당唐 전쟁(645년)이 한창일 때는 계백에게 명하여 신라의 뒤를 습격하여 7개 성을 회복하고 윤충을 보내어 부사달 등 10여개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동시에 해군으로는 당의 강남을 습격하여 월주越州 등지를 점령하여 해외의 개척지를 착착 경영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대야성을 쳐서 인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백제가 망하기 5년 전인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백제가 아무리 나·당 연합군의 공격이 있었다지만 그리도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의자왕의 실정이 있었습니다.

특히 막바지에 보여준 결정적인 판단 착오 몇 가지는 세월 무상에도 불구하고 두고 두고 한스러움으로 남습니다.

 

그 첫째는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흥수興首 등의 충신을 내친 것입니다.

경륜과 지혜가 풍부한 이들이 쫓겨나자 조정은 모략꾼, 간신배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성충과 윤충의 건의대로 지세地勢의 험함을 이용하여 적을 막지 못한 점입니다.

그들은 당나라 군사들은 기벌포(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들은 탄현炭峴(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 고개)을 넘지 못하게 하라고 했으나 이 의견은 간신들에 의해 묵살됩니다.

결국 당나라 군사들은 무사히 상륙하였고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황산벌에 다다랐습니다.

 

셋째는 최고 지도자로서 현장을 굳건히 지키고 결사항전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점입니다.

의자왕에게는 적자가 여럿이고 서자들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이 각기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서 정책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왕 역시 누구의 말을 좇아야 할지 몰라 왕자들의 말을 다 허락하고는 자신은 몸소 태자太子와 함께 북경北京의 곰나루성(웅진熊津)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주인이 없는 마당에 누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의자왕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에 백제의 운명은 끝나버렸습니다.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을 지키는 대장이 그를 잡아 항복하려고 하자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동맥이 끊어지지 않아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묶여서 당나라 진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말년에 계속 되었던 판단과 결단력 부족이 자결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계속됩니다.

향락과 사치에 젖어 성명정 삼관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신교는 동방 한민족이 9천 년 역사를 지속할 수 있게 한 역사의 혼이다.

이러한 신교 정신을 직접 실천하고 신교를 바탕으로 새 문명을 열고 나라를 개창한 ‘역사개척의 집단’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낭가郎家이다.

한민족사는 낭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국 말기에 환인천제로부터 천부와 인을 받은 환웅을 따라 이주하여 배달을 세운 3천 명의 제세핵랑濟世核郞이 낭가의 시초이다.

이 최초의 핵랑의 정신을 살려 배달은 삼랑三郞 제도를 시행하였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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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 삼한오가三韓五加

 

한 분 일신一神께서 세 가지 덕성으로 작용하니 삼신이라 합니다.

삼신께서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과 봄 여름 장하 가을 겨울의 다섯 시간을 관장하는 오제를 다스립니다.

1에서 3으로 다시 5로 분화되어 나가는 신교의 우주론에 따라 우리의 조직 문화에도 1, 3, 5의 정신이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요컨대 삼신오제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 민족은 환국에서부터 배달국, 단군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 고려까지 국가통치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하늘 원리를 그대로 인사화한 민족이기에 우리는 천손민족입니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삶의 궤적은 시간 속으로 흘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됩니다.

또 오늘 우리의 모습과 발걸음이 동력이 되어 미래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왜곡, 단절 없이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현실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닥쳐오는 변혁에 대비하여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민족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혼란의 난맥상, 그 깊은 곳에는 ‘역사왜곡’과 ‘역사상실’이라는 큰 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 개조작업 역시 그 병근病根을 도려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환단고기』라는 특급 처방약을 전수받고, 역사광복의 칼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환단고기』가 전하는 우리 역사의 본래 모습과 한문화의 원형질, 그리고 상고 시대의 조직제도와 국가 통치원리에 눈 떠야 합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들, 나라를 경영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하루 속히 『환단고기』를 통해 국가 발전의 큰 영감을 찾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신교의 삼신오제三神五帝 사상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움직여 온 사상적 기반이었다.

그래서 신교가 밝히는 동방 문화의 우주관의 핵심인 삼신오제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잃어버린 한민족의 국통 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상고시대 한민족의 국가 통치 제도의 구성 원리를 처음으로 상세히 기록한 『환단고기』는 오늘날 국가 경영을 연구하는 데에도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92쪽)

 

삼한관경제三韓官境制를 노래한 서효사誓效詞

6세 단군이 여러 왕들을 상춘常春에 모아 구월산九月山에 천제를 지낼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제문祭文을 짓게 하였다.

나중에 이것이 신지비사神誌秘詞로 알려졌다.


朝光先受地(조광선수지)에 三神赫世臨(삼신혁세림)이로다
아침 햇빛 먼저 받는 이땅에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임하셨고

桓因出象先(환인출상선)하사 樹德宏且深(수덕굉차심)이로다
환인천제 먼저 법을 내셔서 덕을 심음에 크고도 깊사옵니다.

諸神議遣雄(제신의견웅)하사 承詔始開天(승조시개천)이로다
모든 신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셔서 환인천제 조칙 받들어 처음으로 나라 여셨사옵니다.

蚩尤起靑邱(치우기청구)하시니 萬古振武聲(만고진무성)이로다
淮岱皆歸王(회대개귀왕)하니 天下莫能侵(천하막능침)이로다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 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사옵니다.

王儉受大命(왕검수대명)하시니 懽聲動九桓(환성동구환)이로다
단군왕검 하늘의 명을 받으시니 기쁨의 소리 구환에 울려 퍼졌사옵니다.

魚水民其蘇(어수민기소)오 草風德化新(초풍덕화신)이로다
물고기 물 만난 듯 백성들이 소생하고 풀잎에 부는 바람처럼 덕화가 새로워졌사옵니다.

怨者先解怨(원자선해원)이오 病者先去病(병자선거병)이로다
원한 맺힌 자 원한 먼저 풀어주고 병든 자 먼저 낫게 하셨사옵니다.

一心存仁孝(일심존인효)하시니 四海盡光明(사해진광명)이로다
일심으로 인과 효를 행하시니 사해에 광명이 넘치옵니다.

眞韓鎭國中(진한진국중)하니 治道咸維新(치도함유신)이로다
진한이 나라 안을 진정시키니 정치의 도는 모두 새로워졌사옵니다.

慕韓保其左(모한보기좌)하고 番韓控其南(번한공기남)이로다
모한은 왼쪽을 지키고 번한은 남쪽을 제압하옵니다.

巉岩圍四壁(참암위사벽)하니 聖主幸新京(성주행신경)이로다
깎아지른 바위가 사방 벽으로 둘러쌌는데 거룩하신 임금께서 새서울에 행차하셨사옵니다.

如秤錘極器(여칭추극기)하니 極器白牙岡(극기백아강)이오
삼한형세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같으니 저울판은 백아강이요

秤榦蘇密浪(칭간소밀랑)이오 錘者安德鄕(추자안덕향)이로다
首尾均平位(수미균평위)하야 賴德護神精(뇌덕호신정)이로다
저울대는 소밀랑이요 저울추는 안덕향이라 머리와 꼬리가 서로 균형이루니 그 덕에 힘입어 삼신정기 보호하옵니다.

興邦保太平(흥방보태평)하야 朝降七十國(조항칠십국)이로다
나라를 흥성케 하여 태평세월 보전하니 일흔 나라 조공하며 복종하였사옵니다.

永保三韓義(영보삼한의)라야 王業有興隆(왕업유흥륭)이로다
길이 삼한관경제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이옵니다.

興廢莫爲說(흥폐막위설)하라 誠在事天神(성재사천신)이로다.」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 천신(삼신상제)님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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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 삼한오가三韓五加

 

STEP2. 삼신오제로부터 출발한 조직 문화

 

3. 삼한으로 다스린 단군조선


고조선의 삼한관경제
단군조선 시대에도 신교의 ‘삼신오제사상’을 현실의 인사제도에 그대로 적용하여 삼한오가三韓五加라는 국가통치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단군왕검께서는 천지인의 삼신 문화에 입각하여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이 삼한관경제는 고조선 역사와 문화의 핵심을 헤아리는 결정적이고 중대한 열쇠입니다.

상제님의 아들인 대단군이 태일太一의 천자로서 중앙의 진한을 다스리고 두 명의 부단군이 각각 천일天一과 지일地一이 되어 천자를 보필하여 마한과 번한을 다스렸습니다.

 

번한, 마한도 역시 진한처럼 수도가 있었고 삼한오가의 중앙 행정조직을 운영하였습니다.

수도를 아사달 또는 왕검성이라 불렀는데 고대에 아사달과 왕검성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군데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先是(선시)에 區劃天下之地(구획천하지지)하사 分統三韓(분통삼한)하시니 三韓(삼한)에 皆有五家六十四族(개유오가육십사족)이러라.

역주 이에 앞서 왕검께서 천하의 땅을 일정한 지역으로 경계를 정해 삼한三韓 으로 나누어 다스리셨다. 삼한에는 모두 5가五家 64족六十四族이 있었다. (「단군세기」)

 

地有三韓(지유삼한)하야 爲辰弁馬三京之韓(위진변마삼경지한)하니 韓(한)은 卽皇也(즉황야)오
皇(황)은 卽大也(즉대야)오 大(대)는 卽一也(즉일야)라.

역주 그러므로 땅에 삼한이 있으니, 삼한은 삼경三京이 있는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을 말한다. 한韓은 역사의 통치자인 황皇(임금)이라는 뜻이 있다. 이 황은 크다[大]는 뜻이며, 크다[大]는 것은 (시작과 뿌리와 통일을 의미하는) 하나[一]라는 뜻이다[한韓 = 황皇 = 대大= 일一]. (「단군세기」)

 

遂與三韓(수여삼한)으로 分土而治(분토이치)하실새 辰韓(진한)은 天王自爲也(천왕자위야)시라 立都阿斯達(입도아사달)하시고 開國(개국)하사 號朝鮮(호조선)하시니 是爲一世檀君(시위일세단군)이시오 阿斯達(아사달)은 三神所祭之地(삼신소제지지)로 後人(후인)이 稱王儉城(칭왕검성)하니 以王儉舊宅(이왕검구택)이 尙存故也(상존고야)니라.

역주 마침내 삼한으로 영토를 나누어 다스릴 때 진한辰韓은 천왕께서 친히 맡아서 통치하셨다.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니, 이분이 바로 1세 단군이시다. 아사달은 ‘삼신께 제사 지내는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王儉城이라 불렀는데, 그 까닭은 왕검의 옛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단군세기」)

 

삼한오가의 조직문화와 지방자치조직
‘복신시구규復神市久規’(「삼성기 상」)라는 기록대로 옛 조선은 배달국의 통치제제를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배달국보다 더 분화되고 체계화되었지만 삼백오가 조직의 큰 틀은 고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됩니다.

 

47세 고열가 단군께서 보위를 내려놓고 입산하시고, 해모수가 옥새를 양위받기까지 6년 동안 오가에 의해 공화정이 실시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고조선에서 운영되었던 지방 자치제도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이 나옵니다.

각 읍락에서 자체적으로 삼사三師와 육정六正을 운영했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중앙의 삼한오가와 유사한 조직을 각 읍락에서 그대로 운영한 것입니다.

 

彭虞(팽우)하사 闢土地(벽토지)하시며 成造(성조)로 起宮室(기궁실)하시며 高矢(고시)로 主種稼(주종가)하시며 臣智(신지)로 造書契(조서계)하시며 奇省(기성)으로 設醫藥(설의약)하시며 那乙(나을)로 管版籍(관판적)하시며 羲(희)로 典卦筮(전괘서)하시며 尤(우)로 作兵馬(작병마)하시니라

역주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척하게 하시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시고, 고시高矢에게 농사일을 맡게 하시고, 신지臣智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시고, 기성奇省에게 의약을 베풀게 하시고, 나을那乙에게 호적을 관장하게 하시고, 희羲에게 괘서卦筮를 주관하게 하시고, 우尤에게 병마兵馬를 담당하게 하셨다. (「삼성기 상」)

 

諸邑落(제읍락)이 皆自設三老(개자설삼로)하니 三老(삼로)는 亦曰三師(역왈삼사)라 有賢德者(유현덕자)와 有財施者(유재시자)와 有識事者(유식사자)를 皆師事之(개사사지)가 是也(시야)오. 又有六正(우유육정)하니 乃賢佐忠臣(내현좌충신)과 良將勇卒(양장용졸)과 明師德友(명사덕우)가 是也(시야)라.

역주 모든 읍락이 자체적으로 삼로三老를 두었는데, 삼로를 삼사三師라고도 하였다. 어진 덕이 있는 자[賢德者]와 재물을 베푸는 자[財施者], 사리를 잘 아는 자[識事者]를 모든 사람이 스승처럼 섬기는 것이 그것이다. 또 육정六正이 있었는데, 어진 보필자[賢佐]와 충신[忠臣]과 뛰어난 장수[良將]와 용감한 병사[勇卒]와 훌륭한 스승[明師]과 덕 있는 친구[德友]가 그것이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삼한에서 삼조선 체제로 변경
6세 단군 때 신지 발리의 예언대로 고조선의 국운은 삼한관경제와 그 성쇠를 같이합니다.

22세 색불루 단군 때 잠시 위기를 겪고 ‘삼조선 체제’로 변경하였으나 ‘삼한관경제’의 틀은 유지되었습니다.

 

결국 43세 물리 단군 때 삼한관경제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사냥꾼 우화충의 반란입니다.

백민성白民城 욕살 구물丘勿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진압하고 피란 중 붕어하신 물리 단군을 대신하여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정권을 잡은 구물 단군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고 두 조선에도 병권兵權을 나눠주게 됩니다.

이전의 분조관경제分朝管境制에서 분권관경제分權管境制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중앙의 진조선이 통제력을 잃었고 막조선, 번조선이 진조선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저울에 비유되었던 삼한관경제는 완전 붕괴되었고 이후 고조선은 급속히 쇠망의 길로 떨어집니다.

 

三韓(삼한)은 有分朝管境之意(유분조관경지의)오 三朝鮮(삼조선)은 有分權管境之制也(유분권관경지제야)라

역주 삼한이라는 말에는 ‘조정을 나누어 통치한다[分朝管境]’는 뜻이 있고, 삼조선은 ‘권력을 나누어 통치[分權管境]하는 제도를 둔다’는 말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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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조직문화③-배달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 삼한오가三韓五加

 

STEP2. 삼신오제로부터 출발한 조직 문화

 

2. 배달의 조직


삼백의 기능
환웅께서 거느리고 왔던 풍백, 우사, 운사의 삼백三伯 조직은 뒤에 나오는 오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조직이었습니다.

조선시대로 보면 삼정승 곧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해당하는 조직입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는 삼백의 역할에 대해 풍백은 입약, 우사는 시정, 운사는 행형을 맡았다 하였습니다(풍백지입약 우사지시정 운사지행형 風伯之立約과 雨師之施政과 雲師之行刑).

이것을 오늘날 정치제도로 말한다면 풍백은 입법立法기관, 우사는 행정行政기관, 운사는 사법司法기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계획, 통제, 조직으로 보거나 조화·교화·치화로 볼 수 있습니다.

 

삼신 문화에서 삼백 문화가 나왔습니다. 삼백 제도는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三韓曰(삼한왈) 風伯雨師雲師(풍백우사운사) 五加(오가)는 卽家也(즉가야)니 五加曰(오가왈) 牛加主穀(우가주곡)하며 馬加主命(마가주명)하며 狗加主刑(구가주형)하며 猪加主病(저가주병)하며 鷄加主善惡也(계가주선악야)니 民有六十四(민유육십사)하고 徒有三千(도유삼천)이라.

역주 삼한三韓은 풍백·우사·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主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主命]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主刑]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主病]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主善惡]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더 분화된 오가조직
배달 시대는 삼한오가의 조직 체계가 더 분화됩니다.

삼한오가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업무 영역이 세분화된 것입니다.

환웅께서 치우로 하여금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잡는 업무를 맡겼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과거 같으면 오가 중에 주형이 관장했을 업무가 분리되어 새로운 부서가 생긴 셈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주곡 관직을 맡은 분은 고시례이고, 주명 관직은 신지씨가 맡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직은 대체로 세습되었는데 고시씨와 신지씨의 이름은 단군 조선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治尤(치우)는 則世掌兵馬盜賊之職焉(즉세장병마도적지직언)하시니라.

역주 치우治尤로 하여금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잡는 직책’을 관장하게 하셨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桓雄天皇(환웅천황)이 又復命神誌赫德(우복명신지혁덕)하사 作書契(작서계)하시니 蓋神誌氏(개신지씨)가 世掌主命之職(세장주명지직)하 專掌出納獻替之務(전장출납헌체지무)나 而只憑喉舌(이지빙후설)이오
曾無文字記存之法(증무문자기존지법)이라.

역주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書契]를 만들게 하셨다. 신지씨神誌氏는 대대로 주명主命 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桓雄天皇(환웅천황)이 見人居已完(견인거이완)과 萬物(만물)이 各得其所(각득기소)하시고
乃使高矢禮(내사고시례)로 專掌餽養之務(전장궤양지무)하시니 是爲主穀(시위주곡)이니라

역주 환웅천황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은 것을 보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음식과 양육[餽養]의 일을 전담하게 하셨다. 이분이 주곡主穀 벼슬을 맡았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삼신오제 사상은 동북아 한민족사의 창세시절 초기부터 통치 원리로 이화되었다.

배달의 환웅천황이 삼신오제 사상에 따라 삼백三伯(풍백, 우사, 운사) 제도와 오사五事(주곡主穀·주명主命·주병主病·주형主刑·주선악主善惡)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삼백은 조선 시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근현대의 삼권분립(입법부, 행정부,사법부) 제도와 완전히 정합한다.

풍백, 우사, 운사는 흔히 말하듯 바람신, 비신, 구름신이라는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원형인 것이다.

 

배달의 오사는 고조선과 북부여, 고구려, 백제 등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로 흔히 삼황오제三皇五帝를 꼽는데, 이것도 동방 한민족의 삼신오제 사상에서 연유한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92쪽)


여러 명의 왕검들
배달국의 역사를 기록한 신시본기를 보면 왕검이 여러 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세 사와라 환웅초기에 웅녀군의 후예 여黎가 최초로 단허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습니다.

 

여러 지역의 왕검들이 방물을 바치고 귀화하였다는 내용을 볼 때 배달국 역시 한 분 환웅 아래 수많은 왕검들이 각기 소국을 다스렸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왕검들의 나라 중 대읍국大邑國에 해당되는 나라가 웅씨국이었고 웅씨국의 비왕으로 있다 웅씨 왕이 죽자 그 자리를 계승하여 구환을 통일하여 조선을 개국하신 분이 신인왕검이라 불린 단군왕검이십니다.

斯瓦羅桓雄之初(사와라환웅지초)에 熊女君之後(웅녀군지후)를 曰黎(왈여)니 始得封於檀墟(시득봉어단허)하야 爲王儉(위왕검)하야 樹德愛民(수덕애민)하니 土境(토경)이 漸大(점대)하고 諸土境王儉(제토경왕검)이 來獻方物(내헌방물)하야 以歸化者(이귀화자)가 千餘數(천여수)라 後四百六十年(후사백육십년)에 有神人王儉者(유신인왕검자)가 大得民望(대득민망)하사 陞爲裨王(승위비왕)이라가 居●二十四年(거섭이십사년)에 熊氏王(웅씨왕)이 崩於戰(붕어전)하고 王儉(왕검)이 遂代其位(수대기위)하사 統九桓爲一(통구환위일)하시니 是爲檀君王儉也(시위단군왕검야)시니라.

 

역주 사와라환웅(13세) 초기에 웅족 여왕의 후예를 여黎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다. 왕검이 덕을 베풀고 백성을 사랑하므로 영토가 점점 넓어졌다. 여러 지역 왕검이 와서 방물을 바쳤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그 뒤 460년이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 출현하여 백성에게 신망을 크게 얻어 비왕裨王(부왕)에 올라 24년간 섭정하였다. 웅씨 왕이 전쟁에서 죽자 왕검이 드디어 그 자리를 계승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였다.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화백제도 기원②-환국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 삼한오가三韓五加

 

STEP2. 삼신오제로부터 출발한 조직 문화


1. 환국의 조직

인류 최초의 국가이자 동서 문명의 뿌리인 환국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삼국유사』 「고조선」편과 『환단고기』의 일부 내용을 통해 환국의 제도와 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동방 역사의 첫 시작, 환웅 천황의 배달 건국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환국의 국가 통치조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배달의 국가 조직이 환국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배달의 건국에 등장하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삼백三伯제도와 오사五事조직, 그리고 서자부庶子部 조직은 모두 환국에서 운영되었던 국가 통치 조직이었습니다.


오가五加
환인이 동방개척의 적임자를 물었을 때 곁에 있던 오가五加들이 환웅을 천거합니다.

이를 통해 오가는 환인을 곁에서 보좌하는 사람들, 즉 환국의 중앙 통치부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오가는 지역 행정조직이기도 하였습니다.

지역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말합니다.

 

환국의 오가에서는 지역 조직과 중앙 행정조직이 미분화된 형태였습니다.

이는 역사 초창기 초기 조직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五加僉曰(오가첨왈) 庶子(서자)에 有桓雄(유환웅)이 勇兼仁智(용겸인지)하고 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상유의어역세이홍익인간)하오니 可遣太白而理之(가견태백이리지)니이다

역주 오가의 우두머리가 모두 환인에게 대답하였다.“ 서자庶子에 환웅이란 인물이 있는데 용기와 어짊과 지혜를 겸비하고,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동방의 태백산(백두산)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십시오.” (「 삼성기 하」)

 

배달의 오사五事조직을 통해 환국에 있었던 오가들의 역할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오사는 주곡, 주명, 주형, 주병, 주선악을 말합니다.

 

주곡 등은 각각 명사로서 그 자체가 관직명입니다(경주대학교 경영학과에 재직중인 이강식 교수가 1987년 논문을 통해 처음 주장함).

주主 자가 들어가는 관직명으로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에 주부主簿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사主事, 주임主任 등의 관명을 쓰고 있습니다.

주곡은 말 그대로 농사에 관한 일을, 주명은 왕명의 출납을 처리했고, 주형은 형벌을, 주병은 병病을, 주선악은 선악을 관장하는 부서였습니다.

환국의 오가는 지역의 영주로서 대대로 세습되는 가문조직이기도 하였습니다.

 

於是(어시)에 桓雄(환웅)이 率衆三千(솔중삼천)하사 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강우태백산정신단수하)하시니
謂之神市(위지신시)오 是謂桓雄天王也(시위환웅천왕야)시니라 將風伯(장풍백)·雨師(우사)·雲師(운사)하시고
而主穀(이주곡)·主命(주명)·主刑(주형)·主病(주병)·主善惡(주선악)하시며 ●主人間三百六十餘事(범주인간삼백육십여사)하사 在世理化(재세이화)하사 弘益人間(홍익인간)하시니라

 

역주 이때 환웅께서는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오시어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황이시다. 환웅께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 농사·왕명·형벌·질병·선악을 주장하게 하시고,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弘益人間]. (「삼성기 하」)


서자부庶子部
서자庶子의 서庶 자는 여러 서 자입니다.

서자의 문자적 의미는 ‘여러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서자가 관직의 이름으로 쓰인 사례는 당나라와 고려에서 발견됩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당나라 유인궤의 관명이 ‘좌서자 동 문하삼품’[左庶子 同 中書門下三品]으로 나오고 고려에서는 ‘태자좌우서자’[太子左右庶子]라는 관직이 있었습니다.

둘 다 왕·귀족 자제의 스승, 선생, 동궁東宮의 직관職官으로서 서자입니다.

 

따라서 환국의 서자부는 환인의 여러 아들과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는 부서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자부의 장을 대인大人이라 불렀습니다.

대인 환웅이 연 배달국은 삼신의 세 덕성인 조화, 교화, 치화 중에서 교화의 도를 활짝 연 시대였습니다.

 

時(시)에 人多産乏(인다산핍)하야 憂其生道之無方也(우기생도지무방야)러니
庶子之部(서자지부)에 有大人桓雄者(유대인환웅자)가 探聽輿情(탐청여정)하시고
期欲天降(기욕천강)하사 開一光明世界于地上(개일광명세계우지상)하시니라

역주 당시 사람은 많고 물자는 적어 살아갈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였더니, 서자부[庶子之部]의 대인 환웅이 민정을 두루 살펴 듣고 천계에서 내려와 지상에 광명 세상을 열고자 하셨다. (『태백일사』 「환국본기」)


삼신오제 사상
신교 삼신관에 따르면 오제五帝가 다섯 방위의 주재자로서 삼신상제님의 명에 따라 오령五靈을 맡아 다스립니다.

오령은 천지 성령의 영묘한 기운으로 태수, 태화, 태목, 태금, 태토를 말합니다.

후에 오행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천지의 다섯 신령한 조화 기운은 순전히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삼신과 오제의 주재에 따라 작용합니다.

삼신오제 사상은 한민족이 우주의 속 세계인 신의 세계를 깨달아서 나온 개념입니다.

한민족은 이 삼신오제 조직을 국가 통치조직으로 이화하여 환국시대부터 삼한오가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夫三神稽(계부삼신)호니 曰天一(왈천일)과 曰地一(왈지일)과 曰太一(왈태일)이시니 天一(천일)은 主造化(주조화)하시고 地一(지일)은 主敎化(주교화)하시고 太一(태일)은 主治化(주치화)하시니라.

역주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천일과 지일과 태일이시다. 천일은 (만물을 낳는) 조화를 주관하고 지일은 (만물을 기르는) 교화를 주관하고 태일은 (세계를 다스리는) 치화를 주관하신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於時(어시)에 三神(삼신)이 乃督五帝(내독오제)하사 命各顯厥弘通(명각현궐홍통)하시며 五靈(오령)으로 啓成厥化育(계성궐화육)하시니라

역주 이에 삼신께서 다섯 방위의 주재자인 오제를 통솔하여 저마다 그 맡은 바 사명을 두루 펴도록 명령하시고, 오령에게 만물 화육의 조화 작용을 열어서 공덕을 이루게 하셨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이 오제사상을 잘 나타내는 그림이 고구려의 사신도四神圖입니다.

사신도를 보면 동에 청룡, 남에 주작, 북에 현무, 서에 백호, 중앙 천장에 황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각 방위의 주재신을 상징하는 영물靈物입니다.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에서는 각 방위에 배치된 영물들에 오가五加를 함께 배치하였습니다.

특히 중앙 방위에는 황웅여신黃熊女神과 주병主病을 배치하였습니다.

오가 중에서 주병의 상징이 황웅이었습니다.

 

홍산 문화의 여신묘 유적을 통해 배달시대 때만 해도 황웅과 여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신도에서는 황웅 대신에 황룡으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신 숭배 문화가 퇴색된 결과로 보여집니다.

 

五帝注(오제주)에 曰(왈) 「五方(오방)이 各有司命(각유사명)하니 在天曰帝(재천왈제)시오 在地曰大將軍(재지왈대장군)이시니 督察五方者(독찰오방자)는 爲天下大將軍(위천하대장군)이시오 督察地下者(독찰지하자)는 爲地下女將軍也(위지하여장군야)시니 龍王(용왕)은 玄龜(현귀)시니 主善惡(주선악)하시며 朱鵲(주작)은 赤熛(적표)시니 主命(주명)하시며 靑龍(청룡)은 靈山(영산)이시니 主穀(주곡)하시며 白虎(백호)는 兵神(병신)이시니 主刑(주형)하시며 黃熊(황웅)은 女神(여신)이시니 主病(주병)하시니라.」

 

역주 『오제주五帝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오방五方에 저마다 사명이 있으니, 하늘에서는 제帝이시요, 땅에서는 대장군大將軍이시다. 오방을 감찰하는 이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시고, 지하를 감찰하는 이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시다. 용왕龍王 현귀玄龜는 선악을 주관하시고, 주작朱鵲 적표赤熛는 왕명을 주관하시며, 청룡靑龍 영산靈山은 곡식을 주관하시고, 백호白虎 병신兵神은 형벌을 주관하시며, 황웅黃熊 여신女神은 질병을 주관하신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화백제도의 기원
화백은 말 그대로 화합하여 광명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화백은 배달시대에 이미 제도화되었습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의 ‘정치를 시행함에는 화백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發政이 莫先於和白]’라는 대목으로 보아 화백제도는 임시적이거나 일시적인 정책이 아니라 공시적이고 항구적인 국가의 정책이었습니다.

사실 이 화백의 기원은 환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환국의 지도자 환인을 선출할 때 반대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은 연후에야 선출하였습니다.

화백에서는 단 한 사람의 반대가 있어도 회의의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원한이 붙어도 성사시키지 않은 이 화백 정신은, 모든 사람의 가슴 깊이 맺힌 원한을 다 풀어야 인간을 구원·통일할 수 있다는, 신교의 완성 진리로 선포된 증산도의 ‘해원解寃사상’과 맥이 상통합니다.

 

時(시)에 九桓(구환)이 皆以三神(개이삼신)으로 爲一源之祖(위일원지조)하시며 主蘇塗(주소도)하시며 主管境(주관경)하시며 主責禍(주책화)하시며 與衆議一歸(여중의일귀)로 爲和白(위화백)하시니라

역주 이때에 구환족이 모두 삼신을 한뿌리의 조상으로 삼았다. 천황께서 소도蘇塗와 관경管境과 책화責禍를 주관하고, 백성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는 화백 제도를 두셨다

五加(오가)와 衆(중)이 交相選於大衆(교상선어대중)할새 以必求業故(이필구업고)하야 愛憎有別(애증유별)하고
各以其所心(각이기소심)으로 主辦之而自擇(주판지이자택)이라 其所求鵠(기소구곡)은 惟在九桓爲公(유재구환위공)하야 大同歸一焉者(대동귀일언자)니 則亦當自較得失(즉역당자교득실)하야 無一人異然後(무일인이연후)에 從之(종지)하고 諸衆(제중)도 亦不敢遽下獨術以處之(역불감거하독술이처지)라.

 

역주 오가五加와 무리가 서로 번갈아 백성에게서 환인을 선출할 때, 반드시 그 사람의 업적을 살펴서 좋아함과 싫어함을 구별하고, 각자 마음으로 판별하여 스스로 선택하였다. 이렇게 환인을 선출하는 궁극 목적[其所求鵠]은 오직 공公을 위해 구환족[九桓]이 대동단결하여 한마음이 되는 데 있었다. 또한 마땅히 대상자의 잘잘못[得失]을 비교하여 반대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은 연후에야 선출하였고, 다른 모든 무리도 감히 성급하게 독단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환국·배달·조선은 우주 원리를 국가 경영 원리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 우주 원리가 바로 삼신오제三神五帝 사상이다.

삼신(조화신·교화신·치화신)이 현실에서 작용할 때에는 다섯 방위[五方]로 펼쳐진다.

 

오방五方은 동서남북과 중앙이다.

이 오방을 대변하는 다섯 가지 색깔, 청(동방)·백(서방)·황(중앙)·적(남방)·흑(북방)을 오방색이라 한다.

오방에서 각기 만물의 생성작용을 주장하는 신(主神)을 오제라 하는데, 청제靑帝·백제白帝·황제皇帝·적제赤帝·흑제黑帝이다.

이 다섯 방위의 주재자가 수화목금토 오행의 천지 기운을 주재한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91쪽)

 

인류 조직문화 원형①-백제 정사암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 삼한오가三韓五加

STEP1. 들어가기


백제의 정사암政事巖

정사암政事巖은 백제 시대에 고위 귀족들의 회의에 의하여 수상인 상좌평上佐平을 선출하던 곳을 말합니다.

현재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에 위치한 천정대天政臺가 바로 백제의 정사암입니다.

 

정사암은 화백회의和白會議를 개최하던 신라의 사영지四靈地와 같이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지금도 주민들이 임금바위, 신하바위로 부르는 이곳에는 백제 때 임금과 신하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원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호암사에는 정사암이 있는데, 나라에서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개봉하여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자로 재상을 삼았으므로 정사암이란 이름이 생겼다[又虎嵓寺有政事嵓 國家將議宰相 則書當選者名或三四 函封置嵓上 須臾取看 名上有印跡者爲相 故名之]”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백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똑같이 운영되었는데 특히 백제의 정사암 제도는 신교를 받는 화백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화백和白에서 흰 백자를 쓰는 것은 광명문화, 영성문화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밝은 영성으로 신교를 받아 내려 조직 구성원들의 의견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화백 제도의 근간이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화백 제도가 배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를 통해 태고 시절 우리 한민족과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콘클라베(Conclave)에 보이는 화백和白의 흔적

2013년 3월 바티칸 콘클라베(CONCLAVE)에 흰 연기가 피어 올랐습니다.

라틴어로 ‘열쇠를 잠그는 방’이라는 뜻의 이 콘클라베 회의에서 현現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콘클라베는 폐쇄된 공간에서 기도와 투표, 묵상과 토론이 뒤섞인 신비의 종교행사입니다.

초기의 콘클라베는 만장일치로 교황을 선출하였습니다.

콘클라베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화백 제도의 흔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

 

먼저 그 과정을 살펴보면 콘클라베는 전 세계에 흩어진 80세 미만의 추기경들이 교황청 궁내처장의 소집령을 받아 로마로 집결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스티나 소성당에 들어가면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이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로 콘클라베가 진행됩니다.

투표는 3분의 2 이상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됩니다.

 

첫날 오후, 첫 번째 투표가 실시되는데 이 날 투표에서 결정되지 못하면 둘째 날 이후부터 1일당 오전 2회, 오후 2회로 합계 네 차례 투표가 실시됩니다.

3일째가 되어도 결정되지 않을 때는 하루 동안 투표를 중지하고 부제급 추기경 중 최연장자에 의한 강화講話를 듣거나 기도를 합니다.

그럼에도 7회차 투표로 넘어가면 다시 투표를 즉각 중단하고 이번에는 사제급 추기경의 강화를 듣습니다.

게다가 7회차 투표에서도 결정되지 않을 때도 같은 방법이 반복되어 이번에는 주교급 추기경의 연장자가 강화를 이끌어냅니다.

그래도 결정이 되지 않으면 3명 이상인 후보자가 있을 경우 최소 득표자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 되어 마지막엔 2인의 후보자에 투표를 하며 무조건 2/3이상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선거합니다.

 

교황이 선출되면 투표용지를 태워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는 흰 연기가 올라옵니다.

콘클라베가 끝난 뒤 흰옷을 입고 시스티나 성당을 나오는 사람이 새 교황입니다. [참조:위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