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신라 화랑-낭가의 맥②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핵랑의 기원과 전승맥


1. 핵랑의 기원은 삼랑

동방 신교문화의 중심에 핵랑이 있었습니다.

핵랑은 신교의 성직자 그룹이자, 국가 재난 상황을 대비하는 상비군이요, 나라 경영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인재의 보고였습니다.

 

핵랑의 기원은 환웅천황이 개천開天 후 삼랑三郞이라는 관직을 만든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소급해 올라가면 7대 환인 천제가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시고 3,000명의 일꾼을 붙여 주신 것이 그 역사의 시발입니다.

당시 동방 개척에 나선 27세의 환웅과 3,000명의 문명개척단은 역사의 무대를 환국의 삼신산(천산, 삼위산, 금악산)에서 동쪽의 태백산으로 옮긴 역사 혁명가들이요, 동방 역사의 젊은 피였습니다.

 

五加僉曰(오가첨왈) 庶子(서자)에 有桓雄(유환웅)이 勇兼仁智(용겸인지)하고 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상유의어역세이홍익인간)하오니 可遣太白而理之(가견태백이리지)니이다 하야늘 乃授天符印三種(내수천부인삼종)하시고 仍敕曰(잉칙왈) 如今(여금)에 人物(인물)이 業已造完矣(업이조완의)니 君(군)은 勿惜厥勞(물석궐로)하고 率衆三千而往(솔중삼천이왕)하야 開天立敎(개천입교)하고 在世理化(재세이화)하야 爲萬世子孫之洪範也(위만세자손지홍범야)어다.

 

역주 오가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답하였다. “서자庶子에 환웅이란 인물이 있는데 용기와 어짊과 지혜를 겸비하고,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동방의 태백산(백두산)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에 환인께서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종류를 주시며 명하셨다. “이제 인간과 만물이 이미 제자리를 잡아 다 만들어졌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가서,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開天立敎]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을지어다.” (「삼성기 하」)

 

護守三神(호수삼신)하야 以理人命者(이리인명자)를 爲三侍郞(위삼시랑)이니 本三神侍從之郞(본삼신시종지랑)이오 三郞(삼랑)은 本倍達臣(본배달신)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역세습삼신호수지관야)니라. 高麗八觀雜記(고려팔관잡기)에 亦曰(역왈)「三郞(삼랑)은 倍達臣也(배달신야)라」 하니 主稼種財利者(주가종재리자)는 爲業(위업)이오 主敎化威福者(주교화위복자)는 爲郞(위랑)이오 主聚衆願功者(주취중원공자)는 爲伯(위백)이니 卽古發神道也(즉고발신도야)라 皆能降靈豫言(개능강령예언)하야 多神理屢中也(다신리누중야)라

 

역주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郞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發] 신도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郞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2. 핵랑제도의 변천

고조선의 국자랑 배달국을 계승한 단군조선 시대에도 삼랑의 관직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3세 단군 때 한글의 원형 가림토 문자를 창제한 을보륵乙普勒 역시 삼랑이었습니다.

13세 흘달 단군 때 이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여 국자랑國子郞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국자랑들은 천왕랑으로도 불렸는데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 천지화를 머리에 꽂고 다녔기에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라 화랑의 어원과 기원은 바로 천지화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화

랑의 계율 세속오계 역시 소도의 계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소도에 모여 신교 수행과 함께 자기개발에 매진하다가 외적이 침입하거나 병란兵亂이 생기면 무사武士가 되어 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戊戌二十年(무술이십년)이라 多設蘇塗(다설소도)하사 植天指花(식천지화)하시고 使未婚子弟(사미혼자제)로
讀書習射(독서습사)하사 號爲國子郞(호위국자랑)하시니라. 國子郞(국자랑)이 出行(출행) 頭揷天指花(두삽천지화)하니
故(고)로 時人(시인)이 爲天指花郞(위천지화랑)이라.

 

역주 재위 20년 무술(단기 571, BCE 1763)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으셨다. 미혼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단군세기)


源花(원화)는 稱女郞(칭여랑)이오 男(남)은 曰花郞(왈화랑)이니 又云天王郞(우운천왕랑)이라. 自上(자상)으로 命賜烏羽冠(명사오우관)하야 加冠(가관)에 有儀注(유의주)라.

역주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는 화랑花郞이라 하는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였다. 임금으로부터 오우관烏羽冠을 하사 받아 썼는데 관을 쓸 때 예식을 거행하였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蘇塗之立(소도지립)에 皆有戒(개유계)하니 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충효신용인오상지도야)라. 蘇塗之側(소도지측)에 立扃堂(입경당)하야 使未婚子弟(사미혼자제)로 講習事物(강습사물)하니 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개독서습사치마예절가악권박)(並劒術)(병검술))六藝之類也(육예지류야)라.

 

역주 소도가 건립된 곳에는 모두 계율을 두었는데,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이라는 오상의 도[五常之道]가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사물事物을 익히게 하였는데, 대개 독서·활쏘기·말달리기·예절·가악·권박(검술을 겸함)으로 육예六藝의 종류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북부여의 천왕랑 조선의 국자랑은 북부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허리에 칼을 찬 해모수 단군의 모습에서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왕랑들은 머리에 꽃과 더불어 새의 깃털을 꽂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유풍은 바다 건너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깃털로 모자를 만드는 풍습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모자의 깃털은 부족의 상징이면서 전사의 용맹을 상징합니다. 고구려 조의들과 신라 화랑들이 모자에 깃털을 꽂아 그들의 신분과 명예를 표현한 것과 일치합니다.

 

帝(제)는 天姿英勇(천자영용)하시고 神光射人(신광사인)하시니 望之若天王郞(망지약천왕랑)이러시라. 年二十三(연이십삼)에 從天而降(종천이강)하시니 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시단군고열가오십칠년임술사월팔일야라. 依熊心山而起(의웅심산이기)하사 築室蘭濱(축실난빈)하시고 戴烏羽冠(대오우관)하시며 佩龍光劒(패용광검)하시며 乘五龍車(승오룡거)하시니라.

 

역주 해모수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이다. 임금께서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같았다. 23세에 천명을 좇아 내려오시니, 이때는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단기 2095)으로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임금께서 웅심산熊心山 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帝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劒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셨다. (「북부여기」)

 

삼국의 핵랑제도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조의弔意, 무절武節, 화랑花郞이라는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조의에서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걸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 당태종 이세민의 항복을 받아 낸 연개소문과 문무를 겸비한 을파소乙巴素, 명림답부明臨答夫 등이 조의출신이었습니다. 고구려·수나라의 전쟁 당시에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조의 20만’이 전쟁터에 나가 130만이나 되는 수의 대군을 궤멸시켜 인류전쟁사에 기록을 세웠습니다. 신라가 1,000년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화랑도의 정신과 기강이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후기에 와서 불교에 밀려 신교가 쇠퇴해지고 덩달아 화랑 정신도 퇴색하면서 신라는 정치로는 사대事大, 군사로는 유약柔弱에 빠져 망국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自是(자시)로 俗尙(속상)이 叅佺有戒(참전유계)하고 皂衣有律(조의유율)하나니 衣冠者(의관자)는 必帶弓矢(필대궁시)하고 能射者(능사자)는 必得高位(필득고위)하야 善心(선심)은 爲修行之本(위수행지본)하고 貫革(관혁)은 爲假想之惡魁(위가상지악괴)하니라.

 

역주 이때부터 세상에서는 참전叅佺에게 지켜야 할 계戒가 있고, 조의皂衣에게 율律이 있어 숭상하였는데,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착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고 활을 쏘았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乙巴素(을파소)가 爲國相(위국상)에 選年少英俊(선연소영준)하야 爲仙人徒郞(위선인도랑)하니 掌敎化者(장교화자)를 曰叅佺(왈참전)이니 衆選守戒(중선수계)하야 爲神顧托(위신고탁)하며 掌武藝者(장무예자)를 曰皂衣(왈조의)니 兼操成律(겸조성률)하야 爲公挺身也(위공정신야)라.

 

역주 을파소가 국상國相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叅佺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환국 말기에 태동한 제세핵랑과 배달 시대의 삼랑은 그 후 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花郞 →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모두 평상시에는 삼신상제님의 진리를 공부하며 완전한 인격체의 길을 추구하고, 학문과 무예를 동시에 연마하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구국의 선봉에서 목숨을 바쳐 국난을 물리쳤다.

결론적으로 낭가는 신교의 구도자이며 또한 역사 개척의 선봉장으로서 한 시대의 구국청년단이었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85쪽)

              

3. 낭가의 맥이 약해진 계기

고려 시대에도 낭가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신라의 화랑을 계승하여 국가 차원에서 국선國仙·선랑仙郞 제도를 운영한 것입니다.

이 제도는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으로, 대몽항쟁 때는 삼별초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낭가의 맥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으니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역사상 일천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 일컬었던 서경 전쟁(묘청의 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묘청의 반란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묘청과 김부식의 싸움은 평양 천도파 대對 개경 고수파, 칭제북벌稱帝北伐파 대 존화주의尊華主義파, 낭가파 대 유교파, 자주·진보파 대 사대·보수파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이 김부식 일파의 승리로 끝나게 됨으로써 그 이후 역사는 전자前者가 아닌 후자後者의 길로 대세가 꺾이게 됩니다.

 

김부식은 반란군 토벌을 위해 출병하기 전에 정치 라이벌이자 칭제북벌론자였던 정지상과 백수한을 모함하여 피살하고 전쟁 후에는 윤언이를 탄핵하여 귀양보냈습니다.

전쟁 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사서들은 철저히 배제하였고 반면에 춘추필법에 의해 쓰여진 중국 측 기록들은 충실하게 인용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의 자랑스런 낭가의 역사는 대폭 삭제되거나 수정, 폄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후에는 일체의 사료를 궁중에 비장하여 다른 사람이 열람할 길을 끊음으로써 박학자博學者란 자신의 명예를 보전하고 삼국사기를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유행하는 역사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단재는 ‘아 슬프다. 당의 장수 이적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문헌들을 소탕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 사학계에 끼친 재앙이 어찌 김부식의 서경 전쟁의 결과에 미칠 수 있으랴’ 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조의는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한민족의 신교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신교의 종교 군대)이다.

이 조의선인을 한민족 고유의 선비라 말할 수 있는데, 유교·불교·도교 등 외래 사상에 물들지 않은 한민족 고유의 선비상은 문사文士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상무尙武적 무사武士’였다.

조의는 개인적인 완성이 아니라 항상 공도公道와 국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내던지는 살신성도殺身成道를 이상과 목적으로 삼은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이었다. (환단고기 역주본 본문 625쪽 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