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신라의 힘 화랑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역사의 개척자 핵랑


신라의 힘, 화랑花郞


단기 2993년(기원 660년) 7월, 여기는 백제 땅 황산벌입니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군대는 이곳에서 국가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습니다.

나·당 연합에 의해 당나라 군대는 이미 금강 하구의 기벌포伎伐浦(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상륙하여 동진하고 있으니 백제는 동과 서에서 양국의 협공을 받고 있습니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처자를 자기 손으로 베고 나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왔습니다.

신라군은 김유신과 흠춘, 품일 등이 거느리고 있는 5만 대군입니다.

비록 신라군이 백제군보다 그 수가 10배 이상 많았지만 계백 장군의 뜨거운 충의와 백제군의 기세에 눌려 네 번의 싸움에서 네 번 다 패하였습니다.

신라군으로서는 병사들의 가슴에 전의戰意의 불을 타오르게 할 불쏘시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바로 장렬한 죽음을 통한 병사들의 적개심 고취입니다. 먼저 흠춘이 자신의 아들이자 화랑인 반굴盤屈을 내세웠습니다.

 

반굴과 그의 무리들은 기꺼이 적진으로 돌충하여 전부 전사하였습니다.

이어 품일도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16세로 나이가 가장 어렸던 관창 역시 결국 목이 베이어 그 머리가 애마의 꼬리에 매달린 채 돌아오게 됩니다.

관창의 장렬한 죽음과 아버지의 오열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신라군은 용기백배하여 5천 결사의 저항선을 뚫고 백제의 왕도로 진군하였습니다.

 

황산벌 싸움을 통해 당시 신라의 지도층이 백제의 멸망이라는 국가 ‘아젠다agenda’를 위해 멸사봉공의 자세로 헌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터라지만 아버지가 나이 어린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더해진 신라 화랑들의 가상한 용기와 아름다운 희생은 나라의 백성들도 기꺼이 고통분담의 길에 동참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비록 완전한 통일은 아니지만 변방의 작은 나라 신라의 성공에 화랑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화랑제도는 신라만 운영한 게 아닙니다.

고구려와 백제 역시 이름만 다를 뿐 신라의 화랑과 같은 제도가 있었고 그 기원은 상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낭가郎家라고 하여 우리의 고유한 신앙문화 집단이라고 하였습니다.

      


망국으로 이끈 의자왕의 실정

망국의 패주敗主 의자왕, 흔히들 백제 멸망의 주범으로 이야기합니다.

원래 의자왕은 태자 시절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로 불리울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내치를 다지고 군대를 양육하여 왕성한 정복활동을 벌여 연이은 승전고를 올립니다.

 

고高·당唐 전쟁(645년)이 한창일 때는 계백에게 명하여 신라의 뒤를 습격하여 7개 성을 회복하고 윤충을 보내어 부사달 등 10여개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동시에 해군으로는 당의 강남을 습격하여 월주越州 등지를 점령하여 해외의 개척지를 착착 경영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대야성을 쳐서 인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백제가 망하기 5년 전인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백제가 아무리 나·당 연합군의 공격이 있었다지만 그리도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의자왕의 실정이 있었습니다.

특히 막바지에 보여준 결정적인 판단 착오 몇 가지는 세월 무상에도 불구하고 두고 두고 한스러움으로 남습니다.

 

그 첫째는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흥수興首 등의 충신을 내친 것입니다.

경륜과 지혜가 풍부한 이들이 쫓겨나자 조정은 모략꾼, 간신배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성충과 윤충의 건의대로 지세地勢의 험함을 이용하여 적을 막지 못한 점입니다.

그들은 당나라 군사들은 기벌포(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들은 탄현炭峴(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 고개)을 넘지 못하게 하라고 했으나 이 의견은 간신들에 의해 묵살됩니다.

결국 당나라 군사들은 무사히 상륙하였고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황산벌에 다다랐습니다.

 

셋째는 최고 지도자로서 현장을 굳건히 지키고 결사항전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점입니다.

의자왕에게는 적자가 여럿이고 서자들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이 각기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서 정책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왕 역시 누구의 말을 좇아야 할지 몰라 왕자들의 말을 다 허락하고는 자신은 몸소 태자太子와 함께 북경北京의 곰나루성(웅진熊津)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주인이 없는 마당에 누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의자왕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에 백제의 운명은 끝나버렸습니다.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을 지키는 대장이 그를 잡아 항복하려고 하자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동맥이 끊어지지 않아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묶여서 당나라 진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말년에 계속 되었던 판단과 결단력 부족이 자결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계속됩니다.

향락과 사치에 젖어 성명정 삼관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신교는 동방 한민족이 9천 년 역사를 지속할 수 있게 한 역사의 혼이다.

이러한 신교 정신을 직접 실천하고 신교를 바탕으로 새 문명을 열고 나라를 개창한 ‘역사개척의 집단’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낭가郎家이다.

한민족사는 낭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국 말기에 환인천제로부터 천부와 인을 받은 환웅을 따라 이주하여 배달을 세운 3천 명의 제세핵랑濟世核郞이 낭가의 시초이다.

이 최초의 핵랑의 정신을 살려 배달은 삼랑三郞 제도를 시행하였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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