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인류 조직문화③-배달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 삼한오가三韓五加

 

STEP2. 삼신오제로부터 출발한 조직 문화

 

2. 배달의 조직


삼백의 기능
환웅께서 거느리고 왔던 풍백, 우사, 운사의 삼백三伯 조직은 뒤에 나오는 오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조직이었습니다.

조선시대로 보면 삼정승 곧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해당하는 조직입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는 삼백의 역할에 대해 풍백은 입약, 우사는 시정, 운사는 행형을 맡았다 하였습니다(풍백지입약 우사지시정 운사지행형 風伯之立約과 雨師之施政과 雲師之行刑).

이것을 오늘날 정치제도로 말한다면 풍백은 입법立法기관, 우사는 행정行政기관, 운사는 사법司法기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계획, 통제, 조직으로 보거나 조화·교화·치화로 볼 수 있습니다.

 

삼신 문화에서 삼백 문화가 나왔습니다. 삼백 제도는 인류 조직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三韓曰(삼한왈) 風伯雨師雲師(풍백우사운사) 五加(오가)는 卽家也(즉가야)니 五加曰(오가왈) 牛加主穀(우가주곡)하며 馬加主命(마가주명)하며 狗加主刑(구가주형)하며 猪加主病(저가주병)하며 鷄加主善惡也(계가주선악야)니 民有六十四(민유육십사)하고 徒有三千(도유삼천)이라.

역주 삼한三韓은 풍백·우사·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主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主命]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主刑]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主病]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主善惡]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더 분화된 오가조직
배달 시대는 삼한오가의 조직 체계가 더 분화됩니다.

삼한오가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업무 영역이 세분화된 것입니다.

환웅께서 치우로 하여금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잡는 업무를 맡겼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과거 같으면 오가 중에 주형이 관장했을 업무가 분리되어 새로운 부서가 생긴 셈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주곡 관직을 맡은 분은 고시례이고, 주명 관직은 신지씨가 맡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직은 대체로 세습되었는데 고시씨와 신지씨의 이름은 단군 조선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治尤(치우)는 則世掌兵馬盜賊之職焉(즉세장병마도적지직언)하시니라.

역주 치우治尤로 하여금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잡는 직책’을 관장하게 하셨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桓雄天皇(환웅천황)이 又復命神誌赫德(우복명신지혁덕)하사 作書契(작서계)하시니 蓋神誌氏(개신지씨)가 世掌主命之職(세장주명지직)하 專掌出納獻替之務(전장출납헌체지무)나 而只憑喉舌(이지빙후설)이오
曾無文字記存之法(증무문자기존지법)이라.

역주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書契]를 만들게 하셨다. 신지씨神誌氏는 대대로 주명主命 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桓雄天皇(환웅천황)이 見人居已完(견인거이완)과 萬物(만물)이 各得其所(각득기소)하시고
乃使高矢禮(내사고시례)로 專掌餽養之務(전장궤양지무)하시니 是爲主穀(시위주곡)이니라

역주 환웅천황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은 것을 보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음식과 양육[餽養]의 일을 전담하게 하셨다. 이분이 주곡主穀 벼슬을 맡았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삼신오제 사상은 동북아 한민족사의 창세시절 초기부터 통치 원리로 이화되었다.

배달의 환웅천황이 삼신오제 사상에 따라 삼백三伯(풍백, 우사, 운사) 제도와 오사五事(주곡主穀·주명主命·주병主病·주형主刑·주선악主善惡)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삼백은 조선 시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근현대의 삼권분립(입법부, 행정부,사법부) 제도와 완전히 정합한다.

풍백, 우사, 운사는 흔히 말하듯 바람신, 비신, 구름신이라는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원형인 것이다.

 

배달의 오사는 고조선과 북부여, 고구려, 백제 등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로 흔히 삼황오제三皇五帝를 꼽는데, 이것도 동방 한민족의 삼신오제 사상에서 연유한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92쪽)


여러 명의 왕검들
배달국의 역사를 기록한 신시본기를 보면 왕검이 여러 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세 사와라 환웅초기에 웅녀군의 후예 여黎가 최초로 단허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습니다.

 

여러 지역의 왕검들이 방물을 바치고 귀화하였다는 내용을 볼 때 배달국 역시 한 분 환웅 아래 수많은 왕검들이 각기 소국을 다스렸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왕검들의 나라 중 대읍국大邑國에 해당되는 나라가 웅씨국이었고 웅씨국의 비왕으로 있다 웅씨 왕이 죽자 그 자리를 계승하여 구환을 통일하여 조선을 개국하신 분이 신인왕검이라 불린 단군왕검이십니다.

斯瓦羅桓雄之初(사와라환웅지초)에 熊女君之後(웅녀군지후)를 曰黎(왈여)니 始得封於檀墟(시득봉어단허)하야 爲王儉(위왕검)하야 樹德愛民(수덕애민)하니 土境(토경)이 漸大(점대)하고 諸土境王儉(제토경왕검)이 來獻方物(내헌방물)하야 以歸化者(이귀화자)가 千餘數(천여수)라 後四百六十年(후사백육십년)에 有神人王儉者(유신인왕검자)가 大得民望(대득민망)하사 陞爲裨王(승위비왕)이라가 居●二十四年(거섭이십사년)에 熊氏王(웅씨왕)이 崩於戰(붕어전)하고 王儉(왕검)이 遂代其位(수대기위)하사 統九桓爲一(통구환위일)하시니 是爲檀君王儉也(시위단군왕검야)시니라.

 

역주 사와라환웅(13세) 초기에 웅족 여왕의 후예를 여黎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다. 왕검이 덕을 베풀고 백성을 사랑하므로 영토가 점점 넓어졌다. 여러 지역 왕검이 와서 방물을 바쳤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그 뒤 460년이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 출현하여 백성에게 신망을 크게 얻어 비왕裨王(부왕)에 올라 24년간 섭정하였다. 웅씨 왕이 전쟁에서 죽자 왕검이 드디어 그 자리를 계승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였다.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