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불교 도교에 전파된 칠성문화⑤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칠성七星문화

 

불교와 도교에 전파된 칠성신앙

우리의 신교 칠성신앙은 불교에 그대로 흡수되어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에서는 지금도 경내에 칠성각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칠성각, 칠성전七星殿, 북극전北極殿, 북극보전北極寶殿 등의 이름으로 전각을 세워 주존인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북극성)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해)과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달)로 삼존불을 이루고, 다시 좌우로 칠성여래와 칠원성군이 배치된 칠성탱화를 모십니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 불교적으로 수용되어 부처님의 모습으로 화현한 것이 칠성여래七星如來입니다.

특히 음력 7월 7일은 칠석七夕날이라 하여 불가의 명절은 물론 우리 민족의 세시 풍속으로 자리 잡아 왔는데, 이 날은 전국의 사찰에서 치성광여래에게 재齋를 올립니다.

이를 칠석재라 하는데 치성광여래에게 성대하고 정성스런 재를 올려 그 신통력으로 모든 재앙을 없애고 복덕을 달라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 불교의 칠성문화는 인도, 중국, 티베트 등의 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입니다.

 

도교 또한 신교의 칠성사상도 내포합니다.

조선 초기, 중신 변계량卞季良이 도교 사당인 소격전昭格殿에서 북두칠성을 향해 초제醮祭를 올렸다는 기록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계량은 “저 푸른 하늘은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나, 오직 북쪽하늘에 북두가 있어서 상서로움도 내릴 수 있고 재앙도 내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며 칠성을 찬양하였습니다.

         


칠성은 생명의 고향

칠성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 영혼의 고향입니다.

오늘날 인류에게도 칠성 또는 칠성신앙은 여전히 주요한 테마입니다.

칠성으로 돌아가서 칠성과 하나 되었을 때 우리는 온전한 생명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을 이루게 됩니다.

 

칠성은 예부터 우주의 주재자이신 삼신상제님이 계신 별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인생의 궁극적인 물음에 우리는 칠성에서 왔으며 다시 칠성으로 돌아간다는 답을 제시해 볼 수 있습니다.

지상의 사람이 천상의 별기운와 연결된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칠성문화, 상제문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수메르 서양 칠성문화④-유대문화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칠성七星문화

 

STEP2. 동·서양의 칠성문화

 

3. 수메르와 서양의 칠성문화


요일의 기원은 칠회제신력
수메르 역시 동방의 환국을 뿌리로 하여 갈라져나간 서양의 동이입니다.

수메르에도 7수와 칠성문화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신교의 본고장인 동양은 우주의 통치자이신 상제님이 계신 별인 칠성을 천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반면, 수메르와 서양은 신도神道 차원에서 칠성문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르의 제천단 꼭대기에는 하늘의 일곱 주신에게 천제를 올린 제단이 있습니다.

이 일곱 주신은 칠성령(일곱 분의 성령)으로, 칠성의 신도神道적 표현입니다.

수메르의 일곱 신은 후에 기독교의 ‘하나님의 일곱 영seven spirits of God’ (「요한계시록」 4:5)으로 전승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요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수메르의 일곱 신은 요일 이름의 기원이고, 7요일(일주일) 자체가 생긴 기원은 배달 시대 때 탄생한 인류 최고最古의 책력인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과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神市之世(신시지세)에 有七回祭神之曆(유칠회제신지력)하니 一回日(일회일)에 祭天神(제천신)하고
二回日(이회일)에 祭月神(제월신)하고 三回日(삼회일)에 祭水神(제수신)하고 四回日(사회일)에 祭火神(제화신)하고
五回日(오회일)에 祭木神(제목신)하고 六回日(육회일)에 祭金神(제금신)하고 七回日(칠회일)에 祭土神(제토신)하니
盖造曆(개조력)이 始於此(시어차)라.

 

역주 신시 시대에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이 있었다. 첫째 날에 천신(삼신상제님)께, 둘째 날에 월신月神께, 셋째 날에 수신水神께, 넷째 날에 화신火神께, 다섯째 날에 목신木神께, 여섯째 날에 금신金神께, 일곱째 날에 토신土神께 제사 지냈다. 책력을 짓는 방법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紫府先生(자부선생)은 發貴理之後也(발귀리지후야)니 生而神明(생이신명)하고 得道飛昇(득도비승)이라.
嘗測定日月之纏次(상측정일월지전차)하고 推考五行之數理(추고오행지수리)하야 著爲七政運天圖(저위칠정운천도)하니
是爲七星曆之始也(시위칠성력지시야)라.

 

역주 자부 선생은 발귀리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 신명神明하여 도를 통해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 일찍이 일월의 운행 경로와 그 운행 도수[纏次]를 측정하고, 오행의 수리數理를 추정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지으니 이것이 칠성력의 기원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수메르의 칠성문화는 이 외에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신년 축제에 태양계의 일곱개 행성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심판하는 7인’이며 ‘최고신 안An의 일곱 사자’입니다.

 

또한 고대 근동의 모든 도시에는 일곱 개의 성문이 있었고, 문에는 일곱 개의 빗장이 있었고, 7년간의 풍요를 비는 축복이 있었으며, 7년간의 기아와 역병을 저주하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길가메시가 우트나피쉬팀을 만난 곳은 ‘일곱 산맥 너머에 있는 생명의 땅’입니다.

‘일곱 산맥’은 신교의 선 사상의 상징 언어인 칠성七星을 지리학적으로 표현한 말인 것입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인 삼신상제님을 동양의 상수철학으로 표현하면 ‘통일과 조화의 완전수’인 ‘10무극’이다.

10무극 상제님을 다시 체용體用 관계로 보면, 상제님은 삼신을 본체로 하여 칠성으로 만물을 다스리고 작용하신다[10=3+7].

삼신과 칠성이 음양 짝을 이루어 10무극 상제님의 조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삼신을 본체로 하여 칠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신교문화에서는 하나님을 삼신상제님으로만 모신 것이 아니라 칠성님으로도 모셨다.

삼신은 생명을 낳는 하나님이고, 칠성은 기르는 하나님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413쪽)


유대와 기독교의 칠성문화
수메르문명에서 갈려 나간 유대문화에도 칠성신앙이 녹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서인 『구약전서』에서는 천지창조가 7일 만에 이루어졌다 하고, 『신약전서』에서는 ‘일곱 개의 금 촛대’, ‘일곱 교회’, ‘하나님의 일곱 성령’ 등을 말합니다.

 

이상과 같이 서양의 칠성신앙에서 우리는 또 한 번 환국을 모태로 하고 수메르를 실질적인 전수자로 하여 서양 세계로 뻗어 나간 신교문화의 정수를 느끼게 됩니다.

수메르의 칠성사상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7수 사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여호수아」 6:4)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계시록」 1:20).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요한계시록」 8:6)

생활속 칠성문화③-윷놀이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칠성七星문화

 

STEP2. 동·서양의 칠성문화

 

2. 생활속의 칠성문화


상투문화
동북아 민족들 중 유독 한민족에게서만 볼 수 있는 칠성문화가 있습니다.

바로 머리를 틀어 올리는 상투입니다.

상투는 상두上斗라고 합니다.

 

상투를 틀 때 앞으로 4번, 뒤로 3번 꼰다는 것은 북두칠성을 내려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상투는 머리꼭대기에 틀어 올려 꼿꼿하게 세우는 머리기둥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기운을 받는 장소입니다.

사람의 몸에 세운 솟대라 볼 수 있습니다.

 

홍산문화 유물 중에 발견된 옥고에서 알 수 있듯이, 상투는 태고 시대에 시작되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생활문화입니다.

상투는 내 머리를 삼신상제님이 계시는 칠성을 향하게 하여 항상 상제님과 한마음으로 살겠다는 의지와 정성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투를 시대에 뒤처지는 구습으로 알지만, 사실 상투문화에는 삼신상제님을 받들던 인류의 원형문화인 신교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상투문화는 우리와 형태는 약간 다르지만, 중국 남방의 묘족에서 확인할 수 있고, 20세기 초 아메리카 인디언과 중미의 아즈텍인들에게서도 살필 수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문화적으로 혈연적으로 가까운 같은 계열의 한 민족인 것입니다.


윷놀이
한국의 대표적 민속놀이 중의 하나인 윷놀이도 칠성문화의 한 가지로, 북두칠성이 하늘을 도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윷의 기원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부여에 그 기원을 두었으며, 더불어 말하기를 부여의 제가諸加가 윷에 투영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저가猪加가 돼지를 뜻하는 ‘도’에, 구가狗加가 개를 뜻하는 ‘개’에, 양가羊加가 양을 뜻하는 ‘걸’에, 우가牛加가 소를 뜻하는 ‘윷’에, 마가馬加가 말을 뜻하는 ‘모’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윷판의 바깥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안의 모진 것은 땅을 본뜬 것입니다.

 

윷놀이에는 천문 역법과 역학의 수리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단군세기」에서는 천하天河에서 거북이 윷판을 지고 나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윷판은 하늘의 법칙을 담고 있는 천강서이고 윷놀이는 놀이이면서 동시에 우주만물의 변화 원리를 탐색하는 가장 철학적인 문화입니다.

 

丙午十六年(병오십육년)이라 東門外十里(동문외십리)에 陸地生蓮(육지생련)하고 不咸(불함)에 臥石自起(와석자기)하고
天河(천하)에 神龜(신귀)가 負圖而現(부도이현)하니 圖如柶板(도여사판)이오

 

역주 (10세 노을단군) 재위 16년 병오(단기 399, BCE 1935)년, 동문 밖 십 리 떨어진 땅 위에 연꽃이 피었고, 불함산에서 누웠던 돌이 저절로 일어났으며, 천하天河에서 신령스런 거북이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윷판과 같았다. (「단군세기」

 

適以是時(적이시지)에 紫府先生(자부선생)이 造七回祭神之曆(조칠회제신지력)하고
進三皇內文於天陛(진삼황내문어천폐)하니 天王(천왕)이 嘉之(가지)하사 使建三淸宮而居之(사건삼청궁이거지)하시니
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공공헌원창힐대요지도)가 皆來學焉(개래학언)하니라. 於是(어시)에 作柶戱(작사희)하야
以演桓易(이연환역)하니 盖神誌赫德所記(개신지혁덕소기) 天符之遺意也(천부지유의야)라.

 

역주 마침 이때 자부 선생이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 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황께 바쳤다. 천황께서 기뻐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기거하게 하셨다. 공공·헌원·창힐·대요의 무리가 찾아와서 모두 자부 선생에게 배웠다. 그때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桓易」을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대체로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기록한 『천부경』이 전하는 취지이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조선 선조 때의 문인 김문표金文豹는 윷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윷판의 바깥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안의 모진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니, 즉 하늘이 땅바닥까지 둘러싼 것이다. 별의 가운데 있는 것은 북극성이요, 옆에 벌여 있는 것은 28수를 본뜬 것이다. 북두칠성이 제 자리에 있으며 뭇별이 둘러싼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柶之外圓象天, 內方象地卽天包地外也. 星之居中者 樞星也. 旁列者 二十八宿也.卽北辰居所 而衆星拱之者也.]”(『중경지中京誌』 「사도설柶圖說」)

         

동서양의 칠성문화②-북두칠성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칠성七星문화

 

STEP2. 동·서양의 칠성문화

 

1. 삼신과 칠성

삼신은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고 칠성은 출생 이후 인간의 건강, 수명, 복록 등을 관장한다고 믿어왔습니다.

삼신과 칠성은 체와 용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신을 체로 하여 칠성으로 만물을 다스립니다.

칠성은 곧 삼신상제님이 계시는 별입니다.

달리 말해 북두칠성은 대우주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별입니다.


7의 정신
3은 반드시 7을 만나야 새로운 현실의 틀이 만들어집니다.

7은 3이라는 하늘의 완전수(삼신)와 4라는 지상의 완전수(동서남북, 봄 여름 가을 겨울)가 합쳐진 수입니다.

3, 4에서 시작한 운동은 5와 7에서 순환을 완성합니다.

 

옛 사람들은 하늘과 지상이 합쳐지면 복이 온다고 믿고 7을 성스러운 수로 숭배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 자에 7(七)자를 많이 넣었고 서양에서도 7수를 ‘럭키 세븐(lucky seven)’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자들도 7을 가리켜 영적인 완전수이며 위대한 수라고 하였습니다.

 

運三四(운삼사)하여 成環五七(성환오칠)이니라.

역주 천지만물 3과 4수 변화마디 운행하고 5와 7수 변화원리 순환운동 이룸일세. 『(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천부경 中에)

 

하늘에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칠성七星이 있고, 그 기운을 받아 인간의 얼굴에도 일곱 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민간 속설에서는 생명이 7수를 주기로 펼쳐진다고 말합니다.

일주일은 7일이고 빛은 일곱 스펙트럼으로 나뉘어집니다.

3과 7이 곱해서 되는 21 역시 수행과 기도에 있어 중요한 수였습니다.

3×7=21에서 ‘곱하기[×]’는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성기도 공부를 할 때는 7일 단위로 7일, 21(7×3)일, 49(7×7)일 수행을 주로 합니다.

 

擇三七日(택삼칠일)하사 祭天神(제천신)하시며 忌愼外物(기신외물)하사
閉門自修(폐문자수)하시며 呪願有功(주원유공)하시니라

역주 삼칠일(21)을 택하여 상제님께 제사지내고 바깥일[外物]을 꺼리고 삼가 문을 닫고 수도하셨다. (「삼성기전 상」)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칠성은 곧 삼신상제님이 계시는 별인 북두칠성이다.

달리 말해서 북두칠성은 대우주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별이다.

때문에 북두칠성은 우주의 중심별로서 천지일월과 음양오행을 다스리며 인간의 무병장수와 생사화복, 영원불멸, 도통과 깨달음을 관장한다.

우리 조상들이 상고 시대의 무덤이자 제단인 고인돌에 칠성을 그리고, 죽은 사람의 관 밑에 칠성판을 깐 것은 바로 칠성신앙의 한 모습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415쪽)

칠성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은 우주의 중심별로서 천지일월과 음양오행을 다스리며 인간의 무병장수와 생사화복, 영원불멸, 도통과 깨달음을 관장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우주의 주재자 상제님을 삼신상제님 또는 칠성님이라 불렀습니다.

칠성님은 신교문화에서 한민족의 선조들이 하느님을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었습니다.

 

칠성 사상은 9천 년 한민족사의 모든 왕조에서 국가경영제도의 근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전반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천관서」에서 “북두칠성이란 이른바 ‘선기옥형을 살펴서 칠정을 다스린다’는 것이다[北斗七星, 所謂璇璣玉衡以齊七政].”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칠정七政이란 해와 달과 금, 목, 수, 화, 토의 오성五星을 말합니다.

일월은 음양론의 근거가 되고, 오성은 오행론의 기준이 됩니다.

결국 이 말은 북두칠성이 천지일월의 운행을 주관한다는 뜻입니다.

 

北斗者(북두자)는 乃天地之元靈(내천지지원령)이요 神人之本命也(신인지본명야)라 北斗居天之中(북두거천지중)하야
爲天之樞紐(위천지추뉴)며 天地之權衡也(천지지권형야)라 天(천)이 無斗不生(무두불생)하고 無斗不成(무두불성)하며
無斗不明(무두불명)하고 無斗不行(무두불행)하나니 斗爲量度之玄器也(두위양탁지현기야)니라

 

북두칠성은 천지의 으뜸가는 성령이며, 신과 인간의 근본생명을 주장하니라. 북두칠성은 하늘 가운데 자리해서 하늘의 지도리가 되며, 천지의 저울이 되니라. 하늘이 북두칠성이 없으면 만물을 생성하지 못하며, 북두칠성이 없으면 만물을 성숙시키지 못하며, 북두칠성이 없으면 세상을 밝히지 못하며, 북두칠성이 없으면 하늘 자체가 운행하지 아니 하나니, 북두칠성은 헤아리고 살피는 현묘한 그릇이 되느니라. (『도장道藏』17권 「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注」)

 

北斗(북두)는 七政之樞機(칠정지추기)며 陰陽之本元也(음양지본원야)라
故(고)로 運乎天中而臨制四方(운호천중이임제사방)하야 以建四時而均五行也(이건사시이균오행야)라
又曰人君之象(우일인군지상)이요 號令之主也(호령지주야)며 又爲帝車(우위제거)니 取乎運行之義也(취호운행지의야)라

 

북두는 칠정의 핵심이 되는 기틀이며 음양의 본원이니라. 고로 하늘 가운데에서 빙빙 돌아서 사방을 통제해서 사시를 세우고 오행을 고르게 하니라. 북두칠성은 임금의 모습이며, 모든 별들을 호령하고, 모든 인간세계를 호령하는 주인공이며, 옥황상제님께서 타시는 수레니, 수레는 운행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라. (『천문류초天文類抄』)

우리 역사 이해위한 8가지 문화코드

진실의 역사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8가지 문화코드"

 

1. 천부인
천부인(天符印)은 환국의 마지막 7대환인께서 배달국 초대환웅에게 내려주신 옥새

9214년 전 천산 파미르고원 아래 인류최초의 국가인 환국이 열렸습니다.

환의 하늘광명을 체득한 초대 안파견(安巴堅)환인으로부터 마지막 7대 지위리(智爲利)환인까지 총 3301년간 이어진 환국, 그 말기에 이르자 기상이변이 일어나 더이상 국가가 지속될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서자부의 환웅이 동방땅 개척의 뜻을 품고 환인에게 제세핵랑군(濟世核郞軍) 3000명과 국통의 상징인 천부인 3개를 하사 받아 백두산 너머로 와서 천평(天坪)이라는 곳에 신시(神市)라는 나라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신시 개천으로 오늘날 고조선 개국일로 잘못 알고 있는 10월 3일 개천절은 5914년 전 신시배달국이 처음 열린 날입니다.

한편 반고를 우두머리로 한 서장족은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와 금은보화를 싸짊어지고 타밀분지로 들어가 중화족의 시원이 되었습니다.

배달국은 총 18대 1565년간 이어졌는데 14대 치우천황 때 중원을 개척하여 청구로 수도를 옮기고 북경 근처인 탁록에서 천자에게 대항해 온 중화족의 고수 황제헌원과 10년 동안 71회 맞붙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한무제 때 사마천 사기를 통해 이를 거꾸로 헌원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왜곡을 시켰는데 이 기운이 터져나온게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사건입니다.

치우는 중국이 왜곡한대로 악마가 아닙니다.

인류역사상 처음 철기로 무기를 제작해 뿔이 난 투구를 썼기 때문에 중국이 괴물로 왜곡한겁니다.


2. 환단고기
인류시원사를 개창한 원형문화 신교의 경전.
환단고기에는 한민족 1만년 역사의 문화정신인 신관(神觀)과 우주관, 인간론, 역사관이 융합되어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며 단군이 실존인물이 아닌 신화 속의 인물이라는 자들은 환단고기 내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인류문명 발전사에 대해 무지할 때 중앙일보 사회1부 구혜진 기자같은 문외한들이 생겨납니다.

그녀는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과학적 비판이 부족할 때 환단고기같은 책자가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사 기록물이자 인류시원사를 개창한 우리 정신사 뿌리인 환단고기를 매도하는 무리들은 인류의 문화정신이 어디에서 출발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환단고기 마지막편인 태백일사에는 제 1장에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記)가 있어 하나님(一神)이 셋으로 작용하여 화현한 하늘(天一)과 땅(地一)과 인간(太一)에 대해 정의를 해 놓았습니다.

또 상제의 명을 받드는 오제(五帝)가 만물을 낳고 성장시켜 조화로 성숙시키고 생명을 여물게하는 역활과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다섯성령인 오령(五靈)이 각기 맡은 기운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삼일신교에는 '허공' 장이 있어 하늘세계에 대해 정의가 내려져 있으며 11대 도해단군께서 홍익이념을 자세히 정의하신 염표문(念標文)에는 하늘과 땅과 인간의 도와 그 하는 일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3. '이마니시 류(今西龍)'
삼국유사에 나오는 나라 이름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변조함으로써 국통맥 1•2•3번 한민족 7천 년 국가 변천사를 환인•환웅•단군의 3대 인물사로 축소 왜곡시킨 원흉.

 

환단고기는 그만두고 식민사학자마저 인정하는 일제가 그나마 남겨놓은 삼국유사 고조선 왕검조선편에 보면

"위서(魏書)에 운(云) 내왕이천재(乃往二千載)에 유단군왕검(有檀君王儉)이 입도아사달(立都阿斯達)하시고 개국호조선(開國號朝鮮)하시니 여고동시(與高同時)니라.

고기(古記)에 운(云) 석유환국(昔有桓國)하니 서자환웅(庶子桓雄)이 삭의천하(數意天下)하야 탐구인세(貪求人世)어늘 부지자의(父知子意)하시고 하시삼위태백(下視三危太伯)하시니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이라.

내수천부인삼개(乃授天符印三箇)하사 견왕이지(遣往理之)하시니라.
웅(雄)이 솔도삼천(率徒三千)하사 강어태백산정(降於太伯山頂) 신단수하(神壇樹下)하시니 위지신시(謂之神市)요. 시위환웅천왕야(是謂桓雄天王也)시니라."

 

이렇게 일연이 남긴 삼국유사에는 '고기에 옛적부터 환국이 있었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식민사학자들은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위시한 한국 역사왜곡의 3인방이 쳐 놓은 덫에 빠져 고대사 7000년을 신화로 치부해 버립니다.

일연은 '다만 그 환국이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이다.'라고 잘못 전하여 일제로 하여금 신화로 매도할 여지를 남겨놓은 것은 있습니다.


4. 한민족의 9214년 국통맥
인류시원사를 개창한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일본과 중국에 의한 끊임없는 역사침탈로 국통맥이 거의 끊어진 지경에 이르렀다.

 

인류최초의 국가인 환국은 12개 나라의 연방형태로 환인께서 통치하셨습니다.

6000여년 전 지구촌을 덥친 이상기후로 인해 오늘과 같은 환경으로 바뀌면서 환국은 문을 닫고 12개 나라는 지구촌 각지로 흩어져 갔습니다.

크게 양분하여 서쪽에 있던 수밀리국과 우르국은 서방으로 가서 수메르문명을 열어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었고 환국의 국통맥을 이어받은 환웅은 동방으로 넘어와 백두산 너머에 터를 잡고 배달국 신시를 열었습니다.


5. 주역 건괘(乾卦)에 나오는 옥
옥(玉)은 하나님의 신성(神性)과 광명, 생명을 상징한다.

옥은 신앙의 상징으로 하나님이 계신 옥경(玉景)을 뜻한다.

옥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징하는데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오기 전 옥기문명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때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의식 속에서 자타에 대한 경계가 없이 모두가 전체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최근 널리 알려진 홍산문명은 환국 중기에서 배달국을 지나 단군조선 중기에 거쳐 형성된 문명으로 세계 각지로 그 문화가 흘러 들어가 우리의 마니산과 같은 전방후원(前方後圓) 양식의 제천단을 남겼습니다.

 


6. 신교(神敎)
신의 가르침으로 만물과 세상을 다스렸던 한민족의 태고 신앙이자 인류 원형문화로서 인류 4대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신교는 이신시교(以神施敎) 또는 이신설교(以神設敎)의 준말로 인류최초의 원형문화입니다.

신교는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문명, 인더스문명, 황하문명 등 4대 문명과 유불선 및 기독교의 4대 종교를 낳은 모체문명입니다.

신교는 하나님(一神:上帝)이신 삼신(三神)과 칠성(七星)을 섬기는 인류 원형문화로 유불선 모든 종교는 삼신신앙에 의해 기독교 삼위일체(三位一體)와 불교 삼신불(三身佛)과 유교의 삼극(三極)사상으로 발전해 왔고 우리의 삼일신고 경전과 심지어 일제 때는 3•1운동으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칠성은 삼신이신 상제님(하나님)이 계신 별로 우리와 같은 인격적 형상으로 계시며 북두칠성에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별이 더 있는데 보성(輔星)과 필성(弼星)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준다는 '보필'이란 말이 여기에서 왔습니다.

따라서 칠성을 일러 북두구진(北斗九辰)이라 부릅니다.


7. 최초의 계시록 천부경
인간이 천지가 꿈꾸어 온 궁극의 이상과 낙원세계를 건설하는 주인공임을 노래한 인류 최초의 경전으로 모든 종교 이념의 근원이 된 조화경(造化經), 인류 최초의 계시록이자 신교의 경전인 우주 부호 천부경을 보면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 하여 하나가 셋으로 분화되어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부경의 정신은 셋이 모여 하나로 통일되는 회삼귀일(會三歸一)과 하나를 잡으면 그 속에 셋이 포함되어 있는 집일함삼(執一含三)입니다.

지금은 하나에서 분화되어간 그 셋이 다시 하나로 통일되는 문명의 성숙기로 유불선 종교가 하나가 되고 종교와 과학과 철학이 하나로 융합되는 우주가을문명시대입니다.


8. 삼일신고(三一神誥)
배달의 초대 거발환(居發桓) 환웅이 지은 신학(神學)이자 인성론(人性論)과 수행론(修行論)의 최초 경전인 교화경(敎化經).

 

총 366자로 되어 있는 교화경 삼일신고는 5914년 전 배달국을 여신 거발환 초대환웅께서 지은 가르침으로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 1장은 '허공(虛空)'으로 하늘에 대한 정의인데 우리가 매일 보는 저 푸른 하늘이 진짜 하늘이 아니라 하늘은 허허공공하여 형체도 없고 바탕도 없으며 처음도 끝도 없고 상하도 사방도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2장은 '일신(一神)'으로 우주의 주인이신 상제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우주만유를 주재하고 계신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3장은 '천궁'으로 하나님의 나라인 하늘에 있는 천궁(天宮)이 온갖 선(善)과 덕(德)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노래한 것이고,
4장은 '세계'로 상제님이 어떻게 우주천체권을 지어내셨는지 또 땅이 어떻게 열려 온갖 생물이 자리잡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5장은 '인물'로 성명정(性命精) 삼진(三眞)과 심기신(心氣身) 삼망(三妄)과 감식촉(感息觸) 삼도(三途) 등 하늘의 삼신이 내 몸에 들어와 이루어진 생명원리와 인생론과 수행론의 핵심이 나와 있는데 삼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대광명을 체득해 그 공덕을 완수하는게 인생의 목표이며 인간이 걸어가야할 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표절의혹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
◉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의혹에 대한 반론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들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환단고기가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 국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교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는 700년이고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 왕의 13세손’이라 하였다.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이러한 부정확한 내용을 비판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부정한 『신당서』의 기록, ‘가언충의 고구려 900년 유국설留國說’을 근거로 할 때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 200년을 삭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요동을 시찰한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올린 보고 중에 “『고구려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팔십 먹은 장수에게 망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한 대목을 가리킨다.

‘고구려 900년’은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고 오가의 공화정을 폐한 BCE 232년에서 고구려가 망한 CE 668년까지를 뜻한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그 진실이 명쾌하게 밝혀진다.

환단고기의 기록으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의 내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북부여기」·「고구려국본기」를 통해 고구려 제왕의 초기 혈통계보가 천제자天帝子인 제1세 해모수(BCE 239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주몽(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으로 정립됨으로써, 고구려 900년 유국설이 입증되는 것이다.

삼성기 상 원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扶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사 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이라하시니 是爲高句麗始祖也시니라. (삼성기 상)
⇒해설 :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 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삼성기』 상)


즉 광개토대왕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광개토대왕비에 정확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부여 4세+고구려13세를 더하면 광개토 대왕이 17세손임을 밝혀주는 유일한 사서는 바로 환단고기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오히려 환단고기를 통해서 완벽히 광개토대왕 비문의 해독이 가능해졌다. 결코 조작된 위서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는 데에 그치지만, 『환단고기』는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 기록의 본래 진실까지 담고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900년 유국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현現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이순근은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라는 구절이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의 내용과 유사하므로, 『환단고기』는 박은식의 책을 베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기존에 전수되어 내려오던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를 묶어서 1911년에 발간되었고,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1915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역사관을 전개하기 위해 댓구적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베낀 것이란 말인가.

오히려 『한국통사』의 문장이 ‘옛사람(古人)’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라와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형식이므로 박은식이 다른 역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원문 자체를 분석하지 않고, 글의 전체 논리 흐름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유사한 한 구절을 떼어다가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원문은 이렇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망할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라[古人云 ‘國可滅, 史不可滅’, 蓋國形也, 史神也](박은식, 『한국통사』 서문).

이때 박은식이 인용한 ‘옛 사람의 말’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또 『환단고기』 범례에 ‘낭가’라는 말이 나온다.

위서론자들은 ‘단재 신채호가 처음 사용한 낭가라는 말을 환단고기 서문을 쓴 계연수가 따온 것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그 후에 성립됐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사실 『환단고기』는 낭가 문화의 원형인 삼랑三郞과 그 이후의 낭가 맥을 최초로 전해 주는 책이다.

 

이순근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논리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광용 또한 “교리체계에서도 환인(하느님)의 조화, 환웅(예수)의 교화, 단군(성령)의 치화를 생각나게 하는 삼신(삼위)일체론 부분은 … 기독교에 대한 단군신앙의 교리적 대응에서 나온 것이다. 또 영혼, 각혼, 생혼의 성삼품설聖三品說이 보이는 부분도 『천주실의』에서 마테오리치가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군세기』의 삼신일체 사상과 삼혼 논리가 명나라 때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말한 성삼품설聖三品說을 흡수한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환단고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서 신관의 중심 언어인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란 무엇인가?

‘조물주로서 얼굴 없는 하나님인 삼신과 한 몸이 되어 직접 우주 만유를 낳고 다스리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말한다.

비인격적인 삼신만으로는 이 우주에 어떠한 창조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 질서의 주권자이신 삼신일체상제의 조화손길이 개입될 때 비로소 천지만물이 창조되고 변화한다.

삼신일체상제, 이 한 마디에는 조물주가 어떤 원리로 우주를 다스리는지 그 해답이 담겨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位格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말하는 동방의 ‘삼신일체상제’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또한 마테오리치 신부가 말한 성삼품설의 영혼·각혼·생혼은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의 삼혼설에서 말하는 영靈·각覺·생生과 용어는 같으나 그 의미와 사상적 배경이 다르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삼신설이나 삼혼설은 고대 동북아 문화의 우주론, 삼신관을 바탕으로 한 ‘삼수 원리’에 토대를 둔 것이고, 생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이것을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던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하면서 수용한 것이다.

 

반면 마테오리치 신부의 성삼품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혼설에 토대를 둔 것이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서 말한 “영각생靈覺生 삼혼三魂”은 삼혼칠백三魂七魄의 삼혼을 말한다.

 

위서론자들은 삼신, 칠성 문화, 용봉 문화, 천지 광명의 환단 문화에 대한 기초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전통 문화의 기반인 삼신 우주관에 대해 치밀한 문헌 고찰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의식 자체가 없고,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지성과 우주론이 결여된 자들이다.

원전 자체를 체계적으로 읽지 않고, 그 가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논리를 만들어 아전인수 격으로 부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불순한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동방의 오랜 전통문화와 한민족의 숨겨진 원형역사가 담긴 환단고기를 이단과 사이비로 몰고 갔다.

무당, 민족사학, 샤머니즘, 오방낭 등을 거론하면서 민족종교와 민족사학을 도매급으로 사이비로 매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통문화를 사이비나 미신으로 매도한 것은 일제 강점기이후 민족종교 말살정책의 일환이였으며 해방이후에는 개신교계의 세력 확장 전략이었다. 

 

특정종교와 언론이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바탕으로 타문화, 타종교에 배타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며 동방문화와 역사를 배척하고 타도하려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국정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나오기 전부터 ‘환빠교과서’라고 엄청난 음해를 하는 여론몰이를 하더니만 뚜껑을 열고 보니 정작 실린 것은 찬란했던 우리의 상고사 환단고기 내용은 한 줄도 없고 여전히 식민사학 논리를 고수하며 친일 뉴라이트 역사관과 식민사학을 더욱 공고히 뿌리를 내리도록 기술을 하였던 것이다.

최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는 일본 극우 단체들의 지원금이 국내 유수대학과 일본 유학파 출신들에게 지원하여 신친일파를 만드는 정책이 상당히 성공하였다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의 극우교과서를 추진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한국의 뉴라이트 단체와 상당한 친선교류를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식민사학자와 외래사대주의, 그리고 자학사관자들이 매도하는 『환단고기』는 국정교과서 농단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와 음해를 당했다.

자국 역사를 어떻게든 깍아내리려는 이들은 일본 극우 단체의 자금을 받고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찬란하게 실존했던 한국의 고대사는 기술도 하지 않으면서 언론을 통해서 국정교과서는 환빠교과서로 여론몰이를 했다.

이들은 교활하게 민족사학을 매도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반영했다.

뉴라이트는 오히려 이전의 친일식민사학자들보다도 한술 더 떠서 친일을 미화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성공기반이 친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 사건은 한국사학계가 식민사학이 주류임을 다시 한 번 입증을 한 셈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①
위서론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문제는 사서 조작의 문제, 지명과 인명 문제, 근대 술어 사용 문제, 다른 사서와의 관련 문제, 저자 문제 등으로 정리된다. 위서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환단고기를 활발하게 연구하는 의식 있는 학자들의 의견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사서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위서론자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환단고기는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편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다.

이 사실은 환단고기 범례의 내용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연수를 가공 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환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위서를 만들어서 그동안 식민사학의 거짓을 덮으려는 음모에 불과하다.

 

환단고기는 엄청난 깨달음과 깊이 있는 역사를 보는 혜안이 어떠한 사서보다도 뛰어나다.

만약에 환단고기를 조작을 했다면 조작한 사람들은 만세의 학자며 성인들로 추대해도 모자랄 정도의 깊은 소양이 가진 인물들로 느껴질 정도다.

 

이번 국정교과서가 환단고기 내용이 진짜 반영이 될 것이라고 몰아붙이는데 그런 일은 아마도 털 끝 만큼도 없을 것이다.

집필진 대다수가 식민사학계열로 구성이 되었고 이들은 환단고기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데 환단고기 내용을 과연 반영하겠는가.

국정교과서에 환단고기 반영한다는 여론몰이는 언론조작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국정화는 뉴라이트 세력의 역사관이 반영된 일제식민지 근대화론이나 해방이후 친일건국 세력에 대한 미화거나 식민사학자들 주장이 반영되면 되었지, 식민사대주의자들이 뭐가 좋다고 자승자박하는 한민족 국통을 계승한 자주독립역사학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책이었던 환단고기 내용을 집어 넣겠는가?
 
다시 계연수에 대해 알아본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은 그 제자인 이유립의 증언과 여러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와 그가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서술되어 있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20) 등이 있다.

계연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환단고기를 1980(庚申)년에 세상에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만약 환단고기가 조작된 책이라면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진 오형기가 필사를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조작 사실을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선생은 1966년부터 이유립의 제자로 환단고기를 배웠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고등학교 때 몇 명씩 일주일 단위로 이유립의 집에 모여서 역사를 배웠는데, 그때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짚어 가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언론에서 가장 위서론을 극렬하게 확산하고 있는 이문영 주장처럼 환단고기가 1980년대 이유립이 조작한 책이 전혀 아닌 것이다.

양종현은 종이의 질과 색깔, 책 표지 상태까지 말하였는데, 책을 묶은 끈이 떨어져서 여러 번 고쳐 매고 풀로 붙였던 사실도 기억하였다.

이 같은 양종현의 증언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원본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최순실 사건이 터지면서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행촌 이암의 國猶形史猶魂 形可失而保乎(국유형 사유혼, 형가실혼이보호) 즉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할수 있겠는가.

이 구절을 박 전 대통령이 인용했다고 위서를 인용했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잘못을 왜 환단고기에 뒤집어 씌우는가.

성경조차도 19세기 후반 예수의 말씀이 후세에 조작이 되었다고 서양 학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위서론에 시달린 적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가르침과 가치가 인류사에 도움이 된다”라고 하여 종식이 되었다.

 

환단고기 내용이 인류사에 그리 해악이 되는 내용인지 읽어보면 스스로 알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또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이 바뀌었으므로,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유립은 <자유>에 ‘환단유기桓檀留記’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다.

박창암이 1968년 5월 창간한 월간지로서 2010년 7월, 통권 443호를 발행하였다.

이유립이 <자유>에 원고를 기고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위서론자들은 이 <자유>에 게재한 내용과 『환단고기』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1979~80년에 썼거나 교정을 보면서 조작했다는 것이다.

 

박성수는 “환단유기의 내용이 『환단고기』에 담겨 있다. 그래서 ‘환단유기’를 하나의 필명으로 쓴 건지, 아니면 책 제목이 바뀐 것인지 판단은 못하지만,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환단유기로 바꾼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곧 『환단고기』라는 책이 이미 있었다는 뜻이 된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본 책을 직접 본 양종현이, 책의 제목은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다.

또한 임채우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곰과 범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고 “환단고기의 각 권에서 그 내용을 서로 다른 의미로 기록한 점이 환단고기가 한 사람의 저서가 아님을 반증한다”라고 주장한다.

즉 이유립이 독자적으로 창작한 것이라면 그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환단고기 편찬 과정에 의문을 품는다면, 계연수 편집본, 오형기 필사본, 오형기 필사본에 대한 영인본,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더구나 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역사를 공부하였다는 양종현의 진술 또한 거짓이라 해야 하는데, 이는 위서론을 주장하기 위해 한 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벌어진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허구라고 몰아붙이면서, 위서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민족사학을 부정하고 식민사학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환단고기 역주』

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그들 비판의 상당 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에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자구字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라고 하면서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그 숱한 인명, 지명, 연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세기적인 대천재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일축하였다.

 

천안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김삼웅은 “『환단고기』가 비록 내용과 용어의 일부가 후세의 것이라 해도 아직 책 자체가 완전히 위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한다.

 

윤내현 교수는 『환단고기』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가 아직 불충분함을 토로한다.

『단기고사』,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에는 47명의 단군 이름이 실려 있는데, 아직 이 책들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나 그 내용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가 충분하게 되어 있지 않다(윤내현, 『고조선 연구』, 331쪽)라고 지적하며 환단고기 내용자체를 연구조차 하지 않으려는 현사학계를 비판하고 있다.

『환단고기』가 주류 강단사학에서 위서로 몰리고 있던 1993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박창범고조선 13세 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五星聚婁] 현상을 컴퓨터로 재현하고 실제 역사 사건으로 증명했다.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 박사도 이 오성취루 현상이 사실이었고 고조선도 실제로 존재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BCE 1733년에 5행성이 저녁 하늘에 나란히 관측됐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 발견됐다.

이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나도 소프트웨어를 돌려봤다.

그 결과 단 1년의 오차도 없이 BCE 1733년 7월 저녁 서쪽 하늘에는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 순서로 5행성이 늘어섰다. 여기에 달까지 끼어들어서 7월 11~13일 저녁에는 글자 그대로 ‘우주쇼’를 연출했다.

이러한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BCE 1733년, 우리 조상들은 천문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트집을 잡는 근대 용어 문제도 『환단고기』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사실 인류 문화사에 전하는 경전의 고본을 보면, 그 시대 전문가나 학자에 의해 정서가 되면서 글자가 추가되거나 부분적으로 윤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뒤에 뛰어난 대가가 나오면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글자도 바로잡고 문맥도 바로잡는다.

이때 교정한 사람이 살던 당시의 언어로 교정이 되면서 새로운 판본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문화 발전사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사의 수많은 고전, 유교, 불교, 기독교 경전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전수 되었다.

그럼에도 환단고기에 유독 이런 잣대를 대는 것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기위한 음모에 불과하다.

 

『환단고기』 또한 전해지는 과정에서 연대나 일부 내용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환단고기』의 전체 내용, 즉 천지 광명 역사관, 원형 문화의 틀은 훼손된 게 아니다.

과거 동서 문화의 고본이 내려오면서 추가되고 변형된 것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하다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을 작업한 사람들은 근세 사람이 아닌가. 그 가운데는 불과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이처럼 턱없이 위서론을 전개하는 것은 그들이 신교 문화와 신교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인류 시원역사가 워낙 기존 역사서와 달라서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어떤 학자가 위서라고 바람을 넣으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처럼 ‘글쎄 그런 것 같다’하고 대개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만다.

 

윤명철은 『환단고기』가 진서냐 위서냐 하는 것을 떠나서, “이 책이 한국의 사회 사상계 혹은 대중적인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현상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환단고기』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영향력, 역기능과 순기능을 점검하고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역사발전의 긍정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진지한 모색을 해야 한다”라고 한다.

송호수, 안창범, 고준환 등도 『환단고기』의 모든 내용을 다 조작된 것으로 불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는 고대 한중일 삼국의 관계, 북방 유목민족의 발흥 등을 다루는 정치경제사에서 언어, 문자, 음악, 의식주 등을 다루는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각종 주제를 담고 있다.

또한 『환단고기』에는 동북아 원형 문화의 인간론, 신관, 자연관, 역사관을 전해 주는 신령스러운 이야기가 꽉 들어차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환단고기』는 단순히 인간 중심의 역사서가 아니라 ‘천지 광명의 삼신문화 역사서’이다.

때문에 비뚤어진 의식으로는 환단 시대의 시원 문화와 창세 역사가 밝히는 대도의 세계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

고대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현대의식으로 고대문화를 해석해서 고대역사와 문화를 왜곡함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시대의 문화정신, 종교, 정치, 사회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바른 역사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 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 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 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본 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본 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 집順菴集』「동사 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 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 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 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 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 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 단군제에 소련 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 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의)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 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 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