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티베트 역사④

진실의 역사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의 종교와 신앙


고유의 신교 신앙 뵌뽀本敎
오늘날 외국인들에게 티베트는 불교와 달라이 라마의 나라로 쉽게 다가올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 티베트에는 고유 신앙인 신교神敎가 있었다. 이를 ‘뵌뽀本波(本敎)’라고 한다. 일종의 정령 신앙이고 샤머니즘이다. 티베트인 조상들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믿었다. 주술을 외우고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사를 지냈다. 티베트 역사 곳곳에는 그들이 흑마술黑魔術을 쓴 흔적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티베트에는 뵌뽀 무당들이 굿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뵌뽀에서는 이 세상이 하늘·땅·지하 삼계三界가 있으며, 거기에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질병을 관장하는 용신龍神, 자연재해를 관장하는 땅의 신 등등. 뵌뽀는 교파 출현 시기에 따라 정령 숭배 신앙 뵌뽀, 융드롱(한자 ‘만卍’ 자를 지칭하는 티베트어) 뵌뽀, 신新 뵌뽀로 구분할 수 있다. 제6대 왕인 다크리 짼뽀 시기에 전장 지역에서 귀신과 교통한다는 무당이 스스로 교파를 만들었다.

 

이 시기의 뵌뽀는 원시적인 자연 숭배 단계였다. 융드롱 뵌뽀는 외지에서 온 신자들이 만든 교파였다. 이들은 신령을 대신하여 무당이 존재하고 특히 조상 숭배를 행한다는 점에서 정령 신앙 단계에서 발전한 신앙 형태를 하고 있었다. 신 뵌뽀는 7세기 불교 전래와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뵌뽀에서는 자체 경전을 제작, 보급했다. 대부분 불교 경전을 겉모습만 바꾸어 뵌뽀 경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뵌뽀 창시자는 셴랍 미우쩨로 알려졌다. 그는 뵌뽀 신자들에게 불교에서 석가모니와 같이 신성한 존재다. 그가 역사적 인물인지는 아직도 의심을 받고 있다. 뵌뽀 경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 삼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뵌뽀의 최고 신령을 스승으로 모시고 뵌뽀 교리를 공부했다. 공부를 끝낸 삼 형제는 셴라 오카르 신神(뵌뽀 최고의 신. ‘흰빛의 지혜의 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오른손에 갈고리를 들고 코끼리 위의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에게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3단계의 교리 과정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끝나면 불교의 부처에 해당하는 큰 스승이 된다고 했다. 삼 형제 중 첫째는 1단계 수련을 끝냈고 불교의 전세불前世佛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둘째는 2단계 수련을 끝내고 불교의 현세불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뵌뽀 창시자 셴랍 미우쩨이다. 셋째는 3단계 교리를 익혔다. 그는 미래를 관장하는 미래불이 되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셴랍 미우쩨의 수호신이다. 신은 셴랍 미우쩨로 하여금 장중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기원전 5세기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온 셴랍 미우쩨는 뵌뽀를 창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장중 왕국과 토번에는 신교 형태의 다양한 뵌뽀가 있었다. 셴랍 미우쩨는 이러한 원시적 뵌뽀를 통일하여 융드릉 뵌뽀를 만들었다.


티베트 불교는 ‘종파불교’
불교가 티베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였다. 중국의 불교 전래보다 600년이 늦고 한국의 불교 초전初傳(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보다도 약 300년이 늦었다. 티베트는 불교 발상지 인도·네팔과 인접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래가 늦은 이유는 두 지역(티베트와 인도·네팔)을 가로막고 있는 히말라야의 설산 고봉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베트의 나라 세움이 그만큼 늦어진 탓도 있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두 갈래 길이었다. 7세기 중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해진 중국계 불교와 인도·네팔계 불교가 그것이다. 중국 불교가 조금 앞서 전래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티베트인들은 늦게 전해진 인도 불교를 채용했다. 불교는 티베트에 도입된 이래 몇 차례에 걸친 탄압 운동도 있었으나 곧 뿌리를 내리게 된다.

 

티베트 불교의 국교화를 이끈 왕은 제38대 임금 티송데쩬(742∼797)이다. 티베트 불교에는 한국인(신라인)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37대 임금 치데죽짼(재위 705∼754)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진흥책을 썼다. 750년 인도와 당나라로 불경을 구하는 외교 사절단을 동시에 파견했다. 인도로 간 사절단은 히말라야를 넘지 못하였다. 상시桑喜를 단장으로 하는 당나라로 간 사절단 5명은 장안에서 『금강경』, 『도간경稻芉經』 등 불경 1천권을 입수했다. 귀국하는 길에 상시 사절단은 쓰촨四川 성 성도成都에 있는 정중사淨衆寺에 들렀다.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가 바로 당시 정중사 주지로 있었던 무상無相 김화상金和尙(684∼762)이다. 그는 고국 땅에서 까마득히 잊힌 존재였으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는 태산북두처럼 높이 떠 있는 인물이다.

 

무상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확하게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의 셋째 왕자였다. 그는 728년 당나라로 건너갔다. 장안에 도착하여 당 현종唐玄宗의 인도를 받아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다. 이후 쓰촨 성 자중현資中縣 덕순사德純寺(寧國寺)로 가서 당대의 큰 선사 처적處寂의 제자가 되었다. 무상은 2년 동안 처적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 12년 동안 용맹정진했다. 743년부터 20년 동안 정중사 주지로 있으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당나라 인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숭앙받는 큰 선사였다.

 

토번 왕국 외교 사절단 상시 일행은 정중사에서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무상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떠나는 상시 일행에게 무상대사는 앞으로 토번 왕국에 인도 불교가 흥왕할 것을 예언하며 불경 세 권을 선물로 주었다. 상시 사절단 가운데 셀랑拔(塞囊)이 당시 일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무상사 주지 큰 스님을 ‘니마尼瑪(‘태양’이라는 뜻이다)’라고 적었다. 후학들은 고증 끝에 ‘니마’가 무상대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상대사와 하직하고 상시 일행은 756년 라싸로 돌아왔다. 치데죽짼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뒤를 이은 임금이 티송데짼이었다.

 

티송데짼 이후에도 몇 차례 불교 탄압이 있었으나 결국 불교는 티베트를 상징하는 종교로 큰 뿌리를 내렸다. 티베트 불교는 843년 고대 티베트 왕조 분열 후 약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전전기前傳期와 후전기後傳期로 구분된다. 전전기는 ‘국가불교’, 후전기는 ‘종파불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사상 및 종파 역사를 소개할 여유는 없다. 티베트 역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한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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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역사③

진실의 역사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중국 전쟁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였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13세 툽텐 갸초였다.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고 판단한 툽텐 갸초는 즉시 행동으로 나섰다.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 국가 건설에 나섰다. 같은 해 음력 10월, 라싸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1천 명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이듬해(1913) 1월 중국군과 중국 교민들은 모두 라싸를 떠났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라싸로 귀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귀국 즉시 달라이 라마는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났다.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곧이어 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 티베트·중국 전쟁이다. 이 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1918년 제2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티베트군은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참도를 포위 공격하여 3개월 만에 점령했다. 티베트군은 기세를 몰아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중국 쓰촨 성으로 진격했다. 양국은 1918년 12월 영국의 중재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금사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 간에 무력 충돌이 잦았다. 193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갑자기 입적했다. 이듬해 제3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1939년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티베트 정부와 종전 협정을 체결했고 금사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전세영동을 찾다
1935년,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전세영동轉世靈童, 즉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비밀순방단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해 가을 비밀순방단이 도착한 곳은 북부 티베트 서녕 아래 탁최達澤라는 마을이었다. 20가구 남짓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들이 찾은 곳은 탁최 마을의 최종체링曲炯才仁·쇠남초索南措(또는 데끼쩨링德吉才仁) 부부의 집이다. 비밀순방단은 부부의 넷째 아들 라모된줍拉莫頓珠을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확정했다. 바로 이 아이가 현재 전 세계인이 ‘달라이 라마’로 부르고 있는 인물이다. 법명은 땐진 갸초丹增嘉措.

 

1940년 2월 22일,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라싸의 포탈라 궁에서 정식으로 등극했다. 중일전쟁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즉위식이 끝난 뒤에도 중국 사절단은 철수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강압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였다. 1949년 10월 1일 중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당시 청해에 있던 10대 빤쩬 라마 오이키 칼쩬은 중국 정부의 수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티베트를 향한 발톱을 숨기지 않았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다섯 달 뒤, 중국인민군 제18군(총사령관 장국화張國華, 정치위원 담관삼譚冠三)은 티베트와의 국경 금사강을 넘었다. 며칠 뒤 중국 정부는 참도에서 티베트군 5천7백 명을 전멸시켰다고 발표했다. 이듬해(1950) 5월, 중남해中南海에서 중국과 티베트 대표단은 17조협약十七條協約이라 불리는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티베트평화해방협약中央人民政府和 西藏地方政府關於和平解放西藏辨法的協議」을 체결했다. 현 중국 공산당 정부와 티베트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그해 9월 9월 중국인민군 3천 명이 라싸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티베트에 겔룩 시대가 끝나고 중공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달라이 라마, 히말라야를 넘다
티베트는 신앙의, 종교의, 불교의 나라다.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중국과 티베트가 과거 역사에서 보여 주었던 그런 관계일 수는 없었다. 1954년 달라이 라마와 빤쩬 라마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나타났다.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이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은 당시 청년 달라이 라마가 종교에 대해 안심할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마오쩌둥에게 인간적 매력마저 느끼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달라이 라마의 기쁨은 불과 몇 시간도 가지 않았다. 마지막 회견에서 마오쩌둥은 종교는 독毒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듬해(1955) 귀국길에서 달라이 라마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미 조국 티베트는 없고 중국 공산당 치하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티베트에는 이미 공산주의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성한 사원은 비어 갔다. 1965년 티베트 자치구가 탄생했다. 자치구 최고지도자는 달라이 라마였으나 이미 이름뿐인 자리였다.

 

한때는 중원 대륙을 호령하였던 티베트인들이다. 그들은 쉽게 지배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1955년 공산주의 개혁의 강요에 지친 암도와 캄의 티베트인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승려들조차 무기를 들었다. 곳곳에서 게릴라전이 일어났다. 1956년 베이징은 캄에 15만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티베트 저항군은 수없이 죽어 갔다. 티베트인들도 항거의 깃발을 꺾지 않았다. 중부 티베트에서 전면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1958년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긴박해졌다. 중국은 “티베트를 반동(달라이 라마와 그 추종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아니, 엄포가 아니라 결행이었다. 1958년 3월 16일과 17일 사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달라이 라마는 측근과 캄빠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밤중을 이용해 몸을 피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히말라야 너머 인도였다. 네루 인도 수상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달라이 라마 일행을 정치적 망명자로서 보호해 주었다.

 

달라이 라마가 라싸를 탈출한 지 3일 뒤인 20일부터 22일까지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불바다가 되었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죽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에 따르면 2천 명에서 1만 명에 이른다고 썼다. 4천 명이 체포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 이후 많은 티베트인이 정치적 동기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적어도 8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달라이 라마를 따라 인도로 혹은 네팔로 떠났다. 당장에 갈 곳이 없는 티베트인들은 유엔 난민기구와 인도 정부에서 세운 난민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티베트인들은 갑작스럽게 바뀐 인도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결핵과 이질, 풍토병 등 질병으로 죽어갔다. 달라이 라마는 동포들이 겪는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기자 회견을 자청하여 강압에 의해 체결된 「17개조 협의안」은 무효임을 선언했다. 유엔에서도 중국의 티베트 정책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인도 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다람살라 북쪽 맥그로드 간즈를 제공해 주었다. 1960년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 주州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 정부亡命政府가 수립되었다.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티베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자의든 타의든 티베트인들도 섞여 있었던 홍위병紅衛兵은 소위 ‘구체제’의 유적들을 거침없이 파괴했다. 홍위병에게 ‘반동분자와 미신’의 표적이 된 것은 각종 사원을 비롯하여 성곽, 서책, 조각상, 그림, 탑 등이었다. 6천여 곳에 달했던 티베트의 사원과 사찰들은 1976년 이후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물·유적들은 뜻있는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걸고 감추어 두었던 유물과 곳간 등으로 위장해 숨겼던 사찰, 사원들이다.

 

1975년부터 중국 정부는 티베트 중부에 중국 한족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한족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은 티베트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티베트에 대한 특별경제조치가 취해졌다. 티베트인에게도 어느 한도 안에서 자율결정권이 주어졌다. 많은 죄수들이 풀려났고 티베트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1982년 중국 헌법 제35조에 의해 국가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며, 티베트에 대한 외국인 출입이 허가되었다.

 

1989년 달라이 라마는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인권 및 세계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수상 당시 행한 연설을 통해 티베트의 국가적, 문화적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중국의 억압 정책들을 지적하고 이에 맞서는 티베트의 투쟁은 정당하며 폭력은 더 큰 폭력과 고통을 가져오므로 비폭력 독립 운동을 지속해 나갈 것임을 주창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2008년 3월, 라싸에서는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항쟁이 있었다. 1959년 시작된 티베트 독립 운동(티베트 봉기)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일으켰고, 이것이 확대되어 티베트 독립 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이 항쟁은 잠시 잠잠했던 티베트 독립 운동에 불을 붙였다.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에 나섰다. 국제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을 중심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압박이나 국제 여론에 고개를 숙일 중국이 아니었다. 개방정책 이후 중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으로 몸집을 부풀린 상태다. 오늘날 티베트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서는 찬반으로 엇갈린다. 평가하는 이에 따라서 달라이 라마 14세가 주창하는 비폭력 독립 운동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 또한 쉽게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티베트 고원을 향해 귀를 열어 준 이들은 듣고 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랫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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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원元)의 통치와 티베트 불교
13세기, 몽골 제국의 등장은 티베트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티베트는 거의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토착 종교 뵌뽀와 외래 종교인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등으로 이미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미 다른 민족에게 빼앗겼다. 1240년 몽골 제국은 장군 도르타를 파견하여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몽골 군사는 파죽지세로 밀려들어 왔다. 티베트 각 지역의 호족들은 앞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당시 몽골은 항복한 뒤에 공물을 바치는 세력들에게는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회유책을 썼다. 물론 저항하는 세력들에게는 강경 진압책을 구사했다.

 

티베트를 제압한 뒤 몽골은 종교(불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많은 불교 종파들이 횡행했다. 몽골 치하에서 각 종파의 지도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종교적 지배권을 잡기 위한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 달라이 라마 5세 롭상 갸초Lobsang Gyatso(1617~1682) 때 티베트는 다시 사캬Sakya파 티베트 불교로 통일된다. 몽골은 불교 지도자를 통해 티베트를 지배했지만, 반대로 티베트 종교에 의해 몽골의 정신계를 지배당하고 있었다.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는 깊이 뿌리를 내렸다.

 

원元나라 최후의 황제인 순제順帝(1320∼1370) 시기에 티베트 정권은 사캬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강력한 몽골 제국(원元)을 등에 업고 티베트를 지배해 온 사캬파는 이미 부패해 있었다. 이때 팍모주빠의 라뵌喇本(한 지방의 정치와 종교 권력을 모두 갖고 있는 호족) 창춥개짼絳曲堅贊(1302∼1364)이 샤카 정권에 대한 타도의 깃발을 올렸다. 1354년 창춥개짼이 이끄는 팍모주빠 군대가 마침내 사캬 사원에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캬 정권이 무너졌다. 각 지역의 만호장이나 개뽀結布(토번 왕국 멸망 뒤 군벌들이 각 지방에서 기반을 잡고 스스로 ‘개뽀’라고 칭했다)들도 창춥개짼을 티베트 최고 지도자로 인정했다.

 

원나라 순제는 창춥개짼 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나라 정부에서는 창춥개짼을 ‘시뚜司徒(정치·종교 권력을 모두 지배하는 수장)’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130년 동안 티베트의 국가 원수의 호칭은 ‘시뚜’였다. 역사는 당시의 티베트 정부를 ‘팍모주빠 정권’이라고 기록하였다. 창춥개짼은 위대한 개혁군주였다. 티베트 역사에서 그는 송짼감뽀에 비교되는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티베트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종카빠
명明나라와 티베트 관계도 몽골 제국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408년 명 태종明太宗(1360∼1424)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 종카빠宗喀巴(1357∼1419)를 북경으로 초청했다. 종카빠는 티베트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1357년 북부 티베트 종카宗喀(오늘날 칭하이靑海 성 서녕西寧)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 칸이 임명한 지방관 다루가치達魯花赤였다. 출가한 뒤에 종카빠는 각 분야의 뛰어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대·소승의 불교 교리를 터득해 나갔다. 21세가 된 1377년, 그는 이미 뛰어난 학자로서 다른 학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8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모두 다 기념비적인 업적이 되었다.

 

특히 『람림 -깨달음에 이르는 길菩提道次諸廣論』은 티베트 불교 연구자에게는 첫 번째 손에 꼽히는 필독서이다. 종카빠는 원래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까담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까귀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티베트 불교사에 따르면 인도 불교의 마지막 법맥은 사캬에게 전해졌고 사캬의 법맥은 까귀에게 전해졌다. 종카빠가 까귀 계사戒師에게 계를 받음으로써 그 법맥은 까담에게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명 태종의 초청을 받았으나 종카빠는 거절했다. 티베트 국민들은 그의 결정에 감동을 받았다. 다른 불교 종파의 지도자들도 그를 존경했다. 1409년 종카빠는 라싸 동쪽 족卓이라는 산에 까땐 사원囑丹寺을 세웠다. 1416년 종카빠의 제자 참양자시빼땐降央扎西貝典이 라싸 서부 지역에 째뿡 사원哲蛙寺을 세웠다. 3년 뒤에는 종카빠의 제자 사캬예세釋迦益西가 라싸 북부 지역에 세라 사원色拉寺를 새웠다. 이 사원들은 현존하는 티베트 3대 사원이 되었다. 이후 티베트 국민들은 종카빠의 제자들을 ‘겔룩格魯’이라고 불렀다. 계율에 밝다는 뜻이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는 90%가 겔룩파다. 까담 종파의 시조는 아티샤였지만, 겔룩 종파의 시조는 종카빠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는 팍모주빠 5대 시뚜 드락파 갈짼(1374∼1432)을 국가의 종교 수령인 천화왕闡化王으로 책봉했다. 명나라는 260년 동안 중국 역사에 존속했다. 티베트의 팍두르 정권도 명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달라이 라마의 탄생

청淸나라의 황제는 티베트 정치·종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Dalai Lama達賴喇嘛를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상징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달라이 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생제도還生制度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티베트에서 처음 이 제도를 만든 사람은 제2대 까마빠(까담의 스승)인 까마박시噶瑪拔希(1204∼1283)였다. ‘튀쿠孜古’라고 하는 티베트어는 스스로 환생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라마(스승)를 가리킨다. 중국어로는 활불活佛로 번역한다.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리빙 붓다Living Buddha’라고 번역한다. 『티베트 비밀역사』에 따르면 중국어 번역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튀쿠는 몸이 변했다는 뜻으로 부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는 살아있는 부처를 인정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부처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다. 튀쿠의 정확한 번역은 ‘화신nirmāa-kāya化身’, 일종의 변화신變化身이라 할 수 있다. ‘환생’은 중국어로 ‘전세轉世’를 가리킨다. 방금 환생한 아기는 영특한 동자이므로 ‘영동靈童’이라고 한다. 따라서 환생한 아이를 ‘전세영동轉世靈童’이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의 특징 중 하나인 전세영동에 대한 이야기는 각종 영화와 소설 등에서 묘사되어 알려지고 있다.

 

13세기 종카파의 제자인 겔룩파 제2대 까마박시가 창시한 전세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각 교파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다. 이후 겔룩파 최고의 활불 중 한 명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활불 중 한 명으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제1대 달라이 라마는 겐둔 드룹(1391∼1474), 2대 겐둔 갸초(1475∼1542), 3대 쇠남 갸초(1543∼1588)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이 쇠남 갸초 때부터였다.

 

라싸 부근에서 태어난 쇠남 갸초는 3세에 겐둔 가문의 전세활불轉世活佛로 인정받았다. 1571년 투메트 몽골의 알탄 칸(1507∼1582)이 그의 명성을 듣고 초청했다. 1578년 5월, 청하이호 부근 찹차恰卜怡에서 회동했다. 쇠남 갸초는 노란 모자에 법복法服을 입었고 알탄 칸은 몽골식 흰색 정장 차림이었다.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 회담장인 몽골식 천막에서 나온 알탄 칸이 「찹차회담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차하르Chakhar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세력이 강성하여 중국과 티베트를 정복했으며, 사캬와 법주法主·시주施主 관계를 수립한 뒤 불교를 넓게 전파했다”고 그동안의 몽골과 티베트 관계를 회상한 뒤에, “백의몽골인白衣蒙古人은 다음과 같은 법을 지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내용은 티베트 불교를 신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알탄 칸은 “오늘부터 우리는 티베트가 하는 그대로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 내용을 보아도 몽골과 티베트는 단순한 정치적 식민 관계가 아니라 서로 믿고 의지하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세계 정복 민족으로서 정쟁과 살인, 약탈, 겁탈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몽골인들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점차 개과천선해 나갔다.

 

행사의 말미에 두 정상은 존호尊號를 주고받았다. 알탄 칸이 쇠남 갸초에게 준 존호는 ‘와치르다라 달라이 라마瓦齊爾達喇達賴喇嘛’였다. ‘와치르다라’는 금강살타金剛薩埵Vajrasttva, 신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달라이Dalai’는 갸초Gyatso(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큰 바다(大海)’를 뜻하고, ‘라마Lama’는 티베트어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달라이 라마’는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티베트 불교 하면 상징적으로 떠올리는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이때 이후로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은 그 법통을 잇는 모든 화신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쇠남 가쵸는 알탄 칸에게 ‘차크라와르 세첸 칸咱克喇瓦爾第徹辰汗’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차크라와르’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세첸’은 현명하다는 뜻이다. 티베트 불교와 정복 국가 몽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였다. 제3대 달라이 라마 쇠남 갸초는 이후 10년 동안 몽골 포교 활동에 진력했다.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
1588년 3월 3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서 입적했다. 그를 이어 4대 달라이 라마가 된 인물은 용텐 갸초(1589∼1616)였다. 그는 알탄 칸의 증손자다. 1603년 제4대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도착했다. 전세영동으로 인정되어 달라이 라마가 되었으므로 계를 받아야 한다. 당시 겔룩파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계를 줄 수 있는 고승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가 바로 티베트에서 또 하나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빤쩬 라마Panchen Lama였다. 제4대 달라이 라마가 라싸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빤쩬 라마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빤쩬 라마는 4대 달라이 라마의 머리를 깎고 계를 주었다. 이때부터 4백 년 동안 달라이 라마가 아직 어리면 빤쩬 라마가 스승이 되어 주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616년 28세의 4대 달라이 라마는 드레풍 사원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5대 달라이 라마가 된 인물은 롭상 갸초였다. 『1만 년의 이야기 티베트』에 따르면 토번의 모든 공적을 송짼감뽀에게 돌릴 수 있듯이 오늘날 겔룩파 정교 제도 수립의 공은 모두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에게 돌릴 수 있다. 그는 겔룩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 초기부터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 1642년 제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국왕에 취임했다. 당시 26세였다. 제4대 달라이 라마까지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한 종파의 지도자였다. 국왕으로 등극한 5대 달라이 라마는 세속과 종교 권력을 움켜쥔 절대 군주가 되었다. 1649년 5대 달라이 라마는 7세기 토번 왕조 시대에 건설되었다가 왕조 몰락과 함께 황폐해진 포탈라Potala궁(布達拉宮)으로 수도를 옮기고 30년에 걸쳐 궁전을 재건하였다.

 

중원을 평정한 청나라 정부가 5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만주인은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티베트가 법주, 몽골이 시주’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아가 몽골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신으로 추앙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원을 통일한 청나라 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싶어 했다. 티베트 역시 중원의 판도를 읽고 있었다. 5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 정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제4대 빤쩬 라마 역시 같은 시기에 초청장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1652년 12월 북경에서 티베트 국왕 달라이 라마가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당시 청나라 황제는 15살의 제3대 순치제였다. 청나라 정부는 몽골 시대 이상으로 티베트 불교를 대우했다. 달라이 라마는 두 달 동안 북경에 머물렀다. 그가 황궁을 방문할 때는 스승으로서 황제의 옆에 앉았다. 당시 중국 문화권의 국가 중에서는 황제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달라이 라마였다. 이후 티베트와 청은 과거 원나라 시기와 같이 ‘법주法主와 시주施主’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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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역사①

진실의 역사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에서 만난 창세 신화
티베트 고원은 수백만 년 전에 형성된 비교적 젊은 지형으로 알려졌다. 티베트 민족은 1만 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티베트 고원은 티베트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다. 티베트의 동부, 남부, 북부 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최소 1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이미 이 지역에 인류의 활동이 있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비교적 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참도의 카룹, 라싸의 곡공曲貢 유적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유적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티베트 고원에 인류가 생활하며 살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티베트 민족은 다른 지방에서 이주한 민족이 아니라 바로 티베트 고원에서 형성된 민족이다.

 

티베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창세 신화에 따르면 티베트 민족은 원숭이와 나찰녀羅刹女의 후예다. 현지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나찰녀는 마녀나 요괴가 아니라 바위 동굴에 거주했던 유인원類人猿이었다. 그 유인원과 원숭이가 교합하여 자식을 낳아 인간이 되었다는 내용은 다윈의 진화론과도 상통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원숭이 후예 티베트 민족, 역사 시대로 가다
기원전 3세기 전후, 티베트 고원에는 세 개의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산난 지역의 얄릉雅隆 계곡에 자리 잡은 얄릉 왕국, 중부 지역의 숨파 여인국, 그리고 서부 지역의 장중 왕국이 그것이다. 얄릉 왕국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4세기, 얄릉 계곡에서 티베트 민족의 고유 신앙인 뵌뽀本敎를 신앙하는 12명의 유목민이 방목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들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유목민과 소년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소년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유목민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소년을 어깨에 태워 부락으로 데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년을 우두머리로 삼고 네치짼뽀聶赤贊普라고 불렀다. ‘목덜미에 앉아 있던 왕’이라는 뜻이다. 네치짼뽀는 티베트 최초의 왕이다. 네치짼뽀 왕에서 시작하는 이 왕조를 토번 왕조吐蕃王朝라고 한다. 토번(투푀·토번)은 티베트Tibet土伯特의 어원이 되었다. 뵌뽀 경전은 네치짼뽀를 색계色界의 13대 광명천자光明天子가 속세에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신화로 묘사되고 있으나 네치짼뽀는 실존 인물이다. 티베트 역사 기록에 따르면 네치짼뽀는 티베트 동부의 보미 지역 출신이다. 그는 눈과 피부가 녹색을 띠었고 손발에 물갈퀴 같은 것이 달렸고 힘이 장사였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악귀의 화신이라고 의심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얄릉으로 와서 토번 최초의 왕이 된 것이다. 네치짼뽀는 얄릉 부족을 통일하고 윰부라캉궁雍布拉康을 세웠다. 티베트인이 세운 최초의 궁전이다. 이곳에서 토번 왕조가 시작되어 32대까지 이어졌다.

 

제1대 왕 니치짼뽀로부터 제7대 왕 십치짼뽀塞赤贊普까지 토번 왕국의 임금은 뵌뽀 무당의 지배를 받았다. 토번 왕국이 일종의 신교神敎국가였다는 얘기다. 이 시기의 왕들이 남긴 업적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기록이 전한다. 일곱 왕은 모두 임종 직전에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무덤조차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군주 송짼감뽀松贊干布
7세기 초, 송짼감뽀松贊干布(617∼650)는 다른 십여 개 지역을 병합하고 티베트 고원의 통일 정권인 토번 왕조를 건설했다. 이때가 티베트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기다. 이 시기를 이끌었던 송짼감뽀야말로 티베트 민족의 영웅이다. 송짼감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자 조손삼대법왕祖孫三代法王의 으뜸으로 칭송되고 있다.

 

송짼감뽀는 푸갈 세계世系의 제32대 짼뽀贊普(군주)로 라싸 동쪽 마이조쿵가르에서 태어났다. 당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부왕인 남리송짼은 위기를 맞았다. 안으로는 신하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밖으로는 닥포, 공포, 장중, 숨파 등지에서 침공을 해 왔다. 마침내 남리송짼은 신하들에 의해 독살당하고 말았다. 629년 13살이던 왕자 송짼감뽀가 왕위에 올랐다. 영민했던 어린 왕은 정치적 수완을 한껏 발휘했다. 그는 암살자를 보내 부왕을 독살한 숨파 지역 냥망보쩨娘芒布杰를 제거하였다. 이어서 군대를 동원해 망보쩨 마을을 병합시켰다. 숨파 지역뿐만 아니라 티베트 전 지역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633년 송짼감뽀는 수도를 얄룽장뽀강 북쪽에 위치한 라싸로 옮겼다. 중앙의 마르포리 산 위에 아름다운 궁궐도 세웠다. 이때부터 라싸는 티베트 전 지역을 통치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송짼감뽀는 이어서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다. 주요 호족들을 중앙 관리로 임명하고 등급을 정했다. 부왕 남리뢴짼까지만 해도 임금과 부족장들의 회맹 관계에 불과하였던 것이 비로소 왕과 신하 관계로 바뀐 것이다. 이어서 군사 제도를 개편했다. 전국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고 한 구역에 한 군단을 설치했다. 전 인구의 군사화였다. 당시 한 구역의 인구가 4천여 호였다. 왕의 친위대는 1천 호였다. 토번 왕국의 백성이라면 평민이 농민이거나 유목민이면서 동시에 군인이었다. 법률도 제정했다. 지금까지의 왕들은 뵌뽀를 통해 통치했다. 법률 제정에 의해 토번은 왕이 직접 통치하게 된 것이다.


토번 왕국의 왕비가 된 당나라 문성공주
634년, 송짼감뽀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2년 뒤에 다시 사신을 보내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청혼했다. 당나라 공주를 아내로 요구한 것이다. 이세민은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土谷渾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638년 송짼감뽀는 군사를 일으켜서 북부 티베트 지역인 토욕혼을 정벌했다. 이어 여강麗江 등지를 점령했다. 같은 해 8월 송짼감뽀는 친히 20만 군사를 이끌고 당시 토번과 당나라의 국경 지역이던 송주松州(현재의 중국 쓰촨 성 송번松蕃)를 점령했다. 송짼감뽀의 군사력에 놀란 이세민은 마침내 구혼을 받아들였다.

 

당시 송짼감뽀의 왕비는 넷이 있었다. 첫째 왕비는 토번 출신이었다. 둘째와 셋째는 병합을 계획하고 있던 이웃의 작은 왕국 출신이었다. 송짼감뽀가 일종의 혼인 정책을 썼다는 얘기다. 넷째 왕비는 네팔 출신 브리쿠티bhrikuti(赤尊)였다. 브리쿠티는 ‘공주’라는 뜻이다. 브리쿠티 왕비는 불교 신자였다. 그녀는 토번으로 올 때 석가 8세 등신불을 가져왔다. 그녀는 송짼감뽀에게 석가 불상을 모실 사원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송짼감뽀는 작은 사원을 지어 주었다. 지금도 티베트 불교의 성지로 남아있는 조캉 사원大昭寺이 바로 그 사원이다.

 

641년 당나라 문성공주文成公主가 송짼감뽀의 왕비가 되기 위해 토번 왕국에 왔다. 그녀는 토번에 오면서 천문역법·음양참위·의학 등의 서적들을 가져왔고 각종 기술자들도 데려왔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녀는 석가 12세 불상을 가져왔다. 왕비가 된 그녀는 남편 송짼감뽀에게 석가 불상을 모실 사원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송짼감뽀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 사원이 조캉 사원 북쪽에 건립된 라모체 사원小昭寺이다. 이 사원 역시 오늘날에도 티베트 불교의 성지 중 하나다. 오늘날 불교를 빼놓고 티베트를 얘기할 수는 없다. 송짼감뽀가 두 왕비의 요청에 의해 세운 조캉 사원과 라모체 사원은 티베트 고원에서 불교가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710년 조캉 사원과 라모체 사원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 불상은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송짼감뽀는 650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던가. 티베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자리매김되는 송짼감뽀의 뒤는 손자인 망송망짼芒松芒贊(재위 650∼676)이 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한 살이었다. 재상 까르통짼이 대신 국정을 관장했다. 이로부터 약 50년 동안 토번 왕조는 통짼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다. 토번 왕국은 9세기 이후 마지막 왕인 랑데르마가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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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와 조화의 땅 티베트

진실의 역사

히말라야, 티베트 Tibet


티베트는 인류 문명의 젖줄로 불리는 중국 남서부 티베트 고원을 무대로 오랜 세월 동안 고유한 민족적, 문화적 전통을 구축해 온 지역으로, 현재는 중국에 합병되어 ‘시짱西藏자치구’로 남아 있다.

 

기원전 4세기경 형성된 토번 왕조로 역사에 등장한 티베트 민족은 몽골(원元)과 명明, 청淸 등 중국 왕조들과의 꾸준한 관계 속에서 티베트 불교 문화의 영향력을 신장시켜 왔으나,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독립 국가를 이루려는 티베트의 열망은 중국의 무력 점령에 의해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땐진 갸초)는 인도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비폭력 독립 운동을 주창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티베트의 독립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비록 독립 국가는 아니지만,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조화의 땅으로 알려진 티베트의 역사와 전통을 살펴보는 것은 세계의 문화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 데 일조가 될 것으로 본다. 이제 티베트의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러 가 보자.


1. 신비와 조화의 땅, 티베트

“하늘의 한 가운데 땅의 중심, 세계의 심장, 히말라야 산맥은 모든 강의 원류이고, 산은 높고 땅은 깨끗하다. 사람은 선을 행해야 함을 알고 심성은 영특하고 용감하며 풍속은 순수하고 선량하다.”

 

이 말은 『돈황고장문문헌敦煌古藏文文獻』의 일부분이다.

1천여 년 전에 티베트 민족의 조상들이 티베트 고원과, 거기에 살고 있는 자신들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다.

한 세기가 지났으므로 무엇인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티베트는 천 년 전에 기록한 문자 그대로다. 그

렇다고 해도, 미개未開라거나 야만野蠻 따위와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면 또한 오산이다.

그것은 타자와 나를 구분해 놓고, 현대 문명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타자를 보려고 하는 타락된 자들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티베트Tibet, 티베트.
우리는 티베트로 간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티베트는 불가사의不可思議와 신비로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땅이다.


티베트, 떠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티베트Tibet를 탐방하려고 할 때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탐방하려고 하는 티베트는 어떤 티베트를 가리키는가? 티베트 망명 정부로 대표되는 티베트를 말하는가? 민족적·문화적·역사적·지리적인 위치로서의 티베트인가? 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당장에 대답을 구하지 않는다. 각 입장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 이 정도를 기억하고 탐방 길에 나선다.

 

티베트의 지리적 위치는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히말라야Himalayas 산맥의 북측, 쿤룬 산맥의 남측에 옆으로 누운 산악지대 티베트 고원을 티베트라고 한다.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의미에서 프랑스의 7배 정도인 380만㎢의 면적이다. 한반도의 여섯 배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국토의 대부분은 식물 한계선인 해발 4,000m를 넘는 곳에 위치한다.

 

오늘날 티베트의 주 영역은 중국의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티베트자치구)에 편입돼 있다. 티베트의 동쪽은 다쉐大雪 산맥으로 중국 본토와 구분된다. 서쪽은 카라코람Karakoram 산맥과 접하고 있다. 이 중 히말라야 산맥을 따른 남쪽과 그 북동으로 뻗친 연장선상에서 남북으로 달리는 계곡으로 중국 칭하이靑海 성省 남쪽과 쓰촨四川 성 서쪽 지역에 사는 민족이 바로 티베트인이다.

 

인구는 6백만 명이 조금 넘는다. 중국 인구의 0.46%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티베트를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티베트 국경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8세기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敦煌과 윈난雲南 성까지 이르렀다. 라다크는 물론 인도 북부와 네팔의 여러 지역까지 티베트 영토였다. 1959년 수립된 티베트 망명 정부의 입장에서 티베트는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총체로서의 ‘티베트’를 일컫는다. 이때 티베트는 ‘뵈 쵤카 숨’이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우창·캄·암도 등 3개 지역의 티베트라는 뜻이다.


‘티베트’라는 용어 그리고 ‘시짱西藏’, ‘토번吐蕃’
현재 중국에서는 티베트를 ‘시짱西藏’이라고 한다. 티베트 민족을 ‘장족藏族’이라고 부른다. ‘시짱’이라는 명칭은 중국 청나라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시西’는 티베트 지역이 중국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다는 뜻이고, ‘장藏’은 티베트 ‘위짱衛藏’의 줄임말이다. 청나라 강희제姜熙齊 후기에 ‘서정’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건륭제乾隆帝 이후에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장’은 위짱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그리고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면 토번吐蕃, 서번西蕃, 번족蕃族이라는 표현 대신 ‘장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어 이것이 티베트 민족의 명칭이 되었다. 티베트인은 자기의 민족을 ‘푀蕃’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고대 티베트 제국을 토번吐蕃(혹은 투베트, 투보트)라고 불렀다. 14세기경까지는 토번으로 통칭되었다. 고대 튀르크 및 소그드어로 기록된 문헌에는 이지역을 튀퓟Tüpüt으로 불렀다. 학계에서는 이 명칭이 티베트 북부 지역을 나타내는 티베트어 ‘tu phod’나 ‘stod pod’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발음이 아랍 세계로 전해졌다. 이후 영어권에서 Thibet이라고 불리다가 오늘날 영문 명칭인 Tibet으로 정착됐다. 오늘날 중국 외에서는 ‘시짱’보다는 ‘티베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체로 티베트, 간혹 한역인 ‘토번’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류 문명의 젖줄, 티베트 고원
1억 년 전, 티베트 지역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오늘날 티베트 고원에 남아 있는 수많은 염호鹽湖가 까마득히 잊힌 기억을 되살려 준다. 현대의 지질학자들은 그 바다를 그리스 여신의 이름을 가져와 테티스Tethys 해라고 이름 붙였다. 약 4천만 년 전 인도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이 부딪치면서 히말라야 조산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천 년에 걸친 지각 변동의 결과 테티스 해 한복판에서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올랐다. 이때 융기된 지각이 오늘날의 티베트 고원이다.

 

2,500㎞에 이르는 티베트 고원의 남쪽은 히말라야 산맥과 맞닿아 있다. 히말라야 산맥은 티베트 고원과 인도 아대륙印度亞大陸 사이를 가르며 카라코람 산맥에서 미얀마 북부까지 펼쳐져 있다. 티베트 고원 서쪽으로는 히말라야와 카라코람 산맥이 교차한다. 동쪽으로는 암매 마친, 마얀 카라, 미낙 콩가와 민산 산괴로 이어진다. 북서쪽과 북쪽에는 쿤룬 산맥과 차이다무 분지가 놓여 있어 티베트 고원을 중앙아시아와 분리한다. 티베트 고원은 해발 6,000m 이상의 여러 산맥들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트랜스 히말라야 산맥과 니엔첸탕글라 산맥이 대표적이다.

 

티베트 고원은 아시아 대륙을 거미줄처럼 흐르는 주요 강의 어머니다. 황허黃河 강, 양쯔揚子 강을 비롯하여 메콩Mekong 강, 이라와디Irrawaddy 강, 살윈Salween 강,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 인더스Indus 강, 수틀레지Sutlej 강이 티베트 고원이 낳은 자식들이다. 이들 강물은 아라비아 해, 인도양, 그리고 서해를 지나 태평양으로 흘러간다.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 두 문명―황허문명과 인더스 문명이 바로 이곳 티베트 고원에 젖줄을 대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문명의 절반이 이곳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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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④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8천년 전 항법을 체득하다
“항법: navigation , sailing , 航法
선박을 출발지에서 목적하는 곳까지 안전하고 가능하면 빠르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 방법 등을 말한다.”

 

8천 년 전에 뱃사람들의 항법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초적인 몇 가지 항법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항해 중에 중요한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함으로서 목적지와 본선의 관계 위치를 알아내거나, 연안(해안) 가까이 거리를 유지하며 해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항해 중에 해와 달, 별과 같은 천체를 관측하여, 그 관측 값과 관측한 시점에 따라 현재 위치와 방향을 가늠하는 방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항법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어렵게 생각되겠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항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 혹은 전철역을 찾고 학교나 회사에 출근하고 마트나 약국을 찾아가는 모든 활동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항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항법을 구사합니다.

특히 길에는 각종 표지판과 건물의 간판들이 우리가 희망하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도록 참고물 역할을 해 줍니다.

 

하지만, 바다라는 공간은 방향만 가늠해서 안전할 수 없는 곳입니다.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서 연안은 물의 깊이가 주기적으로 달라집니다.

눈에 잘 안 보이지만 ‘조류潮流’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류가 힘들이지 않고 배를 밀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배를 떠내려 보내기도 합니다.

수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암초와 작은 바위섬들은 조류와 합작하여 배를 위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의 흐름은 시간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하고 날씨에 따라 강약이 달라집니다.

‘물길을 안다’는 것은 물의 흐름과 변화를 기억하고 이용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 선조들은 끊임없이 배를 만들고 깊은 물로 나아갔다고 생각됩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내고 ‘항법’을 체득해 냈습니다.

그 덕분에 울산 바다에서는 거대한 고래를 사냥했고, 멀리 있는 섬들까지 사람이 갈 수 있었으며, 일본 열도까지 넘어가 날카로운 도구 ‘흑요석’을 싣고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비봉리 목선은 이렇게 8천 년 전 선조들의 도전적인 삶을 엿보게 해 줍니다.

‘신석기’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8천 년 전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8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미개인이나 원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봉리 목선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와 수준 높았던 기술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땅을 의지해서 더불어 살았던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8천 년 전 비봉리 목선을 만들고 바다를 누비던 사람들은 지혜로웠으며 높은 수준의 기술을 축적했던 자랑스러운 선조들입니다.

 

배와 관련된 선사 고대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너무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7천7백 년 전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판재형 죽변리 목선, 일본 열도로 기마 군단을 실어 날랐던 가야의 배, 22담로를 개척하여 동아시아의 로마를 재현했던 백제의 배, 황해의 제왕 장보고가 탔을 신라의 배. 수많은 깨우침과 역사 진실을 가르쳐 주는 한민족의 해양개척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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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③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노를 저어 배를 조정하다

8천 년 전 배 만드는 기술자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타도 물에 뜨는 배를 만들었다면 그 다음 고민은 배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곳으로 갔다가 다시 뭍으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배를 움직이게 하는 힘,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얕은 물가라면 긴 장대로 바닥을 밀어서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것이라면 양쪽 뭍에 매어 둔 밧줄을 당겨서 오고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수, 강, 바다처럼 깊은 물에서는 장대나 밧줄로 건너기는 어렵습니다.

필요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게 합니다.

사람이 헤엄칠 때 손과 발로 물을 밀어 내듯이, 오리 같은 새들이 물갈퀴가 달린 오리발로 물을 밀어 내듯이 ‘노’라는 도구는 자연스럽게 고안되고 발명되었을 것입니다.

 

비봉리 목선은 4~5미터 길이의 배인데, 적어도 4~6명이 노를 저었다고 추측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흡을 맞춰 노를 저으면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기도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물 위에서 방향을 가늠하다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노를 장착하면, 물 위에서 방향을 잡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항법”이 필요해집니다.

비봉리 목선이 발견된 곳은 8천 년 전 바다와 육지가 인접했던 곳입니다.

바다나 넓은 호수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있다면, 더구나 한밤중에 무사히 뭍에 도착하려면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까요?

물론 나침반은 없던 시절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상 사람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잡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려면 오랫동안 자연을 관찰하여 지식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정말 고맙게도 북극성과 북두칠성은 깜깜한 밤하늘에 오랜 세월 변함없이 북쪽을 알려 주고, 해는 떠오르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동쪽을 알려 주며 해가 지면서 서쪽을 알려 줍니다.

 

8천 년 전 선조들은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기억했습니다.

산의 모양, 해변의 모양, 바위의 위치, 숲의 위치를 기억합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해를 보고, 해가 지면 밤하늘의 달과 별을 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살펴온 해, 달, 별의 운행 규칙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천지 자연을 보고 배워 자연스럽게 방향(방위)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었을 것입니다.

나침반도 등대도 없던 시절, 8천 년 전 선조들은 바다 위에서 하늘과 땅을 의지해 방향을 가늠하여 배를 몰고 물고기를 잡아 생활했습니다.

 

태고 시절부터 이 땅에 세워진 수많은 고인돌에 별자리가 새겨져 전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섬기고 그 안에서 삶을 영위했기에, 천지 부모 그리고 사람이라는 사상(천지인天地人 사상) 혹은 신앙(삼신三神 신앙)이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었을지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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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배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분업적 조직 사회

기술 이야기에 덧붙여서 8천 년 전 배 만들기가 알려 주는 다른 면모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나무를 다루는 지혜, 배를 만드는 기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시야를 조금 더 확대해서, 배를 만드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00년 된 소나무라면 둘레만 해도 대충 어른 둘이 마주 안아야 손을 잡을 정도였을 겁니다.

비봉리 목선에서 가장 두터운 부분의 폭이 62cm였으니 적어도 지름이 80~90cm 정도에 길이가 5m는 되어야 배를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하면, 나무 무게가 얼마나 될까요?

 

어떤 TV 프로에서 150년 된 소나무를 옮기는데 무게가 22톤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200년 된 소나무 5m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한두 사람이 옮길 수 있는 무게는 아닙니다.

배를 만들 목재를 옮기는 데 적어도 수십 명이 동원됐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통나무 하나로 실패하지 않고 배 한 척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배는 한 척만 만들었을까요?

이런저런 상황을 유추해 볼 때 마을 단위 노동력이 배 만드는 작업에 투입되었다고 봅니다.

그 당시 한 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온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야 할 대규모 선박 건조 사업이었습니다.

 

물가에 목재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제 배를 만들어야 하는데, 연장이 필요합니다.

그제서야 돌 도구 연장들을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적당한 돌을 채취하고, 돌을 깨거나 갈아 내고, 다시 나무로 만든 손잡이에 고정시키는 일련의 작업들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재를 옮기는 노동과는 별개로 연장을 준비하는 작업은 분업적으로 병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재를 선별하고 잘라 내서 운반하고, 연장을 마련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봐도, 배 만들기는 조직화된 집단 사회를 그려볼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8천 년 전 비봉리에서 발견된 통나무배는 단순한 배의 파편이나 나무 조각이 아니라 우리에게 조직화된 집단의 체계적인 활동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증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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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서는 작은 연못부터 강과 호수,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물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아마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민물은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고 물속에 있는 풍부한 먹거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깊은 물로 들어가고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배 만들기를 빈번히 시도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인류는 먼 과거의 시간 이래로 여러 가지의 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과 배 이야기를 같이 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오래된 배’ 하면 이집트나 중동 지역을 주로 떠올리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배는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정글의 법칙’에서도 하지 못한 배 만들기

‘정글의 법칙’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오지에 가서 생존하는 것이 주 내용인데, 강물을 건너거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뗏목을 만드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무를 베어서 배를 만드는 장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출연자들이 먹거리를 구해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내용이 중심이다 보니 ‘배 만들기’ 같은 고된 노동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제는 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전문적인 연장과 도구 없이 손칼 몇 개 가지고는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배 만들기가 정말 힘든 일일까? 정말 힘든 일입니다!

비봉리 목선은 통나무를 잘라서 사람이 탈 공간을 파내 만든 배였습니다.

배를 만들 수 있는 목재를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습니다.

아름드리나무 베어 내기는 가장 큰 난관입니다.

 

특히, 8천 년 전 비봉리 목선이 만들어졌던 시기는 금속 도구가 없던 시절(신석기 시대)입니다.

돌 도구만 가지고 사람 몸통보다 두터운 나무를 베어 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어찌어찌해서 나무를 베었다면 물가로 큰 나무를 옮겨야 합니다.

2~3미터 길이의 사람 몸통 두께만 한 나무 무게는 한두 사람이 쉽게 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써야 합니다.

숲에서 물가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힘들겠죠.

 

큰 나무를 물가로 가져오면 그 다음부터는 도구 혹은 연장과의 싸움입니다.

돌 도구만으로 나무의 절반을 들어내고 다시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을 파내야 합니다.


8천 년 전 배의 가치

잠시 생각해 봐도 배 만들기는 아주 고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8천 년 전 선조들께서 해 내셨습니다.

강철 도끼나 끌, 대패 같은 금속 도구도 없이 말입니다.

 

8천 년 전 배 만들기는 그 당시 선조들의 지혜와 수준 높은 기술(High Technology)이 응축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그 당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보여 주는 기록물(Time stamp)입니다.

 

비봉리 목선은 전문 용어로 환목선丸木船 혹은 독목주獨木舟라고 하는데요.

굵고 긴 나무를 통째로 배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봉리 목선은 200년 된 소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수령 2백 년 된 나무를 잘라서 4~5미터가 넘는 배를 만들었습니다.

거대한 소나무를 돌 도구로 베어 내고 다듬어 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들의 지혜를 만나게 됩니다.

 

나무는 생각보다 가공하기가 아주 까다롭습니다.

특히 굳은 옹이 부분을 가공하려면 금속 도구를 가지고도 생각대로 다듬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조들께서는 불을 사용하여 목재를 가공하였습니다.

 

비봉리 목선에는 ‘초흔焦痕(불에 태운 자국)’이 발견됩니다.

가공하려는 부분을 불로 태우면, 탄 부분이 부스러지기 쉬워서 훨씬 수월하게 나무를 다룰 수 있습니다.

지금도 나무 판재를 휘거나 가공하기 위해서 불을 사용합니다.

 

특히 특정 부분만 잘 태우면 쉽게 부스러뜨릴 수 있습니다.

어렵게 손으로 깍아 내는 수고를 덜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정교하게 불을 놓을 수 없기에 돌을 뜨겁게 가열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아 부분적으로 태우는 방법을 사용했을까요?

 

불을 사용해서 통나무 속을 U자형으로 파내 사람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고 배 밑바닥과 외형을 잡았다고 추정합니다.

이렇게 배가 완성됩니다.

추측하건대 거대한 소나무를 베어낼 때도 불을 사용했다고 보여집니다.

 

지금 현대 목공 기술보다는 어설프고 세련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나무를 다루는 지혜와 기술은 이미 8천 년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보다는 많이 느렸겠지만, 차근차근 지식을 축적하고 지혜와 노력을 모아 배를 완성시켜 내고 그 흔적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선조들께 깊은 고마움이 스며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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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⑤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간단하게 말하면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에서 끝에 ‘지도’라는 것은 ‘~하는 그림’이란 뜻이다.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천문현상天文現象의 줄임 말이다.

열차列次란 하늘 별자리를 구획으로 나누어 펼쳐 놓았다는 의미이고, 분야分野라는 것은 하늘 구획을 땅의 특정 지역과 대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공간을 방위와 방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3차원 우주 공간에 퍼져 있는 별들을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상의 방위와 방향에 맞게 2차원 평면에 펼쳐 놓은 것이 천문도이다.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들을 12구역으로 나누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조선 백성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지침서로서 ‘표준 천문도’였다.

이 표준 천문도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천문학

고려 시대의 천문 관측 기록은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

정밀한 관측 기계가 아니면 관찰이 어려운 천문 현상까지 남기고 있다.

고려는 다양한 국가 천문 기관에서 30명에 가까운 천문 학자와 관리들이 활동했다.

 

고려 왕조 475년 동안 천문 관측 기록은 〈고려사〉, 〈천문지〉, 〈역지〉, 〈오행지〉 등에 집약되어 있다.

무려 6,500건에 달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 중 일식 138회, 혜성 87회 같은 비교적 쉬운 관측에서부터 태양 흑점을 관측한 기록도 38회나 있다고 한다.

한 예로 1151년 3월 2일에 ‘일중유흑자日中有黑子’ 즉, ‘태양 속에 검은 것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그 크기가 계란만 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자세한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고려사〉에 오윤부伍允孚가 천문도를 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 기록에서 평양에 천문도가 있다고 한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천문도를 고려가 이어받아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남아있는 정교한 천문도는 없지만 고구려의 별자리 특징을 볼 수 있는 것이 고려 희종의 무덤 천장에 있는 별자리 그림이다.

가운데 북두칠성이 있고 주변에 28수를 그려 넣었으며 태양과 달도 그렸다.

 

무엇보다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에는 북극성과 두 개의 별이 조합된 북극삼성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북극삼성은 고구려 때부터 이어진 특징이다.

동시대에 중국 천문도는 북극오성이 유행이었다.

집안시 씨름무덤(각저총), 춤무덤(무용총), 통구 사신총, 평양시 진파리 4호분 등 고구려 벽화에서 북극삼성이 보인다.

 

또 다른 고구려 벽화의 별자리 전통은 일월, 북두칠성, 그리고 남두육성의 조합이다.

동서쪽에 그려진 해와 달에는 삼족오와 두꺼비가 그려져 있고 북쪽에는 북두칠성 남쪽에는 남두육성이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부터 고려로 전해진 독특한 별자리 체계는 또 있다.

 

고려로 계승된 대표적인 특징은 카시오페아 별자리이다.

주변 국가 천문도에서는 W모양의 카시오페아 별자리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에서는 W모양의 별자리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고려 석관에도 북두칠성과 함께 짝으로 W모양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 천문과학을 전수한 고조선

고조선 영역에는 수많은 고인돌이 있다.

그 중에는 별자리가 그려진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었다. 불

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인돌에 새겨진 구멍들을 별자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조선 때부터 별자리를 관측했음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유물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고인돌에 별자리로 보이는 홈을 적게는 1~2개에서 많게는 400개까지 새긴 것들이 나타난 것이다.

1978년 충북 청원군 아득이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 유적에서 크고 작은 별이 60여 개 이상 새겨진 돌판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아득이 돌판의 점들이 진짜 별자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진파리 4호 무덤(6세기경)의 별자리와 기원전 15세기 지석리 고인돌의 별자리와 기원전 5세기 북극성 주변의 별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해서 서로 비교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득이 돌판의 별 배치가 다른 예들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아득이 돌판은 진짜 천문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돌판에 새겨진 별들의 지름이 별의 밝기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별이 밝으면 크게, 흐리면 작게 표시하는 고구려 천문학 전통이 이미 고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원본을 만든 고구려인들은 아득이 돌판을 만들었던 고조선으로부터 세계 최초의 천문 관측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수천 년의 천문 관측 기술과 역량이 드러난 걸작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이자, 세계의 자랑거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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