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진실의 역사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친일 후손들은 선대가 물려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에 힘입어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선대의 신산한 삶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의 할아버지인 친일파 이명세 등에 의해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쫓겨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창숙 선생의 첫째 아들 김환기는 아버지와 함께 상해 망명길에 올랐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불과 19살이었다.

둘째 아들 김찬기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몇 차례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이후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망명하였으나 망명 도중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 31살이었다.

셋째 아들 김형기는 다행히 살아남았으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고 생활이 곤궁했다.

말년의 김창숙 선생이 이명세 등에 의해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축출당하고 여관 방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때, 셋째 아들 김형기가 자동차 운전사를 하며 부친을 부양했다.

이 당시 세상 사람들이 심산의 아들이 운전사 노릇을 한다고 비웃자, 김창숙 선생이 아들을 위해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두 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셋째 아들에게 조차 변변한 경제적, 사회적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었으리라.

 

아들에게
내 아들이 차를 끈다고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고 조롱하네.
다시 그 아비를 비방하여
거짓 꾸밈 잘하게
자식을 가르쳤다 이르네.
비웃고 헐뜯은들 무엇이 상심하랴.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라.
가정의 생계를 돌보는 이 없다면
하루아침 당장에 망하고 말 것이라.
옛적에 연암(燕巖)공은 전을 지어 기렸다.
예덕(穢德)선생을 너희들 조금도 슬퍼하지 마라.
천한 직업 그것이 바로 천직(天職)이니라.

 

《독립운동가 후손은 4분의 3이 월 소득 200만원 이하》
한국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조사를 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모임인 광복회 회원 6,381명 전원을 대상으로 생활 실태 조사를 한 것이다.

조사 응답자는 1,115명으로, 뉴스타파가 조사한 친일 후손의 전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조사에는 독립 유공자 1대가 58명, 자녀 대인 2대가 469명, 손자 대인 3대가 509명, 증손자 대인 4대가 53명 참여했다.

 

독립 유공자 가족들은 ‘사회적 무관심’과 ‘경제적 빈곤’을 토로하고 있었다.

복수 응답으로 ‘과거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44.6%가 ‘사회적 무관심’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러나 33.9%가 ‘생활의 어려움’을, 33.3%가 ‘연금 승계가 끊길 우려’를 지목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기에 이런 설문 결과가 나왔을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월 개인 소득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50만원 미만이 10.3%, 50~100만원이 20.9%, 100~200만원이 43%였다. 2015년 3분기 기준으로 2이상 평균 소득이 월440만원 남짓이고 4인 가구 최저 생계비가 166만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실질적 소득을 따지고 보면 빈곤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한 자산 역시 국민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70% 이상이 자산 2억원 미만이었다. 다산 5천만원 이하가 28.3%였고, 5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21.1%, 1억원 이상 2억원 미만이 20.9%였다. 2013년 기준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가구당 순자산 3억 3,085만 원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친일 후손 1,177명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 그것도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다.

이같은 결과는 주관적 계층인식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응답자 중 자신이 ‘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이 73.7%을 차지했다.
친일 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조적인 인생행로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학력의 차이였다.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학력이 중졸 이하인 사람이 40%나 됐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 4.7%, 초졸이 22.8%, 중졸이 12.8%였다.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25.7%로, 전체적으로 고졸 이하가 3분의 2이다. 66%에 달한다.

 

친일파 후손 1,177명 중 학력 전수 조사에서는 서울대 출신이 268명으로 22.8%였다. 연대는 68명, 고려대 51명으로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1,177명의 친일 후손 중 유학을 다녀온 비율은 27%였다. 이 수치는 일반인의 유학비율과 비교하면 150~300배에 이른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이들은 부가 대물림 되었다. 당대 누구 못지않은 지식인들이었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배움의 가치를 잘 알았을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지하에서 자신의 후손들과 친일파의 후손들을 비교해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정의가 구현될 리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는가.

그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 속에 매국행위를 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가르쳐 온 것밖에 더 되는가.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정부가 건국 되었음에도 국가에서 예우는 못할망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렸다. 

친일파와 매국노가 성공하는 세상이라면 누가 올바른 정의와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기회주의자와 사대주의자가 성공의 표상이라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국법이 흔들린다.

 

한국사학계의 현주소도 위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 강점기시절 친일과 일본유학을 발판으로 식민 역사학계의 대두가 된 이병도는 2,3세대 제자들을 길러서 대학과 국사편찬위, 한국학 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포진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유롭게 역사연구를 하지만, 민족사학은 '유사사학', '사이비사학'이란 매도와 모멸을 당하면서 정부지원은 커녕 자기 돈을 써가며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사학이 정통사학으로 자리 잡고, 민족사학이 사이비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후에 사가들은 한일 병탄이후 100년사를 친일 100년사로 기록할 것이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섰다. 이제는 지난 묵은 티끌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친일과 망각』

친일파와 독립투사

진실의 역사

친일파와 독립투사
한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 사대파는 바로 친일파였다.

이들은 조선에 지켜야 할 좋은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유일한 살 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선진국인 일본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도왔으며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열렬히 일본에 충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친일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 동화되기를 거부했으며,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주적 조선인만의 나라를 만들려 일본과 친일파와 맞서 싸웠다.

그들이 바로 독립투사였다.

 

500년을 넘게 이어져 온 조선왕조는 1910년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두고 여려가지 주장이 있으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구한말 조선 무렵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 일본과 결탁한 친일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대적인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계몽기관이자 언론사로 알고 있는 ‘독립협회’‘독립신문’은 사실 일본과 결탁한 친일조직이었다.

애초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자체가 일본 외무대신과 주한 일본 공사같은 일본의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단체였으니 짐작할만하지 않은가?

일본이 제공한 자금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일본을 열렬히 찬양하는데 열을 올리며, 조선인들 사이에 친일여론을 퍼뜨리는데 주력을 다했다.

고종34년(1897년) 114호자 《독립신문》에는 “사악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난 것은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베푼 은혜”이며,

고종35년(1898년) 별호에는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라는 논설이 실렸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국 국방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2척의 군함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려는 계획을 세우자 “세계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 무엇하러 군함을 들여 오는가? 군대는 그저 도적떼나 평정할 정도의 소규모만 있으면 된다”라고 극렬히 반대했다.

《독립신문》의 논지대로라면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쓸만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고, 자주 국방을 위한 국비 증강도 하지 말아야 했던 셈이다.

아울러 독립신문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의병들을 가리켜  비도匪徒(도적떼)라고 모욕을 하는가 하면, 조선 침략에 열을 올리는 이토히로부미와 내통하던 이완용을 불세출의 천재이자 애국자라고 찬양을 했다.

이런 《독립신문》이야말로 친일 사대주의 언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립협회 역시 친일 행각으로는 독립신문에 뒤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일본과 대립하자 독립협회는 반러시아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종황제를 압박했다. 

고종이 러시아의 협조를 받아 4000명의 장교와 3만명의 병사로 조직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조선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의도를 품은 일이 아니냐며  협박을 했다.

독립협회는 연일 러시아를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고종을 몰아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말로는 ‘독립’을 내세웠으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사실 일본에 종속되기를 원한 위선적인 친일파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보낸 첩자이면서 고종의 측근이었던 배정 같은 경우도 있었다.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아버지가 역모에 휘말려 죽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그의 첩이 되면서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조선을 증오하여 반드시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실행하게 된다.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상류층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친분을 쌓고 뛰어난 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서 그의 측근이 되는데 성공한다.

조선 지배층 깊숙이 침투한 배정자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고급 정보들을 전부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고종이 일본의 손길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던 일이 도중에 무산된 것도 배정자가 그 사실을 알고 일본 공사관에 정보를 전해주어, 일본이 손을 써서 고종의 망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려 밀사들을 보냈던 헤이그 밀사사건도 배정자의 밀고로 인한 내부 기밀 누출로 인해서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배정자처럼 자발적인 친일 사대 매국노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친 일진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약 40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일진회는 독립신문처럼 친일 여론을 퍼뜨리는 한편, 회원들에게 군사 훈련도 시켰는데 이는 일본군을 도와 항일 의병들과 싸우는 전투에 적극 가담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들이야말로 구한말에 활개치던 가장 악독한 친일 사대 매국노들이었다.

일본에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동참한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아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면서 "장차 50년 후, 일본에 조선인 출신 재상이 나올 줄 누가 알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게 조선 권력층 내부에 일본과 내통하는 친일파가 가득 했으니, 조선이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항일 의병들이 무기들 들고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고 해도, 친일파가 그 정보를 모조리 일본에 보고하는 상황이니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정신병자나 패륜적인 악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형세의 이익을 계산한 이들은 “조선은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 빨리 망해서 일본에 흡수하는 일이 옳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확신범들이었다.

구한말 배웠다는 상류층 위정자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초들은 의병으로 거사를 하여 독립투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깨어있는 지식인 중에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지사들도 많았다.

또한 무지렁이 민초들 중에도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하여 친일을 서슴지 않고 한 자들도 많았었다.  

 

오늘날 친일파와 가장 닮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은 이래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 하는 대로 본받아야 한다”라며 세계주의를 가면 쓰고 자국 혐오와 사대주의적 발언을 일삼는 지식인이다. 만약 이들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했다면, 아마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열렬한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까. 『자주파 VS 사대파』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한국 근현대사

진실의 역사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한국 근현대사
한국의 역사, 한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큰 흐름으로 자주파와 사대파의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자주파는 한국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주독립과 국가발전 및 번영을 성취할 수 있으며, 한국의 전통 역사와 문화에서 세계문화를 이끌어갈 훌륭한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사대파는 한국이 주변 강대국에 비해 너무 뒤쳐져 있어서 한국인 스스로 아무것도 해내기 어려우며, 한국의 역사 문화와 가치를 국수주의로 매도하거나 비합리적인 미신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자주파로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나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을 들 수 있다.

반면 사대파로는 한글 창제에 반대한 최만리나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갖다 바친 친일파들이 있다. 대개 자주의식이 약하다 보면 쉽게 외세에 기대어 영달을 꿈꾸지만 대개 남에게 기댔던 인물치고 뒤끝이 좋았던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제 일은 제가 스스로 하여야 하느니라>
하루는 한 성도에게 '무엇을 사 오라.' 명하시거늘 그 성도가 다른 사람을 대신 시켰더니 일러 말씀하시기를 "그 노고(勞苦)의 대가는 그 사람이 받을 것이니라." 하시니라.
선천은 남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바람에 망하나니 너희들은 하다못해 방 벽에도 기대지 말라. 남의 덕 보기를 바라지 말라. 남의 은혜를 많이 입으면 보은줄에 걸려 행동하기가 어려우니라.
낭패(狼狽)란 짐승이 외발이기 때문에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하여야 행보(行步)하게 되나니 남에게 의지하면 낭패를 당하리라. (道典8:27)

 

사대파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대파도 시대에 따라서 유익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고정된 무생물이 아닌 생물이기에 상황에 따라 천변만화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대파보다 자주파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만약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을 해내겠다는 사람과 남의 힘을 빌려 편하게 이루겠다는 사람이 겨룬다면, 사람은 당연히 굳건한 자립정신을 가진자를 응원할 것이다.

 

역사 전체를 살펴보건데 한국의 사대파, 즉 사대주의자들은 대개 똑똑한듯 했지만 무지했다.

조선시대의 친명 사대주의자들은 명나라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은 일본이 패권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이 영원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명나라는 고작 300년 만에, 일본은 겨우 36년 만에 패권을 잃고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남긴 후유증은 대한민국 곳곳을 병들게 하였다.

친일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건국세력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세력이 매국 사대파에 패한 것이다.

이런 사회 구조는 정의가 상실된 한국사회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기는커녕, 사회 각 분야에 이들이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일제가 뿌리고 간 식민사학의 독버섯에 마취되어 자국의 역사문화를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사대주의자들은 항상 스스로 일어나려는 노력보다는 강대국에 기생하여 자국 문화를 깍아내리고 강대국에 아부하며 부귀영달을 누려왔다.

조선에, 명에 기대어 권력을 농단하던 노론계열 인사들은 일제 강점기가 되자 친일매국세력의 주류가 되어 일본에게 잘 보이려고 경쟁적으로 안달을 하였다. 후에 다시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들어서자 반공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이번에는 친미를 외쳤다. 이들에게 정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부귀, 출세 이외에 가치관은 없는 것이다.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까지 최순실 사태에서 이들이 보여준 행동은 비정상적일 정도다.

한국 정치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태극기라면 몰라도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미국이 없다면 한국의 1만년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단군 이래 수천년간 찌질이 국가이던 한국이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기독교국가인 천조국 미국의 원조로 국가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맹종적 사대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2천년 전 거의 부족국가이던 찌질이 한국이 중국 한사군의 지배를 받으면서 철기문화가 전래되면서 고조선이 급속히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시대만 달라졌고 사대의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달라졌을 뿐 똑같은 논리가 아닌가?

 

사실 조선이 일제에 넘어간 건 미국이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서 일본에게 넘겨서 일제 강점기 시대가 열렸던 사실은 알고 있는가? 

1905년 7월 미,일간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은 필리핀을 점유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점유하도록 밀약을 하였다.

미국의 승인을 받은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이완용도 맨 처음에는 친미주의자였다. 그리고 친일주의자로 바뀐다.

 

지금 국제정세의 흐름을 보면 초강대국인 미국이 단일 패권을 빠르게 상실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의 사대파는 여전히 미국이 영원하거나 앞으로 최소한 100년 동안 세계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라 장담을 한다.

정작 미국에서는 중국의 급부상을 막지 못하다면, 2030년이 되기 전에 경제력에서 미국이 중국에 밀리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동안의 역사를 되돌아 보건데 한국의 사대파는 지독하게도 무능했다.

조선시대의 친명 사대주의자들은 “나라는 망해도 명나라를 돕자!”라고 외쳤으나 그토록 숭배하던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일제 말기 친일파들은 자기 재산을 털어서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로 충성을 했으나 일제의 패망을 막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사대파, 즉 미국을 맹종하는 친미 사대주의자들도(합리적 사대주의야 문제가 없지만) 미국의 쇠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역사에서 사대파들은 자신들이 떠받들던 종주국이 망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무지하고 무능한 집단이 한 나라의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을 때 이를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주파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지나친 자주적 성향은 상대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지나친 독선적인 주장은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을 일으켜서 국가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대파라고 해서 항상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광적인 친명사대파는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고, 지금의 맹종적인 친미사대파도 대한민국을 지나친 흑백논리로 이해하고 있다.

자신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에 대해 적대적 선악논리를 적용하여 종북좌빨로 몰아붙이면서 대한민국을 좌우로 갈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외세인 당나라 힘을 끌어들여 통일과 번영을 꿈꿔온 신라의 통일은 결국 북쪽에는 대진국(발해)과 남쪽에는 신라라는 남북 분열시대를 끌고 들어왔다.

지금은 어떠한가. 외세에 휘말린 한반도는 지금 남북이 서로 갈라져 적대를 하고 있다. 이제 주변국과의 슬기로운 외교와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하여 분열된 민족정신을 묶고, 외래 가치관이 아닌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로써 우리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해야 통일한국의 앞길이 활짝 열리지 않을까?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②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

식민사학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판하는 학자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살수있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비정해서 한국인의 입으로 일제 식민사학의 고대사 체계를 완성시켜 주었다는 말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 영토를 반도내로 축소하고 고조선의 수도는 항상 평양으로 귀결이 된다.

 

이기백은 고조선이 평안도 일대의 작은 소국이 아니라 만주와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땅이 넓다고 강대국이라는 논리는 낡은 역사관이라며 영토가 광대했던 고조선을 오히려 비판을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매국, 이적행위는 그 동안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그 뿌리는 물론 식민사학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받은 역사 교육은 조선총독부 시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고조선은 미개한 사회라고 가르친 반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한사군은 찬란한 역사로 가르쳤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학자들이 국민들의 세금을 독식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사학자들은 주로 국고로 운영되는 서울대와 교원대,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 역사재단 같은 국가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이기동이다. 동북아 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라는 정책 목표로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그런데 2012년 경기도 교육청 소속 역사 교사 17명이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라는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단군 사화를 고조선 개국 신화는 여전히 신화적 범주에 속하며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자명하다며 서술 내용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었다.

뿐만 아니라 간도협약이전에 간도가 우리 영토에 편입된 사실이 없다. 백두산 경계비는 국제법적 인식이 등장하기 전이라 내용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순사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앞장서서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고문하던 한국인 앞잡이들의 행태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북아 역사재단은 일본학자들의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았다고 언론에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를 주목하는 학자와 민중 인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한사군은 버젓이 한반도 내로 기술을 해놓고서 말이다.

그래서 한사군이 만주 서쪽에 있었다는 견해가 어디 있냐고 따지자 말 바꾸기를 시도했다.

이런 기관에 연간 수백억의 국민 세금이 지원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냥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 동북공정의 한국 지부이자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의 국내 전초기지라고 보면 정확하다.

동북아 역사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김용덕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출신이며, 2대 이사장 정재정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출신이며, 3대 이사장인 김학준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출신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4대 이사장은 김학준 이사장의 제자로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현대일본학회장을 한 지일파로서 김호섭 이사장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별위원회가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편찬심의회 수당 지급 내역'에 따르면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 교육부가 임명한 16명의 편찬심의위원은 국정교과서 심사수당 5465만원을 받았다.

김학준은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만주쪽이 다 우리가 지배했던 땅이었다. 이것을 강력히 부르짖은 사람은 5공이었습니다. 5공이 그걸 장려를 했어요. 왜냐하면 쟁점을 돌리려고 애국심에 호소하고 5공이 전적으로 그것을 부채질 했는데 그때 그것에 편승했던 사람들은 학계에서 지금 얼굴을 못 들고 다닙니다.”

김학준의 전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김학준이 5공 민주화 운동을 한사람으로 오인할 것이다.

그러나 김학준은 5공 시절 12대 민정당 소속 국회위원이었다. 이때 민정당 총재가 전두환이었는데 그 당시 전국구 의원이었다. 자신을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지명해준 전두환에게 갑읍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던 김학준이 5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후안무치란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대주의 유학자나 일제 식민 사학, 서구사대주의자들이 먼저 없애고 싶어했던 대상은 단군이었다.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에서 왔다는 箕子기자를 우리 민족의 시조로 삼고 싶어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조직적으로 말살하고 신화로 전락시켰다.

동북아 역사 재단를 비롯한 한국의 식민사학자들도 단군을 말살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이런 식민 사학자들이 해방후 깨끗이 청산되고 상식적인 역사학이 발전했다면 지금쯤 우리는 단군은 말할 것도 없고 고조선이전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조선을 의도적으로 없애기 위해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등이 각기 다른 나라처럼 기록을 했다.

사실 이 나라들은 고조선내의 제후국들이었다. 으레 중국은 한족외에 다른 이민족을 오랑캐로 폄하를 해서 기록을 하고 자신들이 진 전쟁은 아예 빼버리고 승리한 전투는 부풀리는 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교원대 역사교수인 송호정은 이미 골수까지 식민사학으로 가득찬 인물인지라 고대 사료자체를 부인하고 들어간다.

한마디로 역사학의 기본 방법론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한국사의 강역을 축소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물이다.

또한 식민 사학자들의 고질적 병폐는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들이 나오면 오히려 그시대에 기록된 1차 사료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송호정은 단군을 신화라고 규정짓는다. 삼국유사에도 위서를 인용해서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는데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송호정은 단군역사를 신화로 만들고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다. 국민들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말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1차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말투도 아주 단정적으로 기술을 하고 있다.

 

다음 송호정의 글을 보자.

"재야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실재한 역사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오류를 낳고 있다."

그의 논고를 보자.

“단군 조선의 연대는 신화에 나타나 있는 대로를 믿을 수가 없음은 분명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역사학자가 느낌으로 분명하다라고 전제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요, 공상가인 셈이다.

박은식선생은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다”라며 행존 이암선생의 단군세기 서문을 인용했다. 재미 있는 사실은 고조선이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사료근거대로 고고학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초기 청동기 문화의 상한 연대가 서기전 2500년까지 올라간다. 그러자 송호정은 ‘고조선식 동검’이 만주일대와 한반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사실이 식민사학에 큰 위협이란 사실을 느끼고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이 아니라 산융. 동호 등의 북방이민족이 만든 것이라는 논리다. 물론 산융, 동호는 고조선의 다른 명칭이다. 중국에서 으레 고조선을 깍아내리기 위해 오랑캐로 기록을 한 것이다. 그렇건만 송호정은 1차적 사료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이 청동기가 산융, 동호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식민사학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논리이다.

 

침략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정치논리이며 동북공정의 논리로 바라본 정치논리이기에 대한민국은 이 식민사학을 반드시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아무런 1차 사료적 근거가 없는 삼류소설임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부여, 비류, 옥저, 신라, 고구려, 옥저, 예, 맥 등 70여 국의 혈통이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은 중앙에 천자가 있고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대제국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청동기는 10세기, 철기는 서기전 3세기에 중국의 한나라에서 들어왔다고 아무 사료적 근거도 없이 우기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고조선의 제철기술은 서구와 비교할 때 무려 1천년 이상이나 빨랐다. 고조선을 연구할수록 만주일대와 한반도는 물론 산둥반도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식민사학의 앞잡이들은 고조선이 부여, 예맥, 진번 등과 같은 계통의 한 소국으로 대동강 유역에 건국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한중 수교 후 만주 대륙에서 수많은 고조선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슬그머니 중심지 이동설을 내놓았다. 물론 아무런 문헌, 고고학적 근거 없이 나온 이론이다. 창작소설인 것이다.

중국기록에 발조선, 숙신으로 기록된 것은 전부 조선의 명칭이다. 이는 정약용, 신채호, 정인보, 리지린 등이 모두 같은 의견을 기술했다. 그러나 송호정은 고조선을 무조건 축소하고 반도북부내로 쑤셔넣기 위해서 숙신은 여진족이고 고조선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고조선을 전공한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 재직을 하면서 국민세금으로 고조선 역사 말살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국 기관인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그토록 그를 떠받드는 것이다.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가 나오면 사료가 틀렸다고 한다. 『후한서』에는 평양성을 고조선의 수도 왕험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사기열전에는 '위만이 왕험성에 도읍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조선의 옛 도읍에 세운 험독현이 요동군 소속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고조선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이라는 논리는 설 곳이 없다. 또한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樂浪郡故朝鮮國也 在療東(후한서 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括理志)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時朝鮮王滿據之也(사기정의)☞고려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인데 곧 고조선의 땅이다. 浿水療東塞外패수요동새외(사기 조선열전)

☞패수는 요동의 새외에서 나온다. 결국 중국 사료를 종합해보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평양성도 현재의 평양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한국사를 축소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인보다 더욱 우리역사를 반도내로 국한지우고 고조선의 건국사를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국록을 축내면서 한국사 깍아내리기를 하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조선사를 축소시키고 신화를 만들기 위해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모든 작업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한다는 것이다. 국민세금으로 먹고 살면서 정작 행위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강역을 팔아먹는 매국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에서 가야사 복원을 지시하고 그동안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해오던 도종환 의원이 문체부장관으로 지명되자 이들은 본격적 흔들기에 나서고있다. 이번 정권에서 이를 확고히 대청소해야한다.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주의 침략의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 식민사학과 그 후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단군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유는 조선은 자가발전의 능력이 없으므로 외세의 지배와 문물전수를 통해 발전되었다는 제국주의 논리를 강변하기 위해서였다.

뉴라이트 역사관도 매 마찬가지다. 기독교 들어오기 전 한국은 미개사회였다가 기독교가 들어오고 선진사회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래서 일제시대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을 문창극이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는 말 그대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니 과거 수천년 전 기독교가 없을 때, 서양보다 더 강대한 단군의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애써 삭제하려 한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과 뉴라이트 역사관은 동색이다. 자국의 역사를 일제와 미국의 입장에서 기술을 하고 자국역사를 폄훼를 하고 자기 조상에 테러를 가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삼국사기 기록이 위배되었으므로 무조건 일본서기는 옳은 역사책이고 식민지 국가의 역사책은 조작된 것으로 몰아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야마토 왜를 지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이 기록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므로 거짓기록이라고 우겼다.

일제는 1916년 총독부 주재로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면서 한국사를 반도내로 축소시켰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비장의 사료를 강탈해서 단군관련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렸다.

이렇게 몰수되어 태워진 사서만 20여만 권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강대국인 일본(?) 미국에는 굴종적이었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에도 자신의 민족과 민족사를 폄훼했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서기만 믿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행동은 성경의 구약창세기는 무조건 믿으면서 우리의 역사서는 위서라고 몰아붙이는 행동과 같다.

이미 모세의 홍해설화는 역사적 대차비교를 한 결과 허구임이 밝혀지지 않았던가. 성경의 모세기적으로 기록된 애굽왕은 버젓이 천수를 누리고 늙어 죽었고, 하물며 접시물에 빠진 사실조차도 없으니 말이다. 이집트의 왕과 병사가 다 죽었다면 국가위기가 와야 함에도 멀쩡히 태평하게 역사가 지속된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과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조선사편수회는 학문조직이 아니었다. 식민지배의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가공한 것이다.

그런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식민사학 논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강단사학에선 단군을 신화라고 폄하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한국사의 시작을 서기 3세기 이후로 끌어 내리고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사이토 총독의 교육시책이다》

1.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2.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춰내 그것을 확장해서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3.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의 사적과, 일본의 인물,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지금 한국인은 사이토의 전략이 적중했음을 알게 된다. 자국 국민이 자국역사를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하다고 폄훼를 하고 일본 미국의 지배를 감사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니 말이다.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매국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후유증은 우리역사와 혼을 잃는 결정적 치명타를 안겼다. 해방 후 식민주류사학자들은 이중적 처신으로 생존해 왔다. 총론에서는 식민 사학을 비판하는 척하고 각론으로 들어가서는 식민사학 일색인 것이다.

박은식은 일제가 단군 조선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는 조선인이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인이 조선사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이웃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한국사를 자국과 외래 종교 성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왜곡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 한국학 연구소에 10억을 주고 한국 상고사 6권을 영문으로 간행했는데 한국의 송호정, 여호규 등 식민사학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는 학자들만 선발해서 편찬했다.

그런데 한결같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일색이다. 이를 보고 우당 이회영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식미사학 해체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식민사학자들이 지금까지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사 또는 한국 문화의 발전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타율성론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는 내적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정체성론이다.

한민족은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없으므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타율성론은 일본인에게는 한국사를 멸시하게 만들었고, 한국인에게는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다. 곧 식민지배가 한국인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15일 한국인 중에서 해방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이들이 한국고대사를 장악해서 자기 멋대로 주무를지를 누가 알았겠는가?

겉으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속으로는 지지하는 이중적 행보가 이들의 실체다.

윤내현교수가 고조선에 대한 시각을 중국의 고대 1차 사료에 근거해서 반박하자 식민사학계는 윤내현을 재야사학자라고 매도했다.

자기해석하고 다르면 무조건 이단이 되고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 되고 재야로 몰리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지키기 위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유사역사학, 사이비사학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자신들의 역사관과 다른 이들에 대하여 온갖 음해를 가하고 있다.

 

특히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인 한사군에 대해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 그 당시에 기록된 1차 사료에는 한사군의 위치를 하나같이 遼東요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 안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그동안 식민 사학자들은 중국 고대 사료가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한 것처럼 사기를 쳐왔다.

 

이병도는 우봉이씨로 항렬로 따지면 이완용의 손자뻘이다. 할아버지는 국토를 팔아먹고 손자뻘 되는 이병도는 역사를 팔아먹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병도가 한사군을 그리 강조한 이유는 일제 식민사학은 정체성론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고대 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간주하고 정복자인 한나라에서 철기 문화가 전래돼서 조선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철기가 전래되었다는 1차 사료는 전무하다. 고조선이 미개사회였다는 것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정신은 일본 극우파이면서 겉으로는 민족사학자로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식민사학자인 이기동 같은 인물이 비난하는 인물은 식민사학을 비판한 학자들이고, 거꾸로 칭찬하면 식민사학을 옹호하는 인물들이라고 보면 100% 들어맞는다.

역사학계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집단이라면 조선총독부의 시각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일정한 세를 형성해야 마땅한데 현실에서는 그런 예를 찾기 힘들다.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을 적대하는 학자들은 바글바글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진출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조폭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식민사학의 태동배경은 학문이 아니라 식민 지배를 위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왜 피땀 어린 국민 세금을 지원해서 이들을 지켜주는 것일까?

주역의 원리를 닮은 인간의 유전자 코드

세상이 궁금해

주역의 원리를 닮은 인간의 유전자 코드


생명의 설계도, DNA 이중나선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문자 그대로 따져도 옳은 말입니다.
인간의 삶도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성장하여 또 부모가 되어 혈통을 이어갑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라고 말해왔으며, 자식이 부모를 닮듯이 인간은 천지를 닮았다고 하였습니다.
 

유전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유전자에는 주역과 마찬가지로 음양의 논리가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인간의 생명은 자연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짜임새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지의 이치를 담은 주역과 신이 생명을 만드는데 사용한 언어인 유전자,

특히 천지의 열매인 사람의 유전자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겠습니다.
 

形於天地하여 生人하나니

형어천지      생인

萬物之中에 唯人이 最貴也니라.
만물지중    유인    최귀야

하늘과 땅을 형상하여 사람이 생겨났나니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니라. (道典 2:23:2)

중앙아시아 투르판의 아스타나 석굴 천장에서 발굴된 <복희여와도>를 보면,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생명의 설계도인 DNA와 유사한 꽈배기 형상의 뱀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은 신화에서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복희께서 들고 있는 직각자는 만물을 창조하는 하도의 방위를 상징하며,

여와는 낙서의 시간성과 태극의 원(圓)을 그리는 컴파스를 들고 있습니다.


『증산도의 진리』 제4장, 『周算經』卷上 :

직각자는 방위를 강조하는 하도의 공간성을, 컴파스는 시간성을 표현하는 낙서와 태극의 원을 그리는 상징의 도구.

또한 직각자는 9X9=81 윤도수로부터 나오는데 선천 분열의 시발점이 9에서 시작하므로 남자(양)를 상징함.

 

복희씨주역의 원리를 내놓으시고 일부일처의 혼인제도를 세우신 분인데,
부부의 결합으로 새 생명을 잉태하는 모습이 마치 DNA의 이중나선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한 가닥씩 받아서 만들어지는 법칙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유전자에는 생명활동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즉 유전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인체의 설계도입니다.
설계도에 맞추어 몸이라는 집을 짓다보니 눈의 색깔, 팔의 길이, 목소리 등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유전자는 피부, 간, 심장 등의 모든 세포 안에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세포의 핵에 들어있는 핵산(DNA와 RNA)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접어들면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닐스 보어 <빛과 생명>이라는 강연을 통해 주역의 상보성 원리가 생명현상에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하였습니다.
슈뢰딩거생명의 언어가 점과 선으로 된 음양의 부호라고 하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1953년 4월에 왓슨과 크릭은 「핵산의 분자구조」라는 논문을 통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해명하게 되었습니다.

사상(四象)과 유전자코드

두 가닥으로 된 DNA는 옆에서 보면 나선형의 사다리 구조이지만, 원통 위에서 보면 S자형 태극 모양입니다.

10계단을 진행하여 나선이 한 번 회전하고 있습니다.
주역과 유전자코드의 유사성을 알아보면, 유전자 코드는 우선 피리미딘과 퓨린을 음양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피리미딘 형은 다시 시토신(C)과 티민(T), 퓨린 형은 구아닌(G)과 아데닌(A)이라는 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짝짓기는 항상 C=G, T=A라는 음양으로 이루어져서 이중나선은 남녀가 껴안은 것처럼 서로 휘감기게 됩니다.

4종의 염기를 이진법으로 표기하면 C·T·G·A는 00, 01, 10, 11가 되는데, 주역의 사상(四象)과 연관됨을 알 수 있습니다.

 

팔괘와 유전자코드

이중나선을 따라서 늘어서 있는 염기들은 서로 짝을 맺고 있습니다.

한쪽 나선의 염기 배열이 정해지면 다른쪽 나선의 염기 배열은 자동으로 정해지는데, 이것은 백대 조상의 유전자가 나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메시지를 전할 때는 DNA의 중간 부분이 ‘지퍼처럼 열려서’ 정보를 전달하고 다시 닫히게 됩니다.
이때 한 가닥은 DNA 원본으로부터 RNA라는 복사본을 생성하는 센스 사슬(+)이고, 다른 가닥은 원본의 정보를 보존하는 넌센스 사슬(-)로 체용(體用)의 관계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변하지 않고 보존하는 그 한 가닥의 유전정보가 자손 대대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희팔괘가 서로 마주보며 대대를 이루듯이 4개의 염기가 센스 작용의 여부에 따라 이중나선에서 음양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팔괘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4괘와 유전암호의 단위

유전자의 정보는 DNA 위에 C·T·G·A 4개의 문자로 씌어 있는데, 이 4개의 문자가 3개씩 한 세트로 결합하여 하나의 코돈을 만듭니다.

그 코돈이 단백질을 생성하는 유전암호의 기본단위입니다.

따라서 4가지 염기로부터 얻어지는 코돈의 가지 수는 4×4×4=64 해서 총 64종류의 코돈이 있습니다.


또한 코돈 한 개의 정보량은 6비트(64)입니다.

이는 주역의 괘가 6효로 구성되어 한 개의 효마다 0과 1로 표시하면 총 6비트(64)의 정보량을 가지는 것과 부합합니다.
이렇게 주역의 64괘를 64코돈에 배당해보면 1대 1의 대응관계가 성립하여 하나의 코돈을 하나의 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여겨볼 점은 어떤 생물이고 64개 이상의 코돈은 없다는 것이며, 생물계가 천차만별인 것은 바로 64개의 유전암호가 무한순열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DNA 이중나선을 통해 진리는 단순하면서도 우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우주와 인간의 유사성을 찾아보기 위해 한 개의 세포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에 한정해서 이야기했지만,

한 사람에게 100조개의 세포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틀림없이 대우주에 버금가는 상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색은 생명의 본질을 엿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며,

완전한 인간생명에 대한 이해는 철학의 영역과 신도의 문제로 확장해야 그 비밀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님께서는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천지의 이법과 똑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수가 곧 대우주 태극수의 핵이다"라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몸을 새롭게 정의해주셨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DNA 구조를 발견하고서 불과 50여년 만에 인간 유전체 초안을 발표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유전자를 발견하고,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후천선경에는 수(壽)가 상등은 1200세요, 중등은 900세요, 하등은 700세니라. (道典 11:299)
무병장수 문화를 열어가기 위한 생명과학의 숨가쁜 항해가 곧 목적지에 닻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함께 던져주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증산도의 진리』, 『周易』
무로후시 키미코, 『그림으로 보는 생명과학의 지식』, 1997.
제임스 D. 왓슨, 『DNA : 생명의 비밀』, 2003.
조셉 레빈·데이비드 스즈키, 『유전자 : 생명의 원천』, 1993.
武田時昌, 『역으로 본 현대과학』, 1992. 

우주변화의 법칙-음양의 예

세상이 궁금해

우주의 근본법칙 - 음양
음(陰)양(陽)이란?

인간과 만물을 지어내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양극의 두 생명기운을 말합니다.
우주 삼라만상은 밝은것과 어두운 것,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같이 음양의 쌍으로 존재하며

낮과 밤, 밀물과 썰물같이 음양의 이치로 생성 변화합니다.

 

태극(太極)이란?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

음양의 두 원기가 나누어지기 전의 근본.

만물의 근원을 도형으로 나타낸 상징.

 

무극에서 대폭발로 음양이 생겨났고 이를 태극이라 합니다.

그 중에 위로는 가벼우면서 열기로 이루어진 것을 이라 하고,

아래로는 무거우면서 차가운 것으로 이루어진 것을 이라 합니다.


음과 양은 태극 안에서 항상 서로 충돌하려고 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세한 힘의 이동에 따라서 무언인가가 생겨나는데 이때 이루어진 것을 오행이라 합니다.

 
우주변화의 근본법칙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  -주역 계사전(繫辭傳)-

 

우주에서 삼라만상이 무궁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음(陰)과 양(陽)이라는이질적인 두 기운이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현상으로 음양의 변화라고 합니다.

 
음양의 변화모습은 '하루'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밤새 풀잎에 맺혀있던 이슬이 따스한 햇살을 받아 하늘로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 사라집니다.

다시 밤이 되면 풀잎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루는 낮과 밤으로 나눠지는데 낮은 양(陽)에,  밤은 음(陰)에 속합니다.
  

음양(陰陽)이라는 글자는 해가 비친 언덕의 음달과 양달을 형상화해서 만든 글자입니다.

달은 음을 대표하고, 해는 양을 대표하므로 음(陰)은 월月, 양(陽)은 일日이라 합니다.

 

해(日)와 달(月)이 합성되어 역(易)이란 글자가 만들어지는데, 역은 변화(변할 역)를 뜻합니다.

   
음양의 예

인간으로 볼 때 무형인 정신은 양, 유형인 육체는 음입니다.

호흡할 때도 내뱉는 호(呼)는 양 운동이고, 들이쉬는 흡(吸)은 음 운동입니다.

공간적으로 볼 때도 동양은 양이고 서양은 음입니다.

 

그래서 동양은 무형(道)의 정신문화, 즉 철학과 종교가 발달하고,

서양은 유형(器)의 물질문명, 즉 과학과 기술이 발달합니다.

이것을 소위 철학적 용어로 동도서기(東道西器)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극미의 원자의 세계도 음양으로 구성되어 양성자는 양, 음전자는 음이고

전기도 플러스(+) 양과 마이너스(-) 음으로 되어서 빛도 내고 열도 냅니다.

 

양(陽)  하늘-天    해 -日    낮(불)    남(수컷)    정신    호(안에서, 밖으로)    동양, 철학(정신세계)    +(양성자)
음(陰)  땅-地       달-月     밤(물)    여(암컷)    육체    흡(밖에서, 안으로)    서양, 과학(물질세계)    -(음전자)
 

<자연계>
양(陽)   낮晝      여름夏    남南    열熱    화火    명明
음(陰)   아침朝    봄春      동東    온溫    수水    암暗

 

<방향성>
양(陽)   상上    좌左    외外    말단末端    출出    승昇    부浮    철 凸

음(陰)   하下    우右    내內    중심中心    입入    강降    침沈    요 凹


<인간, 인체>
양(陽)   남 男    유幼    외측外側    척배脊背    상부上部    육부六腑    위衛    기 氣
음(陰)   여 女    노老    내측內側    흉복胸腹    하부下部    오장五臟    영營    혈 血
 

<병기 病機>

양(陽)   동動    강성强盛    온열溫熱    건조乾燥    항진亢進    급성 急性
음(陰)   정靜    쇠약衰弱    한랭寒冷    습윤濕潤    감퇴減退    만성 慢性
  

다시 한번 설명하면 시간은 하루주기로 낮과 밤의 음양순환이 있고,

1년 주기로 봄 여름과 가을 겨울이 교차하며 음양으로 영원히 순환반복합니다.

 

동서양의 비교
음양을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공간과 시간입니다.
공간은 크게 동양과 서양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 행동양식이 정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부를때 서양에서는 손바닥을 위로 하면서 손가락으로 "come on" 하지만,

동양에서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이리 오너라"하며 부릅니다.


밥을 먹을때 동양은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모아가면서 안으로 떠 먹고, 서양은 스프를 먹을때 안에서 밖으로 먹습니다.


연필을 깍는것도 우리는 안에서 밖으로 깎지만, 서양은 밖에서 안으로 깍아요.


동양은 애기를 업을때도 등으로 업는다면, 서양은 앞으로 엎고 다녀요.


글을 쓸때도 지금 서양문화가 들어와서 같지만 옛날에는 우에서 좌로 종서를 했고, 서양은 좌에서 우로 횡서를 했어요.

 

옛날 동양문화에서 춤은 어깨 춤이 덩실덩실하였는데

서양은 탱고, 부루스, 고고, 디스코 등 발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춤이 달라져요. 
 
동양은 양이고 서양은 음이기때문에 그 기운에 따른 생활양식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생긴 모습을 보면, 서양사람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동양인들은 그렇지 않죠^^;

동양인은 양으로 위로 올라오는 기운이 강해서 하체가 짧고 상체가 길고, 서양인은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모습으로 나와요.
흑인들 경우 코 아래로 내려갈수록 코가 커지면서 입술이 커요. 얼굴에서도 밑으로 기운이 다 내려가 있는 것을 의미하겠죠.
좀 어려운 얘기지만 기운이 모두 다 내려간 상태를 '북방 수'라고 하는데 북방 수의 기운이 자리잡고 있기때문에 피부색이 검어져요.

 

소[丑]와 말[午]

양의 성질은 동(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 양에 해당합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말의 속성에 비유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여자아이를 말괄량이나 풀어놓은 망아지 같다는 얘기를 하죠.

소는 음입니다. 정적이고 유순하죠. 꼬마가 소를 끌고 가도 소는 느릿느릿 따라갑니다.

발굽을 봐도 말은 양적인 동물이라 하나인 통굽으로 되어 있고, 소는 음에 배속되는 동물이라 소 발굽은 두 개로 갈라져 있습니다.
1 3 5 7 9 홀수는 양의 수(數)이고, 2 4 6 8 10 짝수는 음의 수입니다.

이런 음양의 이치로 양인 말은 발굽도 홀수인 하나로 되어 있고, 음인 소는 발굽도 짝수인 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자연 삼라만상은 모두 음과 양의 이치가 들어 있습니다.

 

우주원리의 세계는 음양

세상이 궁금해

음양 陰陽

우주원리의 세계는 한마디로 음양陰陽이라고 합니다.

음(陰)과 양(陽)은 상대적인 두 개의 힘으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덕을 통해 이 상황을 상세하게 관찰해 봅시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말의 본뜻은 언덕에 생긴 응달과 양달이라는 말입니다. 응달과 양달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봅시다.

하루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천지가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편의상, 별빛과 달빛도 없다고 가정합시다.

 

이런 상태에서는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아무런 판단이 설 수 없습니다.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역시 없는 것도 아니며 적막무짐(寂寞無朕)한 상태로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무극(無極)이라 합니다.
 
영원한 변함이 없을 것 같던 어둠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동쪽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순간,

텅 비어 있던 천지가 밝은 햇빛 아래 갑자기 드러나게 됩니다.

 
태초에 빛이 생겨 밝음과 어둠이 나뉘어지던 상황이 어렴풋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밝음과 어둠은 순간적으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볼 것은 태양이 떠올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언덕입니다.

빛이 비치자마자 언덕에는 양달과 응달이 동시에 생겨났습니다.

양달이 먼저다 응달이 먼저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양은 순식간에 함께 태어난 것입니다.

 
음이 있는 곳은 항상 양이 따라가게 됩니다.

거꾸로 양이 있는 곳은 언제나 음이 따라가게 됩니다.

음과 양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빛과 그리고 그림자'입니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말뜻이 좁게는 응달과 양달이지만,

위와 같은 특성 때문에 동양의 자연주의 사유 방법의 기초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음이 생길 때 동시에 양이 존재하게 되는 음양의 특성을 '음양(陰陽)의 상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덕이 빛에 의해 세상에 드러난 후 응달인 음과 양달인 양이 뚜렷하게 나뉘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언덕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비록 음양의 작용에 의해 밝은 쪽과 어두운 쪽으로 나뉘어졌지만 언덕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양달과 응달의 나뉘어짐과 관계없이 음양이 실현되는 장(場)인 언덕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태극(太極)이며, 음양(陰陽)은 하나 속에 들어 있는 둘입니다.

이러한 음양(陰陽)의 특성을 '음양(陰陽)의 일원성'이라 합니다.

그런데, 위의 두 그림에서 차이가 있지 않나요?

언덕은 응달과 양달이 직선으로 나뉘었는데 태극은 응달과 양달이 곡선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해는 동에서 떠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하게 서쪽으로 넘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언덕에 비치는 응달과 양달의 비율은 한쪽이 많아지면 다른 한쪽이 적어지고,

또한 반대편이 많아지면 다른 반대편이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음양은 (A)의 도형이 아니고 (B)의 도형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음과 양을 나누는 선이 곡선을 이루는 것은 시간이 직선이 아닌 곡선 운동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언덕에 시간의 개념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음양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응달과 양달이 균등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력권의 판도가 달라지고 음양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태양을 동(東)에서 서(西)로 움직이게 하고 태양 빛은 언덕을 비추면서 시간에 따라 응달과 양달의 세력 변화를 일으킵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의해 부여된 음양의 이러한 특성을 '음양의 역동성(力動性)'이라 합니다.

 

태극도 이면에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곡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음양은 항상 변화가 일어나고 또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북아에서 넘어간 인디언

진실의 역사

동북아에서 넘어간 인디언

환국의 환족은 베링해협을 건너 남북 아메리카대륙으로도 이주하였다.

이것은 인디언의 언어, 혈액형, 체질, 치아 등을 연구한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눈으로 보기에도 아시아인에 가까운 인디언은 동북아에서 건너 간 사람들인 것이다.

 

인디언과 동북아인의 연관성은 인디언의 생활도구와 풍습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오리건 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는 동북아의 짚신과 흡사한데 약 9천 년 전의 것이라 한다.

9천 년 전이라면, 그때는 환국시대인 것이다.

수년 전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을 들렀을 때 1층 인디언관에서 본 절구, 소쿠리, 베틀, 어망 등은

우리네 것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그곳 전시장의 모습은 마치 한국의 시골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북미 인디언 마을 입구의 장승과 토템 또한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곳 여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업어서 키우며, 어린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하는것과 똑같은 실뜨기놀이를 한다.

중남미에 아즈텍문명과 잉카문명을 건설한 인디언 또한 환족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배재대 손성태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아즈텍어(나와틀어)와 잉카어(케추아어)의 문장 구조가 한국어과 유사하며

조사의 종류와 쓰임새도 한국어와 유사하다고 한다. 우리말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여럿 있다.

환족은 하늘의 광명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아즈텍 사람도 흰 옷을 즐겨 입고 사원 건물도 흰색으로 칠하였다.

그들은 또한 아이가 태어날 때 금줄을 치고,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다녔다.

-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

 

죽은 사람의 입에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옥구슬을 넣어 주고, 자정에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다 마친 후에는 사용한 종이를 불태우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한민족의 육아, 장례, 제사 풍습과 너무도 유사하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문화와 한韓 문화의 관계에 대해 손 교수는

“직접적인 관련 없이 이처럼 공통점이 많기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인디언문명은 한민족의 조상이 베링해협을 넘어 가 개척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이

아시아의 동부지방에서 살던 민족이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이것은 언어, 혈액형, 체질(형질), 치아모양 등의 과학적 연구방법(DNA 추적)을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 부족 최고 지도자 '아파치'는 초대 환인 '안파견'에서 유래된 것.
 - 북미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는 약 9천년 전의 것이며, 동이족의 짚신과 흡사.
 - 인디언 들이 쓰던 나무절구, 소쿠리, 광주리, 삼태기, 베틀, 어망, 물레 등은 우리선조들이 쓰던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 영국 런던대 연구진은 캐나다에서 칠레에 이르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DNA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최초의 이주민은 베링해가 얼어 육교를 이뤘던 1만5천여년 전 빙하기에 처음 시베리아로부터 건너온 아시아인 집단이었고

  이후 두 차례의 이주민은 중국의 한족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집단임이 밝혀졌다고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 인류의이동-Y염색체와 mtDNA로 추적그래프지도.

- 연세대의대 법의학과 신경진ㆍ이환영 교수팀은 1970년부터 2004년까지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 유적지 중

  11곳(구석기시대 1개, 신석기시대 3개, 청동기시대 2개, 백제시대 1개, 고려시대 4개)에서 출토된 유해 35구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유전자형을 분석한 결과를 이 분야 국제저널(Human Biology) 최근호에 게재했다.(2009-01-14)

  초기 선사시대 한국인 집단이 알타이산맥의 북쪽 지역과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부터 기원했다는

  기존의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과라는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한민족은 파미르고원의 동방에 위치하는 천산(天山)산맥을 시원으로 하여, 시베리아에 있는 바이칼호를 근거로

천지(天地)로 이어지는 경천숭조(敬天崇祖) 전통을 지닌 인류시원 문명의 장자(長子)민족이다.  

그리고 이 중앙아시아 천산을 기점으로 북방문명의 시조인 대단위의 부족국가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문헌으로 밝히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

명판관 여주 선생의 실제 저승 재판기록④

서프라이즈

'저승문답'(원저 : 유명문답록幽冥問答錄)1945년 전후 중국 제2의 포청천으로

명성을 드날렸던 명판관 여주(黎澍) 선생의 실제 저승 재판기록입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죽은 뒤에 역시 저승에 가서 재판을 받습니까?

→ 저승 법정에서 관리하는 대상은 모두 업(業)안에 끌려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대개 평범한 사람들로서 큰 선행도 없고 큰 악행도 없는 사람들을 관리합니다.

 

만약에 크게 수행한 사람은 죽은 뒤에 곧바로 천계(天界)에 올라가기 때문에 저승을 거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저승 명부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저승에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중 혹시 천계에 오르는 것이 조금 늦는 사람은 어쩌다가 저승을 거쳐가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이 저승에 오면, 저승판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서서 그를 공손히 맞이합니다.  

그러면 그 혼백은 걸을 때마다 점점 높아져서 마치 구름 사다리를 걷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즉시 곧바로 천계에 오르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습니다.

 

저승법정에서도 서양인을 잡아옵니까?  

만약에 양인이 오면 피차에 언어는 어떻게 소통합니까?

만약에 양인이 없다면 양인이 죽은 뒤에는 어디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이 되었을 때가 마침 1900년(경자년庚子年)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한 지 5일 만에 항복한 뒤이기 때문에 국내외의 군대와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승에도 다소의 서양인들이 법정에 들어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승에서는 저절로 그들의 말이 통해(通解)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난리에 죽은 한 제독과 또 충성으로 나라를 보위하다가 의분이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하다가

몸을 버린 자가 심리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친히 그들이 똑같이 곧바로 천계(天界)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중국의 저승 재판소가 이미 한 곳만이 아니고, 또 구미(毆美)의 각 나라도 또한 따로 저승 재판소가 있어서

각기 그 정황에 따라 처리합니다.

 

귀신도 또한 생명의 소멸과 기한이 있습니까?

→ 예, 있습니다. 내가 본 옛 귀신은 멀리는 송나라, 원나라 때까지에만 이르고,

당나라 이상의 귀신은 절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신선(神仙)이 된 분을 제외하고는 만고에 길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천년 이상 된 귀신을 보지 못했다는 말로 영혼도 수명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살아서 그 사람이 닦은 수련의 정도와 지은 공덕에 따라 영혼의 수명도 정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의 이르는 동안에 용모가 점점 변하여 가는데,

귀신의 용모도 또한 나이에 따라 노쇠해집니까?

→ 귀신의 용모는 그 병들어 죽을 때까지는 똑 같습니다. 해가 오래 지났다고 해서 노쇠해지지 않습니다.

 

도력(道力)이 높은 분들이 주문을 외워 죽은 혼령을 천도하면 망인에게 도움이 됩니까?

→ 주문을 외워주는 것의 이득에 대해 특별히 일괄적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비유하자면 그 사람이 생전에 큰 선행을 하였으면 죽은 뒤에 곧바로 천계에 오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따로 주문을 읽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생전에 크나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 즉시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도 역시 쉽게 주문을 읽어 주어야 별로 이득이 없습니다.

다만, 일반의 보통 사람들 즉 생전에 큰 선행도 악행도 없는 사람들은 주문을 읽어 주면

어두운 저승세계가 환하게 밝아져서 죄업이 경감되고 이익이 특별히 커집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사람의 도력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또한 막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주문을 외워주는 사람이 도력이 높은 고승이고 효자 현손과 관계가 있으면,

그 주문을 읽어 주는 것이 보통 일반 사람이 외워주는 것보다 열 배 정도 이득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보통 사람이라도 주문을 지극 정성으로 외워주면 또한 상당한 이익이 있습니다.

만약 주문을 읽어주는 사람의 마음이 전일(全一)치 못하여 건성건성 외워 준다면 이익도 극히 적습니다.

주문을 읽어주는 기간은 망인의 49일 이내가 좋고, 이 기간을 지나면 망인이 지은 업에 따라

이미 다른 데에 생을 바꿔 태어나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공덕이 돌아가서 죽은 자는 바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문은 많이 읽을수록 공덕이 많이 쌓입니다. 그리고, 주문에 따라 주력이 다릅니다.

 최고 최상의 주문인 태을주를 정성껏 읽어 많은 공력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생의 전세에서부터 쌓은 그 근기가 이와 같고 또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셨으니,

아마 내세에도 역시 윤회생사(輪回生死)를 면제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윤회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게 어찌 그리 용이할 수 있습니까?

즉 나의 내생(來生)에도 역시 면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같은 종사자에게 부탁하여 이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당신의 내세에는 응당 반드시 하남과 남양일대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 십년 이내에 세상의 물정과 세태인사(世態人事)가 변천하여 아마 저승의 기록도 고쳐질 수도 있을 겁니다.

   

불교를 배운 사람은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도교를 배운 사람은 동천복지(洞天福地)에 태어나지만

유교를 배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어디에 가서 태어납니까?

→ 역시 하늘나라 천계(天界)에 태어납니다.

 

★ 선생은 그 뒤에 어찌하여 저승판관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 내가 원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고,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휴직하기를 빌었지만

번번이 모두 허락을 받지 못했었는데 그 뒤에 동사자들이 주문을 많이 외우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 법대로 시행했더니, 그 공덕이 쌓여 2천 번 이상이 찼기 때문에 드디어 다시는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선생은 평소에도 늘 귀신을 볼 수 있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으로 있을 때에는 귀신을 호출했을 때나 안했을 때를 막론하고 늘 귀신을 볼 수 있었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초 이후부터는 귀신을 보는 것이 점점 적어지더니, 중화민국 10년 이후에는 완전히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맨 처음 저승판관으로 들어오라는 것을 어떻게 통지 받았습니까?

→ 어느날 밤에 꿈 속에서 옛 의관을 단정히 갖춘 한 사람이 찾아와서 내 방으로 들어서서 이르기를

"중대한 일이 있어서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하니 수고스럽겠지만 바쁜 일을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가 어떤 일을 위임하려는 지는 모르나, 다만 내 힘이 모자랄까 두렵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제발 윤허만 해준다면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기에,

나는 그가 본 뜻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직 그의 예의바른 용모가 단정하고 공경하며,

그 태도가 지극 정성 간절하여 정의상 차마 물리칠 수가 없어서 마침내 묵묵히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약속한 수일 내에 곧 모시러 오겠노라고 다짐하고 드디어 이별하였습니다.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내 자신 속으로 한낮 꿈이라 여기고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드디어 4~5일이 지난 뒤에,

꿈 속의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내게 일러 말하기를,

 

 "지난번의 승낙해주신 은혜를 받잡고 특별히 가마를 준비하여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고 왔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내가 보니까 말 한 필의 수레가 문밖에 매어 있어서

드디어 함께 수레에 올랐더니 얼마 안가서 어떤 관아(官衙)에 이르렀습니다.

 

수레에서 내려서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 사람이 나를 인도하여 한 행랑방에 이르러

자리에 앉은 지 조금 후에 바로 대청마루에 올라 안건을 심리하도록 청하였는데,

한 범죄인을 끌어다가 놓고 좌우배심원들이 원안을 진술하여 주면서 나에게 판결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본래 이의 설정을 모르는데 어찌 감히 망령되이 판결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거절을 하니,

좌우 배심원이 이르기를,

"그대가 성심(誠心)으로 미루어 헤아려 보면 그 의사가 어떠한지를 곧 법에 비추어 징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기에

 

내가 잠깐 자세히 생각해보고 이르기를 "이러 이러한 것이냐"고 했더니, 좌우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곧 나에게 판결문에 서명하도록 하고 죄범을 끌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마차로 나를 돌려 보내주었습니다.

 

★ 선생의 부모님도 이 사실을 아셨습니까?

→ 내가 저승 판관이 된 최초에는 그 비밀을 잘 보전하려고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었는데,

그 뒤에 부모님이 내가 빈 방에 혼자 있으면서도 간간이 사람과 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차차 그 실정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대개 내가 저승판관이 된 뒤부터는 항상 저승친구들의 왕래가 있었는데

오직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들을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은 모두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직 나의 말만을 들었었지요.

 

★ 저승친구들이 올 때에는 역시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초대합니까?

→ 아닙니다. 다만 맑은 차 한 잔이면 이미 그 정을 다하는 데 족합니다.

★ 저승에서도 염불하면서 수행하는 자가 있습니까?

염불을 하고 송경(誦經)을 한 사람은 이미 이런 공덕이 있는데,

저승의 모든 귀신들이 어찌 빨리 염불 송경을 하여 지옥에서 벗어나서 천당으로 오르기를 구하지 않습니까?

→ 한 번 저승에 도착하면 바로 그의 업력(業力, 살면서 지은 죄와 공력)에 가로 막혀서 자연 그 염불하고 주문을 읽을 줄 모릅니다.

어찌 살아있을 때 수행공부를 등한히 하겠습니까? 이는 세상 사람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이치입니다

즉 사람들이 주문을 외어도 저승에 간 사람들은 업력에 가로 막혀서 보고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수행은 마땅히 살아있는 이승에서 해야 업력(業力)을 쌓아 낼 수 있습니다.

 

귀신은 이미 형체가 없는 것(無形)을 볼 수가 있고 소리가 없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우리들의 염불 수행하는 것은 도리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까?

→ 자기의 업력(業力)에 가리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들면,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영국 사람의 얘기를 듣는다 할지라도 그 뜻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세간의 어떤 사람이 본래 신앙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우리들의 주문 수행을 보고 듣는다 하여도

역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곧 그로 하여금 우연히 보고 듣게 하여도 신심(信心)이 일어나지 않고, 마침내 수행하지도 않고 주문을 읽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