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진실의 역사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한국에는 어찌 보면 진정한 보수가 없다.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주세력은 친일파였고 그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내내 친미주의자로 전향되었다.

일본은 자신의 고유정신에 기초하여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고유문화에 기초해 선진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우리의 전통가치를 멸시하고 배척하였다.

외세를 등에 업은 사대주의 세력들은 우리 전통가치를 미신과 근대화란 미명하에 쌍그리 부셔버렸다.

정의보다는 개인적 시세의 이로움에 밝은 이들에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묘청의 난 이후 사대주의자들이 천년 역사의 대권을 잡으면서 우리고유의 정신문화, 역사문화는 무시되고 처절히 파괴되고 말았다.
  
일제 침략기를 거쳐 해방이후 한국의 주요 권력을 잡은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친일행위를 철저히 숨기고 조선인 800만이 학살된 일제시대를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우리선조 8백만이 무참히 살육되고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해방된 조국에서 왜 그들의 역사학을 고수하려하는가.

자신의 민족을 무능하다고 비하하고 가해자를 찬양하는게 말이 되는가.

이는 자기 집안에 도둑이 들어서 강제로 훔쳐간 것을 재산을 간수 못해서 뺏겼다고 하는 것과 같다.

 

뉴라이트는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을 하기까지 한다. 그도 그럴만하다. 역사와 전통가치가 파괴된 한국인에게 외세 식민사대사상이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기때문 아니었겠는가. 한국사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외세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한국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지금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일제에 의해 한번 죽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지만 부일세력이 주권을 잡으면서 오히려 정부의 위정자들에 의해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들의 명예와 신원은 아직도 복원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이런 나라에 위기가 온다면 누구나 나라를 위하는 것보다는 기회주의자가 되어 매국노 편에 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란 것을 국가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의를 바로 세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근원적 사건은 단재 신채호의 지적처럼 묘청의 난 이후 유교 사대주의자들이 국권을 쥐면서 우리 스스로 유교이념에 어긋난다고 한민족 정통역사와 문화를 이단과 사문난정으로 몰아버렸기 때문이다.

유교 국시인 조선시대 세조, 예조, 성종 때는 사서수서령이 내려지고 우리 고유사서를 소장하면 목을 벤다고 왕명을 내렸으니 누가 우리 역사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조선중기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친명 사대사상은 더욱 고착되고 이 사대주의자들이 결국 나라를 일본에 파는 매국노가 된다.

 

결국 명이 강하니 명에 붙었다가, 일본이 강하니 일본에 붙고, 미국이 강하니 미국에 붙으면서 물타기로 천년의 권력을 누리면서 강건한 선비정신의 국풍파 민족주의자들을 정치적 정적으로 몰아서 숙청한 것이다.

사대파와 국풍파의 천년전쟁 중이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장 정채산의 명언처럼

"나는 다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입니다.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 위에 올릴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독립군은 시세의 이로움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쉬운 길을 선택했어도 됐을 것이다.

남들이 왜 그리 험난한 길을 가냐고 할 때도 그들은 그런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안중근의 명언인 見利思義처럼 말이다. 이익을 볼진대 의로운지 생각을 하라.

그러나 친일파는 그렇지 못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국난의 위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얼룩진 반역의 역사를 매듭 짓고 고유의 민족역사정신에 기초한 민족 대화합과 한민족 통일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사대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영원히 사대주의를 지향할 수는 없다.

이제 100년의 일제의 잔재를 떨고 분연히 일어날 때이다. 결국은 자주 독립국가로서 역사와 문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진실의 역사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고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시대가 개막되었다.

이어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그 당시 국제적인 정세를 보아 한민족의 운명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3년간 한국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분단은 더욱더 골이 깊어져 쉽게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현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친미적인 단독정부를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 민중으로부터 가로챈 과거 일본인 재산을 고스란히 친일파와 이승만 정부에 넘기게 된다.

친일 경력을 소유하고 있던 대다수 친일파들이 해방 후 골수 친미파로 전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였을 적에는 한결같이 열렬한 반미투사로 활약하던 자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 정부 수립과정에서 가장 큰 과오는 친일 매국노 청산을 하지 않고 등용함으로써 후에 한국사가 불의의 역사가 전개되도록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기득권을 획득하면서 오히려 친일역사를 옹호하고 합리화해갔다.

특히 역사부분에서는 친일 식민사관은 세계보편주의 사관으로 둔갑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학자들의 역사관은 “국뽕”이나 “환빠”라는 모멸을 당하면서 사이비 역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비방하는 재야사학•민족사학에서도 환국•배달의 역사까지 교과서에 들어가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사료나 유물 검증이 가능한 단군조선사는 복원해서 가르쳐야 한다.

특히 단군조선에 대한 사료는 충분히 고증이 가능한데도 오히려 단군조선을 고증하는 사료나 유물이 나오면 이들은 상투적으로 “학계에서 교차검증결과 위서나 위증으로 판정 났다.” 라고 확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언론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

이들이 사료를 부정하는 방법은 유물고증이라는 방법인데 그 유물도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그 시대 유물이라는 확실한 고증도 되지 않은 것이 부지기수임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제국주의 친일사관이 더 세계주의 사관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 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미,소,중,일 같은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고유의 역사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역사관을 정립했던 것일까.

유대인들이 인구수는 적어도 전 세계의 모든 분야를 장악한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바로 그들의 뿌리역사를 철저히 가르치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 고난을 이겨온 조상들의 삶과 지혜, 신앙의 힘에서 희망을 품고 미래를 열어나가기 때문이다.

과거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통일한국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위해서 반드시 식민역사관은 반드시 털어내야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진 주권국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식민사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과거의 강대한 역사와 찬란한 역사가 21세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의식 속에는 통사적 역사가 단절돼 있다. 이런 자들이 역사학자를 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고 뿌리 없는 식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들은 자신들의 식민사관이 무너질까봐, 자신들만의 학문 카르텔을 형성하고 온갖 언론매체를 통해서 민족사학을 죽이기에 여념이 없다.

『아시아 이상주의』 저자인 이홍범 박사는 이런 한국의 식민사학계를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한국은 한국 사람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상당수 식민사학자들이 왜 사사건건 한민족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신화고 위서다 ’라고 합니다. 국수주의라고 말합니다.

자기 민족의 역사 파괴를 합니다. 유대인은 역사정신 권력을 가지고 위대한 유대역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그러기 위해서 대학에서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권력, 독립을 가르치는 길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사학은 친선 한일을 통해 간접, 직접적으로 역사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강단의 식민사학계열을 연구해보면 한중일간의 학문교류, 한일 친선, 한중 친선, 종교사랑 실행, 아름다운 용어를 사용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우리 학계와 역사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강단의 식민사학 학계가 얼이 빠져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국이 되려면 역사가 독립이 돼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지배하지 못하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강단식민사학계가 그동안 뭐를 했냐. 이겁니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국가 민족의 번영의 문제이기 때문에 용기 있는 역사혁명의 횃불이 필요합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친일반미투사에서 친미분자로 변신하는데까지는 그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필요치 않았다.

익히 알다시피 해방직후 친일파들은 그들의 엄청난 죄과로 인해 민중의 엄청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은 파산 상태에서 이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미군의 진주덕분이었다.

미군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친일파들을 건져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미국의 반공노선에 적극 협조하면서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세탁하게 된다.

 

오늘날 뉴라이트는 김진홍 목사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기위해 보수기독교 단체를 주동으로해서 결성한 단체다.

일제강점기가 “하나님이 준 축복이다”라고 하여 오히려 김구, 안중근, 신채호, 윤봉길,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제국주의 질서를 흔든 좌파세력 내지 테러리스트로 비하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조국은 일본이었던가 보다.

오직 자신들의 논리와 다르면 빨갱이와 좌파로 모는 극열분자들의 뿌리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민족반역자들이었던 이들이 해방 후에 친일 청산이 되기는 커녕 반공노선에 합류하면서 수많은 민중과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좌파로 몰아서 숙청하고 이승만 정부의 개국공신으로 둔갑을 했다.

이들은 오로지 사리사욕에 의해서 미국을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들을 계속 자신들의 주위에 거느린 채 충성스런 하수인으로 부려먹기 위해 이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적당한 권세와 부를 안겨다줌으로써 이들을 구워삶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서로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이로부터 부정부패가 이들 매국노 집단의 본격적 속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권력 있는 자리는 미국으로부터 던져지는 온갖 특권을 가장 손쉽게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정부패와 권력이 결부되어 출세를 위한 경쟁이 더욱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장기집권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은 이러한 부도덕성을 바탕으로 했기에 당연히 온갖 불법과 사기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정의 세력에 대한 폭력 깡패의 고용과 유권자 매수가 서슴지 않았고, 유세장은 폭력배의 기습을 받아야 했다. 자신들의 부패와 불의에 항거하는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교사한 운동이라고 매도를 하였다.

이승만은 시민들의 불의에 대한 항쟁을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기회를 주는 것이니 거기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신의 잘못은 고칠 생각이 없었다. 항상 잘못은 민중의 몫이었다. 폭력으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고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폭발을 하자 미국은 표면에 드러난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기로 작정하고 이승만의 사임을 종용한다.

이승만 정권에서 오직 침묵과 굴종만을 강요받았던 이 땅의 민중들은 얼어붙었던 가슴을 뜨거운 투쟁의 열기로 녹이며 저항의 기세를 높여갔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유와 인권을 향유하는데에는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민중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반성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과거가 어찌 되었던 한국현대사가 걸어온 길이었다. 한민족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역사의 인물도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보는 성숙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교훈 삼아서 미래에는 정의의 역사를 지향해야 한다.

역사가 플럼J. H. Plumb은 『과거의 종말The Death of the Past』에서 “과거의 착취와 구속력에 대한 해방 선언이 과거의 종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왜곡된 과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바로잡힐 때, 그리하여 진정으로 과거의 종말이 올 때, 오늘의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바르게 보고 희망찬 미래를 창조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송나라의 황정견

서프라이즈

송나라의 황정견
송나라의 황정견이라는 사람은 자가 '산곡'으로 더 알려진 인물로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이라 불리우고 소동파 등과 같이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입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26세가 되던 해에
어느 고을에 부임을 하여 갔는데 낮잠을 자다가 바깥으로 나가는 꿈을 꾸면서,
한참을 걸어서 어느 집 앞에 당도하니 노파 한사람이 나와서  

집 앞에 차려 놓은 상에 향을 피우고 죽을 한그릇 놓고 무어라 기도를 하는 듯 하더니 집으로 들어 갑니다.

   

그는 한눈에 그것이 맛있는 미나리 죽임을 알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먹어 버리고 돌아 왔다가 꿈을 깹니다.

산곡은 아직도 미나리 향기가 입안에 남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다음 날 다시 낮잠을 자다가 똑같은 꿈을 다시 한번 꾸게 되어서

깨고 난 다음 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관아를 나가 보니,
낯익은 길거리처럼 자신의 발걸음을 인도하는데 얼마를 가 보니 정말로 자신이 미나리 죽을 얻어 먹은 똑같은 집에 이릅니다.

   

문을 두드려 사람을 찾으니 머리가 하얀 노파가 나오는데 

"혹시 어제 미나리 죽을 쑤어 밖에 내놓지 않았는가?" 무슨 일로 그러는가 물으니,

노파는 내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 열심히 불법을 숭상하고 채식을 하며 특히 미나리 죽을 좋아하다가
아깝게 26년여 전에 돌아 갔기에 바로 어제가 그 제사 날인지라,

아이가 가면서 하는 말이 "멀지 않아 다시 만나요"하고 간 것이 생각나 제사날이면 그렇게 미나리 죽을 쑤어 거리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황산곡은 이상하여 노파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니 딸이 사용하던 궤짝이 있는데,

노파는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두었다 하는 소리를 듣고

산곡은 문득 열쇠가 어디 있음을 생각하고 찾아내 궤를 열어 보니,

그 안에는 딸이 썼다던 시문이 가득한데 하나 하나가 다 황산곡이 시험을 볼때마다 답으로 적어 낸 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황산곡은 자신의 전신이 노파의 딸이었음을 알고 노파를 자신의 처소로 모시고 돌아 가실 때까지 잘 봉양합니다.  

후에 정자 하나를 지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승려같으나 삭발하지 않았고, 속인인듯 하나 이미 속세를 떠났네.
꿈 속에서 또 꿈을 꾸고 나서야 이 몸 이전에 또 몸이 있었음을 깨달았네."
하고 화제를 써 놓았다 합니다.

   

또 산곡은 늘 참선을 하고 채식을 하며
사람들에게는 살생을 금하는 게를 지어 널리 알리니 이와 같습니다.

   

"내 육신과 다른 중생의 고기는 이름만 다를 뿐 바탕은 꼭 같네.
원래부터 동일한 성품이건만 다만 형상이 다를 뿐이로다. 

저들이 받는 모든 고통은 내가 맛있는 것 탐하기 때문이니,
그 과보를 어찌 염라대왕에게 물을 필요 있으랴.
본인 스스로 생각해 보면 알겠거늘."

(송나라 때 황정견[黃庭堅]의 글씨, 자서송풍각시[自書松風閣詩] 부분)

숙종에게 붙은 역질신명을 물리친 김응하 장군신명

서프라이즈


숙종에게 붙은 역질 신명을 물리친 김응하 장군 신명 

명의(名醫)와 역질 신명과의 한판 대결
  

당시 명성이 자자한 어느 의원이 있었다. 
하루는 그 의원과 각별히 지내는 제상의 외아들이 병에 걸렸다.
물론 그가 약을 쓰게 되었는데, 진맥을 해보니 불행히도 역질 신명에게 잡혀갈 아이였다. 
원래가 편작과 같은 재주를 가진 의원이라 약을 잘 써서 아이를 구하려고 하였다.  

역질 신명은 밤낮으로 어린아이에게 병 기운을 넣어 잡아가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의원의 신이한 의술로 인해 그때마다 어찌할 수 없이 물러가게 되었다.
“네가 재를 부려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방해하는구나! 그러면 나도 나의 수단대로 너를 꺾고야 말 것이로다.”
“허, 좋을 대로 해봐라.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의원도 역질 신명의 농간에 조금도 물러섬 없이 병자를 살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에 크게 노한 역질 신명은 고심 끝에 의원을 없애기로 하였다. 
그 의원을 항상 불러들이는 임금을 병들게 하면, 그 책임을 물어 의원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작정을 한 역질 신명은 그 길로 지체없이 대궐로 향했다. 당시의 임금인 숙종에게 역질 기운을 넣어버렸다.


평소 건강하던 숙종은 갑자기 신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높은 열에 시달렸다. 
숙종은 그만 시시각각 위중한 상태에 놓였다.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약을 바쳤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다. 
이름 높은 의원들이 진맥을 해보니 역질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그들이 약을 써봐도 효력은 커녕 병세가 점점 더하여 갔다. 
급기야 제상의 아들을 치료하던 그 의원을 불러들였다.
 
의원은 신명의 조화임을 당장 알아챘으나 이번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좀체 궐 밖을 나올 수도 없었다. 
임금의 곁을 조금이라도 뜨는 때에는 임금의 환후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재상의 아들 병세를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의원은 지혜를 내어 열 발자국 간격을 두고 사람 하나씩을 세워 놓고

그가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재상의 아이 병세를 연락하게 하고 약 처방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말이 오가는 동안 시간이 지체되어 제때 처방을 못 받은 재상의 아들은 급기야 죽고 말았다. 
 
역질신명을 물리친 장군신명
  

숙종의 병세도 점점 더해 가기만 했다. 
숙종이 눈을 감기만 하면 역질 신명을 비롯한 여러 잡귀들이 몰려와 괴롭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고통 속에 지내던 어느 날, 숙종은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전날까지도 날뛰던 잡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문 앞에 어떤 장수가 철모와 갑옷을 입은 채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숙종은 잡귀들이 보이지 않자 너무나 기뻤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장수를 불러 물었다.
“너는 누구냐?”

“요동백 김응하입니다. 소신은 상감께서 환후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잡귀들이 들끓는 것을 보고 놈들이 못 들어오게끔 막고 있습니다.”
김응하라는 장수신명은 이렇게 아뢰며 예를 갖춰 몸을 숙이는 것이었다. 
 
요동백 김응하는 조선 선조 때 출생하여 광해군 때까지 나라의 일을 하던 장수다. 그는 강직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만주 땅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에서는 조선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김 장군이 조방장으로 나가 싸워서 용맹을 떨치다가 결국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가 일찍이 역병에 걸려 위중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그의 벗이 약을 가지고 김 장군의 병상에 이르니, 장군은 열에 이끌려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벗은 훌륭한 장군이 병으로 헛되이 죽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가 일찍이 나라 일을 하다가 싸움터에서 죽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되니 누가 그대를 알아주겠는가!”
이 말을 들은 장군은 별안간 눈을 번쩍 부릅뜨고 소리질렀다.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로다. 어서 약을 가져오라!”

김 장군은 그 자리에서 약을 세 사발이나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내 쾌차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생전에 역병을 물리친 바 있는 김 장군이 이런 연유로 하여 역병에 걸린 숙종에게 나타났던 모양이다. 
그 후부터 숙종이 잠들면 어느 때나 김응하 장군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니 어떤 잡귀도 침범하지를 못하였다. 
숙종은 침식이 편해졌고 병세도 차츰 차도가 있었다. 숙종은 오래지 않아 쾌차하였다. 
 
이후 숙종은 그 보답으로 김응하 장군을 모신 충렬사에 사람을 보내어 정성껏 제사드리게 하고 따로 온정을 베풀었다. 

참고자료
대동기문(강효석 편, 명문당)
철원군청 홈페이지
 

<사람마다 신명이 호위하여 있다>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器局)에 따라서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신명이 호위하여 있나니

만일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여

제 일에 게으른 마음을 품으면 신명들이 그에게로 옮겨 가느니라.

못났다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보호신도 떠나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일심으로 하라. 일심하지 않으면 막대기에 기운 붙여 쓸란다.” 하시니라. (道典 4:154)


<모든 병이 생기는 근원은?>

한 성도가 여쭈기를

“매양 병자를 보시면 차마 그 아픔을 보지 못하시어 몸소 대속하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병은 척(隻)이 있어 생기고 수(數)가 있어 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척을 풀어 주지 않으면 척으로 돌아가고

수를 제거하여 주지 않으면 화액(禍厄)으로 돌아가나니

내가 병고(病苦)를 대신 앓게 되면 척은 스스로 풀리고 수는 자연히 소멸되느니라.

내가 천하의 모든 병을 대속하리니 그러므로 후천에는 억조창생에게 병고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9:87)

현몽으로 임진왜란을 막은 이순신

서프라이즈

현몽으로 임진왜란을 막은 이순신 - 이순신 장군과 신명(神明)에 관한 이야기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신도(神道)로써 다스리면 현묘불측(玄妙不測)한 공을 거두나니

이것이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道典 4:5:1)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거북선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한산대첩, 명량대첩 등에서 뛰어난 전법이 승리의 주요 원인이었다.

거북선 고안에서부터 전략 전술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과 지혜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꿈에 거북을 보고 거북선을 고안하다.

 

신묘(辛卯 1591)년 47살의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오른다.

이순신은 왜침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춘다.

특히 거북선을 제조하여 전쟁에 대비한다.

어느 날 이순신은 나랏일로 고심하다가 잠이 드는데, 이 때 거북선 고안의 단초가 되는 신기한 꿈을 꾼다.

나는 병사들에게 먹일 식량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무척이나 먼 곳까지 노를 저어 왔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거대한 거북이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식용으로 쓸 요량으로 거북을 잡기 위해 화살과 무기를 총동원했다.

그러나 노력도 헛되이 도무지 내 손으로는 거북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거북의 입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왔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이순신은 거북 모양으로 생긴 특수한 전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거북선은 두꺼운 나무판을 높히 이어 붙인 다음 그 위에 튼튼한 철갑을 둘러 만들어졌다.

또 거북선의 뱃머리는 용머리처럼 생겼는데, 그곳을 통해 대포가 발사되고 유황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임진(壬辰, 1592)년 5월, 사천해전이 발발하기 이틀전의 일이다.

5월 27일 밤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이순신은 신비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신령님 같은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외쳤다.

“일어나라! 왜적이 나타났다.”
이순신은 벌떡 일어났다. 이 때, 경상우수영으로부터 도와달라는 급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5월 29일 새벽,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함대는 사천을 향해 기운차게 진격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3일간의 해전 끝에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한다.


노모의 죽음을 알리는 꿈을 꾸다.

정유(丁酉, 1597)년 1∼2월에 일본은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해온다.

정유재란이 발발할 즈음 이순신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파직 당한다.

 

서울로 잡혀 올라온 이순신은 옥에 갇혀 한 차례 고문을 받는다. 다행히 풀려나지만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이끌려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남 합천의 초계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던 차에 순천으로 피란갔던 83세의 노모가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끝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한다.
 
노모가 숨을 거두던 그날, 이순신은 불길한 꿈을 꾼다. 그리고 이틀 후 부고를 듣는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4월 11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 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4월 13일〕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이순신은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다.

그러나 조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순신은 또다시 꿈을 꾼다. 그리고 꿈속에서 죽은 형님들을 만난다.
 
〔5월 6일〕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냐?

통곡을 하더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 전술을 알려주다.

후임 통제사 자리에 올랐던 원균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한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자 이순신은 8월 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장군은 9월 16일 겨우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

서해로 향하는 133척의 일본전선을 명량해협(울돌목)의 거친 물살을 이용해 대파한다.
 
명량대첩 직전에 이순신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꿈을 두 차례 꾼다.

신령스럽게도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적군의 행적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술을 예지해 주었다.

 

이순신은 꿈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또 꿈에서 계시 받은대로 실전에 임한다.

그리고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은 당시의 상황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9월 13일〕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임진년 승전했던 한산대첩 때 꾸었던 꿈과 흡사하였다. 이는 무슨 징조일까?

 

〔9월 15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꿈에 신령스런 분이 나타나서 이렇게 진을 치고 저렇게 군사를 배치하면 크게 이길 수 있으나 달리하면 질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9월 16일〕 곧바로 명령을 내려 적장 ‘마다시’를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조선의 형세가 누란(累卵)과 같이 위급하다보니 아마도 천상의 조선신명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었나보다. 
그리고 충심어린 이순신에게 조선을 구할 묘책을 계시한 모양이다.

즉, 국난이 닥치자 천상의 신명과 지상의 인간이 함께 역사하여 이를 수습한 것이라 판단된다. 
 

〈참고서적〉
이순신의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디어더 배럿의 『꿈은 알고 있다』 (나무와 숲, 2003)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 처음 보이며, 이후 이순신에 의해 철갑선으로 개발, 창제되었다.

거북선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왜란 발발 한달 전인 1592년 3월 27일, 장계(狀啓, 지방관원이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5월 29일 사천해전이라 하였다.

 

거북선은 최초의 돌격용 철갑선으로 서양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섰다.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War Memorial Museum), 영국 해사박물관(Maritime Museum),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송구봉의 ‘구선도’를 보고 거북선을 제조하다.

 

이순신의 거북선을 둘러싸고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순신에게는 송구봉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그는 비록 서출이었지만 학식과 인품이 높아 많은 이들이 따랐다.

 

이순신이 12,3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송구봉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밤에 송구봉의 집에 갔는데, 그는 방에 누워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순신은 송구봉의 방에서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송구봉이 묵언으로 교지한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이순신은 여수 수사로 와서 여수 둔덕재의 솔을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구봉에게 다시 가서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구멍은 사청목(巳聽目)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
 
송구봉이 비범한 인물임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구봉(龜峰)이란 호의 거북 구(龜)자가 이순신의 거북선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한데는 이처럼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위험에 처한 이항복을 구한 조상신 이제현

서프라이즈

위험에 처한 이항복을 구한 조상신 이제현

 

이항복이 태어난 지 1년이 되기 전 어느 날이었다.

유모가 우물 가까이 가서 그를 땅 위에 놓아두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때 어린 항복이가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이내 우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 때 유모의 꿈에 수염이 희고 얼굴이 긴 한 장부(丈夫)가 나타나, 지팡이로 유모의 정강이를 탁 치면서 꾸짖었다.

 

유모가 몹시 아파서 화들짝 꿈에서 깨어보니, 저만치에서 항복이 우물로 막 들어가려는게 아닌가.

냅다 쫓아가서 항복이를 얼른 붙잡았다. 이렇게 하여 간발의 차이로 항복이는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유모는 꿈에서 차인 정강이가 실제로 여러 날 아파서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집안에 제사가 있어 방조(傍祖) 이제현의 영정을 대청에 걸어놓게 되었다.

그런데 유모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서 외쳤다.


“앞전에 제 정강이를 때린 이가 바로 저분이옵니다!”
이삼백년전 조상인 익재 이제현 선생이 한참 후손인 이항복을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모든 선령신들이 발동(發動)하여 그 선자선손(善子善孫)을 척신(隻神)의 손에서 건져 내어

새운수의 길로 인도하려고 분주히 서두르나니, 너희는 선령신의 음덕(蔭德)을 중히 여기라.

선령신은 그 자손줄을 타고 다시 태어나느니라. (道典 7:19:4∼6)

현대과학은 신명(神明)의 알음귀-화학자 케쿨레

서프라이즈


현대과학은 신명(神明)의 알음귀로 열렸다

 

신이 정말 있나요? 


꿈에 [벤젠]의 분자구조를 본 화학자 케쿨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道典 2:30:6∼8)
 
오늘날의 찬란한 문명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명의 합작품이다. 

역사적으로 전해지는 재미있는 일화를 통해, 천지신명들이 인간의 꿈이나 사색의 영역으로 찾아와서

열어주는 알음귀 덕택에, 지난 수백년 동안 인류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케쿨레는 1990년 독일 화학학회에서 강연의 요지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꿈꾸는 법을 배운 다음에는 우리도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케쿨레는 그 강연에서 두 가지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가지 꿈 모두 두 가지 주요한 과학적 성과의 토대가 되었다. 

첫 번째 꿈 이야기
런던에 있을 때, 나는 주로 클레팜가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런던 정반대 편에 살고 있는 친구 휴고뮬러와 저녁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얘기들을 나누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화학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어요.

그날도 그 친구 집에 갔다가 마지막 버스를 타고 인적 없는 도시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잠시 몽상에 빠진 듯했는데, 글쎄 내 눈앞으로 원자들이 튀어 오르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작은 두 원자가 어떻게 서로 한 쌍으로 결합되는지, 더 큰 원자가 작은 원자를 어떻게 둘러싸는지,

훨씬 큰 원자들이 작은 원자들을 어떻게 세 개, 혹은 네 개까지 둘러싸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나의 옛 스승 코프가 나타나 멋진 설명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장이 “클레팜가”라고 외치는 소리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보았던 그 형태들을 밑그림으로라도 그려 놓으려고 밤잠을 설치며 매달렸습니다. 
 
케쿨레는 “이것이 바로 ‘화학 구조 이론’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하면서,

탄소가 다른 원자들과 결합되는 방식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이는 현대 유기화학의 기초가 되었다.


어느 덧 7년이 흐른 후, 케쿨레는 [벤젠]의 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다른 화학물들과 달리, [벤젠]의 구조는 기존의 화학기호 체계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독일 화학학회 강연에서, 케쿨레는 그 문제 해결과 관련된 두 번째 꿈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었다.

두 번째 꿈 이야기

벨기에의 헨트에 있을 때였지요. 내 방 창문은 좁은 골목으로 나 있어 낮에도 햇볕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교재를 써보겠다고 앉아 있었지만,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지요. 나는 난로 쪽으로 의자를 돌려놓고 잠깐 눈을 붙였어요.
 

그때 또 다시 내 눈앞에 원자들이 나타났어요. 

 

이번에는 작은 원자 그룹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지요.

몇 겹으로 겹쳐진 배열 구조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원자들이 가까이 달라붙어 짝을 지어 꼬여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뱀 한 마리가 제 꼬리를 물고는 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번갯불이라도 지나간 듯 화들짝 놀라 깨어났지요.

이번에도 역시 그 가설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밤새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케쿨레는 [벤젠]의 분자는 직선으로 연결된 사슬 구조가 아니라 고리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그는 이밖에도 원자를 직접 눈으로 본 경험이 많았다고 했다.

눈을 감고 있거나 아니면 졸고 있는 상태에서 늘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에두아르드 파베르는 1996년 케쿨레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꿈이나 환영을 하찮은 것으로 비웃어 넘기지 말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이는 현대 화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꿈에 아인슈타인과 연구활동에 전념한 어느 공학자

스티븐 레버지 교수는 한 컴퓨터 공학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공학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문제가 막힐 때마다 꿈에 의지해서 문제를 풀어보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밤에 셜록 홈즈 시대에나 있을 법한 구식 응접실에 앉아 있는 꿈을 꾼다.

덥수룩한 백발의 아인슈타인과 나란히 앉아 있다.

꿈에서 그는 나의 친절한 친구로 나온다.

 

우리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흑판에 컴퓨터 플로차트(flowchart)를 그린다.

훌륭한 성과가 나오면 서로 마주보고 웃음을 짓는다.

아인슈타인은 “나머지는 역사에 맡겨 두지”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잠을 자러 가야 한다고 양해를 구한다.
 

나는 그의 안락의자에 앉아 노트에 컴퓨터 코드를 이리저리 그려보다가, 마침내 하나의 코드를 완성한다.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혼자 읊조린다. “깨어나서도 이 플로차트를 기억해 내고 싶다.”

나는 흑판과 노트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그런 다음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나는 시각은 보통 새벽 3시 30분 정도다.

나는 베개 밑에 두었던 손전등을 꺼내 침대 옆에 놓아 둔 노트에 최대한 빨리 옮겨 적는다.

나는 프로그램을 짤 때마다 이 방법을 썼으며, 대부분 99퍼센트의 정확도를 보였다.

출처 : 『꿈은 알고 있다』 디어더 배럿, 나무와 숲, 2003

 

 

루스 몽고메리가 전해주는 '알음귀'에 대한 이야기

미국의 저명한 여성 저널리스트 루스 몽고메리의 저서 중에서 알음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소개한다.
 

“아인슈타인이나 오펜하이머 등은 그곳(지상)에서는 천재로 간주되지만 이곳에서는 물리학에 소질을 지닌 아주 진보한 영혼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상에서 육체 상태로 있을 때 이곳 영혼들의 도움을 받아 기적처럼 보이는 일을 성취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220쪽, 초롱, 1999)
 

“어떤 사람들은 수면상태에서만이 아니라 깨어있을 때도 자주 영혼들로부터 생각이나 암시를 받아들인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영감이 돌파구를 찾게 해주고, 바로 곁에 있는 새로운 도구나 책에서 멋진 해결책을 찾아낸다.

졸 때나 수면 중의 잠재의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의식적인 마음에도 영감이 스며든다.

지상의 문제들에 대한 대부분의 해결책은 이곳(천상)에서 그 문제에 종사하는 영혼이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를 파괴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는 것은 육체적 인간들이 한 짓이지 영혼이 한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273쪽, 초롱, 1999)

전생과 윤회, 업(카르마)

서프라이즈

전생과 윤회 그리고 업(카르마)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 하나…" 

TV에서, 혹은 주위 어른들로부터 가끔 듣는 말이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전생과 어떤 연관이 있길래 이런 얘기를 해 온 것일까?

 

전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사람은 정말로 윤회를 하는 것일까?

윤회를 한다면 나의 전생이 지금의 내 생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윤회를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윤회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여러 책들에 소개된 전생 체험 사례를 통해 전생과 이생의 관계, 윤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윤회'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를 떠올린다. 하지만 윤회는 불교 문화권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니다.

현세와 영계와의 관계에 관한 기술은 고대로부터 수없이 있어 왔다.

 

죽음과 영계에 관한 기록의 원전으로 꼽히는 것이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바르도 퇴돌』인데, 바르도는 삶과 삶 사이의 세계 즉, 중간세를 말한다.

바르도 퇴돌은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삶과 죽음, 사후의 세계, 환생과 해탈의 문제를 그 어떤 고대의 가르침보다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오직 단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생과 사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에서는 '죽음을 배우라. 그래야만 그대는 삶을 배울 것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인도의 우파니사드(힌두교 경전인 『베다』에 실린 성전(聖典)으로 고대 인도의 신비적 철학설을 담고 있다)에도 온갖 윤회설이 설명되고 있다.

 

 

 

기원전 5∼6세기의 그리스 철학에서도 윤회사상을 주장하고 있는데,

플라톤은 '영혼은 불멸하고 인간뿐 아니라 동물로 바꾸어 태어나고, 전세로부터 현세 그리고 내세로 유전한다'고 했다.

윤회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8세기의 학문적 거인(巨人)이며 불가사의한 인물이라 불리었던 스웨덴보르그

육체를 이 세상에 두고 영으로서 영혼의 세계를 출입하여 영계에 대한 많은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2년에 실시한 갤럽 여론 조사는 미국인의 67%가 죽음 이후의 삶을 믿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정신의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브라이언 와이스(Brian L. Weiss)

자신을 찾아온 환자를 통해 우연히 윤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전생요법을 통해 윤회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캐나다의 저명한 의학박사인 조엘 L. 휘튼도 전생요법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윤회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죽음 이후의 세계, 영혼의 세계를 증언하고 있는 영매자들도 무수히 많다.

국내에서도 김영우씨가 쓴 『전생여행』이라는 책이 한때 윤회에 대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김영우씨는 신비가, 영매, 소설가가 아니라 신경정신과 전문의이며, 의학·심리학 박사, 미국임상최면학회(American Society of Clinical Hypnosis)의 교육자문위원(Approved consultant), 공인 최면치료사(Certified Hypnotherapist)이다.

 

고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윤회에 대한 믿음은 계속되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싶으면 자신의 현재의 삶을 보라.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자신의 현재를 보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은

전생과 이생과 내생이 긴밀한 관계로 이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전생퇴행(최면을 통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림)을 통해 전생을 봄으로써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적 요인, 자신이 앓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결함이나 질병 등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본질적인 그 원인을 알게 됨으로써 오랜 지병이 자연스럽게 치유되기도 하고, 성격적 결함이 고쳐지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개선되기도 한다.

 

전생에 관해 기록한 책에 실린 몇 사례를 소개한다.

비행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세 아이의 어머니는 전생퇴행을 통해 3000년 전의 자신의 행위를 보았다.

최면 상태에서 그녀가 본 것은 중앙아메리카 마야문명 사회의 종교 지도자인데 그것이 당시의 자기 모습이었다.

그 무렵 그녀는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그들을 희생물로 바치는 일을 즐겼다.

오늘날 그녀는 일찍이 자기가 남들에게 떠 안겼던 사별의 슬픔을 자신이 다시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엘 L. 휘튼·조우 피셔, 도서출판 기원전

 

어려서부터 중국을 무척 싫어했고, 중국을 생각하면 왠지 무섭고 혐오스러움을 느끼는 A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에 대한 간섭이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

그리고 그는 성적인 충동을 참다보면 자신이 여자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최면상태를 통해 전생을 보니 그는 23살의 여자가 다 찢어진 옷을 입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주위의 건물은 불타고 그녀는 두 명의 청나라 병사들에게 능욕을 당하려 했다.

그 뒤 그녀는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일찍 죽고 한 아이도 전쟁에서 잃어버렸다.

청나라 병사에게 강간 당한 것 때문에 동네에서 화냥년이라는 소리를 들어 결국은 집을 나와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생을 마쳤다.

 

최면에서 깨기 전, 그는 두 딸 중 하나가 현생에서 자기의 어머니라고 했고, 자신을 강간했던 두 명의 청나라 병사는 현생에서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동료라고 했다.

전생에서 버림받았던 딸은 아픈 기억을 잠재의식 속에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이 된 전생의 어머니가 이번에도 자기를 떠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식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자신을 강간했던 두 사람을 현생에서 다시 만난 것도 이들과의 관계에서 청산해야 할 업이 있기 때문이다.

『전생여행』 김영우, 정신세계사

 

원인을 알 수 없고, 치료도 되지 않던 병들의 원인이 알고 보면 전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전생에서의 체험이 자신의 잠재된 영혼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가 현생에서 다시 재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병의 근원적인 원인을 알게 됨으로써 증상도 호전되고, 현재 자신의 삶의 모습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수영장을 두려워하고, 동굴에 갇혀서 굶주림과 탈진 속에 죽은 사람은 어두운 곳을 싫어한다.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은 고소공포증을 보이기도 한다.

목걸이도 못하고 목이 있는 옷도 못 입는 한 여성은 전생퇴행을 통해 전생에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아내가 있는 한 남자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와 여자는 전생에서 사랑하던 사이로 나타나기도 했다.

 

윤회를 할 때는 여자가 남자로,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국경을 초월해서 태어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현생은 전생과 너무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잇다.

 

한 사람의 현재 삶의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삶에서 보여주는 그 사람의 학문적, 예술적 재능이 지금의 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전의 생에서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위대한 정치가, 음악가, 철학자 등 세계의 저명한 사람들은 과거세에서부터 서서히 그 능력을 몸에 익히고 길러 오다가 마침내 실력자로서의 생애를 만나 그 능력이 열매를 맺는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가수, 무용가, 연예인들도 우연히 그런 직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전생에서부터 자질을 보이고 추구해왔던 것을 현생에서 다시 재현하고 그런 분야에 소질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제각기 관심분야도 다르고 재능도 다르게 태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도 여러 번의 전생이 있다.

그런데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태어나기까지 그 중간세에서 영혼은 무엇을 하고, 중간세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

 

전생퇴행을 하는 과정에서 그 중간세를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삶과 삶 사이, 티벳말로 '바르도'라고 하는 그 중간세는 우리가 태어나기위해 뒤에 두고 온 곳이자, 우리가 죽으면 되돌아 가는 곳이기도 하다.

 

중간세를 체험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죽음 바로 직후에 암흑의 터널을 지나 황홀한 빛, 눈부신 광명, 우주와 하나되는 느낌이라고 그 세계를 표현한다.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빛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곧 영혼은 자신이 바로 직전에 살았던 삶의 모습들을 영상처럼 하나하나 보게 된다.

자신이 전세에서 살았던 모든 삶의 모습, 자신의 죄와 허물, 자신의 모든 삶의 모습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감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죄의식, 자책감, 부끄러움, 비통함에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뉘우치고 잘못을 고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라고 한다.

 

전생퇴행을 통해 중간세를 경험한 한 여인의 표현을 보면 이러하다.

"내 영혼은 고통과 후회, 슬픔과 죄의식, 한탄으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그 사람들(재판관)을 쳐다볼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푸른 광선에서 발산되는 따뜻함과 평화가 내 주위를 감싸고 있습니다…재판관들 앞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는데 곧 두려워할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비에 넘쳐있고,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전세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소위 말하는 지옥에서 그에 대한 형벌을 받지만, 일반인의 경우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속죄하고 다시 인간 존재로 환생한다고 한다.

영혼은 지난 삶을 바탕으로 다음 삶의 형태를 결정하게 된다.

결단을 내릴 때는 재판관들의 조언이 함께 한다고 한다.

그 영혼이 어떤 카르마(업)의 빚을 지고 있는가, 어떤 점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다음 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K박사는 인터내셔널 사무기(IBM) 회사 연구원이다.

머리도 좋고 건장하며 멋진 데다가 인망까지 두터웠고, 회사에서는 실력도 인정받아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K박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마음의 갈등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죄의식과 자기 혐오로 자살 충동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생퇴행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그의 한 생은 1189년 십자군 부대의 지휘자로 떠나는 독일의 기사였다.

그때의 그는 목숨을 구걸하는 아랍인들을 무참히 죽였던 너무나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떠한 연유로 분노를 참지 못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목졸라 죽였다.

그 생을 마감하고 바르도에서 다음 생을 계획할 때 그는 폴란드의 목사로 탄생할 계획을 세웠다.

그 생에서 그는 강한 자제력을 배울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만들도록 구상했다.

그 삶에서 목사로서 교회의 규정을 지켜 자신의 공격적 천성을 제거하고 성욕을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엘 L. 휘튼·조우 피셔, 도서출판 기원전

 

이 내용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중간세에서 영혼은 다음 인생을 계획한다는 것이다. 

재판관들로부터 "네가 태어날 장소와 육체를 선택하라"는 조언을 듣는다고 한다.

 

중간세를 체험한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의 항로에 어떠한 곤란이 생겨도 거기에 대해 대처할 수 있도록 인생을 계획하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장애는 극복되기 위해 주어졌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강해지고, 좀 더 인식을 깊게 하며, 보다 진보하며 더욱 책임감이 강해지도록 말입니다."

 

"지난 세에서 충분히 잘 대해주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이 세상으로 돌아와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됩니다.

설령 이번에 그들이 내게 상처를 입힌다 하더라도 용서할 생각입니다."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엘 L. 휘튼·조우 피셔, 도서출판 기원전

 

"우리는 욕망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다음 생애로 넘어갈 때 그것을 또 다른 성향과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짐을 갈수록 무거워집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브라이언 와이스, 정신세계사

 

자신이 환생하여 어떤 경우, 사건을 만나는 것은 자신에 의해 선택되었고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그냥 우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사역사학vs.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도종환 의원

진실의 역사

유사역사학 vs. 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인터뷰들을 인용)

 

1. 도종환 의원을 유사역사학 신봉자로 몰아부치는 목적은?
▷ 도종환 반대세력이 노리는 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교과서 국정화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와 연관된 한국사 정통성과 대한민국 정통성을 통합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을 지닌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2. 동북아역사지도는 도종환 의원의 압력 때문에 취소되었나?
▷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근본 목적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양대 역사 침탈, 즉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사군을 지금의 평양으로하고, 독도를 빼버림으로써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철저히 유린하였기에 동북아역사재단 내부 재심사 결과에 의해 폐기된 것이다.

3.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다?
▷ 국가주의는 국가권력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희생이 전제된다는 관점이라면, 민족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주체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근대사의 동력은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독립운동을 우리가 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데 민족주의가 아니면 통일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다.


4. 유사역사학의 굴레를 씌워서 몰아내기
▷ 역사학의 본질은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데 있다. 다양한 해석은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역사학의 특징을 부정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 독재다.

국민들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학자들이 강요 할 수 없는 시대가 돼 버렸다. 그런데 자기네들 이론을 반대하면 ‘환빠’로 매도한다.

특히 이덕일씨 주장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반발이 도종환 의원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5. 한사군 평양설은 정설이다?
▷ 한사군 연구는 끝난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서로의 학설을 존중하면서 격조 있게 연구를 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 본다.

고대사의 일부 연구자들이 한사군 연구는 국내설로 귀착되었다는 주장은 '역사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역사학 자체를 부정하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양설이 다수설로 볼 순 있다. 그러나 정설이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조선후기 영조대의 『동국문헌비고』에 한사군의 영역이 요동까지 뻗쳤다고 나와 있는데, 관찬 사서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설이었다는거다.

패수 압록강설을 주장하지도 않은 정약용을 내세워 한사군 국내설을 강화 하였지만, 정약용은 정작 패수 대동강설 주창자였다. 정약용의 주장대로라면 한사군 국내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6. 단군을 인정하지 않는 주류사학
▷ 역사학의 기본은 민족의 근원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한다. 학계 주류는 ‘고조선 국내설’을 주장하고 단군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군을 인정하지 않으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대한민국은 현대에 새로 출발한 국가에 불과하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진보적’ 역사학은 남북통일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지 퇴행적 역사관이 아니다. 이는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으로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7. 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 고대사 하는 분들을 막을 세력이 국내에 전혀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걸린 거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다고 하니까 이들이 겁을 먹은 거다. 혹시 자기네들한테 불이익이 될까봐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난 거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를 언급하자 그것도 역시 두려움이 있는 거다. 자기네들 주장이 권력에 의해서 제거될 두려움이 있는 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틀에 갇힌 주류 강단사학이 가야가 포함된 ‘4국시대’의 도래로 위기에 처한 셈이다.

학문 용어로 성립될 수 없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안(정준)씨 등의 행위는 마치 일제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대종교를 ‘유사종교’라는 라벨을 붙여 탄압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진실의 역사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일제는 패망했지만 우리 민족의 온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일본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지배한 미국과 소련은 삼팔선을 그어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공산정권과 자유정권(반공)을 세워서 분할 지배했다.

소련의 영향하에 세워진 북쪽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북한 정권은 기독교 교회가 가진 토지와 재산 등을 몰수했다.

수많은 이북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북한의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밀려 내려왔다. 그들은 수많은 반공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그 유명한 서북청년단도 북한의 박해로 재산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쳐 온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된 단체였다.

월남으로 늘어난 기독교 신도들 덕분에 남한의 기독교 신자 수는 해방 이후에 더욱 늘어났다.

이들 반공 청년단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극렬한 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제주 4.3사건과 1950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때 무고한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아서 수십만명이나 학살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을 했다. 그들의 이념에 반대되는 자들은 좌익시 되었다.

이러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관은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 성향으로 드러났다. 

중세 마녀사냥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노예사냥 및 중남미 원주민 학살이 자행된 이유도 이런 분명한 선악논리로 인해 타문화를 제거 내지는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에는 남한 기독교인들도 한몫을 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의 젊은 남자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된 조직이었다.

기독교와 반공을 외치며 폭력으로 좌익을 탄압하는 반공 청년단들은 당시 남한을 세계 반공 전선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는 미국과 남한 정부에게 아주 훌륭한 도구였다.

이런 이유로 미군과 한국군은 제주 4.3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반공 청년단을 무장시켜 좌익 탄압을 위한 보조 무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 청년단들은 거칠고 난폭한 면이 많은데다 살인, 강간도 서슴없이 자행을 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정치 깡패로 나서면서 국민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래서 훗날 1961년 5.16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구악 일소를 외치자 반공 청년단들은 정권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자진 해산했다. 청년단 중 상당수는 목사가 되어 개신교로 흡수되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이 강경한 반북정책을 옹호하고 북한을 공격해서라도 공산정권을 무너뜨리자는 강한 반공 성향을 보이는 이유도 그들 중 상당수가 반공 청년단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재산(적산)을 미군이 몰수했다가 대부분을 기독교 교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해방 직후, 재산을 급격히 불리면서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말 그대로 기독교에게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보수 개신교계에서 일제 강점기는 하나님의 뜻이며 축복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는 기독교 성장의 토대를 깔아 주었다. 일제 강점기는 그야말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기회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일제 강점기에 대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을 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기독교 부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미국이 적산을 한국의 기독교 교회에 넘겨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일부 기독교 성직자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서 미군과 말이 통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미국의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미군은 한국 기독교에 정보 제공의 대가 겸 이해관계에 철저히 따를 하수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의 적산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1979년 1월 8일 미국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인 리처드 홀부르크는 주한 미국대사인 윌리엄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민주화 시위에 나선다면 그들은 더 이상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이는 한국의 여러 기독교 단체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대가로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약 3년 동안 한국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이 와중에 미군에게 잘 보여 출세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갔다.

특히 미군이 만든 한국군에서는 영어를 잘하고 개신교를 믿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개신교가 강세였다.

한국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때도 바로 미군정 시기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기독교는 또 한 번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미국이 보낸 식량과 구호물자가 대부분 기독교 교회를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분배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옥수수 가루라도 얻으려면 교회로 가서 개신교 종교 행사에 참여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기독교 신자 수는 급증했다. 식량을 나누어 주는 교회에 고마움을 느끼고 또 그런 일을 하는 기독교에 호감이 생겨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해방 직후, 전체 인구의 고작 3퍼센트에 머물던 기독교 인구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증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를 전부 합치면 12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한국 전체 인구인 5천만명의 약 24퍼센트에 해당한다. 인구 대비로 따지자면 필리핀과 동티모르를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한국만큼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는 없다. 지금은 해년 20만명씩 줄어드는 추세다.

 

정리하자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따른 결과였다.

많은 조선인은 세계를 주도하던 강대국인 미국을 동경했고, 그런 미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발달된 문물의 혜택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미국이 믿는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만약 미국이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를 신봉했다면, 지금 한국 곳곳에는 교회대신에 모스크가 가득하지 않았을까?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중국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사상인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유교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자주파 VS 사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