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아시아 최대갑부 리자청

자기계발-명언

아시아 최대갑부 리자청李嘉誠


프로필
리자청(리카싱 Li Ka Shing, 李嘉誠)은 중국 광둥 성에서 태어난 기업인으로, 중국 최대의 기업, 청쿵그룹[長江實業(集團)有限公司, Cheung Kong (Holdings) Limited]의 창시자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며, 중국인 중 세계 최대의 부자 중 한 사람이다.

 

2011년 《포브스Forbes》 선정 세계의 억만장자 11위, 2007년 《포춘Fortune》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 12위 등에 선정되었다.

현재 허치슨왐포아, 창장개발, 에어캐나다, 홍콩전력, 홍콩텔레콤, 허스키오일, 파나마운하·부산항·광양항의 컨테이너 터미널 등 총 460여 개에 달하는 기업에 관계하고 있다.


명언 모음

운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일이 천시, 지리, 인화에 부합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경솔하게 일을 하다가 실패한 후, 운명을 탓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품덕과 재능을 알고 합리적으로 등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각각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곳이 있다.

능력을 살펴보고 사람을 쓴다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인생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생활의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성공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나는 인생의 힘든 시기에 제일 많이 단련을 받았다.

특별히 판촉사원으로 근무할 때, 적지 않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경험과 교훈은 지금 10억, 20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초인이라 부르지만, 사실 나는 타고난 경영자가 아니다.

많은 좌절과 역경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경영의 비결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재는 아무리 취하여도 다함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그들도 당신에게 좋게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모두 다 당신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는 한 발짝 더 앞서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는 올림픽 경기에서 1, 2, 3등이 결정 나는 것이 한 발짝의 차이인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조심스럽고 면밀하게 연구해야 한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용기를 가지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

 

사업의 성공은 절대적인 공식은 없다.

그러나 일련의 원칙을 따른다면 성공 가능성을 상당히 높일 수 있다.

 

옛 친구든 새 친구든 친구를 사귈 때는 성실을 의지하고 호언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했다면 행하여야 하고, 공포탄을 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총명하고 재빠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를 믿고 따르며 나와 왕래하기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100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는 200에 버금가는 힘으로 공격했고 아무렇게나 도박을 하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인류에 공헌한 사람들을 나는 존경하며, 그들에 관한 책 읽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의료, 정치, 교육, 사회복지 등 분야를 막론하고 전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보면 탄복해 마지않는다.

 

더 많이 양보할수록 더 많이 돌아온다.

 

나만 돈을 벌고 상대방은 빈손인 사업이란 절대 불가능하다.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한 푼이라도 더 차치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에게 이익이 없다면 내게 돌아올 이익도 없다.

다른 사람이 먼저 이익을 얻도록 양보해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나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촌철활인

도덕경에는 ‘얻고자 한다면 먼저 내놓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먼저 다른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야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

리차청 회장은 아들에게 “다른 사람과 동업할 때 상대가 이익의 7할이나 8할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 주어라. 우리는 2~3할만 가져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미국의 사상가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

자기계발-명언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

 

랄프 왈도 에머슨의 명언

*행동은 생각의 완성이자 발표다.
*얄팍한 사람은 운을 믿는다. 강한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믿는다.
*진실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거짓 역시 그렇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자신을 믿어라. 모든 마음은 그 철의 현에 감동하여 울린다.
*야망 없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일하지 않고는 사람은 어떤 것도 끝내지 못한다.
*영웅이란 보통 사람보다 더 용감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보다 5분 더 길게 용감할 뿐이다.
*위대한 사람은 기회가 없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현명하고 더욱 현명해지고 사랑받는 대상을 바라볼 때마다 새롭게 보게 되고, 그의 눈과 마음은 그 사랑의 대상이 지닌 미덕을 이끌어 낸다.
*너무 소심하고 까다롭게 자신의 행동을 고민하지 말라. 모든 인생은 실험이다. 더 많이 실험할수록 더 나아진다.
*가장 발전한 문명사회에서도 책은 최고의 기쁨을 준다. 독서의 기쁨을 아는 자는 재난에 맞설 방편을 얻은 것이다.
*자연은 재산을 인간 성격의 결과물로 만듦으로써, 마술처럼 한 인간의 재산을 맞게 정해준다.
*집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은 자주 찾아오는 친구들이다.
*우리가 끈기를 가지고 하는 일이 쉬워지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쉬워져서가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우리의 능력이 향상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본인의 인격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프로필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19세기 초월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미국 최초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에머슨이 없었다면 진정한 의미의 미국 문학은 탄생할 수 없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미국 사상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그가 제시한 자기신뢰, 민권 개념 등은 지금도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의 철학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정신’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 링컨은 그를 ‘미국의 아들’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중세 시대의 종교』 『자연』 『에세이, 제1시리즈』 『에세이, 제2시리즈』 『대표적 인간들』 『영국적 기질』 『삶의 태도』 『5월제 외』 『사회와 고독』 『시집』 『시선집』 『신생』 등이 있다.

미국의 정치가 교육가 과학자 벤자민 프랭클린

자기계발-명언

미국의 위대한 정치가, 교육가, 과학자 벤자민 프랭클린

 

인생의 교훈을 주는 벤자민 플랜클린의 명언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
*인생을 소중히 여긴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시간이야말로 인생을 형성하는 가장 구체적인 요소다.
*우물이 마르면 그제야 물의 소중함을 안다.
*자신의 능력을 감추지 마라. 재능은 쓰라고 있는 것이다. 그늘 속의 해시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이 비극인 것은 우리가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점이다.
*돈을 빌리는 것은 자유를 파는 것과 같다.
*나무에 가위질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친구를 고르는 데는 천천히, 친구를 바꾸는 데는 더 천천히.
*오늘 살기를 바라기보다 잘 살기를 바라라.
*희망만을 먹고 사는 자는 굶어 죽을 것이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아는 것 모두를 말하지도 말고 본 것 모두를 평가하지도 말아라.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의무이며 또한 사회에 대한 의무이다.
*게으름은 쇠붙이의 녹과 같다. 노동보다도 더 심신을 소모시킨다.
*결단하여 해야 할 일은 실행하겠다고 결심하라. 결심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라.
*고통을 겪어야 강하게 된다는 말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를 알라.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가 있다.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왜냐하면 시간은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출발하였는데 세월이 지난 뒤에 보면 어떤 이는 뛰어나고 어떤 이는 낙오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의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은 하루하루 주어진 자신의 시간을 잘 이용하였느냐, 허송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11가지 인생 계명

1. 침묵 자신이나 타인에게 이로운 것 이외에는 말하지 않는다.
2. 약속 예정된 일은 모두 시간을 정해 두고 지킨다.
3. 결단 자신이 할 일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저하지 말며, 한 번 결심한 일은 지체 없이 해치워야 한다.
4. 검소 자기나 남에게 이롭지 않는 일에 금전을 쓰지 말라. 단 한 푼이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5. 공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유용한 일에만 써라.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
6. 진실 남을 속이지 말며 올바르게 생각하고 진실을 말해라.
7. 성실 옳지 못한 일을 하거나 자기 할 일을 게을리하여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
8. 중용 만사에 극단적으로 흐르지 말라.
9. 청결 몸, 옷 또는 가정을 불결하게 하지 말라.
10. 침착 작은 일에 놀라지 말라.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당했을 때에는 태연하게 대처하라.
11. 평화 스스로의 평화를 안정시키고 남의 평화를 어지럽히지 말라.


프로필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1706~1790)은 미국철학협회의 창립, 피뢰침의 발명,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 초대 프랑스 대사 등 실로 다양한 이력을 통해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프랭클린이 정치ㆍ사회ㆍ과학ㆍ문학 등의 방면에서 ‘최초’를 기록한 것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지만, 그의 묘비에는 ‘인쇄인 프랭클린(B. Franklin, printer)’이라고만 남길 만큼 소박한 삶을 살았다.

 

보스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이라고는 2년밖에 받지 못했지만 열두 살에 인쇄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철저한 자기관리와 시간관리를 통해 스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계발, 선하고 덕 있는 삶을 통해 행복에 이르고자 했던 그의 가르침은 ‘성공학의 원점’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제시한 ‘13가지 덕목’이 미국 정신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그의 삶은 비즈니스의 성공, 부를 쌓고 행복한 삶에 이르는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프랭클린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넘었지만, 오늘날 프랭클린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명뿐이다.

근대시대 출발, 동학

진실의 역사

근대시대의 위대한 출발 – 동학(東學)
◉ 오늘은 근대사의 위대한 출발 《동학》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8천만 한국인조차 모르고 있는 이 땅에서 실제 선언된 인류문명사의 새출발에 대한 위대한 선언, 동학의 가르침이 아직도 왜곡이 된 채 제대로 전해지지않고 있습니다.

동학의 위대한 새 소식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았고 잘못된 문화의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된 무극대도 새 출발 선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인류가 격고 있는 모든 비극의 문제들, 죽음의 불덩어리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각종테러, 자연재앙, 대지진, 화산폭발, 말할 수 없는 홍수, 가뭄, 폭염, 혹한 생태계에 가공할 변화의 모습들, 자본주의 붕괴소식, 민주주의 몰락의 이야기.

그리고 최근 영국 브렉시트사태,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변화를 다시 개벽이란 주제로 선언한 동학의 핵심 사상을 살펴봅니다.
  
인류 새 세상에 대한 진정한 새 출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깜짝 놀랄 소식이 무엇일까요.

근대사의 출발점인 동학의 이야기입니다.

東學(동학)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155년전 동서인류가 태고로부터 믿어온 上帝강세에 대한 선언과 앞으로 온 인류가 이런 변화를 맞이한다. 이렇게 대비하야 한다.

그것이 1860년 옛 신라수도 경주에서 최수운 대신사가 도통을 받은 대사건이다. Eastern Learning.

단순 동서문명의 통합이 아니라 하늘과 땅, 진정한 합일의 세계, 神人合一을 의미한다. 신명과 인간이 하나 되는 세상이 온다.

천상조상이 자손을 찾아서 내려온다. 죽어서 천당 극락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건설되는 선경낙원에 대한 소식.

지상천국이 우주의 궁극의 낙원이다. 이것이 동학의 무극대도 소식이다.

侍天主造化定(시천주조화정). 天主를 모시는 주문. 상제님을 모심으로서 인류는 어떤 세상을 맞이하는가.

다가오는 진정한 새 세상은 첨단과학문명의 이상으로만 건설되는 게 아니다. 대지진이 폭발할 때만 하더라더도 실제로는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에 의해서 조화선경이 이 땅에 건설된다는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가 동학의 핵심선언이다.

용화낙원. 미륵님의 조화도권으로 열리는 조화세상에 대한 선언이다. 그것이 시천주에서 말하는 造花定 세상이다.

진정한 통일의 도. 최상의 도다. 더 이상이 없는 무극대도 출현에 대한 소식이다.

왜 동학이 왜곡이 되어 오늘날까지 인내천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가.

최제우의 선언은 시천주다.

이는 후에 동학의 2대 교주 시형이 스승 최제우의 시천주 참뜻을 관념적인 養天主로 왜곡을 한다.

3대 교주 손병희는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으로 왜곡을 하여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학의 사상을 인내천으로 알고 있다.

 

『中庸(중용)』에 唯聖人(유성인)이라야 能知聖人(능지성인)이란 말이 있는데 오직 성인이라야 성인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승의 깨우침과 심법이 완전일체가 되지 않으면 그 뜻을 후세에 제대로 전하기 어려운 까닭이리라.

동학은 인류최초의 원형문화인 환단의 광명문화를 열어준 전 인류가 섬겨온 제천문화의 주인인 삼신 상제님 강세에 대한 강력한 선언이었다. 이런 제천행사는 환국,배달 조선을 이어 부여의 영고제천제로 이어진다. 

삼신상제(하느님)에 대한 제천문화 기록을 찾아보자.

『단군세기』를 보면 16세 위나단군이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44세 구물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렸다고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인 것이다.

 

고대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 시대의 정신문화를 해석하지 못하면 유물을 발견하더라도 역사정신을 읽어낼 수가 없다.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이다.

고려 때 국가 최고의 의례인 팔관회도 불교 행사가 아니라 사실은 제천행사였다.

『송사宋史』 「고려전」을 보면 “고려가 하늘에 제를 올리고 숭신崇神에 제하는 제전을 팔관회라 칭한다”라고 하였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팔관회는 고구려의 동맹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여 팔관회가 한국인의 제천행사의 한 형태임을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천제문화는 조선 태종 때 중신 변계량이 올린 상소문에 나타나듯이([吾東方, 檀君始祖也. 蓋自天而降焉, 非天子分封之也. 祀天之禮, 不知始於何代, 然亦千有餘年, 未之或改也. 惟我太祖康獻大王亦因之而益致謹焉, 臣以爲, 祀天之禮, 不可廢也]『조선왕조실록』 태종 16년), 조선 초기까지 1천 년 동안 끊이지 않았으며, 세조 때까지 국가적 규모로 원구대제圓丘大祭를 봉행하였다.

한민족의 천제문화는 일찍이 중국 땅으로 전파되어, 중국의 역대 왕들도 천제를 봉행하였다.

『사기』 「봉선서封禪書」는 춘추 시대까지 72명의 중국 왕이 현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 72명 중에는 유가儒家에서 상제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질서를 처음으로 확립한 인물로 받드는 요堯와 그의 제위를 물려받은 순舜이 거명된다. 즉 중국에서도 천자가 되고자 했던 인물들은 상제께 천제를 올리고 천자의 지위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춘추 시대 이후 진시황, 한 무제 등도 태산에서 천제를 봉행하였다.

특히 한 무제는 BCE 100년을 시작으로 5년마다 태산 봉선제를 거행하였는데, 총 다섯 차례를 행하였다(『사기』「효무본기」).

국가 행사로 이어져 동북아의 천제문화는 북방 민족에게도 전해졌다.

대진국 이후 만주 땅에 세워진 요나라, 금나라는 한민족의 제천풍속을 받아들여 국가행사로 거행하였다.
  
또한 천제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신사神社 문화를 탄생시켰다.

삼신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든 동방 신교의 풍습 그대로, 일본 신사는 상제님(천신)을 비롯하여 자연신, 조상신 등 다양한 신을 모시고 있다.

오늘날 신교문화의 원형이 가장 많이 살아있는 나라는 바로 일본이다.

천제天祭는 한마디로 인류 문화의 원형이며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의례이자 문화 행사이다.

천제문화의 본질이 바로 삼신상제 신앙이다. 최제우의 선언은 바로 동방문화의 주인인 이 상제강세에 대한 선포인 것이었다.

전 인류가 천주님을 직접 모시는 시대가 와서 앞으로 무극대운 태평성세가 열린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삼정문란과 외세격랑에 지친 조선민중에게 새롭고 커다란 희망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현 학계의 동학에 대한 인식은 한국에서 나온 신흥종교 모체로서 잘못 인식되고 있다.

학의 선언은 동방역사의 일관된 맥락에서 흐르는 삼신제천사상을 깨우친 최제우대성사의 깨달음의 선언이었다는 것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제국주의 그리고 동양에서 유일한 제국주의 반열에 든 일본제국주의 명치유신.

동아시아의 천자의 나라를 자처하던 중국은 아편정쟁으로 병들어서 마침 병들어 천자의 위상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다.

여기서 벌떼처럼 반란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청조가 무너지게 된다.

북쪽에는 러시아 노마노프왕조가 무너지고 러시아 혁명으로 일어나게 된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최후의 보루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이때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천자국을 선포하고 국명을 바꾼다.

 

그러나 일본에게 국권을 뺏기고 35년 동안 800만 동포가 무참하게 죽고, 3년 뒤에 남북이 분단되어 각기 정부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에 대전쟁이 폭풍이란 암호를 시작해서 대한민국이 적화통일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맥아더장군이 밀고 들어온다.

수백만이 죽고 천만 이상가족을 남긴 동족산잔. 그리고 휴전 60년이 넘어서고 있다.

 

주역으로 말하면 64괘 한주기가 거반 다 도는 시간대다.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보면 70년이 넘었다.

우주변화 원리적으로 본다면 상수 변화수의 종점의 시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남북에 살고 있는 당사자인 국민들도, 통일은 도적같이 한순간에 올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통일이 오냐다.

역사를 후퇴시키는 통일이, 전쟁의 파괴를 통한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한반도 주변으로는 팽팽한 전운이 형성돼 가고 있다.

동방의 원주인으로 역사문화의 원근원에 있는 한국인의 창세역사 황금시절 문화정신이 중국 황하문명중심으로 왜곡 되었다.

 

한국인은 신명나는 민족이다. 춤 잘추고 노래도 잘한다.

한류열풍의 문화적 배경은 한민족은 신교문화의 본고장으로 천제를 올리고 전 국민이 왕과 더불어서 즐겁게 신명풀이 놀이를 했는데 그 정서가 폭발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한류문화는 문화의 정신이 없다. 역사정신이 전혀 없다.

역사를 만드는 힘, 영성 창조력.

역사 원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한류문화를 가지고는 새로운 인류문화를 열수 없다.

역사문화근원을 되찾고 깨닫는 그 순간부터 진정한 한국인이 된다.

진정으로 고유문화를 근본으로 해서 세계문화와 대융합할 수 있는 정신문화를 가진 인재를 길러야 한다.
  
동학은 새시대에 대한 강력한 선언을 했지만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패망 당한다.

그러고 나라를 잃은 동학군 세력은 항일독립운동세력의 주체가 된다.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민족 고유사상에 기초한 동학의 이해 없이는 몸부림치는 독립자주세력의 계보를 이해할 수 없다.

 

동학의 메시지는 앞으로 오는 새 세상은 조화문명이다.

사람이 몸과 마음과 영 속에 있는 무궁한 신의 조화, 자기 생각대로 자유자재로 쓰는 그런 세상이 온다.

새로운 생명문화를 천주님이 직접오셔서 여신다. 모든 인간이 도를 통한다. 모든 인간이 성인 부처가 된다.

1860년에 최제우는 이미 종교시대는 끝났다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무극대도의 출현을 선언한 것이다.

기존의 종교와 가르침을 가지고는 이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엄청난 선언인 것이다.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무극대도다. 이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선언을 한국의 신흥종교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등학교, 대학교, 일반, 전세계 한국문화를 소개한 책자를 보면 동학을 신흥종교다.

서양기독교를 서학이라고 하고 서학에 대응하는 주체적인 새로운 가르침을 가진 종교 동학이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지속되고 있다.

 

서학의 꿈이 수천 년 간 숨쉬어 온 동방문화의 정신을 되살린 동학에서 완성된다는 선언이었다.

동방문화의 부활, 동방 역사의 부활의 소식이다.

동학은 수천 년 간 이어진 삼신제천문화 정신의 완전한 부활을 선언한 것이었다.

동학 패망 후 동학교도들은 독립운동가로 대거 합류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태고시절 역사원형정신이 깃든 환단고기를 공부하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동학의 정신이 근본적으로 왜곡된 근저에는 조선이 그렇지 뭐 하는 식의 외래 사대주의 일색으로 흘러오면서 우리 전통문화를 스스로 비하했던 원인이 크다. 

중국은 동산취 원형제단이 83년 전에 홍산에서 150미터 제단 원시피라밋인 총,묘,단이 발굴되면서 삼황오제는 신화가 아니고 실제역사로 바뀌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세상,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덕치의 이상모델이 되는 성왕 요임금과 같은 때, 단군조선시대가 있었다.

환웅시대, 단군시대. 이때를 동이라고 한다.

동이문화는 천단을 쌓아놓고 천신상제님께 제를 올리고 다신이면서 유일신 문화권이 있었다.

  
산해경을 보면 흰옷 입은 사람들 사는 곳에 백색광명의 雄常(웅상)이 있다. 근데 그 문화를 해석을 못한다.

그 웅은 환웅할 때 웅자다. 배달국 통치자 환웅의 웅으로 그 분의 정신은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정신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동방의 진정한 최초의 왕이자, 대제사장 그 분의 은혜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항상 임재해 있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몽골에도 항상 삼신의 가르침 홍익인간, 제세이화.

가장 큰 산, 가장 큰 나무를 성령이 감응을 하는 나무라고 해서 웅상이라고 한다.

이걸 중국도 한국 사람도 모른다. 내 몸과 마음이 신단수가 될 때 그 때 잃어버린 역사문화를 다 찾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일연 스님의 고조선기에는 단군조선이 있고 그 전에 뿌리가 되는 환국 배달 신시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환인과 환웅이라고 하는 역사시대가 있었다.

조선왕조를 패망시키고 통치를 할 때 일본이 환국 배달 조선을 영원히 없는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특별 지시를 했는데 일왕 특명으로 3인이 발동을 했다.

환국을 없애면 배달환웅과 조선단군도 신화나 없던 인물도 만들 수 있었다.

 

일연이 환국은 제석신의 나라다. 인도신화 신의 나라다. 인드라의 나라다.

이렇게 주석을 붙이니까 일연 스님이 자기 생각으로 주석을 붙인 것이 역사왜곡의 근거를 제공 했다.

그런면에서 삼국유사는 고대사 복원 실마리와 왜곡의 근거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일연이 환국을 불교 제석신의 나라라 했으니까 조선인들 너희들도 따라라.

이 논리에 세뇌가 돼서 단군신화를 거침없이 얘기하고 있다.

한국은 제조상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다. 오늘의 한국의 정신이 이렇게 타락했다.

한마디로 제 뿌리를 부정하는 나라다.

 

『小學(소학)』에 建學立師 以培其根 以達其支라. 학교를 세워 스승을 두어 그 뿌리를 북돋아서 가지가지가 뻗도록 한다라고 했다.

한국은 고대사가 왜곡이 되면서 근대사의 위대한 출발 동학의 핵심사상을 동시에 보지 못하는 두 눈이 실명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한민족은 뿌리를 잃은 민족이면서 동시에 미래도 잃고 헤매이고 있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역사문화를 잃고 타이타닉호처럼 침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학을 단순한 근대 새시대의 출발로 보려는 근시안적 안목은 동학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민족 정체성과 고유정신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소치다.

굳건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뿌리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의 융성이 일어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표절의혹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
◉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의혹에 대한 반론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들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환단고기가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 국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교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는 700년이고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 왕의 13세손’이라 하였다.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이러한 부정확한 내용을 비판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부정한 『신당서』의 기록, ‘가언충의 고구려 900년 유국설留國說’을 근거로 할 때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 200년을 삭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요동을 시찰한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올린 보고 중에 “『고구려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팔십 먹은 장수에게 망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한 대목을 가리킨다.

‘고구려 900년’은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고 오가의 공화정을 폐한 BCE 232년에서 고구려가 망한 CE 668년까지를 뜻한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그 진실이 명쾌하게 밝혀진다.

환단고기의 기록으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의 내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북부여기」·「고구려국본기」를 통해 고구려 제왕의 초기 혈통계보가 천제자天帝子인 제1세 해모수(BCE 239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주몽(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으로 정립됨으로써, 고구려 900년 유국설이 입증되는 것이다.

삼성기 상 원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扶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사 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이라하시니 是爲高句麗始祖也시니라. (삼성기 상)
⇒해설 :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 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삼성기』 상)


즉 광개토대왕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광개토대왕비에 정확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부여 4세+고구려13세를 더하면 광개토 대왕이 17세손임을 밝혀주는 유일한 사서는 바로 환단고기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오히려 환단고기를 통해서 완벽히 광개토대왕 비문의 해독이 가능해졌다. 결코 조작된 위서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는 데에 그치지만, 『환단고기』는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 기록의 본래 진실까지 담고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900년 유국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현現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이순근은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라는 구절이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의 내용과 유사하므로, 『환단고기』는 박은식의 책을 베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기존에 전수되어 내려오던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를 묶어서 1911년에 발간되었고,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1915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역사관을 전개하기 위해 댓구적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베낀 것이란 말인가.

오히려 『한국통사』의 문장이 ‘옛사람(古人)’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라와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형식이므로 박은식이 다른 역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원문 자체를 분석하지 않고, 글의 전체 논리 흐름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유사한 한 구절을 떼어다가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원문은 이렇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망할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라[古人云 ‘國可滅, 史不可滅’, 蓋國形也, 史神也](박은식, 『한국통사』 서문).

이때 박은식이 인용한 ‘옛 사람의 말’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또 『환단고기』 범례에 ‘낭가’라는 말이 나온다.

위서론자들은 ‘단재 신채호가 처음 사용한 낭가라는 말을 환단고기 서문을 쓴 계연수가 따온 것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그 후에 성립됐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사실 『환단고기』는 낭가 문화의 원형인 삼랑三郞과 그 이후의 낭가 맥을 최초로 전해 주는 책이다.

 

이순근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논리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광용 또한 “교리체계에서도 환인(하느님)의 조화, 환웅(예수)의 교화, 단군(성령)의 치화를 생각나게 하는 삼신(삼위)일체론 부분은 … 기독교에 대한 단군신앙의 교리적 대응에서 나온 것이다. 또 영혼, 각혼, 생혼의 성삼품설聖三品說이 보이는 부분도 『천주실의』에서 마테오리치가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군세기』의 삼신일체 사상과 삼혼 논리가 명나라 때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말한 성삼품설聖三品說을 흡수한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환단고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서 신관의 중심 언어인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란 무엇인가?

‘조물주로서 얼굴 없는 하나님인 삼신과 한 몸이 되어 직접 우주 만유를 낳고 다스리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말한다.

비인격적인 삼신만으로는 이 우주에 어떠한 창조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 질서의 주권자이신 삼신일체상제의 조화손길이 개입될 때 비로소 천지만물이 창조되고 변화한다.

삼신일체상제, 이 한 마디에는 조물주가 어떤 원리로 우주를 다스리는지 그 해답이 담겨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位格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말하는 동방의 ‘삼신일체상제’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또한 마테오리치 신부가 말한 성삼품설의 영혼·각혼·생혼은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의 삼혼설에서 말하는 영靈·각覺·생生과 용어는 같으나 그 의미와 사상적 배경이 다르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삼신설이나 삼혼설은 고대 동북아 문화의 우주론, 삼신관을 바탕으로 한 ‘삼수 원리’에 토대를 둔 것이고, 생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이것을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던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하면서 수용한 것이다.

 

반면 마테오리치 신부의 성삼품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혼설에 토대를 둔 것이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서 말한 “영각생靈覺生 삼혼三魂”은 삼혼칠백三魂七魄의 삼혼을 말한다.

 

위서론자들은 삼신, 칠성 문화, 용봉 문화, 천지 광명의 환단 문화에 대한 기초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전통 문화의 기반인 삼신 우주관에 대해 치밀한 문헌 고찰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의식 자체가 없고,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지성과 우주론이 결여된 자들이다.

원전 자체를 체계적으로 읽지 않고, 그 가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논리를 만들어 아전인수 격으로 부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불순한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동방의 오랜 전통문화와 한민족의 숨겨진 원형역사가 담긴 환단고기를 이단과 사이비로 몰고 갔다.

무당, 민족사학, 샤머니즘, 오방낭 등을 거론하면서 민족종교와 민족사학을 도매급으로 사이비로 매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통문화를 사이비나 미신으로 매도한 것은 일제 강점기이후 민족종교 말살정책의 일환이였으며 해방이후에는 개신교계의 세력 확장 전략이었다. 

 

특정종교와 언론이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바탕으로 타문화, 타종교에 배타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며 동방문화와 역사를 배척하고 타도하려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국정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나오기 전부터 ‘환빠교과서’라고 엄청난 음해를 하는 여론몰이를 하더니만 뚜껑을 열고 보니 정작 실린 것은 찬란했던 우리의 상고사 환단고기 내용은 한 줄도 없고 여전히 식민사학 논리를 고수하며 친일 뉴라이트 역사관과 식민사학을 더욱 공고히 뿌리를 내리도록 기술을 하였던 것이다.

최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는 일본 극우 단체들의 지원금이 국내 유수대학과 일본 유학파 출신들에게 지원하여 신친일파를 만드는 정책이 상당히 성공하였다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의 극우교과서를 추진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한국의 뉴라이트 단체와 상당한 친선교류를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식민사학자와 외래사대주의, 그리고 자학사관자들이 매도하는 『환단고기』는 국정교과서 농단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와 음해를 당했다.

자국 역사를 어떻게든 깍아내리려는 이들은 일본 극우 단체의 자금을 받고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찬란하게 실존했던 한국의 고대사는 기술도 하지 않으면서 언론을 통해서 국정교과서는 환빠교과서로 여론몰이를 했다.

이들은 교활하게 민족사학을 매도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반영했다.

뉴라이트는 오히려 이전의 친일식민사학자들보다도 한술 더 떠서 친일을 미화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성공기반이 친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 사건은 한국사학계가 식민사학이 주류임을 다시 한 번 입증을 한 셈이다.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③-근대술어사용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③
【근대술어를 사용했기에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 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언어 용례를 근거로 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해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주장이 위서론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감염시키는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전을 읽어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위와 같은 용어가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단어의 의미가 지금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다.

문文과 화化가 결합된 문화라는 말은 고대에 이미 사용되었고, ‘문으로써 가르쳐 변화시키다[以文敎化]’라는 뜻이었다.

 

2천 년 전에 나온 유향劉向(BCE 77~BCE 6)의 『설원說苑』 「지무指武」에서 “성인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문덕을 먼저 쓰고 무력을 나중에 썼다. 대체로 무력을 쓰는 것은 복종하지 않기 때문인데, 문덕으로 교화해도 고쳐지지 않으면 그 뒤에 토벌한다[聖人之治天下也, 先文德而後武力. 凡武之興, 爲不服也, 文化不改, 然後加誅]”라고 하여 문화는 말을 쓰고 있다.

 

‘인류’란 말은 『장자』 「지북유知北游」편에서 “생물은 이를 서러워하고, 사람은 이를 슬퍼한다[生物哀之, 人類悲之]”라고 하여 인류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인류는 중국의 전국시대(BCE 403~BCE 221) 이전부터 사용된 말이다.

 

구마라습鳩摩羅什의 『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인도 승려 구마라습(344~413)이 한문으로 번역한 『금강경』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에, “이 법은 차별이 없어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라고 하여 ‘평등’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국가’란 말은 『주역』 「계사繫辭」 하의 “군자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립해 있을 때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보전할 수 있고, 나라와 집안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라는 구절에서 ‘국가’라는 말이 고대에도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국어國語』 「진어晉語」편을 보면, “선행을 상주고 간악한 행위를 벌주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賞善罰姦, 國之憲法也]”라고 하여, ‘법’·‘법전’을 뜻하는 ‘헌법’이 나온다.

 

‘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업業은 본래 신교의 우주론을 담고 있는 언어이다.

인도어 ‘카르마’가 업으로 번역되어 쓰이기 이전부터 한민족은 우주의 업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한국 고유의 ‘업’은 ‘천지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이 지극히 신성한 공력을 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 업이 시대 변화에 따라 의미가 바뀌어 오늘날 ‘산업’이란 말이 된 것이다.

 

본업·직업·악업·선업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업은 고전에서 적어도 1~2천 년 전부터 쓰인 용어인데, 이 땅의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무지해서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부정을 전제로 한 비뚤어진 역사의식으로, 학자의 양심을 의심하게 하는 불성실성으로 시원 동방문화의 창업자인 한민족 고유의 대도 역사서 『환단고기』를 대하고 있다.

이들은 어찌하면 찬란했던 우리 역사의 진실이 담긴 환단고기에 불리한 사료가 있는 것만 찾아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다.

조금이라도 우리 고대사에 불리한 자료가 나오면 무슨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쾌재를 부른다.

 

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인류사의 주요 고전도 원전이 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 필사되거나 후에 보정이 되어서 전해진 경우가 대다수다.

『주역』은 태호 복희씨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에 가탁하여 전국 시대를 거쳐 한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편집된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여졌다는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래 다섯 저자가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피하여 온전히 전해졌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계연수가 모은 다섯 권은 필사 과정에서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거나 가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그 보정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환단고기 역주

◆ 환단고기 술어의 고전『古典』 사용례

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②-영고탑진실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 - 영고탑진실
◉ 영고탑 기록이 청나라때 나오므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의 진실
환단고기 위론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영고탑’이 청나라(1644~1911)의 시조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므로,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고 주장한다.

조인성은 『단군세기』의 저자인 이암과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은 고려말 사람이고,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은 조선 중기 사람이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이도학 또한 『만주원류고』의 한 가지 기록을 근거로(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이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라 주장한다.

즉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대 이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료만 가지고 어떻게 그런 섣부른 주장을 한단 말인가.

제주대 명예교수 안창범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오는 영고탑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여 이도학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즉,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特이라 한다.

영고탑은 본래 영고특寧姑特에서 영고태台로, 영고태台에서 영고탑塔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다”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영안의 옛 탑’이라는 뜻이며, 단군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보면 ‘영고탑’을 ‘영안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이익(1681(숙종 7)∼1763)은 『성호사설』에서 ‘영고탑’은 ‘오랄烏剌, 애호艾滸와 함께 동삼성東三省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해자垓字가 깊다’고 하였다.

 

중국문헌에서는 영고탑을 탑이 아니라 옛 지명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其實並不像字面意思那樣是一個塔,而是一個古地名,原位於今黑龍江省海林市,後在公元1666年遷到黑龍江省寧安市。寧古塔是清代寧古塔將軍治所和駐地,是清政府設在盛京(瀋陽)以北統轄黑龍江,吉林廣大地區的軍事、政治和經濟中心,是向朝廷提供八旗兵源和向戍邊部隊輸送物資的重要根據地,也是十七世紀末到十八世紀初,東北各族向朝廷進貢禮品的轉收點,因此寧古塔與盛京齊名《 滿語寫法參見在線滿漢詞典》 , 《寧古塔紀略》,見《續修四庫全書》本

영고탑은 글자의 뜻과 달리 탑이 아니고 옛 지명이다.

원래는 지금의 흑룡강성 해림시에 있다가 뒤에 서기 1666년 흑룡강성 영안시로 옮겼다.

영고탑은 청나라 때 영고탑장군의 치소이며 주둔지로써 청나라 정부가 설치했던 성경(심양)이북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광대한 지역의 군사 정치 경제를 통치 관할하던 중심지였다.

조정에 대해서는 8기병의 군사를 제공했고 국경주둔부대에게는 물자를 수송하던 주요근거지였다.

또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까지 동북지역의 각 민족이 조정에 예물을 바칠 때 거두어들이던  장소였다.

따라서 영고탑은 성경과 명성을 나란히 했다.《만어사전》,《영고탑기략》,《속수사고전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요동이 본래 조선의 고지(故地)이며, 숙신(肅愼)·예맥(穢貊)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 조선에 복속했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오랄(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강역(疆域)임을 모르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위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명실록』을 인용하여 명나라 초기에 ‘영고탑로寧古塔 路’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명칭은 적어도 명나라 초기(1368)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고탑은 원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영고 ‘迎鼓터’란 지역으로 북부여 이후 황폐화 되고 고구려 대진국의 멸망으로 역사기록이 사라지면서 그 유래에 대해 정확이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다만 간신히 이름만 전해지다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맞물려 ‘영고탑 寧古塔’으로 기록이 된 것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민족의 발흥지역으로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내던 영고제천을 지내던 영고터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조 이전에 쓰인 용례가 있다면, 위서론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지 주장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기록이 존재한다.

청조 이전부터 영고대 혹은 영고탑이란 명칭이 존재했다.

중국 문헌에서 ‘명대 초기에 여진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곳을 동해와집영고탑로東海窩集寧古塔路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명대 초기 사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암이 살던 고려말에 영고탑이란 명칭이 통용되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배달과 고조선의 제천행사를 이어받은 부여의 영고迎鼓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16세 위나단군이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44세 구물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렸다고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영고탑’은 원래 탑의 이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탑이 사라지고 지명으로 남았다고 보아야 한다.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이다.

후대에 청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고迎鼓의 원래 의미와 표기법이 잊혀져 영고寧古가 되었고, 우리말의 ‘터’를 특特, 태台, 탑塔 등으로 음사하면서 영고탑寧古塔이란 말로 정착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고탑지寧古塔志』를 보면 “만주어로 6은 ‘寧公’이라 하고 ‘자리[坐]’는 ‘特’이라 하는데, ‘寧公特’ 다른 말로 ‘寧公台’라고 부르다가 점차 ‘寧古塔’으로 불렀다[滿呼六爲寧公, 坐爲特, 故曰寧公特, 一訛爲寧公台, 在訛爲寧古塔矣]”라고 하였다.

우리말의 ‘터’도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特(만주어로 타)’이 우리말의 ‘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역주

 

◉ 寧古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淸)나라 때 지명. 
1653년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을 두었고, 62년 영고탑장군(將軍)으로 고쳤다.

그 뒤 팔기부도통(八旗副都統)을 두었으나, 청나라 때에는 죄인의 유형지(流刑地)가 되었다.

1910년 영안부[寧安府]로 되었다가, 중화민국 이후 닝안현으로 고쳤다. (두산백과)

고조선 1왕조시대 수도 송화강 아사달 (하얼빈), 북부여 발흥지 웅심산. 고구려 발흥지 졸본. 만주일대를 발흥지 삼아서 한민족은 국통을 계승하며 천자국으로서 삼신상제께 천제를 올렸다. 영고는 부여의 삼신제천행사였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①
위서론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문제는 사서 조작의 문제, 지명과 인명 문제, 근대 술어 사용 문제, 다른 사서와의 관련 문제, 저자 문제 등으로 정리된다. 위서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환단고기를 활발하게 연구하는 의식 있는 학자들의 의견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사서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위서론자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환단고기는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편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다.

이 사실은 환단고기 범례의 내용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연수를 가공 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환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위서를 만들어서 그동안 식민사학의 거짓을 덮으려는 음모에 불과하다.

 

환단고기는 엄청난 깨달음과 깊이 있는 역사를 보는 혜안이 어떠한 사서보다도 뛰어나다.

만약에 환단고기를 조작을 했다면 조작한 사람들은 만세의 학자며 성인들로 추대해도 모자랄 정도의 깊은 소양이 가진 인물들로 느껴질 정도다.

 

이번 국정교과서가 환단고기 내용이 진짜 반영이 될 것이라고 몰아붙이는데 그런 일은 아마도 털 끝 만큼도 없을 것이다.

집필진 대다수가 식민사학계열로 구성이 되었고 이들은 환단고기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데 환단고기 내용을 과연 반영하겠는가.

국정교과서에 환단고기 반영한다는 여론몰이는 언론조작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국정화는 뉴라이트 세력의 역사관이 반영된 일제식민지 근대화론이나 해방이후 친일건국 세력에 대한 미화거나 식민사학자들 주장이 반영되면 되었지, 식민사대주의자들이 뭐가 좋다고 자승자박하는 한민족 국통을 계승한 자주독립역사학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책이었던 환단고기 내용을 집어 넣겠는가?
 
다시 계연수에 대해 알아본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은 그 제자인 이유립의 증언과 여러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와 그가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서술되어 있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20) 등이 있다.

계연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환단고기를 1980(庚申)년에 세상에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만약 환단고기가 조작된 책이라면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진 오형기가 필사를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조작 사실을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선생은 1966년부터 이유립의 제자로 환단고기를 배웠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고등학교 때 몇 명씩 일주일 단위로 이유립의 집에 모여서 역사를 배웠는데, 그때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짚어 가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언론에서 가장 위서론을 극렬하게 확산하고 있는 이문영 주장처럼 환단고기가 1980년대 이유립이 조작한 책이 전혀 아닌 것이다.

양종현은 종이의 질과 색깔, 책 표지 상태까지 말하였는데, 책을 묶은 끈이 떨어져서 여러 번 고쳐 매고 풀로 붙였던 사실도 기억하였다.

이 같은 양종현의 증언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원본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최순실 사건이 터지면서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행촌 이암의 國猶形史猶魂 形可失而保乎(국유형 사유혼, 형가실혼이보호) 즉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할수 있겠는가.

이 구절을 박 전 대통령이 인용했다고 위서를 인용했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잘못을 왜 환단고기에 뒤집어 씌우는가.

성경조차도 19세기 후반 예수의 말씀이 후세에 조작이 되었다고 서양 학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위서론에 시달린 적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가르침과 가치가 인류사에 도움이 된다”라고 하여 종식이 되었다.

 

환단고기 내용이 인류사에 그리 해악이 되는 내용인지 읽어보면 스스로 알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또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이 바뀌었으므로,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유립은 <자유>에 ‘환단유기桓檀留記’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다.

박창암이 1968년 5월 창간한 월간지로서 2010년 7월, 통권 443호를 발행하였다.

이유립이 <자유>에 원고를 기고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위서론자들은 이 <자유>에 게재한 내용과 『환단고기』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1979~80년에 썼거나 교정을 보면서 조작했다는 것이다.

 

박성수는 “환단유기의 내용이 『환단고기』에 담겨 있다. 그래서 ‘환단유기’를 하나의 필명으로 쓴 건지, 아니면 책 제목이 바뀐 것인지 판단은 못하지만,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환단유기로 바꾼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곧 『환단고기』라는 책이 이미 있었다는 뜻이 된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본 책을 직접 본 양종현이, 책의 제목은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다.

또한 임채우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곰과 범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고 “환단고기의 각 권에서 그 내용을 서로 다른 의미로 기록한 점이 환단고기가 한 사람의 저서가 아님을 반증한다”라고 주장한다.

즉 이유립이 독자적으로 창작한 것이라면 그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환단고기 편찬 과정에 의문을 품는다면, 계연수 편집본, 오형기 필사본, 오형기 필사본에 대한 영인본,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더구나 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역사를 공부하였다는 양종현의 진술 또한 거짓이라 해야 하는데, 이는 위서론을 주장하기 위해 한 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벌어진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허구라고 몰아붙이면서, 위서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민족사학을 부정하고 식민사학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환단고기 역주』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역사서의 저자들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한 내용 중에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하여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진서론에서 전거로 사용하는 『조선왕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기록이 잘못되었으니 ‘안함·원로·동중의 삼성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으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리고 『세조실록』에서는 저자가 세 명 이상일 경우 ‘문태,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이라고 사람 수를 명시하였다.

즉 이름을 나열할 때 몇 사람인지 혼동이 생길 여지가 있으면, 몇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안함로와 원동중 두 사람이 『삼성기』를 저술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안함安咸’은 『세조실록』에 나오는 ‘안함安含’과 독음만 같을 뿐 글자가 다르다.

더욱이 『왕조실록』은 정확성을 요구하는 정사正史이므로 기록자들이 ‘안함安含과 안함安咸’, ‘로원老元과 원로元老’를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이들을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문헌고증을 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부분에서 오류를 범하며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삼성三聖이 아니라 삼인三人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삼성三聖과 삼인三人을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은 억측일 뿐이다.

설혹 『세조실록』 에 있는 해당 기록을 ‘안함, 로원, 동중이라는 세 성인에 대한 기록’으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수양산성을 쌓은 세 사람을 과연 성인聖人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다.

만약 성인으로 기록할 정도라면 기록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에서 이 인물들의 업적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성인 정도라면 그들의 행적에 대한 책이나 가르침이라도 전수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원동중의 삼성기가 실재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맥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원동중元董仲 삼성기三聖記 주注’라는 대목이다.

이것을 보면 이맥이 원동중의 『삼성기』에 주注가 달린 책을 보고 『태백일사』를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안함·원로·동중의 세 성인에 대한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는‘안함·원로·동중 세 성인의 기록’이 아니라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인 것이다.

또 위서론자 이순근은 구한말에 나온 도기론道器論이 『단군세기』에 나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주역』에는 이미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라는 문구가 나온다.

도기론은 이에 근거해서 도道와 기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또한 이순근은 “당대當代의 왕을 상上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고려라 칭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표기법이다. 이 경우는 아조我朝, 본조本朝, 혹은 아국我國 정도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단군세기』를 고려 때 이암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사람이 지은,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로 몰았다.

 

그리고 서울대 국사학 교수를 역임한 한영우 또한 “또 한 가지 결정적 의문은 고려高麗니 몽고蒙古니 하는 용어다. 공민왕 시기의 당시 사람들은 고려니 몽고니 하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더욱이 원나라 간섭기에 대신을 지낸 행촌의 입장에서는 쓸 수 없는 용어다”라고 하여 저자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암이 고려와 몽고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선가의 의식과 유가의 의식의 차이’를 들어 이해할 수 있다.

『청학집』을 보면, 조선조 유가에서 잘 사용하지 않던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가나 선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우리나라 또는 우리 민족의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군세기』 서문이나 본문을 읽어 보면 이암의 사상적 경계는 유가보다는 오히려 한민족 신교문화의 전통 도가 쪽에 가깝다.

따라서 이암이 아국이라 하지 않고 고려나 몽고라 호칭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군세기』 서문은 논리가 매우 치밀한 글이다.

이암은 ‘국유형하고 사유혼하니’라는 구절을, 그 논리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 세 번이나 반복한다.

『단군세기』 서문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이암이 이 글을 쓰던 당시의 시대 배경을 알아야 한다.

12세기 초엽에 원나라는 세계의 3분의 1을 점령한 대제국을 건설했고,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채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잠, 류청신 같은 역적이 나와서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없애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기를 주청했다.

 

이렇게 국운이 기울어져 고려 5백 년 사직이 패망당할 통탄스러운 상황에서, 행촌은 동북아 창세 시대의 뿌리 종교이자 시원 사상인 신교의 핵심인 ‘삼신의 우주사상과 인간론’을 전하면서 위정자들에게 매서운 질타를 한 것이다.

조정에는 만고역적이 들끓고, 역사상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 원나라의 침략으로 망해 가는 조국의 허망한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신교문화와 시원역사의 부활을 절규하며 글을 쓴 것이다.

 

또한 이암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마음의 근원과 신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 중에서 성자性者는 신지근야神之根也 즉 ‘인간 마음의 바탕 자리는 신이 존재하는 뿌리가 된다’는 구절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 얽힌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어 주는 깨달음의 극치를 보이는 문장이다.

그것은 공자의 중용, 석가모니의 중론보다 훨씬 위대한 말씀이며, 환단의 천지 광명 사상을 활연관통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는 간결한 명문이다.

 

한영우는 또 『단군세기』에 나오는, 초대 단군왕검이 백성에게 내려 준 생활 실천 과제라 할 수 있는 ‘팔조금법八條禁法’의 문장이 간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군세기』를 이암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군왕검이 고조선 창업자로서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으로 여덟 가지를 정해서 내려 준 것을 놓고 문장이 길다고 트집을 잡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단군왕검의 가르침은 그 구성과 체계가 매우 논리정연하다.

그래서 이도학은 위서론자이면서도 『단군세기』 서문을 분석하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군세기』를 이암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거짓으로 몰면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사리에 맞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는 위서론자들의 무지몽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그것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붙이면서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인데, 바로 ‘잠청배潛淸輩’라는 문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이다.

고려의 역적이었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과 같은 간신배’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위서론자들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였다.

역사의 상식에 무지한 소치이다.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한 그들은 잠청배가 조선 말기에 나온 말이므로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다.

 

이승호는 이러한 잘못에 대하여 “(위서론자들의) 이런 오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특정한 시각이나 목적으로 『환단고기』를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즉 위서론자들이 위서로 낙인찍기 위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환단고기』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처럼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의 가치를 파괴하고 훼손하기 위해 어떤 무리한 비판도 불사한다.

이러한 예만 보아도 위서론자들이 식민사학의 변론자로서 동북아 원형 문화의 눈을 가리는 반민족적 행태를 얼마나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환단고기 역주》

삼성기 하의 저자 원천석

진실의 역사

三聖記(삼성기) 下의 저자 元天錫(원천석) 그의 자취를 찾아서

<무학대사가 잡아준 耘谷(운곡) 元天錫(원천석) 의 묘 : 원주 판부면>의 전설

무학대사(1327년 고려충숙왕 14년생)는 운곡 원천석의 묏자리를 잡아준 것으로 전한다.

“耘谷(운곡)[元天錫(원천석)의 호]은 어느 것을 원하시오? 했다.
재물과 벼슬이 후손들에게 넉넉하기를 바란다면, 의당 그곳 만대 영화지지요.

다만, 그저 탈 없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면 앞에 보이는 봉요혈(蜂腰穴)이 적격이올시다.“
“봉요혈”, 벌의 허리에 해당하는 혈자리인 것이다.

금방 끊어질 듯 가늘지만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는 진혈의 허리다. 용맥이 흐르다 순간 결지를 했으니 기룡혈이다.

 

원래는 무학대사가 3대 정승이 나는 자리를 쓰겠느냐 아니면 무탈하게 자손들이 입신양명을 못하더라도 번창하는 자리를 쓰겠느냐 해서 이 자리를 택했다고 전해진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혈자리다. 귀석이 주변에 있어 기의 누수를 막고 있다.

치악산의 한 자락이 서남향으로 흘러내린 끊어질 듯한 기맥은 잘록한 목을 지나 본신 안산을 이루며 당판을 단단히 일으킨다. 

벌허리처럼 끊어질듯한 이 자리에 쓴 이유는 고려말 망국의 상흔과 조선 유교국시에 실망하고 출사를 하지 않은 원천석 선생의 소망을 이 혈자리에서 염원한 것은 아닐까.

한민족 국혼과 고유역사가 사라져 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역사관이 분명했던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자 고려말 충신 72두문동 현인의 한사람이었던 원천석은 사라져가는 조선의 역사를 『삼성기』 하를 집필함으로써 이렇게 이어 주었다.

마치 자신이 묻힌 봉요혈 자리처럼 말이다. 허리가 끊어질듯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풍수학의 절미를 보여주는 이 봉요혈 혈자리처럼 말이다.

후손 중에 똑똑한 인물이 나와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고, 그저 순탄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원주 원씨 중시조 원천석선생이다. 인문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당대의 영화를 구하지 않았다.

 

혈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인물은 무학대사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건의 배경이다.

원천석은 고려말의 인물이다.

고려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탄식하며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공양했다.

정계 중심에서 한순간 운명이 바뀐 상황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자신을 정립하기 위함이다.

마치 고려말 망국의 패운을 통탄하며 단군세기를 강화도에서 집필한 행촌 이암은 먼 미래를 보며 단군세기를 남긴다.

그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그도 그런 심정에서 한민족 역사시원의 원형을 기록했으리라.

원천석은 호는 耘谷(운곡)이고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원천석은 춘추전국시대 晉(진)나라의 직필하던 사관이었던 董狐(동호)를 존경하여 자신의 필명을 董仲(동중)이라 하였다 한다.

의미를 해석한다면 동호란 인물에 버금한다. 그의 필명에서 사관으로서의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대쪽같은 중도심법을 엿볼 수 있다.

 

威勢(위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실을 그대로 直筆(직필)하였던 곧고 충직한 사관이었다. 

동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史實)을 바르게 기록(記錄)했다하여, 董狐直筆(동호직필)이란 사자성어가 전한다.

고려왕조가 망하자, 그는 뒷담을 끼고 돌아보듯 쇄망을 나귀의 말발굽으로 짚어가며 한수 시를 읊조렸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조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가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학대사와의 만남이다. 어떻게 조선의 왕사가 고려의 충신과 한자리에서 앉아 있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운곡 원천석의 행동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을 하는 것이리라. 어떤이는 당대에 살고 역사에서 죽는 이도 있다.
왜 깊어질수록 역사적 삶을 선택하는지는 스스로 깨우쳐야 하리라.

 

일찍이, 이방원(태종)은 왕자시절 운곡 원천석에게 글공부 가르침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이방원이 즉위한 후 중임을 하려고 원주에 자주 찾아 왔으나, 그때마다 산속으로 몸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왕은 계곡에 있는 바위에 올라앉아 집을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돌아갔다.
훗날 그 바위태종대(太宗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운곡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忠義)였음을 그가 남긴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짐작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최영장군을 기리는 것과 우왕,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운곡은 여섯 권의 야사를 집필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후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것을 가묘에 잘 간수하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에 유언은 지켜졌으나, 증손자 때에 책의 내용을 살피다가 혼겁하여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원천석(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하가 세조실록에 전한다.

 

◉ 세조실록 - 사서수거령에 수거된 목록에 기록된 고유사서목록 (환단고기 고증)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여차하여 그런 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조정에서 알게 되면 멸문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조선에 와서는 그 아들 되는 태종 이방원이 유교의 가르침 국시와 역사관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관에 있었던 우리 전통 역사서를 다 불질러버렸다.

유교국시이념에 어긋나면 닉자처참匿者處斬이란 왕명이 기록돼 있다. 우리 고유사서를 숨긴 자는 목을 벤다는 것이다.

이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록이다. 그래서 역사사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머릿 속에 역사관이라는 것은 불교사관, 유교사관, 이것이 이조 오백년을 내려오면서 결국은 우리 역사를 일본에게 다 내주고 노예민족으로 전락을 했던 것이다.

주체성이 결여된 이런 사대주의 국시는 국난의 위기에 민족과 국가가 사분오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한말 외세에 휩쓸리던 그 중심에 근대 역사의 문을 연 동학혁명 농민군들의 절규는 이러한 동방역사의 외세침탈에 대한 저항이자 국혼 부활의 외침이었다.

 

조선시대 유교국시에 어긋나면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잡혀서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원천석은 무학대사와는 세살터울 아래이며, 나옹화상과는 열 살 차이가 난다.

“고려사”에 의하면,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등과 모두 금문책(金門策:과거)을 꿰뚫은 동문들이다.

고대문자나 고대사에 달인들이었던 것이다.

 

치악산에 들어간 것은 이성계가 위하도 회군할 무렵일 때였는데 그는 정치에 대한 회의감이 너무 강했다.

그가 누워 있는 묏자리는 무학대사의 선물이었다.

묏자리가 입향 방위가 풍수법상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것은 무학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선택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 주고 있다.
형국으로는 포은 정몽주나 목은 이색의 산소보다 국세를 잘 맞추어 있다.

포은 정몽주는 속으로 정가 세상을 꿈꾸었다하니 땅은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일까.

천지는 진실을 알고 참된 자손에 복을 내리는가보다. 특히 ,이곳은 사세가 일품이라고 풍수사들은 입을 모아 칭찬한다.

백호 줄기의 산에 올라서 “봉요혈“을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 벌이 꿀을 따먹기 위해 꽃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처럼 생겼다.

조화치고는 너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천석 생애의 청고한 삶과 가치를 풍수학에 소망을 담았으리라.

그는 한민족 역사의 부활을 염원하였음을 묏자리나마 말없이 깊은 뜻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운곡 원천석은 강원도 횡성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국말국초의 변동기에 그는 고려의 충정을 지키고자 한 조선초의 은사(隱士)였다.

그는 금문과 고서의 대가였다.

그의 사후 손자가 가묘를 개장했을 때 조선 유교사학하고는 대립되는 한민족 고유사서였다고 전한다.

원동중은 원천석이다.

당시 자신의 이름을 은닉하면서 동시에 대쪽같은 사관이었던 동호를 존경해서 필명을 동중이라 하여 자신이 원천석임을 알지 못하게 하여 자신의 후손이 후세에 멸문을 당하지 않도록 한 배려였음이리라.

원천석은 삼성기 하를 집필해 한민족 국통의 계보를 전하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