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그들 비판의 상당 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에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자구字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라고 하면서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그 숱한 인명, 지명, 연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세기적인 대천재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일축하였다.

 

천안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김삼웅은 “『환단고기』가 비록 내용과 용어의 일부가 후세의 것이라 해도 아직 책 자체가 완전히 위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한다.

 

윤내현 교수는 『환단고기』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가 아직 불충분함을 토로한다.

『단기고사』,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에는 47명의 단군 이름이 실려 있는데, 아직 이 책들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나 그 내용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가 충분하게 되어 있지 않다(윤내현, 『고조선 연구』, 331쪽)라고 지적하며 환단고기 내용자체를 연구조차 하지 않으려는 현사학계를 비판하고 있다.

『환단고기』가 주류 강단사학에서 위서로 몰리고 있던 1993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박창범고조선 13세 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五星聚婁] 현상을 컴퓨터로 재현하고 실제 역사 사건으로 증명했다.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 박사도 이 오성취루 현상이 사실이었고 고조선도 실제로 존재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BCE 1733년에 5행성이 저녁 하늘에 나란히 관측됐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 발견됐다.

이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나도 소프트웨어를 돌려봤다.

그 결과 단 1년의 오차도 없이 BCE 1733년 7월 저녁 서쪽 하늘에는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 순서로 5행성이 늘어섰다. 여기에 달까지 끼어들어서 7월 11~13일 저녁에는 글자 그대로 ‘우주쇼’를 연출했다.

이러한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BCE 1733년, 우리 조상들은 천문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트집을 잡는 근대 용어 문제도 『환단고기』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사실 인류 문화사에 전하는 경전의 고본을 보면, 그 시대 전문가나 학자에 의해 정서가 되면서 글자가 추가되거나 부분적으로 윤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뒤에 뛰어난 대가가 나오면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글자도 바로잡고 문맥도 바로잡는다.

이때 교정한 사람이 살던 당시의 언어로 교정이 되면서 새로운 판본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문화 발전사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사의 수많은 고전, 유교, 불교, 기독교 경전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전수 되었다.

그럼에도 환단고기에 유독 이런 잣대를 대는 것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기위한 음모에 불과하다.

 

『환단고기』 또한 전해지는 과정에서 연대나 일부 내용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환단고기』의 전체 내용, 즉 천지 광명 역사관, 원형 문화의 틀은 훼손된 게 아니다.

과거 동서 문화의 고본이 내려오면서 추가되고 변형된 것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하다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을 작업한 사람들은 근세 사람이 아닌가. 그 가운데는 불과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이처럼 턱없이 위서론을 전개하는 것은 그들이 신교 문화와 신교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인류 시원역사가 워낙 기존 역사서와 달라서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어떤 학자가 위서라고 바람을 넣으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처럼 ‘글쎄 그런 것 같다’하고 대개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만다.

 

윤명철은 『환단고기』가 진서냐 위서냐 하는 것을 떠나서, “이 책이 한국의 사회 사상계 혹은 대중적인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현상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환단고기』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영향력, 역기능과 순기능을 점검하고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역사발전의 긍정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진지한 모색을 해야 한다”라고 한다.

송호수, 안창범, 고준환 등도 『환단고기』의 모든 내용을 다 조작된 것으로 불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는 고대 한중일 삼국의 관계, 북방 유목민족의 발흥 등을 다루는 정치경제사에서 언어, 문자, 음악, 의식주 등을 다루는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각종 주제를 담고 있다.

또한 『환단고기』에는 동북아 원형 문화의 인간론, 신관, 자연관, 역사관을 전해 주는 신령스러운 이야기가 꽉 들어차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환단고기』는 단순히 인간 중심의 역사서가 아니라 ‘천지 광명의 삼신문화 역사서’이다.

때문에 비뚤어진 의식으로는 환단 시대의 시원 문화와 창세 역사가 밝히는 대도의 세계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

고대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현대의식으로 고대문화를 해석해서 고대역사와 문화를 왜곡함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시대의 문화정신, 종교, 정치, 사회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바른 역사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②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았다.

범례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 1943)와 오동진(1889~1944)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다.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일본군의 간도출병과 홍범도에 관한 기록이다. 홍범도의 호걸스런 기풍, 독립군 진영내의 분열상, 그의 전술전략, 한쪽 다리에 관통총상 등이 눈길을 끈다. 그는 청산리 전쟁 중에 총상을 입었던 것 같다.

다음은 홍범도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항일투쟁을 단순 명확하게 말해보면 가장 먼저, 가장 활발히, 가장 오래 투쟁을 한 우리민족의 영웅이다.
심하게 얘기해서 이순신 장군에 버금갈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사람이고, 정식 군인으로 평양감영의 나팔수 출신이며, 따라서 정식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나팔수는 오늘날 무전병과 같아 글을 모르고선 절대 맡을 수 없는 보직이다. 어느 책을 보니까, 홍범도 장군을 일자 무식꾼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왜곡되게 쓴 책으로 돈벌이하는 사기꾼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잠시 금강산 초계사에서 스님생활을 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적손인 스님으로부터 각종 진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비구스님과 사랑에 빠져 스님생활을 마감하고 함경도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포수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고 함경도 삼수갑산을 넘나들면서 명포수로 맹활약을 했다. 이때 험한 속의 날쌘 산짐승을 잡으려면 몇날 몇일을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나타나면 협공해서 잡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포수들은 모두가 사격에 관해서 명사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도 움직이는 목표물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봉오동 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독립군과 왜놈들 정규군과 정면승부를 한 최초의 전투라는데 있다.

전과는 283중 46명을 사살했고 전멸 시킬 수 있었지만 갑작스런 소나기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독안에 든 쥐를 놓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왜놈들에겐 하마터면 전멸이라는 치욕을 면하는 순간이었다. 얼마 후 치욕을 씻고자 혈안이 된 왜놈들이 홍범도 부대를 찾고자 헤매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김좌진 부대와 조우해 벌어진 전투가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전투의 시작은 김좌진 부대가 했지만 전투과정에서 김좌진 부대는 왜놈들에게 밀려 쫓기는 위기에 빠졌지만 홍범도 장군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어 무사할 수 있었고 이때 홍범도 부대는 위기에 빠진 김좌진 부대를 도움은 물론 일본군의 협공을 역이용해 일본군끼리 총질을 하게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러나 훗날 이범석 장군(당시20세)의 자서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설처럼 기술해 청산리 전투가 김좌진의 공 인양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진짜 승리자인 홍범도 장군(당시52세)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는데 일조를 했다.

일제때 배운 학자들로 이뤄진 해방 초기의 역사학계는 이러한 역사 왜곡에 면밀한 연구 없이 인용해 일본군들을 그토록 벌벌 떨게 한 민족의 영웅인 홍범도장군을 역사의 노숙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항일의병과 독립지사들은 한민족의 오염되지 않은 고유의 역사사서인 환단고기를 읽고 강독을 하며 대한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위협한 제국주의에 강력히 항거한 것이었다.

역사관이 부족한 그들이었다면 과연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혼을 바쳐 나라를 되찾으려 했겠는가.

그 당시도 일명 지식인이었던 많은 배운자들은 역사관이 부족한 시대조류에 편승해서 사대주의에 기대어 일본을 믿고 그들 편에 섰다.

바로 이 독립운동사를, 해방 후 친일세력이 득세를 하면서 거의 독립운동사를 가르치지 않거나 철저히 왜곡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정신적 기반마저 신화로 치부되어 환단고기는 한낮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서 조작된 사서로 몰아 붙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원래 보급이 없던 독립군으로서는 교포의 큰 부락을 만나지 못하면 거의 몸에 지녔던 소금 섞은 좁쌀가루로 굶주림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로는 강냉이나 날밀떡, 호박 같은 것도 구할 수 없어서 세 네 끼씩 굶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백 여근의 무장을 몸에 걸치고 하루에 백 수십리 길 험산 황야를 가로질러 강행군하면서 피가 튀는 치열한 전투까지 치루었던 것이다. 그 배고픔, 그 추위, 그 투지가 아직 숨소리의 갈피엔 배여 있다. 어찌 내 이를 잊을 수 있으랴!


영하 삼 사십도의 혹한에 눈산이 부서져 나리는 듯한 눈보라 속에서 비록 때 늦게나마 면군복(솜군복)을 입게 되는 것은 천만다행의 행운이었던 일인저! 그뿐이랴. 중상한 전우가 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을 눈 앞에서 목도해야 했고, 경상자에게도 소독약 한 번 써본 일이 드물었다.

범례에서 계연수는 “환단 이후로 계속 전수되어 온 삼일심법三一心法(태고 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동방 대광명의 참 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 하도다!”라고 벅찬 심정을 토로했다.

 

발간 의의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요, 또한 민족 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게 되었으니 크게 경축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1914년(51세) 대영절에 계연수는 단학회 동지들과 평안도 삭주 천마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혈맹을 맺어 ‘역사 회복 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다짐하였다.

이듬해 10월 단학회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기면서 관전현 홍석랍자紅石拉子에 배달의숙倍達義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열어 청년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천마대天摩隊,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민사義民社, 벽파대碧波隊,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에 속한 단원들의 사상적 계몽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단학회가 결성된 지 10년이 지난 1919년 3월부터 기관지 <단학회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제8호까지 발간하였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 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흉포한 야욕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천 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 계연수는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유교사대주의 노선을 걸었던 조선시대에는 환단의 역사를 숨겨서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운초 계연수 선생이 내려오던 한민족 고유사서를 환단고기로 합본하면서 우리 상고사가 전수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상고사가 고스란히 실린 환단고기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최근 식민사학계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과 언론에서 환단고기를 ‘환빠’로 매도하는 이유는 환단고기가 살아나는 만큼 독립운동사가 살아나고 해방 후 현대사의 주도권을 쥔 외래사대주의자들과 친일파, 그리고 친일식민사학자들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환단고기』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사는 것이다.

결국 찬란한 선조들의 역사를 죽이는 매국행위를 해야만 자신들의 부귀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이다. 자신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책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태천에 살던 백관묵白寬默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의 소장본이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李沂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다.

 

백관묵(1804~?)은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 헌종 6년(1840) 식년시式年試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백관묵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일간지 <문화경제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아들 백삼규白三圭(1855~1920)는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다. 백삼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 운동을 시작하여, 1910년 경술국치 후 큰아들 인해仁海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농무계農務契와 환인계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보민회保民會, 일민단日民團, 강립단强立團 등을 숙청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백삼규의 장남 인해도 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21년 불심검문에 걸려 격투 끝에 순국하였고, 그 후 둘째 인제仁濟도 순국하였다.

삼부자가 모두 일제에게 희생되어 구국의 충혼으로 승화한 것이다.<문화경제신문>, “화서학파華西學派 인물열전” 246회, 2011.4.9.

 

그리고 이형식은 1796년생으로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계연수가 이형식을 생원이 아니라 진사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친 이사겸李嗣謙이 진사로 합격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형식 소장본에는 『단군세기』도 합본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관묵의 『단군세기』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다.
이기(1848~1909)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다. 이기는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유하였는데,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리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해 이정직은 “대개 백증(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백증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라고 평하였고, 황현도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 활동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戰後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羅寅永(나철羅喆,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해 11월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自强, 자급自給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絶食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이암의 현손)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기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역사서를 읽었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가 계연수에게 전해 준 『태백일사』도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오던 것이다.

이러한 이기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계연수의 간략한 생애가 기록된 『해동인물지』에 따르면, 계연수의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한 후 무술년(1898)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太白遺史』 등을 간행하였다.

기미년(1919)에 임시정부의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신철학통편』은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한(1916)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안경전 역주자는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檀檀學會 회장인 양종현(1948~ )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계연수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다.

양종현씨는 환단고기가 이유립선생의 창작이라는 강단 식민사학의 음해에 대노를 했다.

그는 공부를 할 때 끌로 판 목판 인쇄본의 글자를 한 글자씩 짚어가며 스승님과 같이 공부를 했다고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계연수는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로부터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환단고기 역주』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③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세계 최고最古의 옥玉 문화】
6천여 년 전에 벌써 국가 단계의 복잡한 문명을 일구었다는 사실도 인류의 창세사를 다시 쓸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홍산문화가 세계인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문화이다. 
  
특히 발해연안 지역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에 ‘옥玉’ 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신령 령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가운데 ‘입 구口’ 자 3개)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는 뜻이라 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자인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 바로 옥인 것이다.

중국의 고증학자 왕궈웨이王國維의 해석에 의하면 ‘예禮’ 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 자 위에 두 개의 옥[曲]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즉 예라는 것은 ‘옥을 바쳐 신을 섬기는 것’이다. 요컨대 선사 시대의 석기와 토기는 생활용품이었지만, 옥기는 신을 섬기는 예기로 제작되었다(이형구·이기환, 같은 책, 156~157쪽).
  
이형구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발해연안 고대 문화 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옥문화입니다. 고대인들의 신앙적인 마음에서 옥을 선호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하는 옥의 특징을 보면, 용 신앙이라든지 새 신앙이 우리 민족, 동이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영덕 강구면 오포리에서 나온 곡옥을 보면, 그 모양에 입이 있고 구멍도 나 있어서 어떤 사람은 태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누에 같다고도 하지만 저는 용이라고 봤습니다.

홍산문화 대릉하 유역에 적석총이나 석관묘에서는 약 20센티미터의 옥이 나오는데 고리에다 끼워서 가슴에 걸었던 것으로 이 또한 용의 형상입니다.

“한국의 곡옥은 용의 변천일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용신앙의 기원하면 중원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만리장성 너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최초의 용의 형상화뿐 아니라 중국문화의 원류가 중원이 아니라 동북지방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이다.”

부장품이 나온 31기의 묘 가운데, 신석기 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는 단 한 점도 없이 옥기만 발굴된 묘가 26기나 된다.

특히 제2지점 21호 묘의 남성 인골은 옥으로 옷을 해 입은 듯하다. 옥거북, 옥베개, 옥패玉牌, 옥벽玉璧 등 무려 20점의 옥 장식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신을 치장하고 있다.

제5지점 중심 대묘에 누워 있는 남성 인골은 양 귀 밑에 옥벽, 가슴팍에 옥장식, 오른팔에 옥팔찌, 양손에 옥거북이 치장되어 있었다. 신령한 거북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죽어서도 신과 소통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자 정치적 수장으로 간주된다.

 

부장품으로 옥기를 사용한 것은 옥이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서 옥을 ‘오덕五德을 갖춘 아름다운 돌’이라 하였고,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고 하였다(君子比德於玉焉(『예기』「빙의聘義」). 그리고 『주역』 「설괘전」에서는 팔괘의 첫째인 건乾괘의 성격을 옥으로 표현하였다(건은 … 옥이다[乾, … 爲玉] 『주역』「설괘전」).

그 까닭은 옥이 하늘의 빛깔과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천상의 수도를 옥경玉京이라 불렀고, 옥경에 거하며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을 옥황상제玉皇上帝라 부르며 모셨다. 

그래서 홍산인들은 옥을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 신과 소통하는 신물, 천제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흔히 고대를 석기-청동기-철기의 3단계로 구분한다. 하지만 발해연안 영역에서 옥기로 뒤덮인 수천 년의 유적지가 대량 발굴됨에 따라 중국학자들은 청동기 이전에 옥기 시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대 동북아의 옥은 홍산문화보다 더 오래된 흥륭와문화(BCE 6200~BCE 5200)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내몽골 자치구의 오한기敖漢旗에 위치한 흥륭와촌에서 세계 최초의 옥결玉玦(옥 귀걸이)이 발굴되었다. 이 옥결에 사용된 옥은 요동반도의 수암에서 나온 수암옥岫岩玉이다. 수암은 흥륭와촌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진 곳으로 압록강에서 멀지 않다. 당시 만주의 동쪽에서 난 옥을 서쪽으로 가져가 옥제품으로 가공할 만큼 만주의 동서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옥결이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의 옥결은 그 외양이 흥륭와문화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BCE 6천 년경부터 요서, 요동, 한반도가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 문화가 후대의 홍산문화에서 더욱 다양하고 화려해진 점은, 하나의 연속된 문명이 3,4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옥기 유물을 보면 재질은 수암옥(청황옥青黃玉)이 대부분인데 그 색상은 천연 옥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료와 같은 것으로 채색을 한 것도 있다. 검은색의 흑피옥도 출토되었는데, 흑피옥은 중국의 신석기 유적에서는 출토된 바가 없다.
  
요컨대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의 것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단 시대 배달 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다.

시베리아과학원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도 홍산문화의 독자성에 대해 “홍산문화는 중원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중원문화가 홍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용 문화에 대하여 “중국의 용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기록을 보면 북방 이민족 가운데 용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도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용봉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홍산인이었다.

중국에서는 요하지역에서 발견된 이 유적을 ‘신비의 왕국’또는 여신상이 발견되어 ‘여왕국’이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이었다는 요하문명은 그동안 부단히 고조선 영역이라고 주장되던 곳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단군조선보다도 빠른 기원전 3,000년~3,500년경에 이미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민족사로 본다면 문헌기록상 배달국에 해당하는 시기다. 중국은 그동안 황하유역에서 태어난 선진 문화가 각지로 전파 됐다는 황하 중심문화를 기본정설로 고수해 왔었다. 

그러나 만리장성 밖에서 기원전 3000~3500년전에 요하지역에 고대국가가 존재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중국은 이를 근거로 그동안 전설속의 인물이던 삼황오제를 중국의 실존역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조선이 실재했냐 아니냐, 논쟁을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는 우하량 지역의 신비의 왕국을 중국 시원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하량 지역 즉 요령지역은 그동안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이 되어 동이족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곳이었다.

이런 유물들이 나온 지역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던 터이며 이런 유물들은 고조선의 표지 유물들이다.

이런 홍산 유적이 우리 고대사임일 밝혀주고 있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다. 홍산문화는 환단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환국·배달·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왜 홍산문화를 알아야 하는가
이렇게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인류사 최고最古’인 홍산문화를,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2~3천 년 앞선 황하문명의 원류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황하문명의 원 뿌리가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중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 난처함을 다민족 역사관으로써 해결하였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모두 중국의 문화와 역사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면서 중국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앞서는 세계 최고最古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린다.

환단 시대의 한민족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둔갑시켜 이제 경제대국에서 문화대국까지 꿈꾸는 것이다.

홍산문화를 황하 문명의 뿌리라 하여 자기네 문화로 둔갑시켰지만, 심정적으로는 동방 한민족 문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2000년대 후반, 우하량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를 놓아 유적지를 은폐하였다. 홍산문화가 밝혀질수록 중국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에 불리해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유적을 파괴한 것이다.
  
중국이 미래의 중심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때, 환단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명에 대해 침묵하거나 우리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지배해 온 거짓 역사의 미몽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시원 역사와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한민족의 원형문화를 회복하여 웅대한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환단고기 역주』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 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 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 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본 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본 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 집順菴集』「동사 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 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 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 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 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 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 단군제에 소련 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 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의)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 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 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①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 동북아의 여러 신석기 문화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의 유적 발굴을 통해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요서 지역(발해연안 지역)의 신석기·청동기 문화 발굴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내몽골 적봉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이래,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발굴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2006년 6월에도 거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내몽골 적봉시 오한기敖漢旗의 초모산草帽山 유적지에서 5,500년 전 적석총군이 발견되었다.(중국 CCTV 보도 내용, 2006.6.10)
  
요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신석기 문화는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하서 문화이다. 현지인조차 길을 찾지 못하는 오지에 위치한 소하서 유적은 당국의 문화재 신고 정책에 따라 주민이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중국은 이 문화를 ‘인류 최고最古의 신석기 문화’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소하서 유적은 7,000~8,000년 전에 만들어진 발해 연안 빗살무늬토기와 그 연대가 일치한다. 발해 연안 빗살무늬토기는 그 재질과 모양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다. 이것은 소하서 문명의 주인공과 동방 한민족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요서의 여러 신석기 문화 가운데 홍산문화는 세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요령성 조양시 건평建平현과 능원凌源현의 접경지역에서 번창했던 홍산문화는 신석기 말기의 문화로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사용한 BCE 4700~ BCE 2900년경의 문명’이다. 하가점 하층에서는 BCE 2400~BCE 1500년에 걸쳐 농경집단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났다. 이 하층에서 비파형 청동검이 나왔는데, 그것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¼ 만주와 한반도에¼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인 것이다.
이처럼 문헌 기록으로 보나 유물로 보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드넓은 땅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다.
  
1954년에 중국 학자 인다尹達는, 철광석으로 뒤덮여 산 전체가 붉게 보이는 ‘홍산紅山’에서 이름을 따서 이 문화를 ‘홍산문화’라 명명하였다. 이형구는 홍산문화를 ‘발해연안문명’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발해연안이란 발해를 둘러싸고 있는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를 말한다. 세계 4대문명과 마찬가지로 이 문명은 북위 30~45°에서 발생하였다. 그는 “지중해 문명(지중해를 둘러싸고 태동한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창조한 문명은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 내는 젖줄이었다”라고 밝혔다. 

◉ 고대국가의 기틀인 총塚·묘廟·단壇이 모두 나타나는 홍산문화
홍산문화는 1979년 객좌현 동산취촌東産嘴村 발굴과 1983년 그 인근 우하량촌牛河梁村 발굴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동산취에서 엄청난 제사 유적이 발견되고, 우하량에서 돌무덤[塚], 신전[廟], 제단[壇]이 한꺼번에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형구 교수는 총·묘·단을 인류의 정신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3요소라 한다. 이 3요소가 모두 나온 것은 다른 신석기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이 돌무덤, 즉 적석총 유적지이다.

적석총은 고대로부터 삼국 시대 때까지 계속 나타나는 동이족의 대표적 묘제墓制로 황하지역의 화하족 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은 것이다. 충적층 지대인 황하 지역에 살던 화하족(중국 한족의 조상)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직접 주검을 묻거나 관을 묻는 형식의 널무덤(토광묘土壙墓)을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 지역에 살던 동이족은 주로 돌무덤을 지었다.

우하량의 돌무덤은 약 5,500년에서 5,000년경 전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돌무덤은 BCE 2000~BCE 1500년경의 것이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요서 지역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했거나 요서 문화가 한반도에 전파된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적석총, 석관묘 등의 돌무덤이 시베리아에서 기원되었다’고 말하는 강단사학계의 학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요서의 돌무덤이 시베리아 것보다 1,500년을 앞서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한민족은 시베리아보다 요서 지역과 문화적으로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돌무덤 문제만으로도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BCE 4천 년대에 요서에서 돌무덤을 짓고 문명을 일군 동이족은 바로 배달의 백성이다.
  
우하량의 여러 적석총 무덤 중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제2지점의 방형 적석총이다.

‘중심에 큰 적석총(돌무지무덤)’과 그것을 에워싼 ‘27기의 석관묘(돌널무덤)’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앙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홍산인들이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서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시사한다.

이 대형 무덤군의 바로 옆 자리에서 원형으로 쌓은 적석총도 함께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원형 적석총은 원래 최하단의 직경이 22m에 달하는 3단 높이로 지어진 것이었다. 일반적인 돌무덤의 양식과 다른 이 건축물의 용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중국 학자들은 이 적석총의 용도에 대한 실마리를 명·청의 황제들이 천제를 지내던 북경 천단공원에서 찾았다. 그곳 원구단이 우하량 적석총과 동일한 형태의 원형 3단이기 때문이다. 우하량 적석총도 천단공원의 원구단과 마찬가지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단으로 지어진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의 이 원형 제단이 홍산인의 정신문화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요소인 단壇을 대표한다.
  
각 층의 둘레를 따라 늘여 세워진 원통형 토기 또한 이 원형 건축물이 제단이었음을 말해 준다. 요령성 조양시의 덕보박물관 왕동리王冬力 관장은 이 독특한 토기에 대해 “토기의 위쪽에 덮개가 없고 아래쪽에 바닥이 없는 것은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장은 제단의 주변에 원통형 토기를 둘러 세워 하늘과 통하는 소통로를 만들었다”라고 해석한다.
  
방형으로 짜여진 대형 무덤군과 천제를 올리던 제단을 함께 갖춘 우하량 제2지점 유적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전체 구조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천원지방은 ‘아버지 하늘의 정신은 둥글고, 어머니 땅의 정신은 방정하다’로 해석된다. 천원지방 사상이 일본으로 전해져 전방후원형(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원형인 형태) 무덤의 형태로 나타났다. 천원지방 구조는 배달 시대 이후 고조선 때 지은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명나라 때 지은 북경의 환구단, 조선 말기에 고종 황제가 세운 원구단 등 제천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5,500년 전에 배달 동이족이 세운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제천단의 원형이고, 나아가 배달의 천제 문화는 동북아 천제 문화의 뿌리인 것이다. 
  
홍산문화를 일군 배달 동이족의 놀라운 수준을 보여 주는 셋째 요소인 신전(廟)은 우하량 제1지점에서 발굴되었다.

그런데 신전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여신이었다. 이형구는 홍산인들이 여신을 모신 사당을 지어 지모신地母神에게 제사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多産을 기원했다고 말한다. 여신묘가 상당히 좁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특권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 들어가 제를 지낸 이는 제정일치의 고대 사회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매자 구실을 한 정치적, 종교적 수장으로 단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총·묘·단이 모두 나타나는 우하량은 홍산인의 성지였고 제정일치 시대였던 당시에 임금이 하늘과 소통하던 곳이었다. 한마디로 우하량은 당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하량이 동서 10km, 남북 5km에 걸쳐 있는 홍산문화 유적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곰을 숭상한 홍산인
그런데 반지하식 구조로 지은 우하량의 여신묘 터에서 여신상과 함께, 홍산인의 토템 신앙을 보여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곰 소조상은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새 소조상은 북실北室에서 출토되었다. 곰토템과 난생설화는 한반도와 북방유목민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삼국유사에서 이야기하는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신화로 알고 있었는데 홍산유적에서 웅녀여신상과 곰발바닥 옥웅룡 등이 발굴 된 것이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의 목마신화가 1870년대 트로이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던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하량뿐 아니라 광범위한 인근 지역에서 ‘옥으로 만든 곰·용 혼합 형태의 형상물[玉熊龍]’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곰 토템이 아주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홍산문화 유적지 전체에서 발굴된 옥기 가운데 웅룡熊龍이 상당히 많은데, 이것은 주로 죽은 자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곰을 얼마나 신성시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적석총 무덤에서 새 모양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홍산인이 새 토템 신앙도 하였음을 보여 준다. 현재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전역과 일본 등에도 이 새를 토템으로 하는 솟대문화가 광범위하게 남아있다.
  
여신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한 홍산인을 환단 시대의 배달 동이족과 연관지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을 『환단고기』에서 전하고 있다. 바로 배달이 세워진 직후, 호족과 웅족이 환웅천황을 찾아와 환족으로 교화되기를 청한 사건이다.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 중심의 사나운 부족이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 중심의 우매한 부족이었다. 삼신의 도를 깨쳐 광명 인간이 되기 위해 두 부족은 일체의 활동을 금하고 수행 공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호족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었고 웅족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행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이처럼 요서 지역의 유물과 『환단고기』가 밝히는 내용을 종합해서 볼 때, 홍산문화는 환단(환국과 배달)의 문화로 볼 수밖에 없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③

진실의 역사

일본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③

아베정권은 ‘강한 일본’을 내세우며 일본인의 역사인식 자체를 수정하려고 한다.

일본의 우익은 역사 수정 신봉자이이다.

“한국 경제를 뒤흔들어 혼란에 빠뜨리고 생존의 손짓에 정치적 암거래를 할 것이다.”
“일본 금융기관이 한국 경제에 지원과 협력을 중단하면 삼성도 하루 만에 무너질 것이다.” 〈일본 주간 문춘〉
“원화를 최대한 사들여 한국 통화가치를 높이자. 그러면 일본이 한국경제를 통제할 수 있다.” 〈하기우다 자민당 총재 보좌관〉

만약 경제 대혼란의 상황에서 한국이 천문학적 자금지원을 받고 경제복속이 현실화되면 일본은 끊임없이 내정간섭에 나설 것이다.
미국은 일본편이란 사실도 공식적으로 확증을 받았다.

미국의 한미일 동맹 중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미일 동맹이다.

한국이 섭섭해 할지 몰라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다.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점점 동북아시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면 당연히 미군이 개입할 것이다. 

한미일 합동작전이 펼쳐진다면 일본자위대는 동북아 안정을 위해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다.

전시작전 통제권이 미국에 있는 한국은 방위권을 미일군사 동맹체제에 넘겨야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은 핵무기 보유방법을 우회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핵잠수함과 핵항공모함을 운영하려는 것이다.

일본은 천문학적 금액의 미국 국채보유국으로 국채와 핵무기를 맞바꾸고 형식상 핵잠수함 관리 권한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핵보유국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밖에도 일본의 경제 지원을 받았거나 국제기구 장악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한,일관계를 두고 한국 편을 들 수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 한 나라도 없다는 일본주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약소국이 강대국의 몰염치를 아무리 비판해도 강대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냉혹함이 국제 질서의 현실이다.

외교의 힘이 국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은 ‘핵’의 힘으로 큰소리를 내고, 일본은 ‘자본력’으로도 모자라 핵보유국을 꿈꾸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는 명분보다 실리가 당연히 우선시 된다.

힘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를 피할 수 없음이다.

 

세계를 압도하는 경제력, 남이 결코 넘볼 수 없는 국방력을 갖추지 않으면 한국의 외교는 외교가 아니라 사교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을 국가차원에서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베의 행보는 ‘강한 일본’을 그리는 일본우익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냈다.

장기적인 경기불황에 국민 피로도가 어느 때 보다도 높은 일본에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일본은 철저히 국제 관계가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에 망상을 꿈꾸지 않는다. 철저한 실리외교다.

 

오늘의 한반도는 구한말과 마찬가지로 미, 중, 러, 일 등의 열강의 각축장으로 바뀌었다.

이 기회를 놓칠리 없는 일본이다. 무서운 나라이다.

일본은 먼저 중국에 센카쿠 영토 분쟁을 선언했다. 쿠릴열도 싸움도 시작했다. 동시에 미국과의 군사동맹은 더욱 강화시켰다.

아시아, 아프리카, 심지어 유럽과도 튼튼한 동맹관계를 구축한다.

그러면서 3차 정한론 한국 침략을 준비한다.

역사를 왜곡하고 독도 도발을 일상화 한다. 그런데도 한국은 식민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최종목적은 뭘까.

일본의 검은 속셈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한국은 또다시 일본에 당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힘을 잃고 사회적 혼란과 갈등으로 표류하면 일본은 흉악한 민낯을 서서히 드러낼 것이다.

일본 야욕이 현실로 드러나면 100여년 전 조선을 팔아먹었던 지배계급이 21세기 대한민국에 다시 환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뉴라이트 세력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나라를 넘길 때 지배계급은 늘 살아남아 부귀영화를 이어 갔다.

반대로 민중은 가장 큰 고통의 시련을 견뎌야 했다.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에 대한 논고이다.

『조선인은 방종, 사치, 낭비, 사행의 성격을 가졌다. 남에게 빌붙어 생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조선인은 모방성이 풍부해 구미사상 같은 것을 아무런 심사숙고도 없이 통째로 삼키듯 받아들인다.

조선 3000년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나 대국만을 따르는 사대주의 역사였다. 조선인은 사대事大에 익숙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이 불을 뿜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주적(主敵)을 북한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한국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 국가가 최우선해야 할 과제가 궁극적으로 ‘북한정권 붕괴’라면 그것은 정세에 무지한 ‘자기 도취상태’이다.

남북이 이념대립을 하고, 남한에서는 좌우대립과 내분이 심할수록 일본은 웃을 것이다.

일본은 자기 고유의 역사 문화 정신 위에 외래 사상을 받아들여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나 한국은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외래 사대사상이 주과 되어 우리 역사문화를 파괴해 버렸다.

분열된 한민족을 통합하려면 한민족 고유 정신에 기초하여 시원역사를 회복할 때 통일 민족국가로 나가는 초석을 다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을 사분오열로 갈라놓았던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았던 좌우 이념대립을 넘어서야 한다.

남한도 북한도 각자 자유와 공산이라는 이념에 갇힌 틀을 깨고 한민족 고유의 역사문화 동질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역사를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과거의 제국주의의 유산인 자유와 공산이라는 이념이 더 이상 한국의 통일역사를 열어나가는데 장애가 돼서는 안 된다.

이제 식민사관을 청산하고 한민족 고유의 역사문화에 기초한 통일역사관을 정립해야 할 때이다.

일본은 한국이 자신들의 역사문화를 잃고 남북이 심각하게 대립하고, 남남갈등, 내부의 극단적 갈등이 회복 불능 상태로 빠지길 기다릴 것이다.

리는 일본, 중국, 북한 문제가 늘 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냉전체제 붕괴 이후 한반도 주변의 열강들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중국의 팽창주의, 일본의 극우주의, 러시아 연방의 세력 확대가 가시화되고 있다.

정반대로 남과 북은 민족갈등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러다가 민족 소멸이란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한반도에 급변 사태가 오면 임진왜란, 구한말과 같이 한국은 내부가 먼저 붕괴될 것이다.

또 다시 열강이 우리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암운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던 역사가 2017년 대한민국에 다시 먹구름이 되어 몰려오고 있다.

강대국이 결코 넘볼 수 없는 힘을 갖추지 않으면 침략의 먹구름은 천둥과 번개, 폭우를 동반하며 한반도를 재앙으로 몰고 갈 것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일본은 ‘강한 일본’을 내세우며 그들의 전통 역사문화인 신사문화를 기반하여 국민 총화단결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한민족 통합의 구심점인 단군 조선사를 도려내기 위해 안달이다.

심지어 한국의 식민사학계에서는 단군조선 해체론까지 대두되고 ‘민족’이란 단어 자체를 부정적으로 몰고 가는 실정이다.

일본은 장기적인 경제침체, 후쿠시마 원전사고 등으로 움직이지 않던 여론이 흔들리고 있다.

영토분쟁, 과거사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노골화 하며 외부 분출 에너지를 내부에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생존은 일본의 본색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일본은 실리와 실용으로 움직이는 국가이다.

일본의 우경화 행보가 단순히 일본 국내 정치용이라는 예측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일본의 아베총리의 행동을 조목조목 살펴보면 결국, ‘일본은 다시 한국을 침략한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철저히 준비해 가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에 눈떠야 한다.

한국이 망언시리즈라며 비판을 하는 사이에 일본 극우 세력은 목표를 향해 내용과 강도를 높여 가고 있다.

더구나 일본 국민이 이런 움직임에 점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집단적 광기, 한반도에 전운이 드리워져 가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정치와 국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한국의 운명이 걱정스럽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냉철한 판단을 하여 국제 정세의 흐름에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철저히 국가의 미래에 대비를 해야 한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②

진실의 역사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구한말 시절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유일한 차이는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이다.

이제 중국은 순식간에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며 팽창주의를 취하고 있다.

중국 견제에 나선 미국은 군사력을 증강하고 일본도 미국을 등에 업고 재무장에 본격 나서고 있다.

불행히도 지금의 모습은 구한말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온통 분열주의로 탈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구한말 러시아가 득세하면 친러파, 청나라가 입김이 세지면 친청파로 돌아서고, 일본이 강해지자 친일파로 돌아서서 나라를 팔아먹었다.

다시 미국이 부상하자 친미파가 득세했다. 시세의 흐름에 빠른 이 기회주의자들이 엘리트층이었다.

도덕성이 함께 갖추어졌었다면 이들이 애국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엘리트 계층은 그렇질 못했다.

이들은 친일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친일역사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미화를 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 어리석다’고 했던 아베 총리의 말에 분노만 할 게 아니다.

냉정하게 우리를 되짚어 보고, 눈 똑바로 뜨고 역사를 곱씹어 봐야한다.

그리고 일본 우익은 한국이 강제징용 배상금을 청구하면 일본은 한국을 금융공격으로 무너뜨려야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일본은 장기불황, 대지진, 등에 의한 사회경제적 불안과 불만을 풀어낼 출구가 절실해졌다.

이에 아베는 ‘강한 일본’을 내세우고 군국주의 부활을 실현해 가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준비해 간다는 사실이다.

강한 국가는 강한 군대를 가져야한다는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야욕을 드러낼 때마다 ‘평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임진왜란 당시도 무장집단이 지배층이었고 메이지 유신의 지배 계층도 무장세력이었다.

강한 일본은 군사력에서 나왔고 그 달콤함에 다시 취하고 싶은 일본이다.

특히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실제 일본이 침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주었다. 

잃어버린 20년은 강한 보수정부 아베를 낳았다.

아베는 일본 경제부흥을 위해 아베노믹스를 선포하고 무제한적 양적완화 정책을 폈다.

돈을 마구 찍어서 경제를 살린다는 극단적 처방을 선택한 것이다.

양적완화는 경기부양을 위한 마지막 처방이다.

현재는 가시적으로 성공적인 정책처럼 보이고 있지만, 일본은 국가 채무가 GDP대비 300%를 육박하고 있다.

언제 이 버블이 폭발할지 모른다. 일본 경제의 몰락은 세계경제 공황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실패를 한다면 일본뿐 아니라 세계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가게 된다.

결국 일본은 눈을 돌려 폭발 직전의 내부문제를 밖으로 쏟아내며 해결할 것이다.

본으로서는 최악의 타개상황을 준비해야한다.

그래서 왜곡된 군국주의 과거사를 국민에게 세뇌시키고, 독도 분쟁화에 가속도를 붙이는 이유이다.

 

중국 팽창에 대한 미일 동맹강화, 남북한의 긴장 고조는 한반도를 극도의 불안 속으로 몰고 있다.

일본은 외부 침략을 통해서 생존과 발전의 길을 찾아내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19세기 정한론이 그랬다.

내부 위기감이 쌓일 때마다 어김없이 외부 침략논리를 만들어 국민을 단결시키고 강력한 리더십을 동원해서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일본은 전쟁준비가 끝나면 침략전쟁의 속셈을 여과 없이 드러내 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굉장한 배상금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산업기반을 조성해 부국강병의 기초를 놓았다.

세계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한 약탈로 쌓아올린 부이다.

전쟁을 수반하기 위해 식민지배 국가와 약소국에서 엄청난 자원을 수탈해갔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유럽이 전운에 휩싸이자 엄청난 군수 보급국으로 변신을 했다.

1929년 덮친 세계공황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돌파해 나갔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무력을 이용한 착취와 수탈이 경제부흥의 발판이었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부상을 했다.

한국전쟁은 전후 패망한 일본경제를 회복시켜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한국에 대한 영토 도발, 역사 왜곡을 보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분쟁일상화 전력이 숨어있다’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반도는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식민사학의 노예가 돼서 친일을 찬양하는 지식인이 많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식 억지로 포장된 과거사는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일본인이 만든 한국사를 배우고 있다.

아베는 3차 정한론을 가지고 신일본제국, 아시아 중심을 자처할 것이다.
일본우익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에 유익했다”라고 말한다.

유럽제국주의가 중남미를 식민지 삼고 약탈, 살인, 강간, 강제 개종을 시키고 우리는 그들을 문명세계로 개화시켰다고 하는 주장과 비슷하다.

제국주의는 약육강식의 강자의 논리이지 정의의 논리가 아니다.
잘 사는 게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음은 1912년 《아사히 신문》에 실린 사설이다.

“1945년 8월15일 일본 진주 미군이 일본을 병합하고 미국의 주로 만들었다”라고 전제한 후 “미국이 일본에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일본은 간섭하는 미국에 대해 “절대로 감사할 수가 없다”라는 한 사설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정에 그대로 적용을 해본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가르치며 일본을 강제 병합한다.

영어로 교과서를 배우고, 미국의 역사를 공부한다. 일장기 대신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미국의 국가를 부른다.

이름도 미국명으로 개명 한다. 일본사람이 미국 병사로 전쟁에 나가고 일본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수천, 수만의 동포를 살해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일본인의 고혈을 짜내고 “일본을 발전시켰으니 감사해라”고 하면 과연 일본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역지사지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는 사자성어가 아니다.

 

한국은 식민사학을 청산해서 정의의 역사로 바로 잡을 때 한국사회의 심각한 지도층의 부패와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국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가기 어렵다.

국가를 발전시키는 힘은 역사문화의 저력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면서 한민족의 미래를 열어 나가야한다.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 부활, 독도 침탈과 역사 왜곡 그리고 한국의 뉴라이트 부활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식민사학,

그리고 민족사학을 무너뜨리기 위해 ‘유사역사학’, ‘사이비 역사학’이란 극단적이고 혐오스러운 언어를 써가며 민중으로부터 민족사학을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려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①

진실의 역사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2014년 4월 22일 일본 각료와 국회의원 168명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집단적으로 참배했다.

“전쟁에 목숨 바친 영령을 높이 받들어 숭배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다. 내정간섭을 말라.”

극우세력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강한일본’을 외치는 극우파에게 박수가 쏟아진다. 언론도 우경화를 부추긴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한나절 안에 한국을 접수할 수 있다는 극언도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보고 일본정세에 밝은 일부 지식인은 “이미 침략이 시작 됐다고 말한다.

 

임진왜란과 한일병탄 때처럼 무력을 앞세운 침략이 아니라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

즉 ‘경제침략으로 한국을 삼킬 것이다’고 본다.

지금은 역사 속 일본 침략기와 오늘이 너무나 닮아 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910년 한일병탄시기 모두 오늘의 한국 및 국제 정세와 너무 비슷하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나뉘어 사사건건 분열했다.

한일병합 이전 조선은 분열이 더 심했다.

개화파와 쇄국파의 정변은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러면 오늘의 한국은 어떠한가. 먹고사는 문제 말고 분열상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진보와 보수, 남북분단, 동서지역감정, 이념갈등 등 자기 단체의 이익만 있고 공동의 선은 없다.

 

이런 국내 흐름을 보고, 일본 우익은 “한국은 원래 홀로 설 수 없는 나라”라고 비아냥거린다.

식민사관이 판을 치고 자주독립사관이 무너진 한국은 침략하기 딱 좋은 사회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20여년의 장기 침체와 리더쉽 부재 속에서 아베 총리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고 일본 일체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베의 얼굴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아베는 “나를 군국주의자로 불러도 좋다”라고 선언했다.

일본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외부로 표출시킨 과거 군국주의는 우리에게 엄청난 민족적 상처를 남겼다.

군국주의 무장이후 첫 실천대상은 늘 가장 가까운 한국이었다.

최근 일본의 비정상적 움직임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중요한 점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무장할 때마다 우리나라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10만양병설은 묵살됐고, 19세기 조선은 쇄국을 고집하다 나라를 잃었다.

임진왜란, 한일병탄에 이어 한국을 정벌하겠다는 3차 경제 정한론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보자.
일본은 독도를 놓고 끊임없이 도발에 나선다. 시비를 넘어 자기 영토라고 선언했다.

독도를 분쟁의 씨앗, 침략의 촉매로 삼고자 함이다.
일본이 분쟁 희생양을 잡는다면 당연히 중국보다는 한국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독도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비켜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일병탄 때도 중국을 먹기 위해 조선을 밟고 갔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미.일.중.러의 신경전도 한일병탄 때와 유사하다.

 

미국은 이제 일본을 내세워 중국 팽창을 저지하고 있다.

친일파는 영원히 영속을 하며 부귀를 누리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고 방위력 증강에 찬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국도 도덕과 정의보다는 철저히 미국 국익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전범국가를 파트너로 삼고 있는 미국, 그리고 피해국가를 오히려 정복하도록 방조하고 있는 미국을 보라.

 

일본은 북한과의 밀월관계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일본은 정말 외교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데 한국은 사교에 머무르고 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대가로 일본은 피해액 3억 달러를 지불했다.

북한에는 300억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한다. 일명 원산 프로젝트다.

임진왜란과 한일병탄시절, 때를 놓쳐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21세기 한국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다음은 아베 총리의 말이다.

“한국은 그냥 어리석은 국가이다.”
“중국은 어처구니없는 나라지만 아직 이성적인 외교게임이 가능한 반면 한국은 그냥 어리석은 국가”라고 말했다.

16세기말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19세기말 정한론을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도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21세기 일본지도자가 여전히 한국을 어리석은 국가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베총리는 어리석은 한국을 교화하기 위해 반드시 침략한다는 정한론 유전자의 소유자이다.

 

다음은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우리는 실패했지만 한국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데 한국이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한국인에게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실로 위대했고 찬란했으며 찬연했지만 한국은 결코,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아베 노부유키의 말대로 지금 한국에서 벌어진 역사전쟁을 보면서 이미 식민사학이 사회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일본의 아베총리에서 아베 노부유키의 부활이 보이지 않는가?

 

지금 한국에서는 도종환 의원 문체부 장관 지명을 둘러싸고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하던 민족사학과 사대주의자들이 지향하던 식민사학과의 대전쟁이다. 

강단사학에서는 도종환 의원의 역사관을 가지고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에 경도되었다며 강대한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 민족주의 사관이라고 파상공세를 가하고 있다.

그러면 있는 역사와 영토를 줄이는 것이 세계주의사관이란 말인가.

 

이들은 민족을 이야기하면 이상하리만큼 경도된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국뽕’, ‘국수주의’로 몰아가면서 민족사학을 매도한다.

이러한 이유는 그들의 뿌리가 민족을 배반한 친일식민사관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3년 미 펜실베니아대에서 국제 정치학과 역사학으로 박사를 받았으며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전공한 이홍범 박사는 강대국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역사학적으로 분석하면서 한국의 역사학의 현주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따끔한 지적을 했다.

 

역사가 망하면 민족은 멸망합니다. 우리 민족이 망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외래 종교 역사관이 ‘단군은 신화다’ 해서 한민족 민족사관을 파괴해서 자주 민족통일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민족의 귀중한 역사관을 가지고 민족 자주와 통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홍익역사관으로 조국의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사사건건 반대하면서 민족사관을 패배시키는 세력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세력이 소위 강단사학입니다.

외래 식민사관이 방해하고 파괴하고 그러면 결국 약한 민족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투쟁, 역사전쟁 중에 있습니다.

군사경제는 쉽게 알아보지만 보이지 않은 역사관은 역사 통찰력이 없으면 보기가 어렵습니다.

외래사관이 구원이든 사랑이든 평화든 경제번영을 사용하고 실증적인 용어를 들고 나오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밑에 흐르는 진리정신을 통찰하기 쉽지 않습니다.

위대한 민족만이 역사정신권력을 만들어 세계사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천만 민족을 통합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한다면 영광스런 조국통일을 이루고 세계 선진대국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종교'를 읽고

진실의 역사

'대통령과 종교'를 읽고
뉴라이트, 한기총, 대형교회는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들은 이명박 당선을 기원하는 ‘대선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개최하고, 이명박의 각종 비리 의혹이 터질 때마다 노골적으로 변론을 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지 않는 사람은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는 극언까지 했었다.

이명박 당선의 일등공신은 단연 뉴라이트와 한기총이다. 한기총의 수뇌 대다수가 뉴라이트 중심세력이다.

 

한기총은 보수기독교와 대형교회의 대변자 역할을 해왔다. 개신교인은 대체적으로 보수경향이 강하다.

이명박의 분명한 종교적 성향은 취임초부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명박 정부의 장관 16명 가운데 10명이 개신교 신자였고 불교신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청와대 수석비사관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으로서 폭넓은 인사수용이 아닌 종교 편향적 색채가 분명했던 것이다.

 

이명박은 소망교회 출신이고 대다수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도 개신교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통령은 기독교계만의 대통령이 아니다.

그가 장로 출신이라 해도 다를 바 없다. 정권 창출과 정권 수호과정에서 발휘한 막강한 종교권력을 바탕으로 개신교는 입법과정과 정치현안에도 적극 개입을 했다. 특히 기독교의 이권과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준 자신감과 오만함을 바탕으로 도를 넘어 정권퇴진운동을 주도했다.

개신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공개적으로 개신교에 SOS를 요청하는 정치인도 등장을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김진홍 목사가 주도하는 ‘뉴라이트연합’이 있었다.

개신교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선교방식은 대중들로부터 ‘안하무인 종교’, ‘무례한 종교’, ‘속 좁은 종교’라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공공장소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식의 일방적 선교를 하면서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부산집회에서는 ‘범어사’가 무너지게 해주십시오, “할렐루야” 하는 기도까지 나왔다. 이게 예수님의 뜻은 아니었다. 예수님을 이용한 자신들의 잘못된 믿음을 절대적 진리로 착각한 오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소위 소망교회 인맥들이 대표적 인사라인이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개신교인을 중용하면서 이른바 ‘교회인맥’이 또다시 부상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랑의 교회 인맥’이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항간에서는 소망교회는 ‘지고’, 사랑의 교회는 ‘뜨고’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사랑의 교회 신자가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교회인맥의 정부 참여는 대형교회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국정농단을 한 최순실도 2000년 이후로 기독교로 개종하여 여러 강남의 대형교회를 다니며 인맥을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남 순복음 교회, 소망교회, 광림교회를 다녔다고 최순실 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강남의 대형교회를 다니면서 몇천 단위 헌금도 하고 교회를 리모델링 해주었다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알려진 바와 같이 사이비 무당, 영세교 등으로 언론화한 이면에는 한국사회 대형교회의 권력과 종교간의 유착된 의혹의 눈길을 돌리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박근혜는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고 있지만 ‘종교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개신교인이 대거 중용되는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12명 중에서 개신교인은 8명에 달했지만, 불교와 천주교는 1명도 없었다. 청와대의 3실장, 정무수석, 홍보수석, 교육문화수석, 고용복지수석, 외교안보수석 등이 전부 개신교인이다. 내각인선도 개신교 인사가 압도적이다.

어떤 사람을 임명하든 개신교인이 다수 선정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았다.

기독교 단체의 정교유착이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종교편향적 인사를 보여 왔던 것처럼 박근혜 정부도 지나치게 특정종교로 기울어졌다는 분석과 함께 신중한 인사가 필요하다는 불교계의 우려 섞인 지적도 있었다.

무종교인 박근혜 대통령이 인위적으로 기독교계 인사를 중용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기독교계의 정계진출과 이들이 인맥을 총동원해서 정교유착과 국정개입의 의도적 전략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석비서관 중에 불교신자가 1명도 없어서 무교인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이 청불회 회장을 맡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개신교는 국회 입법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차별금지법은 지난 2007년, 2010년 두 차례 입법이 추진되었지만 무산되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제동을 걸고 나선 곳은 다름 아닌 보수 개신교였다.

보수개신교가 문제 삼은 조항은 종교, 사상, 성적 지향의 차별금지 조항이다. 개신교는 이법이 통과하면 타종교나 이단을 비판하거나, 종북세력을 비판할 수 없고, 교회에서 동생애를 죄라고 가르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미 기득권화되고 보수화된 교회권력을 완전히 뿌리내리고 타 종교나 자신들의 이념과 다른 단체의 행동을 억압하겠다는 의도가 농후한 것이다. 

 

이 법이 보수개신교의 반발이 워낙 거센 상황이라 제정 여부는 미지수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막강한 권력과 기득권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경제전문가의 지적이 많다.

2010년대에 들어서 교회의 파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교인감소와 대형교회화되면서 대출로 지은 교회건물에 대한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의 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교회 세습에 대한 논란도 개신교 이미지와 신뢰도들 추락시키는 요인이다.

권력화된 교회, 종교단체의 국정개입. 희한한 것은 ‘개신교의 중용현상’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오히려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오히려 청와대 수석의 개신교 비율은 이명박 정부 때보다도 더 높아졌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뉴라이트적 사관을 반영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제작을 주도했던 권희영 교수가 '한국학 중앙연구원 원장'을 역임했고, 김구는 건국의 공로자가 아니라고 공식 석상에서 주장한 이인호 교수 역시 'KBS 이사장'직을 역임했고,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주창했던 박효종 교수 역시 '방송통신 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승만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나 야곱과 꼭 같다고 주장한 류영익 교수 역시 '국사편찬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개신교 대세현상의 지속이었던 것이다.

이미 개신교 자체가 권력화 돼있고 이런 측근들이 포진된 상태에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이 지속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발생한 최순실 사건이 과연 사이비 종교, 영세교 최태민 목사의 후계자인 최순실의 무당짓으로만 보이는가.

그리고 박근혜 탄핵과 더불어 대형교회가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며 부패정권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뉴라이트는 자신의 종교세력을 기반으로 대통령을 만들어주고 그 대가로 정부 요직을 선물 받은 것이다.

종교와 권력의 정교유착은 정경유착 이상으로 끈질긴 관계다. 《'대통령과 종교' 책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