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고종 황제 대한제국 선포

진실의 역사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의 입장에서는 국면 전환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갑오년甲午年(1894)에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기세가 함경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휩쓸었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십만 동족이 참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을미년乙未年(1895)에는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조선의 왕비 중전 민씨가 시해당하는 전고에 없던 사변事變이 발생했다.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건만 망해가는 나라 조선에게는 마땅한 응징 수단이 없었다.

1896년 2월 11일(이하 양력)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俄館播遷).


“내가 이제 조선의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나니 이는 수륙병진(水陸幷進)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원일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먼저 서울에 들어가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 써서 남대문에 붙이라.” 하시니 원일이 명을 받아 일행을 거느리고 태전으로 떠나니라. - 도전 5편 121장(1906 병오년 공사)


조선의 입장에서는 먼저 땅에 떨어진 국가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이를 대내외에 알리는 게 시급한 과제였다. 이어 오랜 궁핍과 절망감에 빠진 백성을 일으키고 보듬을 수 있는 개혁 정치도 절실했다.

당시 실록을 보면 고종이 과신戈臣(관료), 백성百姓(일반 양민), 군오軍伍(군대), 시정市井(상인 집단)으로부터 칭제稱帝 요청을 받았고, 이에 대한 전국적인 상소도 5개월간 빗발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여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국민적 요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제 정치의 상황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각서(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5.14)를 맺어 일본을 견제해 주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높일 수 있었던 기회였다.

드디어 1897년 8월 16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그해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圜丘壇에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즉위식은 다름 아닌 ‘황천상제皇天上帝’께 올리는 고천제告天祭였다.

 

환구단은 정방형의 땅에 화강암으로 3층 단을 만들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표현이다.

환구단의 지붕은 원추형 모양에 색깔은 금색으로 칠해 천자의 위상을 높였다.

 

고종의 고천제는 환국, 배달, 조선 이후 역대 제왕들이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등극을 알리고 천자天子(天帝之子)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皇穹宇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라는 당시 신위가 보관되어 있다.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대한은 옛 조선 곧 삼한三韓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황제 즉위식 이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12월 23일 가장 먼저 대한제국을 승인했고 잇따라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도 대한제국을 승인했다.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청산했으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곳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렇게 독립 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후 고종 황제는 황실이 중심이 된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를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1910년 대한제국은 끝내 패망했고 고종 황제 역시 1919년 1월 21일 당시 경운궁慶運宮 함녕전咸寧殿에서 돌연 68세로 붕어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주독립 국가 대한제국의 정신은 항일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역시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과 대한제국의 ‘민국民國’ 이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국호에 담았다.

사실상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대한제국인 셈이다.

고종의 천제 복원과 황제국 선포는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1860 경신庚申년 최수운 선생의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을 놓칠 수 없다.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은 최수운 선생은 민족과 인류를 향해 우주적인 대선언을 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학의 ‘다시 개벽’ 사상이다.

이는 선천 개벽으로 탄생한 인류가 앞으로 후천 개벽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참동학 증산도에서 알려주는 가을대개벽이다.

가을개벽의 역사 정신은 ‘뿌리를 찾아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앞으로 인류는 뿌리 역사와 원형 문화를 되찾아 지구촌 통일 문화 시대를 열게 된다.

천자 문화는 곧 동방 한민족의 뿌리 역사이면서 인류의 원형 문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선포는 동방 역사의 종주권 선언이면서 다가오는 개벽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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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는 누구에게 천제를 올렸는가?

진실의 역사

고종황제는 누구에게 천제를 올렸는가?

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圓丘壇의 모습이다.

 

고종임금은 1897년 10월 원구단에서 하늘에 천제를 올리고 황제로 등극하였다.

곧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러면 고종황제는 누구에게 천제를 올렸을까?

원구단 천제의 1호 대상은 바로 ‘상제님’이다.

상제님은 원구단에 모신 여러 신위 중 제일 상단에 모셔진 분으로서, 고종은 상제님께 천제를 올려서 자신의 황제등극과 대한제국의 탄생을 신고한 것이다.

고종은 천자의 보위에 오르면서 조선 초기 명나라의 압력으로 폐지했던 천제문화를 다시 복원한 것이다.

 

호천상제昊天上帝, 황지기皇地祇, 태조太祖 등의 신위를 제천의례 때는 원구단에 모시고 평소에는 황궁우皇穹宇에 모셨다.

원구단은 제천단, 황궁우는 사당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일제는 1919년 원구단을 파괴하여 현재는 황궁우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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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대천제-천제 문화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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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천제天祭 문화

 

신교 문화의 꽃, 대천제

 

고종황제의 대천제

우리는 1897년 고종황제의 업적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고종은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원구단을 복원하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림으로써 만천하에 황제 등극을 알리고 새로운 국호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고종 황제가 올린 원구대제는 끊어진 한민족의 천제문화의 맥을 되살리고 우리가 본래 천자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해는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태백일사와 단군세기를 출간한 해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가 쓰고 있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다음 기록을 보면 당시 고종이 상제님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출처: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0월 13일(양력) 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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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①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 동북아의 여러 신석기 문화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의 유적 발굴을 통해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요서 지역(발해연안 지역)의 신석기·청동기 문화 발굴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내몽골 적봉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이래,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발굴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2006년 6월에도 거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내몽골 적봉시 오한기敖漢旗의 초모산草帽山 유적지에서 5,500년 전 적석총군이 발견되었다.(중국 CCTV 보도 내용, 2006.6.10)
  
요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신석기 문화는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하서 문화이다. 현지인조차 길을 찾지 못하는 오지에 위치한 소하서 유적은 당국의 문화재 신고 정책에 따라 주민이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중국은 이 문화를 ‘인류 최고最古의 신석기 문화’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소하서 유적은 7,000~8,000년 전에 만들어진 발해 연안 빗살무늬토기와 그 연대가 일치한다. 발해 연안 빗살무늬토기는 그 재질과 모양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다. 이것은 소하서 문명의 주인공과 동방 한민족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요서의 여러 신석기 문화 가운데 홍산문화는 세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요령성 조양시 건평建平현과 능원凌源현의 접경지역에서 번창했던 홍산문화는 신석기 말기의 문화로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사용한 BCE 4700~ BCE 2900년경의 문명’이다. 하가점 하층에서는 BCE 2400~BCE 1500년에 걸쳐 농경집단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났다. 이 하층에서 비파형 청동검이 나왔는데, 그것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¼ 만주와 한반도에¼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인 것이다.
이처럼 문헌 기록으로 보나 유물로 보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드넓은 땅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다.
  
1954년에 중국 학자 인다尹達는, 철광석으로 뒤덮여 산 전체가 붉게 보이는 ‘홍산紅山’에서 이름을 따서 이 문화를 ‘홍산문화’라 명명하였다. 이형구는 홍산문화를 ‘발해연안문명’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발해연안이란 발해를 둘러싸고 있는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를 말한다. 세계 4대문명과 마찬가지로 이 문명은 북위 30~45°에서 발생하였다. 그는 “지중해 문명(지중해를 둘러싸고 태동한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창조한 문명은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 내는 젖줄이었다”라고 밝혔다. 

◉ 고대국가의 기틀인 총塚·묘廟·단壇이 모두 나타나는 홍산문화
홍산문화는 1979년 객좌현 동산취촌東産嘴村 발굴과 1983년 그 인근 우하량촌牛河梁村 발굴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동산취에서 엄청난 제사 유적이 발견되고, 우하량에서 돌무덤[塚], 신전[廟], 제단[壇]이 한꺼번에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형구 교수는 총·묘·단을 인류의 정신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3요소라 한다. 이 3요소가 모두 나온 것은 다른 신석기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이 돌무덤, 즉 적석총 유적지이다.

적석총은 고대로부터 삼국 시대 때까지 계속 나타나는 동이족의 대표적 묘제墓制로 황하지역의 화하족 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은 것이다. 충적층 지대인 황하 지역에 살던 화하족(중국 한족의 조상)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직접 주검을 묻거나 관을 묻는 형식의 널무덤(토광묘土壙墓)을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 지역에 살던 동이족은 주로 돌무덤을 지었다.

우하량의 돌무덤은 약 5,500년에서 5,000년경 전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돌무덤은 BCE 2000~BCE 1500년경의 것이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요서 지역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했거나 요서 문화가 한반도에 전파된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적석총, 석관묘 등의 돌무덤이 시베리아에서 기원되었다’고 말하는 강단사학계의 학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요서의 돌무덤이 시베리아 것보다 1,500년을 앞서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한민족은 시베리아보다 요서 지역과 문화적으로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돌무덤 문제만으로도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BCE 4천 년대에 요서에서 돌무덤을 짓고 문명을 일군 동이족은 바로 배달의 백성이다.
  
우하량의 여러 적석총 무덤 중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제2지점의 방형 적석총이다.

‘중심에 큰 적석총(돌무지무덤)’과 그것을 에워싼 ‘27기의 석관묘(돌널무덤)’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앙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홍산인들이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서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시사한다.

이 대형 무덤군의 바로 옆 자리에서 원형으로 쌓은 적석총도 함께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원형 적석총은 원래 최하단의 직경이 22m에 달하는 3단 높이로 지어진 것이었다. 일반적인 돌무덤의 양식과 다른 이 건축물의 용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중국 학자들은 이 적석총의 용도에 대한 실마리를 명·청의 황제들이 천제를 지내던 북경 천단공원에서 찾았다. 그곳 원구단이 우하량 적석총과 동일한 형태의 원형 3단이기 때문이다. 우하량 적석총도 천단공원의 원구단과 마찬가지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단으로 지어진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의 이 원형 제단이 홍산인의 정신문화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요소인 단壇을 대표한다.
  
각 층의 둘레를 따라 늘여 세워진 원통형 토기 또한 이 원형 건축물이 제단이었음을 말해 준다. 요령성 조양시의 덕보박물관 왕동리王冬力 관장은 이 독특한 토기에 대해 “토기의 위쪽에 덮개가 없고 아래쪽에 바닥이 없는 것은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장은 제단의 주변에 원통형 토기를 둘러 세워 하늘과 통하는 소통로를 만들었다”라고 해석한다.
  
방형으로 짜여진 대형 무덤군과 천제를 올리던 제단을 함께 갖춘 우하량 제2지점 유적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전체 구조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천원지방은 ‘아버지 하늘의 정신은 둥글고, 어머니 땅의 정신은 방정하다’로 해석된다. 천원지방 사상이 일본으로 전해져 전방후원형(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원형인 형태) 무덤의 형태로 나타났다. 천원지방 구조는 배달 시대 이후 고조선 때 지은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명나라 때 지은 북경의 환구단, 조선 말기에 고종 황제가 세운 원구단 등 제천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5,500년 전에 배달 동이족이 세운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제천단의 원형이고, 나아가 배달의 천제 문화는 동북아 천제 문화의 뿌리인 것이다. 
  
홍산문화를 일군 배달 동이족의 놀라운 수준을 보여 주는 셋째 요소인 신전(廟)은 우하량 제1지점에서 발굴되었다.

그런데 신전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여신이었다. 이형구는 홍산인들이 여신을 모신 사당을 지어 지모신地母神에게 제사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多産을 기원했다고 말한다. 여신묘가 상당히 좁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특권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 들어가 제를 지낸 이는 제정일치의 고대 사회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매자 구실을 한 정치적, 종교적 수장으로 단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총·묘·단이 모두 나타나는 우하량은 홍산인의 성지였고 제정일치 시대였던 당시에 임금이 하늘과 소통하던 곳이었다. 한마디로 우하량은 당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하량이 동서 10km, 남북 5km에 걸쳐 있는 홍산문화 유적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곰을 숭상한 홍산인
그런데 반지하식 구조로 지은 우하량의 여신묘 터에서 여신상과 함께, 홍산인의 토템 신앙을 보여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곰 소조상은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새 소조상은 북실北室에서 출토되었다. 곰토템과 난생설화는 한반도와 북방유목민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삼국유사에서 이야기하는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신화로 알고 있었는데 홍산유적에서 웅녀여신상과 곰발바닥 옥웅룡 등이 발굴 된 것이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의 목마신화가 1870년대 트로이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던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하량뿐 아니라 광범위한 인근 지역에서 ‘옥으로 만든 곰·용 혼합 형태의 형상물[玉熊龍]’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곰 토템이 아주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홍산문화 유적지 전체에서 발굴된 옥기 가운데 웅룡熊龍이 상당히 많은데, 이것은 주로 죽은 자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곰을 얼마나 신성시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적석총 무덤에서 새 모양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홍산인이 새 토템 신앙도 하였음을 보여 준다. 현재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전역과 일본 등에도 이 새를 토템으로 하는 솟대문화가 광범위하게 남아있다.
  
여신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한 홍산인을 환단 시대의 배달 동이족과 연관지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을 『환단고기』에서 전하고 있다. 바로 배달이 세워진 직후, 호족과 웅족이 환웅천황을 찾아와 환족으로 교화되기를 청한 사건이다.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 중심의 사나운 부족이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 중심의 우매한 부족이었다. 삼신의 도를 깨쳐 광명 인간이 되기 위해 두 부족은 일체의 활동을 금하고 수행 공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호족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었고 웅족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행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이처럼 요서 지역의 유물과 『환단고기』가 밝히는 내용을 종합해서 볼 때, 홍산문화는 환단(환국과 배달)의 문화로 볼 수밖에 없다.

친일파와 독립투사

진실의 역사

친일파와 독립투사
한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 사대파는 바로 친일파였다.

이들은 조선에 지켜야 할 좋은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유일한 살 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선진국인 일본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도왔으며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열렬히 일본에 충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친일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 동화되기를 거부했으며,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주적 조선인만의 나라를 만들려 일본과 친일파와 맞서 싸웠다.

그들이 바로 독립투사였다.

 

500년을 넘게 이어져 온 조선왕조는 1910년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두고 여려가지 주장이 있으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구한말 조선 무렵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 일본과 결탁한 친일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대적인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계몽기관이자 언론사로 알고 있는 ‘독립협회’‘독립신문’은 사실 일본과 결탁한 친일조직이었다.

애초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자체가 일본 외무대신과 주한 일본 공사같은 일본의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단체였으니 짐작할만하지 않은가?

일본이 제공한 자금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일본을 열렬히 찬양하는데 열을 올리며, 조선인들 사이에 친일여론을 퍼뜨리는데 주력을 다했다.

고종34년(1897년) 114호자 《독립신문》에는 “사악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난 것은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베푼 은혜”이며,

고종35년(1898년) 별호에는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라는 논설이 실렸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국 국방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2척의 군함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려는 계획을 세우자 “세계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 무엇하러 군함을 들여 오는가? 군대는 그저 도적떼나 평정할 정도의 소규모만 있으면 된다”라고 극렬히 반대했다.

《독립신문》의 논지대로라면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쓸만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고, 자주 국방을 위한 국비 증강도 하지 말아야 했던 셈이다.

아울러 독립신문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의병들을 가리켜  비도匪徒(도적떼)라고 모욕을 하는가 하면, 조선 침략에 열을 올리는 이토히로부미와 내통하던 이완용을 불세출의 천재이자 애국자라고 찬양을 했다.

이런 《독립신문》이야말로 친일 사대주의 언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립협회 역시 친일 행각으로는 독립신문에 뒤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일본과 대립하자 독립협회는 반러시아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종황제를 압박했다. 

고종이 러시아의 협조를 받아 4000명의 장교와 3만명의 병사로 조직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조선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의도를 품은 일이 아니냐며  협박을 했다.

독립협회는 연일 러시아를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고종을 몰아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말로는 ‘독립’을 내세웠으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사실 일본에 종속되기를 원한 위선적인 친일파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보낸 첩자이면서 고종의 측근이었던 배정 같은 경우도 있었다.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아버지가 역모에 휘말려 죽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그의 첩이 되면서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조선을 증오하여 반드시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실행하게 된다.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상류층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친분을 쌓고 뛰어난 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서 그의 측근이 되는데 성공한다.

조선 지배층 깊숙이 침투한 배정자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고급 정보들을 전부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고종이 일본의 손길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던 일이 도중에 무산된 것도 배정자가 그 사실을 알고 일본 공사관에 정보를 전해주어, 일본이 손을 써서 고종의 망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려 밀사들을 보냈던 헤이그 밀사사건도 배정자의 밀고로 인한 내부 기밀 누출로 인해서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배정자처럼 자발적인 친일 사대 매국노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친 일진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약 40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일진회는 독립신문처럼 친일 여론을 퍼뜨리는 한편, 회원들에게 군사 훈련도 시켰는데 이는 일본군을 도와 항일 의병들과 싸우는 전투에 적극 가담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들이야말로 구한말에 활개치던 가장 악독한 친일 사대 매국노들이었다.

일본에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동참한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아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면서 "장차 50년 후, 일본에 조선인 출신 재상이 나올 줄 누가 알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게 조선 권력층 내부에 일본과 내통하는 친일파가 가득 했으니, 조선이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항일 의병들이 무기들 들고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고 해도, 친일파가 그 정보를 모조리 일본에 보고하는 상황이니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정신병자나 패륜적인 악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형세의 이익을 계산한 이들은 “조선은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 빨리 망해서 일본에 흡수하는 일이 옳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확신범들이었다.

구한말 배웠다는 상류층 위정자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초들은 의병으로 거사를 하여 독립투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깨어있는 지식인 중에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지사들도 많았다.

또한 무지렁이 민초들 중에도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하여 친일을 서슴지 않고 한 자들도 많았었다.  

 

오늘날 친일파와 가장 닮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은 이래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 하는 대로 본받아야 한다”라며 세계주의를 가면 쓰고 자국 혐오와 사대주의적 발언을 일삼는 지식인이다. 만약 이들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했다면, 아마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열렬한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까. 『자주파 VS 사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