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일제 식민사학과 한사군

 

고고학이 밝혀주는 낙랑군 실체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으로 보는 유력한 근거는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이다.

이 지역 무덤들은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 가지로 다른 지역 무덤과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학자들에 의하면 광복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3,000여기를 발굴 조사한 결과 나무곽무덤은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한漢나라가 출현하기 훨씬 전인 BCE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형태였으며, 귀틀무덤을 거쳐 벽돌무덤으로 발전하고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은 한나라 것과 다른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인 좁은 놋단검(세형동검)을 비롯해 조립식 쇠단검, 조립식 쇠장검, 질그릇과 마구 등이다.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중국계 유물은 무엇일까?

그 유물들을 잘 살펴보면 전한시대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약 2백년 뒤의 후한시대 또는 그 이후의 유물들만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한 시대의 유물들 대동강 유역에서는 〈점제평산군신사비○蟬平山郡神祠碑〉가 발굴되었는데“ ○和二年四月戊午, ?蟬長勃興”으로 시작된다. 첫 자는 읽을 수가 없으나 두 번째 和자가 들어간 중국 연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후한後漢 장제章帝시대로서 CE 85년이다.

 

문제는 낙랑군의 속현 가운데 하나인 점제?蟬현이 있는데 이 비석이 발굴된 지역은 낙랑군 점제현이 틀림없다고 발굴자들은 말하고 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연대가 확인되는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인데, 화천은 왕망王莽 때 주조된 청동제 화폐이다.

왕망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皇后 일족이었다가 황위를 빼앗아 신新을 건국(CE 8)하였지만, 불과 15년 만(CE 23)에 망했다.

 

그런데 이 화폐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통용되다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전한의 무제가 우거정권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BCE 108년 무렵의 유물이 아니라 왕망의 신新나라를 무너뜨리고 후한後漢을 세운(CE 25) 광무제 이후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위조된 봉니 출토되어 보고된 유물 가운데에는 위조품도 있었다.

낙랑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중에서 봉니封泥는 일제가 위조한 대표적 유물로 본다.

 

봉니는 문서를 운송하는 도중에 남이 보거나 위조하지 못하도록 죽간竹簡을 묶은 노끈 매듭에 진흙을 발라 도장을 찍은 것으로 그 서체나 모양도 다양하다.

 

그리고 봉니는 보내는 곳이 아닌 받는 곳인 낙랑군 지역 외에서 발견돼야하며, 문서를 보려면 봉니를 깨트려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은 드물다.

 

그런데 낙랑 봉니라는 것들은 대부분 형체도 온전하고 서체나 형태도 거의 흡사하다. 더구나 낙랑군 치소였다는 토성 터에서 받는 곳인 관할 현에 있어야 할 봉니가 200여 개나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수가 발견된 예는 없다.

 

그러한 봉니가 광복 후 북한이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 일제의 봉니 위조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하나도 없다.

 

오죽하면 한 일본인 역사학자는 위조한‘ 봉니封泥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으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부터 거액을 보상금으로 받았는데, 조선사 왜곡에 앞장섰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마저 그것은 위조라고 반발할 정도였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⑤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일제 식민사학과 한사군

 

대동강 유역의 낙랑국
최리의 낙랑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은 옥저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그 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神王(대무신열제)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딸로써 그의 처를 삼도록 하였다.(『삼국사기』)

라고 한 기록에서 군郡을 다스리는‘ 낙랑태수樂浪太守’라는 한나라 지방 관리의 호칭이 아니라 국國을 다스리는 ‘낙랑왕樂浪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때의 낙랑이 낙랑군이라면 ‘태수太守’라는 호칭을 써야한다.

이것은 대동강 유역이 한漢나라 군현인 낙랑군 지역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또『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 차차웅 원년(CE 3)에 낙랑의 군사가 신라 도성인 금성金城을 포위했는데, 여기서 낙랑을 일컬어 낙랑군이라 하지 않고‘ 이웃나라(隣國)’라 부르고 있다.

 

백제 책계왕조에는 대방의 통치자를‘ 대방의 왕[帶方王]’이라고 한 기록이 보이며, 또 신라 기림이사금 3년에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낙랑과 대방을 국가로 보고 있다.

 

만일 이들이 중국 세력이었다면 중국으로 돌아가야지 신라에 귀복했을리 만무한 것이다.

 

난하에서 건너온 최숭 대동강 부근에 있었던 낙랑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북부여기』에 따르면 BCE 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난하 유역에서 현재의 대동강으로 이주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임신 원년(BCE 169) 정월 낙랑왕 최숭崔崇이 해성에서 곡식 300석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E 195)년 겨울이었다.(북부여기)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낙랑왕 최리는 최숭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최숭이 마한 왕검성(지금의 평양)으로 오기 전 난하 유역에 원래 낙랑이 있었다.

 

최숭이 대동강 부근에 와서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나라이름을 낙랑국으로 삼았다.

난하지역에는 낙랑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그 당대의 기록인『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곳에 조선·낙랑현이 있다고 하였는데 갈석산은 현재도 하북성 창려현에 그대로 있다.

 

갈석산은 연나라 장성의 동쪽 끝인 양평 부근이요,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끝이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대동강이 아니라 난하 하류의 갈석산 부근이었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④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일제 식민사학과 한사군

일제는 우리 고대사를 말살하여 역사무대를 한반도로 규정하고 우리 역사의 시작이 고조선을 침탈한 위만정권부터라고 하였다.

 

또 위만정권이 한 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고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들어서면서 중국의 식민통치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우리 고대사가 시작된 것으로 조작하였다.

 

광복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일했던 이병도와 그 후학들은 지금도 일제 식민사학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한국사 틀을 정설로 고수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또한 위만정권과 한사군으로 인해 우리 문화가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사는 반도의 태반을 한족漢族에게 빼앗김으로써 상고上古에 있어서 외래족에게 굴복하는 선례를 남겼다.(이병도, 『한국사대관』)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있는 조그만 한반도의 역사다.(이기백, 『한국사신론』)

 

대동강변에 설치된 한사군은 원시적 국가형태로 볼 것이나 한韓민족은 한漢나라의 식민지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는 변칙적인 과정을 밟았다.(김철준·한우근, 『한국사개론』)

 

근래에 와서 고조선의 위치가 처음에 요동에 있다가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설을 내놓기는 했으나 핵심은 바뀐 게 없다.

한사군은 여전히 대동강 유역에서 수백 년간 존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한사군은 사마천이 생존해 있을 당시에 모두 설치된 것이 아니라 일부가 후대가 설치된 것이라 봐야 한다.

 

설사 당시에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그 위치는 한반도 북부가 아닌 지금의 하북성과 요서 지역이었다.

 

문헌 연구만 제대로 해도 한사군이란 것이 한반도 내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국내 주류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을 그대로 추종하여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에 다 갖다놔 버렸다.

 

신채호 선생 말대로‘ 귀신도 하지 못하는 땅 떠서 옮기는 재주’를 부린 것이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③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한사군 위치의 핵심, 낙랑군樂浪郡

한사군 문제의 초점은 한사군의 위치 문제이다.

이를 규명하는 열쇠는 한漢 군현郡縣 설치의 출발점이자 위만정권의 도읍지 왕험성이 있었다는 낙랑의 위치를 찾는 데 있다.

 

현재 주류학계의 정설로 간주되어온 낙랑군 대동강설(재평양설在平壤說)은 이에 반론을 제기해온 여러 학자들의 문헌고찰을 통해 많은 모순이 발견되고 있다.


낙랑과 평양의 위치
먼저『후한서』「 동이열전」을 보면 111년에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을 쳐서 관리와 백성들을 살상하였다[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樂浪, 殺傷吏民](후한서』「동이열전」 부여조).

 

기존의 주장대로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라고 가정한다면 만주 송화강 유역에 위치한 부여(동부여)가 남쪽으로 진격하여 고구려의 수천 리 영토를 아무 제지도 안 받고 그대로 통과했다는 말이 되며, 개선할 때도 역시 무사통과했다는 말인데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11세 태왕인 동천열제東天烈帝(227~248)는 246년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도읍이 폐허가 되자 이듬해 환도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고구려는 장수왕 때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 기록은 고대의 평양이 여러 곳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주류사학계의 주장처럼 이때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평양=낙랑군)이라면 고구려가 수도를 적국의 땅인 낙랑군으로 옮겼다는 말이 되므로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주류사학계에서는 여전히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 낙랑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무제의 낙랑 공격
대동강 부근의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복속된 것은 CE 37년이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왕망王莽의 신新나라가 멸망하고 한 고조 유방의 후손인 유수劉秀(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가 후한後漢을 건국했는데, CE 44년 광무제는 바다를 건너 낙랑 지역을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 대무신왕 27년(44)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二十七年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之爲郡縣, 薩水已南屬漢](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이것을 기존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빼앗은 낙랑군을 광무제가 다시 빼앗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광무제 때 지금의 난하 유역에는 이미 낙랑군이 따로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국의 잔여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다음의 『태백일사』 기록에서처럼 낙랑국 유민들은 고구려에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대무신열제 20년(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동압록(압록강)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大武神列帝二十年, 帝襲樂浪國, 滅之. 東鴨綠以南, 屬我, 獨海城以南近海諸城, 未下](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해성은 지금의 요동반도 북부에 있다.

당시 해성이남인 요동반도까지도 최씨낙랑국의 기본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와 태백일사의 내용을 종합하면 광무제가 공격한 낙랑은 해성 이남 지역이다. ‘살수2) 이남’의 기록에서 살수는 요동의 주남하를 말한다. 후한 광무제가 대동강 주변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범위와 기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당시 신라가 한반도 북부의 낙랑을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라 일관되게 지칭한 사실과, 낙랑 멸망 후 그 유민이 중국이 아니라 신라에 귀부한 사실만 봐도 넉넉히 입증된다. (윤내현,『한국열국사연구』)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②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중국 문헌과『 환단고기』의 한사군

위만정권이 사라지는 당대 사건을 직접 체험한 사마천이 『사기』를 기록할 때 한 무제가 동방침략에서 완패한 이 전쟁을 오도시켰다.

즉 당시의 국제정세 등 제반 사실을 생략했고 또 전쟁결과에 대해서도“ 사군을 두었다.”라고만 하고 그 군현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우거정권의 항신降臣들이 받은 제후諸侯 관직만 자세하게 기록했다.

『사기』 주석서의 엇갈린 기록들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두었다.

참은 홰청후에, 음은 추저후에, 겹은 평주후에, 장은 기후에, 최는 부친이 죽었으나 자못 공이 있으므로 온양후에 봉했다[遂定朝鮮爲四郡. 封參爲??侯, 陰爲荻?侯, ?爲平州侯, 長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爲溫陽侯](『사기』「조선열전」).

 

동방원정의 가장 큰 전과인 사군의 명칭은 왜 빠뜨렸을까? 더구나 『사기』의 다른 본문과 주석들이 한사군을 모두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볼때,‘ 사군을 두었다’는 기록은 후대 역사학자들이 추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한다.

이 군현郡縣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사기』「흉노열전匈奴列傳」에도 보인다.

 

한나라가 양신楊信을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한나라는 동쪽의 예맥濊貊을 뿌리 뽑고, 조선에 군郡을 설치하였다[漢使楊信於匈奴. 是時漢東拔穢?, 朝鮮以爲郡](『사기』「흉노열전」).

 

여기에 대해 당唐나라 때 인물인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현도玄?·낙랑樂浪 2군郡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宋의 인물인 배인裵絪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이다.”라고 4군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자기보다 앞 시대 인물인 배인의 주석에서 “4군을 설치했다”고 되어있는 데도 현도·낙랑 2군뿐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한서』의 한사군
한사군의 명칭은 『사기』본문에는 끝내 등장하지 않고 약 2백여 년 후에 편찬된『한서漢書「』무제본기武帝本紀」에 비로소 등장한다.

 

조선에서 우거왕右渠王의 목을 베고 항복하니 그 땅을 낙랑·임둔·현도·진번군으로 삼았다[朝鮮, 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眞番郡].

 

그러면서도『한서「』오행지五行志」에는 ‘원봉元封 6년(BCE 105)조’에 “이전에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三郡을 열었다[先是, 兩將軍征朝鮮, 開三郡].”라고 하여 3군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사기』와『한서』의 기록이 2군郡과 3군郡, 4군郡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한사군에 대해 두 사서가 내용뿐만 아니라 숫자마저도 다르기 때문에 한사군의 실존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북부여기」가 전하는 한사군의 실상
우거를 멸한 후 북부여를 침공한(BCE 107년) 한나라의 군대를 물리친 조선족 항쟁과정은 『환단고기』의 「북부여기」에서 잘 전해지고 있다.

 

이 때 구국의 영웅으로 등장한 인물이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손으로 고리국?離國 출신 의병장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었다.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무제)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癸酉十三年, 漢劉徹寇平那滅右渠. 仍欲易置四郡, 盛以兵四侵. 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 所至連破漢寇. 遺民四應以助戰 軍報大振.] (「북부여기」).

 

한나라 침략군을 물리친 고두막한은 민심을 얻어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에 종래의 북부여 황실을 압박하여 가섭원 땅으로 밀어내고 스스로 북부여의 단군 제위에 올라 동명제東明帝라고 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동부여의 개국비화다.

중국 사서에서는 북부여와의 전쟁과정은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북부여와의 전쟁 사실을 의도적으로 말살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위만정권을 멸한 한나라가 마치 고조선 전체를 정복한 것처럼 꾸미고 뒤이어 북부여에게 패한 것을 숨기고자 하는 역사 왜곡 음모이다.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①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한사군漢四郡 - 중국과 일본의 합작 역사조작

 

실패로 끝난 한무제의 동방원정

 

한나라는 BCE 109년, 누선장군樓船將軍(수군)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육군) 순체荀?를 보내 위만의 손자 우거정권을 수륙 양군으로 협공하였다.

1년 이상끌던 전쟁은 우거정권 내부의 번조선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우거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끝이 났다.

 

한마디로 우거정권은 한漢나라 군이 아닌 내부 쿠데타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BCE 108년 전한前漢 무제武帝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옛 강역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동쪽으로 북부여를 침공하였으나 대패하여 물러갔다.

 

전쟁이 끝난 후 한나라 측 장군들은 모두 사형을 당했고 누선장군 양복만이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서인(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반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실질적으로 우거정권을 무너뜨린 번조선 귀족들은 전부 한나라의 제후諸侯로 봉해졌다.

이것이 사마천이 기록한 한사군 전쟁의 실상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위만정권)이 멸망하자, 한漢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313).”고 간략히 적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사군 전쟁이 시작된 BCE 109년부터 고구려가 등장한 BCE 58년까지 약 50년 동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진실의 역사

#한국사 :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 한민족 뿌리역사를 도려낸 일본

 

19세기 중반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면서 한국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식민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식민주의 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관이다.

조선인을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민족으로 묘사하여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요지이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정립과 실현을 위하여 일제는 조선침략을 군사적으로 준비함과 동시에 자국의 쟁쟁한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게 하였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결국 한반도 지배를 위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학에는 ‘조선사 강좌’가 설치되고 논문과 저서가 속속 간행되었다.

일본인이 한국사를 이른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내세워 주관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 연구를 반석에 올려놓은 일본의 식민 사학자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1854~1922),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65~1942),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1874~1930) 등이다.

이 세 사람은 독일에 직접 유학을 하거나 일본 내 대학을 다니면서 실증주의 사학을 공부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조상의 무덤과 집터를 파헤쳐 꺼낸 유골과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려 한다. 그리고 고증되지 않은 기록은 대부분 불신한다.

 

이러한 실증사학의 정신에 따라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국-배달-고조선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하야시 다이스케가 『조선사』와 『조선근세사』에서 정한 한국사의 시대 구분이다.

한사군 이전은 태고太古, 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는 상고上古, 고려 시대는 중고中古, 조선 시대는 금대今代로 구분하였다(김용섭, 같은 책, 498쪽)

이후 그들은 만철滿鐵조사부를 세워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조사를 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 역사를 말살하고 그 자리를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채우는 데에 있었다.

 

마침내 1910년에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자국의 식민주의 사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데려왔고, 192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면서 그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일제 관학자들은 조선 역사를 본격적으로 변조하여 조선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상고 이래의 한일교섭사 중에 일본에 불리한 사실은 모두 은폐하였다.

임진왜란을 마치 일본이 승전한 것처럼 기술하고, 광개토태왕비의 비문과 칠지도 명문을 조작하는 등 우리 역사와 문화재에 손대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일본이 왜곡한 사례 중에서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한민족사의 밑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것으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작한 “석유환인昔有桓因”이다.

1903년 동경제국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후 조선에 파견된 이마니시 류는 조선 역사를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역사로 깎아 내리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내 조선의 한 사서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 사서가 바로 『삼국유사』이다.

그는 조선 중종 1512(壬申)년에 간행된 『삼국유사』 임신본에 적힌 “석유환국昔有桓国”의 ‘국国’ 자를 ‘인因’ 자로 변조시켰다.

‘국’ 자와 ‘인’ 자는 서로 모양이 비슷하여 변조하기가 쉽기도 하지만, 일연이 붙인 ‘제석을 말한다謂帝釋也’는 주석에 힘입어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과감히 변조한 것이다.

이리하여 환국을 불교 신화에 나오는 나라로 둔갑시키고,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 고대사의 핵을 도려낸 사건’이다.

이로써 한국사의 영혼이 뿌리 뽑히게 되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7천 년 상고사가 통째로 잘려 나간 것도 통탄스럽지만,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마저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환인·환웅·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전락시킨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중국은 최근 홍산유적이 발굴되면서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中華古代文明探源工程을 진행하였다.

이 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보다 한 술 더 떠서 중국 역사의 시발점을 1만 년 전으로 끌어 올려 중화 문명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중국은 만리장성 밖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이 오랑캐문화라 하여 한족문화권으로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만리장성밖에서 황하문명보다도 수천년 앞선 홍산유적이 대량 발굴되자 이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옥기문화, 청동유물, 석관묘제, 천원지방형의 원형신전, 용봉유물, 옥웅룡, 웅녀여신상, 수행하는 여신상, 주문읽는 토우, 곰발바닥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홍산유적은 북방유목문화의 전형이자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웅족 토템기록을 명확히 증언해주고 있다.

동이문화의 전형적 특성을 보여줌에도 한국학자들은 고조선 문화와는 관계없다고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가 신화시대로 치부하고 연구조차 하지 않는 작금에  중국은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고 중국의 고대사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식민사관
1945년에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지만, 이 땅의 사학은 여전히 식민사학의 잔재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 땅의 역사 광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식민사학의 주구 노릇을 하던 몇몇 학자와 그 후예들에게 잠식되었다.

그들은 지난 식민통치시기에 8백만 이상의 조선인을 참살한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 아래 교묘히 숨겨 그대로 수용하였다.

 

지금도 식민사학계는 이런 홍산유적에 대한 실질적 연구는 외면하고 이미 학계에서는 검증이 끝났다면서 곳곳에서 여론과 인터넷을 통해 실증사학으로 고증이 되지 않는다고 몰면서 식민사학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고대사를 신화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역사상 가장 반인륜적이고 파괴적인 역사관인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변론하였다.

이것은 자국의 역사를 자국민이 파괴하는 해괴한 행위로, 세계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한사군 재在한반도설’이다.

한사군설은 고조선 말기 한반도 땅에 한나라가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설치하였다는 주장이다.

일제는 대동강 유역에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라는 조작된 유물을 심어놓고, 그 비석을 한사군 유물로 내세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한국 사학계는 그 조작설을 그대로 따랐다.

최근 그 비석의 화강암 재질을 분석한 결과 위조된 유물임이 드러났지만, 한국인들은 한반도 내 평양 주변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배우고, ‘낙랑·임둔·진번·현도’라는 이름을 반세기가 넘도록 열심히 외우고 다녔다. (이병도李丙燾 등이 참여하여 설립한 진단학회에서 1965년에 간행한 『한국사』 7권에 수록)

 

그리고 일제가 내세운 한사군설을 그대로 따라 우리 역사학자들의 손으로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정한 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는 지금 다시 중국에게 역사를 빼앗기고 있다.

중국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설을 동북공정에 적극 활용하여 2,100여 년 전 한나라 때의 중국 영토를 한강 이북까지 확장하였다.

중국의 이 황당한 주장이 서양의 세계사 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리려면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한국사의 뿌리를 뽑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화 패권주의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은 남의 역사를 강도질하는 패악의 근원이다.

 

초·중·고 교과서에서 우리는 일제가 꾸민 역사 사기극의 잔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환국과 배달의 역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족장이 다스리던 부족 사회가 있었다고 서술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고조선의 출현에 대해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라고 하면서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서술한다.

 

얼핏 보아도 너무나 싱거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는 이 서술조차도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2009년에야 겨우 개정된 내용이다.

그 전까지는 “건국되었다고 한다” 또는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남의 나라 역사를 말하듯이, 설사 우리 역사라 해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듯이 서술하였다.


그런데 비단 학교 교과서뿐 아니라 국가공무원 수험서, 육·해·공군의 역사 교재, 아동용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모든 역사책에는 일제가 조작한 잘못된 한국사가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제 식민사학의 여독이 오늘날까지도 모든 한국인의 뼛속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 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 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 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본 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본 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 집順菴集』「동사 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 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 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 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 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 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 단군제에 소련 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 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의)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 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 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

유사역사학vs.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도종환 의원

진실의 역사

유사역사학 vs. 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인터뷰들을 인용)

 

1. 도종환 의원을 유사역사학 신봉자로 몰아부치는 목적은?
▷ 도종환 반대세력이 노리는 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교과서 국정화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와 연관된 한국사 정통성과 대한민국 정통성을 통합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을 지닌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2. 동북아역사지도는 도종환 의원의 압력 때문에 취소되었나?
▷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근본 목적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양대 역사 침탈, 즉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사군을 지금의 평양으로하고, 독도를 빼버림으로써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철저히 유린하였기에 동북아역사재단 내부 재심사 결과에 의해 폐기된 것이다.

3.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다?
▷ 국가주의는 국가권력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희생이 전제된다는 관점이라면, 민족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주체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근대사의 동력은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독립운동을 우리가 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데 민족주의가 아니면 통일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다.


4. 유사역사학의 굴레를 씌워서 몰아내기
▷ 역사학의 본질은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데 있다. 다양한 해석은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역사학의 특징을 부정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 독재다.

국민들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학자들이 강요 할 수 없는 시대가 돼 버렸다. 그런데 자기네들 이론을 반대하면 ‘환빠’로 매도한다.

특히 이덕일씨 주장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반발이 도종환 의원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5. 한사군 평양설은 정설이다?
▷ 한사군 연구는 끝난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서로의 학설을 존중하면서 격조 있게 연구를 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 본다.

고대사의 일부 연구자들이 한사군 연구는 국내설로 귀착되었다는 주장은 '역사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역사학 자체를 부정하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양설이 다수설로 볼 순 있다. 그러나 정설이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조선후기 영조대의 『동국문헌비고』에 한사군의 영역이 요동까지 뻗쳤다고 나와 있는데, 관찬 사서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설이었다는거다.

패수 압록강설을 주장하지도 않은 정약용을 내세워 한사군 국내설을 강화 하였지만, 정약용은 정작 패수 대동강설 주창자였다. 정약용의 주장대로라면 한사군 국내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6. 단군을 인정하지 않는 주류사학
▷ 역사학의 기본은 민족의 근원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한다. 학계 주류는 ‘고조선 국내설’을 주장하고 단군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군을 인정하지 않으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대한민국은 현대에 새로 출발한 국가에 불과하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진보적’ 역사학은 남북통일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지 퇴행적 역사관이 아니다. 이는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으로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7. 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 고대사 하는 분들을 막을 세력이 국내에 전혀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걸린 거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다고 하니까 이들이 겁을 먹은 거다. 혹시 자기네들한테 불이익이 될까봐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난 거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를 언급하자 그것도 역시 두려움이 있는 거다. 자기네들 주장이 권력에 의해서 제거될 두려움이 있는 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틀에 갇힌 주류 강단사학이 가야가 포함된 ‘4국시대’의 도래로 위기에 처한 셈이다.

학문 용어로 성립될 수 없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안(정준)씨 등의 행위는 마치 일제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대종교를 ‘유사종교’라는 라벨을 붙여 탄압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