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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역사조작 임나일본부 허구③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성③

 

백제의 임나재건 노력을 일본의 것으로 둔갑


백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키노오히하노스쿠네’
“키노오히하노스쿠네紀生磐宿禰가 임나를 점거하고 고구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삼한의 왕 노릇을 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이라 칭했다.

임나의 좌로, 나기타갑배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爾林에서 죽였다.

대산성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다.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백제군대가 굶주려 고생하게 하였다.

백제왕이 크게 화가 나서 영군領軍 고이해와 내두內頭 막고해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키노오히하노스쿠네는 군대를 맞받아쳤는데 담력이 더욱 왕성하여 행하는 곳마다 모두 깨뜨렸다.

한 사람이 백명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뒤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임나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이 좌로, 나기타갑배 등 300명을 죽였다.” - 『일본서기』 겐조(顯宗) 천황기 3년조(487)

 

이 기록은 야마토 조정이 파견한 키노오히하노스쿠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삼한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기록인데 내용을 살펴보면 백제에 대한 반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제가 임나를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임나에 살았던 백제의 백성들
“임나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 중 도망해온 자와 호적이 끊어진 지 3, 4대가 되는 자를 찾아내어 백제에 옮겨 호적에 올리게 하였다.” - 게이타이 천황기 2년조(508년)

 

이 기록은 일본현읍이 아니라 ‘○○현읍’이었을 것이다.

일본이라는 명칭이 백제가 망하고(660) 7세기 후반(670)에야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나의 현읍에 백제의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은 임나의 경영을 백제가 했음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의 임나재건회의
백제 성왕(재위 523~554)은 가야를 포함한 사국사四國史에서 중요한 왕이다.

『일본서기』는 그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아마 백제의 유민들이 남긴 백제사서들에 기록이 상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고구려와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가야를 포함해 열국들 사이의 긴장사태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532년 신라가 금관가야를 쳐서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안라국, 탁순국 등 가야연맹의 여러 소국들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가야세력은 이 위급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 하나가 임나 재건을 위한 국제적 대책회의였다.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기 원년(539)에 실려 있는 기사가 바로 임라재건회의에 대한 기록이다.

 

“성명왕(성왕-필자)이 말했다.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근초고왕-필자), 귀수왕(근구수왕-필자)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旱岐-가야소국들의 왕의 칭호)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고 지냈다.

자제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에 속임을 받고, 천황의 노여움을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중좌평下部中佐平 마로, 성방城方 갑배매노 등을 보내어 가라에 가서 임나일본부에 모여 서로 맹약을 맺게 하였다.

이후 다른 일에 얽매였으나 임나를 재건하는 것을 조석으로 잊은 적이 없다”.

 

이 뒤에도 백제성왕의 말이 실려 있는데 안라가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백제가 근초고왕 때부터 임라 지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에 의해 금관가야와 녹기탄(녹국), 탁순 등이 망하자 백제 성왕이 가야연맹의 여러 나라 지도자들을 모아서 대책회의를 연 것이다.
회의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열렸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임나일본부의 유지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백제가 임나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회의였다.

회의의 주도자도 임나일본부가 아닌 백제성왕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