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동북아 역사조작 임나일본부 허구④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성

 

임나를 합병한 신라에 대한 적개심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통해 임나 즉 가야를 직접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간접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사실과 거리가 먼 허구임을 보았다.

 

562년 신라에 의해 대가야가 망하고 임나는 신라에 합병되었다.

『일본서기』에는 야마토 조정이 대장군 키노오노마로스쿠네(紀男麻呂宿禰)를 파견하여 임나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고 하는데 실은 이는 백제가 임나를 구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펼친 것이다.

 

『일본서기』는 더 나아가 그 원정을 기록한 긴메이 천황기 23년조에 신라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든가, 또 대장군 사테히코를 보내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왕이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는 허구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는 부활하지 않았다.

긴메이 천황은 중병으로 죽는 자리에서 유언을 하였는데 황태자에게 ‘그대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사람들이 임나를 멸망시킨 신라와 그 동맹 고구려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이러한 사실왜곡으로 나타났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서기』는 임나에 있던 야마토 정권의 외교기구를 ‘내관가둔창’이라는 천황의 직할영토로 둔갑시키고 삼한의 지배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서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도 일본부에 대한 주석을 ‘어사지御事持’(미코토모치)로 달고 있는데 이는 왕의 사신使臣이라는 뜻이다.

 

또 일본이라는 국명 역시 임나일본부가 없어진 562년보다 100여년 뒤에 사용되기 시작한 국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가 얼마나 허구성을 띤 것인지 알 수 있다.

 

백제장군 목라근자와 그 아들 목만치(=목협만치)
백제장군 목라근자에게는 목만치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신라를 공격할 때 현지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일본서기』 응신應神천황기 25년조에는 『백제기』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목만치를 목라근자의 아들이라 하였다.

 

이 목만치는 또 『삼국사기』 개로왕蓋鹵王 조에도 나온다.

개로왕이 당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될 처지에 처하자 왕자(후일의 문주왕文周王)와 함께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협만치가 목만치를 가리킨다.

목도 성이고 협도 성으로서 목협만치는 복성複姓이었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 기록에 의하면 이 목만치는 부친의 세력을 이용하여 임나 일을 전담하였다.

백제와 임나에서 권세자 역할을 하던 그는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포악한 것을 보고 천황이 그를 불러들였다고 되어 있다.


백제가 왜를 끌어들인 이유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신묘년(391) 이래 왜가 매년 바다를 건너왔으며 백잔(백제)이 왜와 화통하여 친선을 맺어 왜인들이 신라 영토에 가득 들어왔고 (399) 또 404년에는 왜가 백제 군대와 함께 대방지역을 침략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문에서 보이는 왜는 단순한 해적인 왜구倭寇가 아니라 당시의 일본정부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파병한 왜의 군대였다.

그런데 왜 백제는 왜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였을까?

 

백제는 고구려와 한 세대 전인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부터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원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신왕(재위 392~405)은 397년 야마토정권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태자 전지腆支를 인질로 일본에 보냈다.

 

백제는 왜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왜병이 들어왔는데 이들의 근거가 임나가라였다.

당시 백제는 임나가라를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왜군에게 제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 10년조에 의하면 고구려군은 임나가라까지 왜군을 추격하여 그 성을 함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