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동북아 역사조작 임나일본부 허구②

진실의 역사

[동북아 역사조작극]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성

 

『일본서기』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은 거짓

기록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는 추아이(仲哀) 천황의 비妃로서 남편이 죽은 후 69년 동안 섭정을 한 여인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재위기간이 201~269년이지만 『일본서기』가 이 시기의 연대를 의도적으로 2주갑周甲 올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321~369년이 그 섭정기간이 될 것이다.

 

『일본서기』는 추아이 천황이 신이 명한 신라정벌을 거부했기 때문에 신벌神罰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후는 남편이 죽자 임신한 몸으로 곧 바로 신라정벌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정벌 기사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어 현실 사건을 기술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겨울 10월 3일 화이진에서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속의 큰 물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어 범선은 파도에 따라 나아갔다. 노를 쓸 필요없이 곧바로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 안까지 미쳤다. 이로써 천신지기天神地氣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였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 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 『일본서기』

 

이 뒤에는 신라왕이 일본을 상전으로 모시고 해마다 빠짐없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신라 왕의 이름을 파사매금婆娑寐錦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왕(파사이사금)은 재위연도가 80~112년으로 신공황후 시대보다 250년 이전의 사람이다.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가공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삼한이 천황가의 직할영토라고 조작
『일본서기』는 계속해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왕이 신라가 항복했다는 것을 듣고는 스스로 군영으로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일본의 번국蕃國으로서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래서 신공황후는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을 정하였는데 이것을 삼한三韓이라고 하였다.

내관가둔창은 천황가의 직할 영토라는 뜻이다.

 

『일본서기』는 삼한이 천황가의 영토라는 엄청난 역사왜곡을 자행한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실린 신라정벌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백제의 가야원정을 일본의 원정으로 왜곡
그러나 신공황후 49년조에는 목라근자木羅斤資(모쿠라콘시)의 가야7국 평정 기사가 실려 있다.

아라타와케(荒田別), 카가와케(鹿我別) 등이 이끄는 일본 군대가 목라근자의 증원군과 함께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창녕), 남가야(김해), 녹국㖨國(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 7국을 평정하였다는 기록이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강진)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제주)를 백제에게 주었다.

백제왕 초고(근초고왕)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들과 만나 김제에서 회맹會盟하였다.

회맹에서 백제왕은 이후 항상 서번西蕃을 칭하고 봄가을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다는 기록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 기록을 사실로 보고 일본이 임나를 직접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간접 지배했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가 일본 장군이 아니라 백제 장군이었다는 점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장수라는 아라타와케와 카가와케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점 등으로 판단할 때 이 원정은 백제의 원정이었는데 이를 『일본서기』가 일본의 원정으로 왜곡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일본이 아니라 백제가 가야 7국을 평정한 후 가야에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를 파견하여 경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일본서기』는 목만치가 일본에 귀화한 것을 근거로 일본이 한 것으로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