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천지대세에 어두운 자㉖

생존의 비밀

조상을 부정하고 천지대세에 어두운 자는 멸망한다


인류는 지금 총체적인 문명의 전환점에 서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대로 가면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상제님은 이런 인간의 삶을 “저것들 다 하루살이다, 하루살이!”(도전6:65)라고 하셨다.

불빛을 쫓다가 불기둥에 스치기만 하면 녹아서 없어지는 하루살이 깔따구처럼, 눈앞에 보이는 이끗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 낙엽으로 나뒹굴게 된다는 말씀이다.

 

가을은 모든 생명이 소멸을 하면서 열매를 맺는 계절이다.

이때는 오직 천지 조화주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오려면 병으로 병을 씻어내야 한다”(도전2:139)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세상은 점점 후천 새 역사를 열기 위한 병란 개벽의 상황으로 조여들어 가고 있다.

 

오늘의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궁극의 성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씨름과 더불어 몰려오는 질병 대란을 극복하고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 것인가?

 

1)누가 살고 누가 죽는가
‘우주의 가을이 오고 있다!’일찍이 인류 역사에 이 한마디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동서의 어떤 성자도 장차 인류에게 닥쳐올 대변혁의 실체가 우주의 가을개벽임을 알지 못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소년으로도 지각을 차린 자에게는 ‘철을 안다’ 하고, 노인도 몰지각하면 철부지한 아이와 같다”(도전2:138)고 하셨다.

때를 모르고 사는 인생은, 아무리 학덕이 뛰어난 학자나 재능이 특출한 지구촌의 최고 경영자라 하더라도 한낱 철부지[節不知] 인생이라는 말씀이다.

 

우주의 여름은 이미 끝나가고 있다.

누구도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온 인류는 누구도 예외 없이 천지의 가을을 맞이해야 한다.

천지는 지금 가장 급진적인 파괴와 거듭남의 시대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천하대세를 아는 자에게는 천하의 살 기[生氣]이 붙어 있고, 천하대세에 어두운 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밖에 없느 니라” (도전2:137:3)라는 말씀대로, 상씨름이 넘어가고 3년 대병란이 몰려오고 지축이 정립하는 가을 개벽의 대세에 눈뜨는 자만이 살 길을 찾을 수 있다.

가을개벽 소식을 알면 살고, 그것을 모르면 죽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하대세에 눈 뜰 수 있을까?

그 길은 질병대란에서 인간을 건지기 위해 오신 상제님의 도법을 깨닫는 데 있다.

상제님은 당신님의 도법을 ‘판 밖의 남모르는 법’이라 하셨다.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는 법[전무지후무지법前煞之後無之法]’이라고도 하셨다.

 

따라서 선천 문화의 ‘판 안’에 물든 채 고정 관념에 갇혀 있으면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대로 알 수 없다.

선천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한 기존 종교의 성직자, 종교인, 지식인, 전문가들은 오히려 그 지식이 장애가 되어 상제님, 태모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름에는 여름옷을 입어야 하고, 가을에는 가을 옷을 입어야 한다.

의식의 지평을 넓혀서 가을 세상에 알맞은 깨달음의 눈을 갖지 못하면 결코 가을 개벽을 극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제님은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천 관습 고치기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 (도전9:208)
•너희는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삶을 도모하라. 묵은 습성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그 몸이 따라서 망하느니라. (도전2:41)

 

과감히 묵은 생각을 떨쳐내고 판 안에서 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바로 거기에 살 길이 있다.

상제님의 도법은 모든 것이 새롭고 또 새롭다.

 

원시반본, 뿌리 기운을 받아야 열매 맺는다.

증산 상제님의 상생의 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원시반본은 뿌리로,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가을은 생명이든 자기의 뿌리를 찾아 돌아가는 때이다.

 

뿌리로 돌아가, 뿌리 기운을 받아야 가을에 열매를 맺어 다음해 봄에 다시 싹을 틔우고 생명을 이어간다.

‘열매는 뿌리 기운의 결정체’이다.

만일 가을철에 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생명의 순환은 거기서 끝이 나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자기 자신을 낳아 준 조상이다.

따라서 지금은 누구도 자기 부모, 자기 조상을 잘 받들어 혈통 맥을 바로 잡아야 한다.

 

•지금은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시대니 혈통줄을 바르게 하라. 환부역조換父逆祖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도전7:17)
•너희에게는 선령先靈이 하느님이니라. 너희는 선령을 찾은 연후에 나를 찾으라. … 사람들이 천지만 섬기면 살 줄 알지마는 먼저 저희 선령에게 잘 빌어야 하고, 또 그 선령이 나에게 빌어야 비로소 살게 되느니라. (도전7:19)

 

지금 부모와 조상을 박대하거나 부정하고, 조상의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없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나를 낳아 준 사람이 바로 내 부모, 내 조상이다.

그래서 내 개인에게는 내 조상이 제1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과 같이, 상제님을 찾기 이전에 자신의 부모와 조상을 제1의 하나님으로 받들어야 한다.

만일 자손이 조상을 우습게 알고 배반하면 조상도 자손을 돌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세계 각 민족마다 시원 역사의 창시자가 계신다.

그분을 민족의 하나님, 국통의 하나님이라 하는데, 이 민족의 하나님․국통의 하나님이 제2의 하나님이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환국의 환인桓因,배달국의 환웅桓雄, 조선의 단군檀君인 이 삼성조三聖祖가 국통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이다.

그리고 나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잘 받든 후에는 우주의 통치자 상제님, 절대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왜 상제님을 모셔야 하는가?

인류 문화의 뿌리는 바로 신교神敎 문화이며, 그 신교문화의 씨를 뿌리신 분이 상제님이시다.

상제님은 이 뿌리로부터 선천 문화의 꽃이 활짝 필 수 있도록 석가, 공자, 예수 성자를 지상에 직접 내려 보내셨다.

그렇게 해서 이들이 우주의 여름철에 줄기 문화인 동서양의 종교를 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시로 반본하는 우주의 가을철을 맞아 상제님께서 뿌리 문화인 신교와, 줄기 문화인 선천 종교의 기운을 모두 거두어 열매 문화인 인류의 통일 문화를 열어 주시기 위해 친히 강세하셨다.

우주의 가을철에는 뭇 생명이 뿌리로 돌아가야 생존하듯이, 인류 또한 뿌리 기운을 받아서 열매 진리를 만나야 산다.

 

그래야 우리 인생과 진리에 대한 모든 의혹이 총체적으로 해결되고 지구촌 인류가 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된다.

그 새로운 통일 문화가 바로 상제님의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진리의 뿌리, 도의 뿌리 되시는 상제님 진리를 만나 상제님을 모셔야 한다.

이것이 상제님의 뜻이며, 가을 개벽기 원시반본의 섭리를 따르는 진정한 생명의 길이다.

 

내가 살아야 조상도 산다. 무엇보다 가을 대개벽기에는 조상이 자손의 생사 줄을 쥐고 있다.
• 선령신이 짱짱해야 나를 따르게 되나니 선령신을 잘 모시고 잘 대접하라. 선령신이 약하면 척신隻神을 벗어나지 못하여 도를 닦지 못하느니라. 선령의 음덕蔭德으로 나를 믿게 되느니라.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 크게 깨치는 것도 일차적으로 조상의 음덕蔭德으로 이뤄진다.

즉 조상들이 대대로 생전에 세상에 공덕을 많이 쌓고, 죽은 후에는 천상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를 하며 정성을 들여야 겨우 자손 하나를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조상이 아무리 큰 음덕을 쌓고 하늘에서 도를 열어 주어도 자손이 못나고 정성이 없어 받아들이지 못하면 다 헛일이다.

 

반면에 조상의 음덕이 적고 척신이 발동하더라도 자손인 나의 일심만 강력하면 척신의 방해 기운을 잘 이겨내어 마침내 훌륭한 구도자로 거듭날 수 있다.

조상의 음덕과 자손의 일심!

이것이 조상과 자손이 함께 가을 병란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손이 하나라도 살지 못하면 천상의 조상도 살 수가 없다.

조상은 자손의 뿌리요 자손은 조상 선령의 숨구멍이다.

저 나무의 이파리와 가지를 죄다 떼 봐라.

그러면 숨구멍이 막혀서 그냥 죽어버린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손이 떨어지면 조상들도 다 없어져 버린다.

내가 살아야 내 조상도 살려 주고 또한 자손만대가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가을 개벽기에 내가 구원 받으면 수천, 수만 년 동안 대대로 살아온 나의 조상이 모두 산다.

내가 진리를 못 만나거나 잘못 닦아 추살병란秋殺病亂으로 죽으면 나의 조상도 자연적으로 소멸되고 만다.

이것이 가을 대개벽기의 구원과 죽음에 대한 하늘의 준엄한 경고이다.

 

선천 종교의 구원론은 자기 하나만의 구원으로 끝나지만, 상제님의 구원은 자손과 조상을 함께 건지는 총체적인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조상 신명들이 자기 자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자손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생존의 비밀』<26>

환인 환웅 단군 왕검 의미

진실의 역사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와 환, 단, 한의 뜻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

 

注(주)에 曰(왈)
桓仁(환인)은 亦曰天神(역왈천신)이시니 天(천)은 即大也(즉대야)며 一也(일야)오

 

桓雄(환웅)은 亦曰天王(역왈천왕)이시니 王(왕)은 卽皇也(즉황야)며 帝也(제야)오
檀君(단군)은 亦曰天君(역왈천군)이시니 主祭之長也(주제지장야)오
王儉(왕검)은 亦卽監群(역즉감군)이시니 管境之長也(관경지장야)니라.

 

『대변경』의「주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인桓仁은 천신天神이라고도 하니 천天은 곧 큼[大]이며, 하나[一]다.
환웅桓雄은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니 왕王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다.
단군檀君은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니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시다.
왕검王儉은 감군監群이라고도 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시다.


환, 단, 한의 뜻

故(고)로 自天光明(자천광명)을 謂之桓也(위지환야)오
自地光明(자지광명)을 謂之檀也(위지단야)니 所謂桓(소위환)은 則九皇之謂也(즉구황지위야)라

韓(한)은 亦則大也(역즉대야)니 三韓曰風伯雨師雲師(삼한왈풍백우사운사)오

加(가)는 卽家也(즉가야)니 五加曰(오가왈) 牛加主穀(우가주곡)하며

馬加主命(마가주명)하며 狗加主刑(구가주형)하며 猪加主病(저가주병)하며
鷄加主善惡也(계가주선악야)니 民有六十四(민유육십사)하고 徒有三千(도유삼천)이라.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환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또 크다[大]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우사·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진실의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②  (0) 2017.12.12
고려①  (0) 2017.12.11
홍산문화 시대 분류  (0) 2017.12.09
한국사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0) 2017.12.08
동북아 역사조작 한사군⑥  (0) 2017.12.07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 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 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 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본 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본 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 집順菴集』「동사 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 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 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 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 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 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 단군제에 소련 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 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의)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 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 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

유사역사학vs.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도종환 의원

진실의 역사

유사역사학 vs. 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인터뷰들을 인용)

 

1. 도종환 의원을 유사역사학 신봉자로 몰아부치는 목적은?
▷ 도종환 반대세력이 노리는 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교과서 국정화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와 연관된 한국사 정통성과 대한민국 정통성을 통합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을 지닌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2. 동북아역사지도는 도종환 의원의 압력 때문에 취소되었나?
▷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근본 목적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양대 역사 침탈, 즉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사군을 지금의 평양으로하고, 독도를 빼버림으로써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철저히 유린하였기에 동북아역사재단 내부 재심사 결과에 의해 폐기된 것이다.

3.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다?
▷ 국가주의는 국가권력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희생이 전제된다는 관점이라면, 민족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주체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근대사의 동력은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독립운동을 우리가 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데 민족주의가 아니면 통일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다.


4. 유사역사학의 굴레를 씌워서 몰아내기
▷ 역사학의 본질은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데 있다. 다양한 해석은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역사학의 특징을 부정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 독재다.

국민들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학자들이 강요 할 수 없는 시대가 돼 버렸다. 그런데 자기네들 이론을 반대하면 ‘환빠’로 매도한다.

특히 이덕일씨 주장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반발이 도종환 의원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5. 한사군 평양설은 정설이다?
▷ 한사군 연구는 끝난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서로의 학설을 존중하면서 격조 있게 연구를 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 본다.

고대사의 일부 연구자들이 한사군 연구는 국내설로 귀착되었다는 주장은 '역사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역사학 자체를 부정하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양설이 다수설로 볼 순 있다. 그러나 정설이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조선후기 영조대의 『동국문헌비고』에 한사군의 영역이 요동까지 뻗쳤다고 나와 있는데, 관찬 사서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설이었다는거다.

패수 압록강설을 주장하지도 않은 정약용을 내세워 한사군 국내설을 강화 하였지만, 정약용은 정작 패수 대동강설 주창자였다. 정약용의 주장대로라면 한사군 국내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6. 단군을 인정하지 않는 주류사학
▷ 역사학의 기본은 민족의 근원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한다. 학계 주류는 ‘고조선 국내설’을 주장하고 단군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군을 인정하지 않으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대한민국은 현대에 새로 출발한 국가에 불과하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진보적’ 역사학은 남북통일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지 퇴행적 역사관이 아니다. 이는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으로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7. 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 고대사 하는 분들을 막을 세력이 국내에 전혀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걸린 거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다고 하니까 이들이 겁을 먹은 거다. 혹시 자기네들한테 불이익이 될까봐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난 거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를 언급하자 그것도 역시 두려움이 있는 거다. 자기네들 주장이 권력에 의해서 제거될 두려움이 있는 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틀에 갇힌 주류 강단사학이 가야가 포함된 ‘4국시대’의 도래로 위기에 처한 셈이다.

학문 용어로 성립될 수 없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안(정준)씨 등의 행위는 마치 일제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대종교를 ‘유사종교’라는 라벨을 붙여 탄압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식민학자 거두 이병도 참회의 글

진실의 역사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식민학자 거두 두계 이병도 참회의 글

-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이병도 박사가 죽음을 삼년 앞둔 시점에서

평생 자신의 학설을 뒤집고

단군 조선의 실재를 인정한 기사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당시 사학계의 거두였던 두계 이병도의 이 참회기사는

조선일보 특집기사로 1면에 실릴만큼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식민사관과 친일파들에게 의해 숨겨졌던 한민족의 고대사가

해방 후 세상에 처음 드러났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단군신화' 운운하며 강단사학은

우물 안 개구리마냥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실증적 존재가 있는데

그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마흔 일곱 분 단군이 2096년 단 동안 다스린

고대 한민족의 전성기를 가졌던 고조선을

아직도 신화라 치부함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