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칠성문화①-고인돌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칠성七星문화

STEP1. 들어가기


한민족과 함께 한 칠성七星신앙

*백사장 세모래 밭에 칠성단을 모으고 임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은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리고 가족의 무사안녕을 칠성에 기원하였습니다.

칠성은 북녘 하늘에 있는 국자 모양의 일곱 개 별로 북두칠성을 말합니다.

다른 이름으로 칠성님, 칠성신, 칠성여래七星如來, 칠원성군七元星君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아들이 없는 아낙네들은 칠성단에 자손의 점지를 기원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는 시신을 넣은 관의 바닥에 칠성판을 깔아 칠성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상제님께 염원하였습니다.

칠성은 우리 민족에게는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늘 함께 하는 별이었습니다.

 

특히 아이가 단명短命으로 태어났을 때 북두칠성에 빌어 장수하게 만들었다는 설화가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우리 민족은 칠성을 인간의 운명과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인식하였습니다.

한민족의 칠성신앙은 역사의 출발과 함께 해왔습니다.

 

옛 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뚜껑돌에 북두칠성 ‘성혈性穴’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평안도 증산군 용덕리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에는 뚜껑돌 겉면에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었는데 조사 결과 이 구멍은 별자리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돌의 중심부에는 북극성이 그려져 있으며 80여 개의 구멍은 11개의 별자리에 있는 80여 개의 별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이 고인돌은 BCE 300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뚜껑돌에도 역시 80개의 구멍을 내어 북두칠성의 국자 형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계 천문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토지경계비에 새겨진 별자리를 고대 천문학의 원형으로 봅니다.

이 별자리의 그림은 BCE 1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별자리는 이보다 1800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천문학의 종주국이자 칠성신앙의 원조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⑤

진실의 역사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간단하게 말하면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에서 끝에 ‘지도’라는 것은 ‘~하는 그림’이란 뜻이다.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천문현상天文現象의 줄임 말이다.

열차列次란 하늘 별자리를 구획으로 나누어 펼쳐 놓았다는 의미이고, 분야分野라는 것은 하늘 구획을 땅의 특정 지역과 대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공간을 방위와 방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3차원 우주 공간에 퍼져 있는 별들을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상의 방위와 방향에 맞게 2차원 평면에 펼쳐 놓은 것이 천문도이다.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들을 12구역으로 나누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조선 백성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지침서로서 ‘표준 천문도’였다.

이 표준 천문도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천문학

고려 시대의 천문 관측 기록은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

정밀한 관측 기계가 아니면 관찰이 어려운 천문 현상까지 남기고 있다.

고려는 다양한 국가 천문 기관에서 30명에 가까운 천문 학자와 관리들이 활동했다.

 

고려 왕조 475년 동안 천문 관측 기록은 〈고려사〉, 〈천문지〉, 〈역지〉, 〈오행지〉 등에 집약되어 있다.

무려 6,500건에 달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 중 일식 138회, 혜성 87회 같은 비교적 쉬운 관측에서부터 태양 흑점을 관측한 기록도 38회나 있다고 한다.

한 예로 1151년 3월 2일에 ‘일중유흑자日中有黑子’ 즉, ‘태양 속에 검은 것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그 크기가 계란만 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자세한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고려사〉에 오윤부伍允孚가 천문도를 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 기록에서 평양에 천문도가 있다고 한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천문도를 고려가 이어받아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남아있는 정교한 천문도는 없지만 고구려의 별자리 특징을 볼 수 있는 것이 고려 희종의 무덤 천장에 있는 별자리 그림이다.

가운데 북두칠성이 있고 주변에 28수를 그려 넣었으며 태양과 달도 그렸다.

 

무엇보다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에는 북극성과 두 개의 별이 조합된 북극삼성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북극삼성은 고구려 때부터 이어진 특징이다.

동시대에 중국 천문도는 북극오성이 유행이었다.

집안시 씨름무덤(각저총), 춤무덤(무용총), 통구 사신총, 평양시 진파리 4호분 등 고구려 벽화에서 북극삼성이 보인다.

 

또 다른 고구려 벽화의 별자리 전통은 일월, 북두칠성, 그리고 남두육성의 조합이다.

동서쪽에 그려진 해와 달에는 삼족오와 두꺼비가 그려져 있고 북쪽에는 북두칠성 남쪽에는 남두육성이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부터 고려로 전해진 독특한 별자리 체계는 또 있다.

 

고려로 계승된 대표적인 특징은 카시오페아 별자리이다.

주변 국가 천문도에서는 W모양의 카시오페아 별자리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에서는 W모양의 별자리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고려 석관에도 북두칠성과 함께 짝으로 W모양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 천문과학을 전수한 고조선

고조선 영역에는 수많은 고인돌이 있다.

그 중에는 별자리가 그려진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었다. 불

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인돌에 새겨진 구멍들을 별자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조선 때부터 별자리를 관측했음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유물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고인돌에 별자리로 보이는 홈을 적게는 1~2개에서 많게는 400개까지 새긴 것들이 나타난 것이다.

1978년 충북 청원군 아득이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 유적에서 크고 작은 별이 60여 개 이상 새겨진 돌판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아득이 돌판의 점들이 진짜 별자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진파리 4호 무덤(6세기경)의 별자리와 기원전 15세기 지석리 고인돌의 별자리와 기원전 5세기 북극성 주변의 별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해서 서로 비교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득이 돌판의 별 배치가 다른 예들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아득이 돌판은 진짜 천문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돌판에 새겨진 별들의 지름이 별의 밝기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별이 밝으면 크게, 흐리면 작게 표시하는 고구려 천문학 전통이 이미 고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원본을 만든 고구려인들은 아득이 돌판을 만들었던 고조선으로부터 세계 최초의 천문 관측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수천 년의 천문 관측 기술과 역량이 드러난 걸작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이자, 세계의 자랑거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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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 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 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 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본 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본 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 집順菴集』「동사 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 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 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 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 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 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 단군제에 소련 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 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의)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 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 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

세계 고인돌의 반이상이 한반도에 있다-바이 코리아(BUY KOREA)

진실의 역사

'세계 고인돌의 반이상이 한반도에 있다'

 

"나는 원래 비교역사학의 대가가 아닌가.

 

처음 내가 이 신비한 민족과 맞닥뜨린 것은 고인돌을 통해서였어.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더군.


이상하지 않나? 이 넓은 지구상에 그 좁은 한반도라는 지역에


세계 고인돌의 70%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고인돌에 미쳐 있던 나는 한국어를 아주 열심히 공부했어.


그러고는 무작정 한국에 갔어. 뭐라고 얻어보려고 말이야."


"호,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는 줄은 저도 몰랐는데요."


사나이는 약간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니 아무도 모르는거야.


학자든 뭐든 아무도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자기 나라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 나라 역사를 샅샅이 뒤졌어.


그러면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어."


"왜요?"


"흐흐,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자기 나라에 있으면


그 역사란 건 무서울 정도로 오래됐다는 얘기가 아냐?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줄이지 못해 안달이더군.


고인돌이란 강력한 부족국가의 상징인 것은 자네도 잘 알테지.


그런데 이 사람들은 중국에서 누군가 내려오기 전의 한반도란


그저 미개인들이 흩어져 살았던 것으로 생각하더군.


모든 역사책도 그렇게 만들고.


그러면 그 많은 고인돌들은 세계 각지에서 수입해 갖다 두었단 말인가?


이렇게 온 나라 전체가 잘못된 역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나라는 처음이었어."


"그게 신비하단 말씀인가요?"


"아니, 더 신비한 일이 있었어."


사나이는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랐다.


폐허에서 위스키와 거위간을 즐기는 이 사나이에게서는


알 수 없는 풍자와 허무가 묻어 나왔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비교역사 연구가이면서 성서 전문가야.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두 눈동자가 튀어나올 뻔한 발견을 했어.


바로 그 한국에서 가장 신비하다는 인물의 저서를 읽을 때였지.


나는 그 책에서 성서의 요한계시록과 똑같이 씌어진 구절을 찾아낸거야."


"네? 언젯적 책인데요?"


"한국에 성서가 처음 소개되기도 전의 책이야.


그 책에는 놀랍게도 성서의 요한계시록과 같은 숫자가


문장 하나 틀리지 않고 나왔어."


글렌은 아직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눈길로


자신의 상전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문화의 뿌리가 같다는 얘기지.


한국인들이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전,


본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는 수메르족하고 뿌리를 같이하는 거란 얘기지.


이스라엘이 수메르족의 후예이듯 말이야."


"수메르란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물론.


그들은 바이칼 호 부근에 살다


일부는 시베리아를 동진해서 한반도로 들어가고


또 일부는 서쪽으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중근동으로 들어갔어.


일부는 그냥 바이칼호 부근에 남아 있었고.


이들은 자꾸 이질화되어 갔지만 아직도 어느 부분에서는


동질의 문화를 갖고 있어.


요한계시록과 그 예언서에 나오는 숫자가 같다는 점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거지."


"오오, 그거야말로 인류사상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군요."


"과제? 그렇지, 과제지.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실망하고 말았네.


나는 한국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가 되어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실망스럽게도 전혀 없었어."


"그럴리가요?"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라네."


"오오."


"처음 나는 한국을 좋아했어.


그러나 차츰 한국이 너무도 싫어지기 시작했네."


"왜요?"


"그들은 인류의 유산을 죽여 버린 게 아닌가.


그들 자신이 활발하게 연구해 세계에 내놓아야 할 고대의 신비한 유산을


모조리 묻어버리지 않았나?


그들은 범죄자야.


인류의 유산을 탕진한 범죄자라구."


"이상하군요.


그 나라에도 학자와 연구자들이 있을텐데요."


"그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여 미치광이 취급을 받아.


내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자 갑자기 한국의 학자들이 모두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어."


"네? 미워하다니요?


고맙게 생각했으면 했지."


"그게 한국이라는 나라야.


모두가 패거리로 나뉘어 있어.


연구는 하나도 안 하는 놈들이 패거리끼리 뭉쳐가지고


나를 공격하는데 나중엔 인신공격까지 하더군."


"......."


"자기네 나라에 고인돌이 그렇게 많으니 굉장히 강성한 고대국가가


있었을 거라고 했더니 그런 나라는 중국에나 있었지 자기네 나라는


고구려니 뭐니 하는 나라가 최초의 고대국가였다고


떼를 지어 달려드는데 나는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네.


알고 봤더니 그건 일본인들이 식민 지배 때 조작해 가르친 역사였어."


"한국은 아직 일본의 식민지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나라는 먹고사는 것 밖에는 모르는 나라야.


모두가 돈에만 관심 있고 역사니 문화니 하는 것은 껍질밖에 없는 나라야."


<김진명 작 - 바이 코리아(BUY KOREA) 中>

 

 

 

이것은 소설이 아닌 실화입니다.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면
고대에 엄청난 국가가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한글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자 서열로 1위라고 합니다.
문자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하는데

그건 뛰어난 정신 문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위대한 역사는 가르쳐주지 않고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게 되고

찬란한 역사는 감추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세계사 속에서 한국 고대사는 사라졌습니다.

한반도의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시원 역사는 왜 이토록 왜곡된 채 방치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한결 같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든 채 너무도 안일 무도하여

제 나라 역사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는 민족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 도적질을 나무랄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를 훔친 민족보다

지키지 못한 민족이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국토는 그 민족의 육체고 역사는 그 민족의 영혼입니다.

우리 민족이 혼 빠진 민족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 우리 스스로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역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이 얕보고 역사를 빼앗아 가는 것 입니다.
이젠 우리가 역사 왜곡의 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