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동서양의 칠성문화②-북두칠성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칠성七星문화

 

STEP2. 동·서양의 칠성문화

 

1. 삼신과 칠성

삼신은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고 칠성은 출생 이후 인간의 건강, 수명, 복록 등을 관장한다고 믿어왔습니다.

삼신과 칠성은 체와 용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신을 체로 하여 칠성으로 만물을 다스립니다.

칠성은 곧 삼신상제님이 계시는 별입니다.

달리 말해 북두칠성은 대우주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별입니다.


7의 정신
3은 반드시 7을 만나야 새로운 현실의 틀이 만들어집니다.

7은 3이라는 하늘의 완전수(삼신)와 4라는 지상의 완전수(동서남북, 봄 여름 가을 겨울)가 합쳐진 수입니다.

3, 4에서 시작한 운동은 5와 7에서 순환을 완성합니다.

 

옛 사람들은 하늘과 지상이 합쳐지면 복이 온다고 믿고 7을 성스러운 수로 숭배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 자에 7(七)자를 많이 넣었고 서양에서도 7수를 ‘럭키 세븐(lucky seven)’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자들도 7을 가리켜 영적인 완전수이며 위대한 수라고 하였습니다.

 

運三四(운삼사)하여 成環五七(성환오칠)이니라.

역주 천지만물 3과 4수 변화마디 운행하고 5와 7수 변화원리 순환운동 이룸일세. 『(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천부경 中에)

 

하늘에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칠성七星이 있고, 그 기운을 받아 인간의 얼굴에도 일곱 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민간 속설에서는 생명이 7수를 주기로 펼쳐진다고 말합니다.

일주일은 7일이고 빛은 일곱 스펙트럼으로 나뉘어집니다.

3과 7이 곱해서 되는 21 역시 수행과 기도에 있어 중요한 수였습니다.

3×7=21에서 ‘곱하기[×]’는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성기도 공부를 할 때는 7일 단위로 7일, 21(7×3)일, 49(7×7)일 수행을 주로 합니다.

 

擇三七日(택삼칠일)하사 祭天神(제천신)하시며 忌愼外物(기신외물)하사
閉門自修(폐문자수)하시며 呪願有功(주원유공)하시니라

역주 삼칠일(21)을 택하여 상제님께 제사지내고 바깥일[外物]을 꺼리고 삼가 문을 닫고 수도하셨다. (「삼성기전 상」)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칠성은 곧 삼신상제님이 계시는 별인 북두칠성이다.

달리 말해서 북두칠성은 대우주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별이다.

때문에 북두칠성은 우주의 중심별로서 천지일월과 음양오행을 다스리며 인간의 무병장수와 생사화복, 영원불멸, 도통과 깨달음을 관장한다.

우리 조상들이 상고 시대의 무덤이자 제단인 고인돌에 칠성을 그리고, 죽은 사람의 관 밑에 칠성판을 깐 것은 바로 칠성신앙의 한 모습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415쪽)

칠성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은 우주의 중심별로서 천지일월과 음양오행을 다스리며 인간의 무병장수와 생사화복, 영원불멸, 도통과 깨달음을 관장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우주의 주재자 상제님을 삼신상제님 또는 칠성님이라 불렀습니다.

칠성님은 신교문화에서 한민족의 선조들이 하느님을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었습니다.

 

칠성 사상은 9천 년 한민족사의 모든 왕조에서 국가경영제도의 근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전반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천관서」에서 “북두칠성이란 이른바 ‘선기옥형을 살펴서 칠정을 다스린다’는 것이다[北斗七星, 所謂璇璣玉衡以齊七政].”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칠정七政이란 해와 달과 금, 목, 수, 화, 토의 오성五星을 말합니다.

일월은 음양론의 근거가 되고, 오성은 오행론의 기준이 됩니다.

결국 이 말은 북두칠성이 천지일월의 운행을 주관한다는 뜻입니다.

 

北斗者(북두자)는 乃天地之元靈(내천지지원령)이요 神人之本命也(신인지본명야)라 北斗居天之中(북두거천지중)하야
爲天之樞紐(위천지추뉴)며 天地之權衡也(천지지권형야)라 天(천)이 無斗不生(무두불생)하고 無斗不成(무두불성)하며
無斗不明(무두불명)하고 無斗不行(무두불행)하나니 斗爲量度之玄器也(두위양탁지현기야)니라

 

북두칠성은 천지의 으뜸가는 성령이며, 신과 인간의 근본생명을 주장하니라. 북두칠성은 하늘 가운데 자리해서 하늘의 지도리가 되며, 천지의 저울이 되니라. 하늘이 북두칠성이 없으면 만물을 생성하지 못하며, 북두칠성이 없으면 만물을 성숙시키지 못하며, 북두칠성이 없으면 세상을 밝히지 못하며, 북두칠성이 없으면 하늘 자체가 운행하지 아니 하나니, 북두칠성은 헤아리고 살피는 현묘한 그릇이 되느니라. (『도장道藏』17권 「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注」)

 

北斗(북두)는 七政之樞機(칠정지추기)며 陰陽之本元也(음양지본원야)라
故(고)로 運乎天中而臨制四方(운호천중이임제사방)하야 以建四時而均五行也(이건사시이균오행야)라
又曰人君之象(우일인군지상)이요 號令之主也(호령지주야)며 又爲帝車(우위제거)니 取乎運行之義也(취호운행지의야)라

 

북두는 칠정의 핵심이 되는 기틀이며 음양의 본원이니라. 고로 하늘 가운데에서 빙빙 돌아서 사방을 통제해서 사시를 세우고 오행을 고르게 하니라. 북두칠성은 임금의 모습이며, 모든 별들을 호령하고, 모든 인간세계를 호령하는 주인공이며, 옥황상제님께서 타시는 수레니, 수레는 운행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라. (『천문류초天文類抄』)

칠성문화①-고인돌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칠성七星문화

STEP1. 들어가기


한민족과 함께 한 칠성七星신앙

*백사장 세모래 밭에 칠성단을 모으고 임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은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리고 가족의 무사안녕을 칠성에 기원하였습니다.

칠성은 북녘 하늘에 있는 국자 모양의 일곱 개 별로 북두칠성을 말합니다.

다른 이름으로 칠성님, 칠성신, 칠성여래七星如來, 칠원성군七元星君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아들이 없는 아낙네들은 칠성단에 자손의 점지를 기원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는 시신을 넣은 관의 바닥에 칠성판을 깔아 칠성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상제님께 염원하였습니다.

칠성은 우리 민족에게는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늘 함께 하는 별이었습니다.

 

특히 아이가 단명短命으로 태어났을 때 북두칠성에 빌어 장수하게 만들었다는 설화가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우리 민족은 칠성을 인간의 운명과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인식하였습니다.

한민족의 칠성신앙은 역사의 출발과 함께 해왔습니다.

 

옛 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뚜껑돌에 북두칠성 ‘성혈性穴’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평안도 증산군 용덕리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에는 뚜껑돌 겉면에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었는데 조사 결과 이 구멍은 별자리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돌의 중심부에는 북극성이 그려져 있으며 80여 개의 구멍은 11개의 별자리에 있는 80여 개의 별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이 고인돌은 BCE 300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뚜껑돌에도 역시 80개의 구멍을 내어 북두칠성의 국자 형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계 천문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토지경계비에 새겨진 별자리를 고대 천문학의 원형으로 봅니다.

이 별자리의 그림은 BCE 1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별자리는 이보다 1800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천문학의 종주국이자 칠성신앙의 원조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⑤-기마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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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북방민족

 

STEP3.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북방민족의 기원


세계를 뒤흔든 기마민족

3세기에서 6세기까지 세계 지도를 바꾼 주체 세력은 북방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13세기 지구촌 네트워크를 구축한 이들 역시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BCE 2세기부터 세계적인 대제국을 잇따라 만들어 냈습니다.

 

지배층이 바뀌는 데 따라 제국의 이름은 흉노-선비-북위-돌궐-위구르-거란-금-몽골제국(중국에선 元)-청 등으로 바뀌었지만 몸통은 항상 여러 부족의 유목기마민족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몽고군이 보여준 필사적인 결의, 허를 찌르는 기동력,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전술 등에 대해 ‘황색공포(Yellow Peril)’라고 표현하며 아직도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들 북방 민족의 기원이 배달과 고조선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한민족이 움직일 때마다 세계사의 향방이 결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훈족의 이동은 로마를 멸망시켰고, 몽고인들은 세계를 단일경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당시 몽고인들이 통일화폐로 사용한 지폐는 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었을 정도입니다.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이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도 타민족을 제외한 실제 몽고기병은 4∼1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인원으로 1∼2억 정도의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가들조차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95년 워싱턴 포스트 지는 지난 1천년간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유전학적 기원은 북방계와 남방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동動적인 북방 유목문화와 정靜적인 남방의 농경문화의 요소가 결합되었습니다. 그러나 광활한 대륙을 잃어버리고 한반도로 쫓겨들어오면서, 국가와 제도라는 편안한 울타리에 안주하면서부터 우리는 북방 문화와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좌절되자 우리의 북방 이야기는 전설 속으로 사그라들었습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시대는 스스로 주인임을 포기하고 대국大國의 신하임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후 있었던 북진北進과 북벌北伐은 담론 차원에 그쳐버렸고 전 국가적인 정책으로 수렴되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주변국들에게 역사를 빼앗겨 버렸고 또한 우리 스스로도 힘써 역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민족, 나라는 있으되 정신은 없는 국민들은 시대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자기 삶의 주인도 될 수 없습니다.


새 역사를 개척하는 성웅으로 거듭나야

한문화의 중심에 신교가 있고 신교에서는 문과 무를 겸비한 인간상을 추구합니다. 문과 무는 일체양용一體兩用으로 작용할 때 서로가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유목문화의 동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와 농경문화의 정적이고 섬세한 기운이 합쳐져야 조직이 건강해집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북방 DNA를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는 붉은 악마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역동성과 신바람을 확인하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디지털 노마드Nomad의 시대입니다. 안주하면 죽고 변화하면 사는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제도와 틀에 갇혀 온 정적인 정신으로는 온갖 정보들이 조화를 지어내고 시시각각 역사가 뒤집어지는 디지털 시대를 선도해나갈 수 없습니다. 창의와 혁신, 그리고 개척 정신으로 무장한 노마드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수성守成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대륙을 휘달리며 수많은 나라를 정복한 동방의 알렉산더 광개토태왕이 있고 대당 사대주의의 역사를 혁명하고 서토西土를 정복했던 연개소문과 같은 영웅이 있었습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한민족의 원류의 하나는 역시 알타이, 천산, 몽골 고원을 무대로 역사를 펼친 북방계 민족이다. 한민족의 원류가 북방계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민족’이라는 의식, 천신 즉 삼신상제를 숭배하는 종교문화, 난생설화, 가야 유물에서 나타나는 동복銅O및 마갑馬甲과 같은 북방 유목민 유물, 고구려 벽화에서 생생하게 나타나는 기마전사로서의 성격, 그리고 순장제와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풍습) 같은 관습 등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329쪽)

 

이제 세월호 침몰에서 확인한 우리 사회의 낡은 관행과 묵은 정신을 『환단고기』가 전해주는 우리의 원형문화로 말끔히 씻어내야 합니다. 신교가 추구하는 진선미의 인간은 성웅 겸비의 영걸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 역사를 개척하는 삼랑三郞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역사광복과 오만년 새로운 역사를 쓰는 역사혁명의 대장정에 다함께 참여합시다.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④-선비 돌궐 거란 거란

진실의 역사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

 

STEP2.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북방민족의 기원

 

3. 선비와 돌궐 그리고 거란, 여진족


중국 수·당의 뿌리, 선비족

『후한서』에는 선비와 오환을 모두 동호東胡(번조선)의 후예라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선비는 고조선에 속한 족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선비족의 발상지를 『위서魏書』에서 대선비산大鮮卑山으로 꼽았는데, 이 대선비산이라는 산 이름에서 선비족이라는 족명이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북흉노가 1세기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여러 유목 집단이 초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고, 결국 선비족鮮卑族이 패권을 잡고 북방 지역을 통일하였습니다. 선비족의 기원은 고조선에 속한 동북 지방이었습니다. 중원에서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여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이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남하하였는데 이로써 5호胡 16국國 시대가 열립니다. 5호 16국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를 무너뜨린 당나라 역시 그 기원이 선비족에 있습니다.

 

己未四十年(기미사십년)이라 封皇弟代心(봉황제대심)하사 爲南鮮卑大人(위남선비대인)하시니라.
역주 재위 40년 기미(단기 712, BCE 1622)년에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국南鮮卑國의 대인으로 봉하셨다. 「( 단군세기」16세 위나단군)

甲寅三年(갑인삼년)이라 鮮卑山酋長們古(선비산존장문고)가 入貢(입공)하니라.
역주 재위 3년 갑인(단기 1487, BCE 847)년에 선비산鮮卑山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 단군세기」32세 추밀단군)

          

 

돌궐의 후예 터키

단군세기에는 돌궐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옵니다. 3세 가륵 단군이 지백특支伯特에서 강거의 반란을 토벌하였다는 것입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키는데, 18세 동엄 단군 때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활동 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인 ‘투르크Turk’족이 바로 돌궐突厥족입니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에 강력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돌궐족은 원래 몽골족 국가인 유연柔然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돌궐족이 553년에 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후 돌궐의 후예들은 북방의 초원을 떠나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가즈나 왕조(975~1187)를 세우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1037)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습니다. 13세기의 마지막 해, 129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 말에는 발칸 반도까지 장악하였습니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정사인 『요사遼史』 「세표世表」에 거란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 상세히 전합니다.

“흉노 모돈(묵돌)에게 패한 동호東胡는 선비산에서 보전하고 있었는데 선비씨라 하였다. 그 후 모용씨의 연이 선비를 파하자 그 부部를 나누어 우문·고막해·거란이라 하였다. 거란의 이름이 이에 비로소 생겨났다[後爲冒頓可汗所襲, 保鮮卑山以居, 號鮮卑氏. 旣而慕容燕破之, 析其部曰宇文, 曰庫莫奚, 曰契丹.]”라고 하였습니다.

 

동호는 BCE 2백 년경, 한 고조 유방을 굴복시킨 흉노의 대영웅 묵돌선우(묵특선우)에게 멸망당하여 오환산과 선비에서 숨어 보전하며 오환·선비족이 되었습니다. 이 선비족에서 거란이 나왔습니다. 고막해·거란족은 후세에 몽골족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거란 부족의 시조에 대해 『요사遼史』 「지리지地理誌」 영주永州 조에서는 “전설에 따르면, 한 신인神人이 흰 말을 타고 마우산으로부터 토하(노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갔고, 한 천녀天女는 푸른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평지송림으로부터 황하潢河(황수=서요하)를 따라 내려왔다. 목엽산木葉山에 이르러 두 강이 합류하니 서로 만나 배필이 되어 여덟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 뒤로 족속이 점차 번성해져 팔부로 나뉘었다[相傳有神人乘白馬, 自馬盂山浮土河而東, 有天女駕靑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 至木葉山, 二水合流, 相遇爲配偶, 生八子. 其後族屬漸盛,分爲八部.]”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거란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옛 고리국稾離國 일대를 근거로 하여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리국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후북부여(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 고두막한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진 때 오경五京의 하나인 서경압록부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요나라의 도읍인 상경임황부(지금의 요하 상류 임황)가 자리 잡았는데, 이곳은 바로 옛 고리국의 중심부였습니다. 거란 역시 분명히 조선족(한민족)의 한 갈래입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는 또 다른 북방 민족에 의해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 이동이 발생하였다. 흉노와 선비족이 일으킨 이동의 파도는 유럽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 북방 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다. 또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동북아의 중심이었던 고조선의 문화적 자양분을 흡수하며 동북아의 북방에서 뻗어 나간 유목민의 대이동이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본문 321쪽)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환단고기』 「고려국본기」에서는 여진 사신의 말을 인용하여 여진의 선조가 고려 출신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금 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준 :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평주의 승려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평주중 금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당초에 여진으로 들어가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古乙이라 불렀는데, 금나라 시조 아골타가 그 후손이다’라고 한다[今俊: 世傳, 昔有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爲金之先. 或曰‘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 娶女眞女, 生子曰古乙. 金祖阿骨打, 乃其後也.’]”는 기록이 있습니다.

 

睿宗文孝大王四年秋(예종문효대왕사년추)에 撤九城(철구성)하야 還女眞舊地(환여진구지)하니라.
先是(선시)에 女眞(여진)이 使O弗史顯等(사요불사현등)하야 入朝奏曰(입조주왈) 昔(석)에
我太師盈歌(아태사영가)가 嘗言我祖宗(상언아조종)이 出自大邦(출자대방)하니 至于子孫(지우자손)하야 義當歸附(의당귀부)가 可也(가야)라 하더니 今太師烏雅束(금태사오아속)이
亦以大邦(역이대방)으로 爲父母之國(위부모지국)이러니 ......


역주예종 문효文孝대왕 4년(단기 3442, 1109) 가을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여진이 요불褭弗,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저희 태사 영가盈歌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歸附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께서도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고려국본기」)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흉노, 선비, 돌궐 등의 북방 민족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신교 삼신문화의 천신天神사상이다. 흉노의 경우 선우는 천신의 아들로서 그 뜻을 지상에 펴는 제사장이며 대리자였다. 선우는 한나라 황제에게 보낸 문서에서 늘 자신을‘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 혹은‘ 천지가 낳고 일월이 세운 흉노 대선우’라칭하였다. 흉노인은 천신의 상을 만들어 받들었는데, 금으로 된 큰 신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한서』「흉노전」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또 흉노 사회에서는 주술과 의술을 겸한 무당이 있었다. 선비족이나 돌궐족도 이러한 흉노 사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323쪽)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 지방의 말갈인은 고구려 복국 운동에 협력하였고, 대진(발해)이 성립되자 다시 대진에 예속되었습니다. 흑룡강 하류 지역에 살던 흑수말갈은 당唐과 결탁하여 대진 세력을 배제하려 하다가, 마침내 대진 3세 무황제에게 토멸 당해 150여 년간 종족의 이름조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10세기 초에 대진이 거란에게 망하자,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족(대진 유민)과 퉁구스 만주족을 통틀어 여진女眞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금사金史』를 보면, 그 서두에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가족이다. 다 같이 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다[女眞, 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라는 금나라 건국자[金太祖] 아골타阿骨打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고조선·부여·고구려의 후손인 발해 사람과 여진 모두 뿌리가 같은 동족입니다.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③-몽고

진실의 역사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

 

STEP2.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북방민족의 기원

 

2. 유라시아를 아우러는 대제국 몽고

 
몽고의 기원
원래 몽고蒙古라는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당나라 때 처음 몽와, 몽골이라는 명칭이 나타납니다. 현재 몽고의 공식 국가명칭이 몽골리아(MONGOLIA)이고 민족이나 민족어를 지칭할 때 몽골(MONGOL)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몽골(Mongol)은 원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어였으나, 칭기즈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전체 몽골인과 몽골어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몽골의 기원에 대해 『환단고기』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甲申元年(갑신원년)이라. 封皇弟烏斯達(봉황제오사달)하사 爲蒙古里汗(위몽고리한)하시니
或曰今蒙古族(혹왈금몽고족)이 爲其後云(위기후운)이라
역주 오사구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환기 5061, 신시개천 1761, 단기 197, BCE 2137)년이다. 임금께서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셨다. 혹자는 지금의 몽골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 단군세기)」

乙酉二年(을유이년)이라 藍國君今達(남국군금달)이 與靑邱君(여청구군)과 句麗君(구려군)으로 會于周愷(회우주개)하고
合蒙古里之兵(합몽고리지병)하야 所到(소도)에 破殷城O(파은성책)하고 深入奧地(심입오지)하니라
역주 재위 2년 을유(단기 1098, BCE 1236)년, 남국 왕 금달今達이 청구국왕, 구려국 왕과 더불어 주개周愷에서 만나 몽고리의 군대와 합세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부수고 오지奧地로 깊숙이 들어갔다. (「단군세기」 23세 솔나단군)

    

 

몽고의 풍습
흉노, 선비, 거란, 돌궐, 몽골은 본래 동북아 초원에 살던 다양한 유목족 가운데 일부였으나 인근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각 시대별 초원 제국의 호칭이 되었습니다. 몽골은 흉노의 일부, 선비·돌궐·거란의 일부로 내려오다가 13세기에 마침내 유목 민족을 통일하여 몽골 제국[元]을 건설하였습니다.

 

최근 몽골 지역 답사 내용을 보면 몽골 문화가 동방고조선 민족의 신교 문화와 같은 뿌리임을 실감하게 합니다. 백색 숭상, 천제天祭 문화, 고수레·돌장승·깃털 장식·씨름·샤먼 의식 등의 풍속, 청동기·빗살무늬 토기 등의 유적 유물, 몽골 반점, 용모, 언어, 설화, 신앙 등이 우리 한민족과 혈통적 친연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한 동일문화권입니다. 예를 들어 몽골의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인 ‘오보’는 우리의 서낭당과 같고, 오보 제祭는 소도 제천 풍속과 같습니다.

 

몽골인은 산을 신성시하여 산에 제를 지냈는데 칭기즈칸도 부르칸칼둔 산에 피신하였을 때 매일 그 산에 제를 올리고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몽골인들은 또 술을 마시기 전에 손가락으로 술을 세 번 튕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의 고수레와 유래가 같은 것입니다. 돌탑 주위를 탑돌이 하면서 세 바퀴 돌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믿음도 있었는데, 이 또한 우리의 3수 신앙과 비슷합니다.

 

몽골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는 달구(달구지), 말루(마루), 정지(부엌), 인두(인두), 오루가(올가미) 등 우리말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또 왼쪽과 오른쪽을 우리말과 같이 왼쪽, 오른(바른)쪽이라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5부족인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가 몽골에서는 동·서·남·북·중앙을 지칭하는 말이라 합니다.

 

그 밖에 몽골 아이들의 놀이 가운데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굴렁쇠 놀이가 있고, 속담에 “처녀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문지방을 밟는 것을 금하는 것 역시 우리 풍속과 동일하며 오방신장五方神將의 관념까지 같습니다.


몽고의 정복사업
12세기 몽고초원은 부족간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206년 테무친(칭기즈칸)은 마침내 초원의 패자로 등극하였고 부족간의 싸움도 막을 내렸습니다. 1211년 금나라 원정을 시작하여 화친을 맺었고, 1218년 몽골제국의 첫 분권 왕조인 오고타이 한국을 세웁니다.

 

1220년에는 서역의 호라즘 제국과 여진족의 금나라를 멸망시킵니다. 1225년 이란, 이라크, 아르메니아, 러시아 지역까지 정복한 후 돌아와서 네 아들들에게 사한국四汗國으로 분할 통치하도록 하였습니다.

 

1227년 서하西夏 원정 도중 칭기즈칸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이 뒤를 이어 1234년에 금을 멸망시킵니다. 1235년에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유럽을 원정하였고,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정복하여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1259년에는 서아시아를 침공하여 일한국을 건설합니다.

 

1259년에는 고려를 점령하여 속국으로 만듭니다. 1271년 드디어 쿠빌라이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인 원 나라를 건설하였고, 1279년엔 남송南宋을 멸망시킵니다. 칭기즈칸 시대에 정복한 땅은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더 넓었습니다. 칭기즈칸이야말로 세계 역사 최초로 지구촌경영의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②-흉노족

진실의 역사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

 

STEP2.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북방민족의 기원


1. 유럽을 뒤흔든 흉노족
흉노의 기원
흉노족은 선우를 ‘탱리고도撑犂孤塗 선우’라고도 불렀는데, 탱리撑犂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孤塗’는 아들을 의미합니다. 곧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합니다. 동이족의 천자사상과 일치합니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며,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습니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습니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합니다. 세계사에서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던 흉노의 기원에 대해서 유일무이하게 밝혀주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甲辰六年(갑진육년)이라 命列陽褥薩索靖(명열양욕살삭정)하사 遷于弱水(천우약수)하시고 終身棘置(종신극치)러시니 後(후)에 赦之(사지)하사 仍封其地(잉봉기지)하시니 是爲凶奴之祖(시위흉노지조)라.
역주 재위 6년 갑진(단기 157, BCE 2177)년, 임금께서 열양列陽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셨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凶奴의 시조가 되었다.(「단군세기」 3세 오사구 단군)

丙辰五年(병진오년)이라 凶奴(흉노)가 入貢(입공)하니라.
역주 재위 5년 병진(단기 1429, BCE 905)년, 흉노匈奴가 공물을 바쳤다. (「단군세기」30세 내휴단군)

戊寅(무인)에 匈奴(흉노)가 遣使番韓(견사번한)하야 求見天王(구현천왕)하고 稱臣貢物而去(칭신공물이거)하니라.
역주 무인(단기 1691, BCE 643)년 흉노가 번한에(52세 엄루왕 때) 사신을 보내어 천왕을 뵙기를 구하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흉노의 좌우현왕 제도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다스렸습니다. 즉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했던 것입니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대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습니다. 좌현왕을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도 하였는데, 항상 선우의 태자를 좌현왕으로 임명하였고, 선우의 유고有故 시 그 자리를 계승하였습니다. 흉노의 좌우현왕 제도는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좌우현왕, 좌우곡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賢’을 일러 ‘도기屠耆’라 하기 때문에 항상 태자를 좌도기왕으로 삼았다[置左右賢王, 左右谷蠡王,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匈奴謂賢曰‘屠耆’, 故常以太子爲左屠耆王.]”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를 바꾼 흉노족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번조선)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유목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후 내분으로 남·북흉노로 분열하게 됩니다. 이 중 북흉노는 사라진 듯 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그 존재를 알렸습니다. 이들은 볼가 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습니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신라 김씨의 시조는 흉노의 태자
훈족의 이동으로 서쪽에서 새 역사의 물결이 일고 있었을 때 흉노의 또 다른 이동이 동쪽에도 있었습니다. 때는 한 무제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무제가 흉노를 공략할 때 흉노 좌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이 흉노 왕자의 이름이 김일제金日磾입니다.

 

뒤에 무제는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은 공을 치하하여 그를 ‘투후秺侯’로 봉하였습니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입니다. 김일제의 후손인 성星은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15대조 성한왕星漢王으로 추정합니다. 혹자는 성한왕을 경주에 들어온 김알지金閼智로 비정합니다. 김일제의 후손 중에서 왕후(전한 11세 원제元帝의 비 효원왕후)도 배출되었습니다.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건국한 왕망王莽은 김일제의 현손玄孫이라 합니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습니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후에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무왕비 비문과 중국 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①-아틸라 보검

진실의 역사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①

 

오늘의 한민족은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민족이다.

그리하여 몸은 한민족이되 자신의 정신과 문화를 모르는 무국적자로 살고 있다.

환단고기는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찾는 역사경전이요 문화경전이다.

환단고기를 통해 한민족의 원형문화를 추적해보자.


STEP1. 들어가기

 

아틸라의 보검

1973년 신라의 고도 경주의 계림로 공사 때 세상을 놀라게 한 유물이 하나 발굴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보물 635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제감장보검입니다. 석류석과 유리, 황금으로 장식한 이 보검은 금으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사이에 유리나 보석을 박아 넣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버리고 36㎝의 칼 손잡이 부분의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 있습니다. 맨 위의 납작한 판에 삼태극 무늬가 선명한 이 칼은 우리나라의 보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보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칼은 로마의 트라키아(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지역) 지방에서 4~5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아틸라 왕의 이름을 따 아틸라 보검이라 불리는 이 칼이 트라키아로부터 8천㎞ 떨어진 신라 땅에서 발견된 연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보물은 무역상에 맡겨 북방 초원을 통과시켜 신라에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에 가서 받아왔든지 아니면 트라키아의 사절이 직접 신라에 와서 전해주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방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상호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북방에서 내려온 신라와 가야
1973~19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의 전형입니다. 장례식과 묘제墓制는 어느 민족이든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계통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납니다. 이런 묘제를 가진 종족이 외부에서 침입했거나, 혁명적으로 득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 무덤 속에서 발굴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 역시 디자인이 북방 유목문화의 것이었습니다. 적석목곽분엔 중국식 물건이 거의 없는 반면 몽골 초원 문화를 이어받은 유물들과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이나 공예품들이 많습니다. 이는 신라 지배층이 몽골고원-중앙아시아-흑해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합니다.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도 말안장, 동복, 요대 등의 기마민족의 유물이 대거 발견되고 있습니다. 부장품을 들여다보면 중무장한 기사騎士가 떠오릅니다. 유물 가운데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의식을 치르기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제기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신라와 가야는 북방 흉노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 민족과 북방 민족들과의 혈통, 문화적인 연관 관계를 『환단고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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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불편한 진실 신장 위구르 티베트

진실의 역사

중국의 불편한 진실 신장 위구르, 티베트


대한민국 독립만세운동 기념일인 3월 1일, 중국의 한 기차역에서는 테러가 터졌다. 170여명의 민간사상자를 낸 이 테러는 신장 위구르Uighur 자치구의 분리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이다.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기 2일 전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의 심각성은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위구르족의 독립요구가 그만큼 극에 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치구가 아닌 곳에서의 위구르족 테러는 지난 2013년 10월 천안문 차량돌진 테러 이후 두 번째이다. 중국 내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본격화될 조짐이 보인다. 중국은 미국처럼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위구르는 중국이 아니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 역사적 배경과 살아온 문화가 다른데 어떻게 중국에 편입될 수 있겠는가?” -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Isa Yusuf Alptekin(1901~1995)위구르 망명정부 지도자

 

위구르족의 독립요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 사이 위구르족과 중국은 크고 작은 유혈분쟁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규모는 2009년 7월 5일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서 있었던 것으로 200여 명이 사망하고 1600명이 부상당하였다. 인명피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중국의 철저한 언론통제 때문이다. 사태 보도는 되지만 이슈화되지는 못한다. 다른 소수민족으로 번질 것을 염려하여 짧은 기간 동안만 보도를 하고 끝내버린다. 여기에 중국의 눈치를 보는 국제사회의 분위기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위구르족에 앞서 중국에 대한 분리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곳은 바로 티베트Tibet이다. 평균 해발고도 4,900미터로 히말라야 산맥 아래에 위치하여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수행자들에게 선망의 장소인 티베트에게 있어 최고의 관심사항은 다름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1950년 무력에 의해 중국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 티베트는 줄곧 독립을 요구해 왔다. 1959년 3월 10일, 반反중국 반反공산주의의 기치를 세워 봉기가 일어났다. 86,000명이라는 티베트인이 죽음을 당하였고, 티베트의 지도자들은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실라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티베트는 세계 각지에 사무소를 두었다. 티베트의 독립운동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장인 달라이라마는 국제적 명망을 높여가며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중국이 티베트와 신장위구르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이유는 중국이 50여 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티베트와 위구르가 독립하게 되면 나머지 소수민족들에게 도미노Domino현상(연쇄 파급 현상)을 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여러 민족으로 갈려 쪼개지게 되고 대국 중국은 사라지게 된다.

 

지금은 강력한 공권력으로 소수민족들을 통제하고 있으나, 누르면 누를수록 반발력은 커지듯이 소수민족들의 저항이 더 거세질 수 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민족문제’는 시한폭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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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의 종교와 신앙


고유의 신교 신앙 뵌뽀本敎
오늘날 외국인들에게 티베트는 불교와 달라이 라마의 나라로 쉽게 다가올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 티베트에는 고유 신앙인 신교神敎가 있었다. 이를 ‘뵌뽀本波(本敎)’라고 한다. 일종의 정령 신앙이고 샤머니즘이다. 티베트인 조상들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믿었다. 주술을 외우고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사를 지냈다. 티베트 역사 곳곳에는 그들이 흑마술黑魔術을 쓴 흔적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티베트에는 뵌뽀 무당들이 굿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뵌뽀에서는 이 세상이 하늘·땅·지하 삼계三界가 있으며, 거기에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질병을 관장하는 용신龍神, 자연재해를 관장하는 땅의 신 등등. 뵌뽀는 교파 출현 시기에 따라 정령 숭배 신앙 뵌뽀, 융드롱(한자 ‘만卍’ 자를 지칭하는 티베트어) 뵌뽀, 신新 뵌뽀로 구분할 수 있다. 제6대 왕인 다크리 짼뽀 시기에 전장 지역에서 귀신과 교통한다는 무당이 스스로 교파를 만들었다.

 

이 시기의 뵌뽀는 원시적인 자연 숭배 단계였다. 융드롱 뵌뽀는 외지에서 온 신자들이 만든 교파였다. 이들은 신령을 대신하여 무당이 존재하고 특히 조상 숭배를 행한다는 점에서 정령 신앙 단계에서 발전한 신앙 형태를 하고 있었다. 신 뵌뽀는 7세기 불교 전래와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뵌뽀에서는 자체 경전을 제작, 보급했다. 대부분 불교 경전을 겉모습만 바꾸어 뵌뽀 경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뵌뽀 창시자는 셴랍 미우쩨로 알려졌다. 그는 뵌뽀 신자들에게 불교에서 석가모니와 같이 신성한 존재다. 그가 역사적 인물인지는 아직도 의심을 받고 있다. 뵌뽀 경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 삼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뵌뽀의 최고 신령을 스승으로 모시고 뵌뽀 교리를 공부했다. 공부를 끝낸 삼 형제는 셴라 오카르 신神(뵌뽀 최고의 신. ‘흰빛의 지혜의 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오른손에 갈고리를 들고 코끼리 위의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에게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3단계의 교리 과정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끝나면 불교의 부처에 해당하는 큰 스승이 된다고 했다. 삼 형제 중 첫째는 1단계 수련을 끝냈고 불교의 전세불前世佛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둘째는 2단계 수련을 끝내고 불교의 현세불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뵌뽀 창시자 셴랍 미우쩨이다. 셋째는 3단계 교리를 익혔다. 그는 미래를 관장하는 미래불이 되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셴랍 미우쩨의 수호신이다. 신은 셴랍 미우쩨로 하여금 장중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기원전 5세기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온 셴랍 미우쩨는 뵌뽀를 창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장중 왕국과 토번에는 신교 형태의 다양한 뵌뽀가 있었다. 셴랍 미우쩨는 이러한 원시적 뵌뽀를 통일하여 융드릉 뵌뽀를 만들었다.


티베트 불교는 ‘종파불교’
불교가 티베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였다. 중국의 불교 전래보다 600년이 늦고 한국의 불교 초전初傳(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보다도 약 300년이 늦었다. 티베트는 불교 발상지 인도·네팔과 인접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래가 늦은 이유는 두 지역(티베트와 인도·네팔)을 가로막고 있는 히말라야의 설산 고봉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베트의 나라 세움이 그만큼 늦어진 탓도 있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두 갈래 길이었다. 7세기 중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해진 중국계 불교와 인도·네팔계 불교가 그것이다. 중국 불교가 조금 앞서 전래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티베트인들은 늦게 전해진 인도 불교를 채용했다. 불교는 티베트에 도입된 이래 몇 차례에 걸친 탄압 운동도 있었으나 곧 뿌리를 내리게 된다.

 

티베트 불교의 국교화를 이끈 왕은 제38대 임금 티송데쩬(742∼797)이다. 티베트 불교에는 한국인(신라인)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37대 임금 치데죽짼(재위 705∼754)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진흥책을 썼다. 750년 인도와 당나라로 불경을 구하는 외교 사절단을 동시에 파견했다. 인도로 간 사절단은 히말라야를 넘지 못하였다. 상시桑喜를 단장으로 하는 당나라로 간 사절단 5명은 장안에서 『금강경』, 『도간경稻芉經』 등 불경 1천권을 입수했다. 귀국하는 길에 상시 사절단은 쓰촨四川 성 성도成都에 있는 정중사淨衆寺에 들렀다.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가 바로 당시 정중사 주지로 있었던 무상無相 김화상金和尙(684∼762)이다. 그는 고국 땅에서 까마득히 잊힌 존재였으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는 태산북두처럼 높이 떠 있는 인물이다.

 

무상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확하게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의 셋째 왕자였다. 그는 728년 당나라로 건너갔다. 장안에 도착하여 당 현종唐玄宗의 인도를 받아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다. 이후 쓰촨 성 자중현資中縣 덕순사德純寺(寧國寺)로 가서 당대의 큰 선사 처적處寂의 제자가 되었다. 무상은 2년 동안 처적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 12년 동안 용맹정진했다. 743년부터 20년 동안 정중사 주지로 있으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당나라 인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숭앙받는 큰 선사였다.

 

토번 왕국 외교 사절단 상시 일행은 정중사에서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무상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떠나는 상시 일행에게 무상대사는 앞으로 토번 왕국에 인도 불교가 흥왕할 것을 예언하며 불경 세 권을 선물로 주었다. 상시 사절단 가운데 셀랑拔(塞囊)이 당시 일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무상사 주지 큰 스님을 ‘니마尼瑪(‘태양’이라는 뜻이다)’라고 적었다. 후학들은 고증 끝에 ‘니마’가 무상대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상대사와 하직하고 상시 일행은 756년 라싸로 돌아왔다. 치데죽짼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뒤를 이은 임금이 티송데짼이었다.

 

티송데짼 이후에도 몇 차례 불교 탄압이 있었으나 결국 불교는 티베트를 상징하는 종교로 큰 뿌리를 내렸다. 티베트 불교는 843년 고대 티베트 왕조 분열 후 약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전전기前傳期와 후전기後傳期로 구분된다. 전전기는 ‘국가불교’, 후전기는 ‘종파불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사상 및 종파 역사를 소개할 여유는 없다. 티베트 역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한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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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역사③

진실의 역사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중국 전쟁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였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13세 툽텐 갸초였다.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고 판단한 툽텐 갸초는 즉시 행동으로 나섰다.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 국가 건설에 나섰다. 같은 해 음력 10월, 라싸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1천 명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이듬해(1913) 1월 중국군과 중국 교민들은 모두 라싸를 떠났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라싸로 귀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귀국 즉시 달라이 라마는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났다.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곧이어 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 티베트·중국 전쟁이다. 이 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1918년 제2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티베트군은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참도를 포위 공격하여 3개월 만에 점령했다. 티베트군은 기세를 몰아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중국 쓰촨 성으로 진격했다. 양국은 1918년 12월 영국의 중재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금사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 간에 무력 충돌이 잦았다. 193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갑자기 입적했다. 이듬해 제3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1939년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티베트 정부와 종전 협정을 체결했고 금사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전세영동을 찾다
1935년,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전세영동轉世靈童, 즉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비밀순방단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해 가을 비밀순방단이 도착한 곳은 북부 티베트 서녕 아래 탁최達澤라는 마을이었다. 20가구 남짓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들이 찾은 곳은 탁최 마을의 최종체링曲炯才仁·쇠남초索南措(또는 데끼쩨링德吉才仁) 부부의 집이다. 비밀순방단은 부부의 넷째 아들 라모된줍拉莫頓珠을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확정했다. 바로 이 아이가 현재 전 세계인이 ‘달라이 라마’로 부르고 있는 인물이다. 법명은 땐진 갸초丹增嘉措.

 

1940년 2월 22일,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라싸의 포탈라 궁에서 정식으로 등극했다. 중일전쟁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즉위식이 끝난 뒤에도 중국 사절단은 철수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강압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였다. 1949년 10월 1일 중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당시 청해에 있던 10대 빤쩬 라마 오이키 칼쩬은 중국 정부의 수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티베트를 향한 발톱을 숨기지 않았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다섯 달 뒤, 중국인민군 제18군(총사령관 장국화張國華, 정치위원 담관삼譚冠三)은 티베트와의 국경 금사강을 넘었다. 며칠 뒤 중국 정부는 참도에서 티베트군 5천7백 명을 전멸시켰다고 발표했다. 이듬해(1950) 5월, 중남해中南海에서 중국과 티베트 대표단은 17조협약十七條協約이라 불리는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티베트평화해방협약中央人民政府和 西藏地方政府關於和平解放西藏辨法的協議」을 체결했다. 현 중국 공산당 정부와 티베트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그해 9월 9월 중국인민군 3천 명이 라싸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티베트에 겔룩 시대가 끝나고 중공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달라이 라마, 히말라야를 넘다
티베트는 신앙의, 종교의, 불교의 나라다.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중국과 티베트가 과거 역사에서 보여 주었던 그런 관계일 수는 없었다. 1954년 달라이 라마와 빤쩬 라마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나타났다.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이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은 당시 청년 달라이 라마가 종교에 대해 안심할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마오쩌둥에게 인간적 매력마저 느끼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달라이 라마의 기쁨은 불과 몇 시간도 가지 않았다. 마지막 회견에서 마오쩌둥은 종교는 독毒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듬해(1955) 귀국길에서 달라이 라마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미 조국 티베트는 없고 중국 공산당 치하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티베트에는 이미 공산주의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성한 사원은 비어 갔다. 1965년 티베트 자치구가 탄생했다. 자치구 최고지도자는 달라이 라마였으나 이미 이름뿐인 자리였다.

 

한때는 중원 대륙을 호령하였던 티베트인들이다. 그들은 쉽게 지배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1955년 공산주의 개혁의 강요에 지친 암도와 캄의 티베트인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승려들조차 무기를 들었다. 곳곳에서 게릴라전이 일어났다. 1956년 베이징은 캄에 15만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티베트 저항군은 수없이 죽어 갔다. 티베트인들도 항거의 깃발을 꺾지 않았다. 중부 티베트에서 전면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1958년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긴박해졌다. 중국은 “티베트를 반동(달라이 라마와 그 추종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아니, 엄포가 아니라 결행이었다. 1958년 3월 16일과 17일 사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달라이 라마는 측근과 캄빠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밤중을 이용해 몸을 피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히말라야 너머 인도였다. 네루 인도 수상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달라이 라마 일행을 정치적 망명자로서 보호해 주었다.

 

달라이 라마가 라싸를 탈출한 지 3일 뒤인 20일부터 22일까지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불바다가 되었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죽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에 따르면 2천 명에서 1만 명에 이른다고 썼다. 4천 명이 체포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 이후 많은 티베트인이 정치적 동기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적어도 8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달라이 라마를 따라 인도로 혹은 네팔로 떠났다. 당장에 갈 곳이 없는 티베트인들은 유엔 난민기구와 인도 정부에서 세운 난민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티베트인들은 갑작스럽게 바뀐 인도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결핵과 이질, 풍토병 등 질병으로 죽어갔다. 달라이 라마는 동포들이 겪는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기자 회견을 자청하여 강압에 의해 체결된 「17개조 협의안」은 무효임을 선언했다. 유엔에서도 중국의 티베트 정책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인도 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다람살라 북쪽 맥그로드 간즈를 제공해 주었다. 1960년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 주州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 정부亡命政府가 수립되었다.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티베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자의든 타의든 티베트인들도 섞여 있었던 홍위병紅衛兵은 소위 ‘구체제’의 유적들을 거침없이 파괴했다. 홍위병에게 ‘반동분자와 미신’의 표적이 된 것은 각종 사원을 비롯하여 성곽, 서책, 조각상, 그림, 탑 등이었다. 6천여 곳에 달했던 티베트의 사원과 사찰들은 1976년 이후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물·유적들은 뜻있는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걸고 감추어 두었던 유물과 곳간 등으로 위장해 숨겼던 사찰, 사원들이다.

 

1975년부터 중국 정부는 티베트 중부에 중국 한족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한족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은 티베트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티베트에 대한 특별경제조치가 취해졌다. 티베트인에게도 어느 한도 안에서 자율결정권이 주어졌다. 많은 죄수들이 풀려났고 티베트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1982년 중국 헌법 제35조에 의해 국가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며, 티베트에 대한 외국인 출입이 허가되었다.

 

1989년 달라이 라마는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인권 및 세계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수상 당시 행한 연설을 통해 티베트의 국가적, 문화적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중국의 억압 정책들을 지적하고 이에 맞서는 티베트의 투쟁은 정당하며 폭력은 더 큰 폭력과 고통을 가져오므로 비폭력 독립 운동을 지속해 나갈 것임을 주창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2008년 3월, 라싸에서는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항쟁이 있었다. 1959년 시작된 티베트 독립 운동(티베트 봉기)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일으켰고, 이것이 확대되어 티베트 독립 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이 항쟁은 잠시 잠잠했던 티베트 독립 운동에 불을 붙였다.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에 나섰다. 국제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을 중심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압박이나 국제 여론에 고개를 숙일 중국이 아니었다. 개방정책 이후 중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으로 몸집을 부풀린 상태다. 오늘날 티베트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서는 찬반으로 엇갈린다. 평가하는 이에 따라서 달라이 라마 14세가 주창하는 비폭력 독립 운동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 또한 쉽게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티베트 고원을 향해 귀를 열어 준 이들은 듣고 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랫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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