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온 동방 한민족㉑

생존의 비밀

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온 동방 한민족

동방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 제사 올리는 천제 문화이다.

동방의 한민족은 상고사 시대인 배달국(6천 년 전) 때부터 하늘과 땅과 인간세계를 주관하시는 상제님께 천제天際를 올리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배달국의 환웅천황과 고조선의 단군왕검 이래 역대의 모든 제왕이 나라를 건국한 후 가장 먼저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부국평강富國平康을 기원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승부윤敬承府尹 변계량이 태종에게 상서上書를 올려 “우리 동방에서는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를 1천여 년이 되도록 그친 적이 없으며, 태조 대왕께서도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습니다(공손하게 삼가 잘 받들었습니다)”라고 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

 

태조[이성계]도 전통에 따라 천제 올리는 예를 받들었으니, 태종도 상제님께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상소를 한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상제님을 모신 오랜 천제 문화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동양에서는 하나님을 믿어 오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서교가 전래된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믿어온 것으로 대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서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국교행사로 왕이 직접 하나님께 천제를 올린 하나님 문화의 본고장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동방문화의 본고장인 환국-배달-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한민족은 일찍이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상달제 등은 한민족이 상제님을 모시고 행했던 민족의 축제다.(『삼국유사』)

천제 문화는 이후 중국을 큰집으로 받드는 조선 왕조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근성과 명나라의 압력으로 세조 때부터 중단되었다가 근세에 이르러 잠시 복구되었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조선 말,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에서 충격을 받은 고종이 그 3년 뒤인 1897년에 원구단을 쌓고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한 것이다.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고, ‘광무光武’ 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국호 대한민국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 동방의 상제문화를 회복하려 했던 고종 황제의 절규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인 우리는 상제문화를 다 잃어버렸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 왜곡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중국인들은 ‘은나라 말에 중국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箕子조선’ 에서 시작되었으며, 일본인들은 ‘위만衛滿조선’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의 역사는 2,200년밖에 안 된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초․중․고의 역사 교과서를 보면 4,342년 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하면서 실제 우리 역사는 2,700년이라고 한다.

 

또 위만이 쳐들어와서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4,342년에서 2,700년 사이의 과정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는 유령의 역사다.

 

그런데 최근 약 100년에 걸쳐 이루어진 발굴 작업을 통해, 동방 한민족 (동이족) 문화의 터전이었던 요하 지방에서, 중국의 황하 문명을 낳은 우리의 고대 문명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이것은 기존에 밝혀진 4대 문명권보다 2천~3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창세 문명이자 최고最高 문명이다.

홍산 문화라고 일컫는 한민족 배달국의 문화 유적이 발굴된 것이다.

여기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제단이 발굴 되었는데, 그 길이가 동서로 160m, 남북으로 50m나 되는 대형 천단이다.

그 모양을 보면 제단의 앞 쪽은 원 모양으로 되어 있고, 중앙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이를 ‘천원지방天圓地方’ 형이라 하는데, 이는 ‘하늘’의 정신은 둥글고, 땅의 정신은 방정하다’는 뜻이다.

 

홍산유적에서는 ‘천자문화’의 상징물인 다양한 용봉문양의 옥기玉器가 발굴되었다.

또한 우하량 유적에서는 천지의 주인이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대형 제단이 발견되었다.

이 일대에는 방형 적석총, 그리고 조상신과 상제님께 제사 지낸 원형 제단[壇]과 여신묘女神廟 같은 신전[廟]이 발굴되었다.

방형方形으로 된 적석총과 원형圓形으로 된 적석재단은 3중으로 둘레를 쌓았다.

 

이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묘제는 동방 배달과 고조선의 고유문화다.

중국 북경의 천단 공원과 우리나라 강화도 마리산에 남아 있는 제천단도 천원지방형이다.

그 원형元型이 바로 우하량 제단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신묘, 돌무지무덤, 천자를 상징하는 용龍과 봉황鳳凰의 형상물, 그리고 상제문화의 상징인 옥玉 유물도 수천, 수만 점이 나왔다.

옥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징하는 가장 순수한 자연 보석이다.

그래서 상제님이 계신 하늘을 옥경玉京, 또는 옥황玉皇이라고 하며 상제님을 옥황상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학자들은 발굴된 옥 유물들에 대해, 지금의 과학 기술로도 그렇게 정교하게 구멍을 뚫고 갈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에서만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기 전에 옥기 시대가 있었다고까지 이야기를 한다.

이로써 그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신화로만 알고 있었던 한민족의 고대 나라인 ‘환국-배달-고조선’이 엄연히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라는 명백한 근거가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네 문화가 인류 문화의 원류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중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재빨리 홍산 문화를 중국문화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

것이 바로 2002년부터 시행한 그 유명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동북공정이란 현재의 중국 땅 안에서 일어났던 이전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연구 프로젝트를 말한다.

2010년이면 그 모든 공정이 끝나서 한민족의 고대사는 물론 고구려 역사 등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자기네 역사로 왜곡시킨 교과서가 나오고, 이러한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

 

이렇게 중국이 한민족 역사를 유린하고 있는데 정작이 땅의 정치가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외면하면서 침묵만 지키거나 ‘우리 한민족과는 무관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북공정의 논리에 적극 동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구한말 조선을 외세에 팔아먹었던 자학사관의 비굴한 모습이자 뿌리 깊은 사대주의의 망령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관이 동북아 역사재단이다 재단 이사장과 연구원들이 대부분 식민사학 계보의 인물들이다.

아직도 한국의 주류 사학은 식민사학 계보에서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 역사 재단은 일본. 중국 등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 영유권 주장 등에 대응하기 위해 2006년 9월 28일 설립된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이다.

기존의 고구려연구재단과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그런데 동북아재단 홈페이지 등에서 동북공정의 논리를 그대로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오히려 홍산문화는 우리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2016년 11월 30일 한성백제 박물관에서 개회한 고대사 시민강좌에서 발해 역사마저 우리역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 충격을 더했다.

 

고대 역사를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접근한 것이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도 발해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함께 보자는 모순된 주장을 하였다.

나라가 망할 때, 외부 세력에 붕괴되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사대주의자와 매국노들이 판을 칠 때 역사정신과 국권이 몰락하면서 외세에 침탈을 당하는 것이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생존의 비밀』<21>

고종황제는 누구에게 천제를 올렸는가?

진실의 역사

고종황제는 누구에게 천제를 올렸는가?

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圓丘壇의 모습이다.

 

고종임금은 1897년 10월 원구단에서 하늘에 천제를 올리고 황제로 등극하였다.

곧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러면 고종황제는 누구에게 천제를 올렸을까?

원구단 천제의 1호 대상은 바로 ‘상제님’이다.

상제님은 원구단에 모신 여러 신위 중 제일 상단에 모셔진 분으로서, 고종은 상제님께 천제를 올려서 자신의 황제등극과 대한제국의 탄생을 신고한 것이다.

고종은 천자의 보위에 오르면서 조선 초기 명나라의 압력으로 폐지했던 천제문화를 다시 복원한 것이다.

 

호천상제昊天上帝, 황지기皇地祇, 태조太祖 등의 신위를 제천의례 때는 원구단에 모시고 평소에는 황궁우皇穹宇에 모셨다.

원구단은 제천단, 황궁우는 사당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일제는 1919년 원구단을 파괴하여 현재는 황궁우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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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②-영고탑진실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 - 영고탑진실
◉ 영고탑 기록이 청나라때 나오므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의 진실
환단고기 위론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영고탑’이 청나라(1644~1911)의 시조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므로,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고 주장한다.

조인성은 『단군세기』의 저자인 이암과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은 고려말 사람이고,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은 조선 중기 사람이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이도학 또한 『만주원류고』의 한 가지 기록을 근거로(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이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라 주장한다.

즉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대 이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료만 가지고 어떻게 그런 섣부른 주장을 한단 말인가.

제주대 명예교수 안창범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오는 영고탑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여 이도학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즉,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特이라 한다.

영고탑은 본래 영고특寧姑特에서 영고태台로, 영고태台에서 영고탑塔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다”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영안의 옛 탑’이라는 뜻이며, 단군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보면 ‘영고탑’을 ‘영안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이익(1681(숙종 7)∼1763)은 『성호사설』에서 ‘영고탑’은 ‘오랄烏剌, 애호艾滸와 함께 동삼성東三省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해자垓字가 깊다’고 하였다.

 

중국문헌에서는 영고탑을 탑이 아니라 옛 지명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其實並不像字面意思那樣是一個塔,而是一個古地名,原位於今黑龍江省海林市,後在公元1666年遷到黑龍江省寧安市。寧古塔是清代寧古塔將軍治所和駐地,是清政府設在盛京(瀋陽)以北統轄黑龍江,吉林廣大地區的軍事、政治和經濟中心,是向朝廷提供八旗兵源和向戍邊部隊輸送物資的重要根據地,也是十七世紀末到十八世紀初,東北各族向朝廷進貢禮品的轉收點,因此寧古塔與盛京齊名《 滿語寫法參見在線滿漢詞典》 , 《寧古塔紀略》,見《續修四庫全書》本

영고탑은 글자의 뜻과 달리 탑이 아니고 옛 지명이다.

원래는 지금의 흑룡강성 해림시에 있다가 뒤에 서기 1666년 흑룡강성 영안시로 옮겼다.

영고탑은 청나라 때 영고탑장군의 치소이며 주둔지로써 청나라 정부가 설치했던 성경(심양)이북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광대한 지역의 군사 정치 경제를 통치 관할하던 중심지였다.

조정에 대해서는 8기병의 군사를 제공했고 국경주둔부대에게는 물자를 수송하던 주요근거지였다.

또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까지 동북지역의 각 민족이 조정에 예물을 바칠 때 거두어들이던  장소였다.

따라서 영고탑은 성경과 명성을 나란히 했다.《만어사전》,《영고탑기략》,《속수사고전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요동이 본래 조선의 고지(故地)이며, 숙신(肅愼)·예맥(穢貊)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 조선에 복속했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오랄(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강역(疆域)임을 모르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위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명실록』을 인용하여 명나라 초기에 ‘영고탑로寧古塔 路’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명칭은 적어도 명나라 초기(1368)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고탑은 원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영고 ‘迎鼓터’란 지역으로 북부여 이후 황폐화 되고 고구려 대진국의 멸망으로 역사기록이 사라지면서 그 유래에 대해 정확이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다만 간신히 이름만 전해지다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맞물려 ‘영고탑 寧古塔’으로 기록이 된 것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민족의 발흥지역으로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내던 영고제천을 지내던 영고터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조 이전에 쓰인 용례가 있다면, 위서론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지 주장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기록이 존재한다.

청조 이전부터 영고대 혹은 영고탑이란 명칭이 존재했다.

중국 문헌에서 ‘명대 초기에 여진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곳을 동해와집영고탑로東海窩集寧古塔路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명대 초기 사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암이 살던 고려말에 영고탑이란 명칭이 통용되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배달과 고조선의 제천행사를 이어받은 부여의 영고迎鼓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16세 위나단군이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44세 구물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렸다고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영고탑’은 원래 탑의 이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탑이 사라지고 지명으로 남았다고 보아야 한다.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이다.

후대에 청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고迎鼓의 원래 의미와 표기법이 잊혀져 영고寧古가 되었고, 우리말의 ‘터’를 특特, 태台, 탑塔 등으로 음사하면서 영고탑寧古塔이란 말로 정착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고탑지寧古塔志』를 보면 “만주어로 6은 ‘寧公’이라 하고 ‘자리[坐]’는 ‘特’이라 하는데, ‘寧公特’ 다른 말로 ‘寧公台’라고 부르다가 점차 ‘寧古塔’으로 불렀다[滿呼六爲寧公, 坐爲特, 故曰寧公特, 一訛爲寧公台, 在訛爲寧古塔矣]”라고 하였다.

우리말의 ‘터’도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特(만주어로 타)’이 우리말의 ‘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역주

 

◉ 寧古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淸)나라 때 지명. 
1653년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을 두었고, 62년 영고탑장군(將軍)으로 고쳤다.

그 뒤 팔기부도통(八旗副都統)을 두었으나, 청나라 때에는 죄인의 유형지(流刑地)가 되었다.

1910년 영안부[寧安府]로 되었다가, 중화민국 이후 닝안현으로 고쳤다. (두산백과)

고조선 1왕조시대 수도 송화강 아사달 (하얼빈), 북부여 발흥지 웅심산. 고구려 발흥지 졸본. 만주일대를 발흥지 삼아서 한민족은 국통을 계승하며 천자국으로서 삼신상제께 천제를 올렸다. 영고는 부여의 삼신제천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