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삼국유사'에 해당되는 글 3건

  1. 김수로왕 허황옥-삼국유사
  2. 근대시대 출발, 동학
  3.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김수로왕 허황옥-삼국유사

진실의 역사

신교神敎 문화

 

상제님을 잘 모신 김수로왕과 허황옥(『삼국유사』「가락국기」)


삼신상제님은 자신을 지극히 따르는 사람에게 꿈이나 알음귀를 통해 국가의 대소사大小事나 인생의 대소사를 밝게 가르쳐주시는 분이다.

한민족의 9천년 역사가 삼신상제님과 함께 해 온 역사이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 최고 대종大宗인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의 결혼에 얽힌 신비로운 내용이 있다.

 

짝을 구하지 못한 수로왕에게 신하들이 배필을 구할 것을 건의하자 수로왕은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였다.

 

아니라 다를까 아유타국에서 공주가 제 발로 오게 되는데 수로왕을 만난 공주의 일성이 참으로 놀랍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妾是阿踰타國公主也(첩시아유타국공주야) 姓許名黃玉(성허명황옥) 年二八矣(년이팔의) 在本國時(재본국시) 今年五月中(금년오월중)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부왕여황후고첩이어왈) 爺孃一昨夢中(야양일작몽중) 同見皇天上帝(동견황천상제) 謂曰(위왈) 駕洛國元君首露者(가락국원군수로자) 天所降而俾御大寶(천소강이비어대보) 乃神乃聖(내신내성) 惟其人乎(유기인호) 且以新莅家邦(차이신리가방) 未定匹偶(미정필우) 卿等湞遣公主而配之(경등정견공주이배지) 言訖升天(언흘승천) 形開之後(형개지후) 上帝之言(상제지언) 其猶在耳(기유재이) 이於此而忽辭親向彼乎(이어차이홀사친향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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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대 출발, 동학

진실의 역사

근대시대의 위대한 출발 – 동학(東學)
◉ 오늘은 근대사의 위대한 출발 《동학》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8천만 한국인조차 모르고 있는 이 땅에서 실제 선언된 인류문명사의 새출발에 대한 위대한 선언, 동학의 가르침이 아직도 왜곡이 된 채 제대로 전해지지않고 있습니다.

동학의 위대한 새 소식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았고 잘못된 문화의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된 무극대도 새 출발 선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인류가 격고 있는 모든 비극의 문제들, 죽음의 불덩어리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각종테러, 자연재앙, 대지진, 화산폭발, 말할 수 없는 홍수, 가뭄, 폭염, 혹한 생태계에 가공할 변화의 모습들, 자본주의 붕괴소식, 민주주의 몰락의 이야기.

그리고 최근 영국 브렉시트사태,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변화를 다시 개벽이란 주제로 선언한 동학의 핵심 사상을 살펴봅니다.
  
인류 새 세상에 대한 진정한 새 출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깜짝 놀랄 소식이 무엇일까요.

근대사의 출발점인 동학의 이야기입니다.

東學(동학)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155년전 동서인류가 태고로부터 믿어온 上帝강세에 대한 선언과 앞으로 온 인류가 이런 변화를 맞이한다. 이렇게 대비하야 한다.

그것이 1860년 옛 신라수도 경주에서 최수운 대신사가 도통을 받은 대사건이다. Eastern Learning.

단순 동서문명의 통합이 아니라 하늘과 땅, 진정한 합일의 세계, 神人合一을 의미한다. 신명과 인간이 하나 되는 세상이 온다.

천상조상이 자손을 찾아서 내려온다. 죽어서 천당 극락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건설되는 선경낙원에 대한 소식.

지상천국이 우주의 궁극의 낙원이다. 이것이 동학의 무극대도 소식이다.

侍天主造化定(시천주조화정). 天主를 모시는 주문. 상제님을 모심으로서 인류는 어떤 세상을 맞이하는가.

다가오는 진정한 새 세상은 첨단과학문명의 이상으로만 건설되는 게 아니다. 대지진이 폭발할 때만 하더라더도 실제로는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에 의해서 조화선경이 이 땅에 건설된다는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가 동학의 핵심선언이다.

용화낙원. 미륵님의 조화도권으로 열리는 조화세상에 대한 선언이다. 그것이 시천주에서 말하는 造花定 세상이다.

진정한 통일의 도. 최상의 도다. 더 이상이 없는 무극대도 출현에 대한 소식이다.

왜 동학이 왜곡이 되어 오늘날까지 인내천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가.

최제우의 선언은 시천주다.

이는 후에 동학의 2대 교주 시형이 스승 최제우의 시천주 참뜻을 관념적인 養天主로 왜곡을 한다.

3대 교주 손병희는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으로 왜곡을 하여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학의 사상을 인내천으로 알고 있다.

 

『中庸(중용)』에 唯聖人(유성인)이라야 能知聖人(능지성인)이란 말이 있는데 오직 성인이라야 성인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승의 깨우침과 심법이 완전일체가 되지 않으면 그 뜻을 후세에 제대로 전하기 어려운 까닭이리라.

동학은 인류최초의 원형문화인 환단의 광명문화를 열어준 전 인류가 섬겨온 제천문화의 주인인 삼신 상제님 강세에 대한 강력한 선언이었다. 이런 제천행사는 환국,배달 조선을 이어 부여의 영고제천제로 이어진다. 

삼신상제(하느님)에 대한 제천문화 기록을 찾아보자.

『단군세기』를 보면 16세 위나단군이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44세 구물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렸다고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인 것이다.

 

고대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 시대의 정신문화를 해석하지 못하면 유물을 발견하더라도 역사정신을 읽어낼 수가 없다.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이다.

고려 때 국가 최고의 의례인 팔관회도 불교 행사가 아니라 사실은 제천행사였다.

『송사宋史』 「고려전」을 보면 “고려가 하늘에 제를 올리고 숭신崇神에 제하는 제전을 팔관회라 칭한다”라고 하였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팔관회는 고구려의 동맹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여 팔관회가 한국인의 제천행사의 한 형태임을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천제문화는 조선 태종 때 중신 변계량이 올린 상소문에 나타나듯이([吾東方, 檀君始祖也. 蓋自天而降焉, 非天子分封之也. 祀天之禮, 不知始於何代, 然亦千有餘年, 未之或改也. 惟我太祖康獻大王亦因之而益致謹焉, 臣以爲, 祀天之禮, 不可廢也]『조선왕조실록』 태종 16년), 조선 초기까지 1천 년 동안 끊이지 않았으며, 세조 때까지 국가적 규모로 원구대제圓丘大祭를 봉행하였다.

한민족의 천제문화는 일찍이 중국 땅으로 전파되어, 중국의 역대 왕들도 천제를 봉행하였다.

『사기』 「봉선서封禪書」는 춘추 시대까지 72명의 중국 왕이 현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 72명 중에는 유가儒家에서 상제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질서를 처음으로 확립한 인물로 받드는 요堯와 그의 제위를 물려받은 순舜이 거명된다. 즉 중국에서도 천자가 되고자 했던 인물들은 상제께 천제를 올리고 천자의 지위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춘추 시대 이후 진시황, 한 무제 등도 태산에서 천제를 봉행하였다.

특히 한 무제는 BCE 100년을 시작으로 5년마다 태산 봉선제를 거행하였는데, 총 다섯 차례를 행하였다(『사기』「효무본기」).

국가 행사로 이어져 동북아의 천제문화는 북방 민족에게도 전해졌다.

대진국 이후 만주 땅에 세워진 요나라, 금나라는 한민족의 제천풍속을 받아들여 국가행사로 거행하였다.
  
또한 천제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신사神社 문화를 탄생시켰다.

삼신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든 동방 신교의 풍습 그대로, 일본 신사는 상제님(천신)을 비롯하여 자연신, 조상신 등 다양한 신을 모시고 있다.

오늘날 신교문화의 원형이 가장 많이 살아있는 나라는 바로 일본이다.

천제天祭는 한마디로 인류 문화의 원형이며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의례이자 문화 행사이다.

천제문화의 본질이 바로 삼신상제 신앙이다. 최제우의 선언은 바로 동방문화의 주인인 이 상제강세에 대한 선포인 것이었다.

전 인류가 천주님을 직접 모시는 시대가 와서 앞으로 무극대운 태평성세가 열린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삼정문란과 외세격랑에 지친 조선민중에게 새롭고 커다란 희망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현 학계의 동학에 대한 인식은 한국에서 나온 신흥종교 모체로서 잘못 인식되고 있다.

학의 선언은 동방역사의 일관된 맥락에서 흐르는 삼신제천사상을 깨우친 최제우대성사의 깨달음의 선언이었다는 것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제국주의 그리고 동양에서 유일한 제국주의 반열에 든 일본제국주의 명치유신.

동아시아의 천자의 나라를 자처하던 중국은 아편정쟁으로 병들어서 마침 병들어 천자의 위상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다.

여기서 벌떼처럼 반란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청조가 무너지게 된다.

북쪽에는 러시아 노마노프왕조가 무너지고 러시아 혁명으로 일어나게 된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최후의 보루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이때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천자국을 선포하고 국명을 바꾼다.

 

그러나 일본에게 국권을 뺏기고 35년 동안 800만 동포가 무참하게 죽고, 3년 뒤에 남북이 분단되어 각기 정부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에 대전쟁이 폭풍이란 암호를 시작해서 대한민국이 적화통일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맥아더장군이 밀고 들어온다.

수백만이 죽고 천만 이상가족을 남긴 동족산잔. 그리고 휴전 60년이 넘어서고 있다.

 

주역으로 말하면 64괘 한주기가 거반 다 도는 시간대다.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보면 70년이 넘었다.

우주변화 원리적으로 본다면 상수 변화수의 종점의 시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남북에 살고 있는 당사자인 국민들도, 통일은 도적같이 한순간에 올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통일이 오냐다.

역사를 후퇴시키는 통일이, 전쟁의 파괴를 통한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한반도 주변으로는 팽팽한 전운이 형성돼 가고 있다.

동방의 원주인으로 역사문화의 원근원에 있는 한국인의 창세역사 황금시절 문화정신이 중국 황하문명중심으로 왜곡 되었다.

 

한국인은 신명나는 민족이다. 춤 잘추고 노래도 잘한다.

한류열풍의 문화적 배경은 한민족은 신교문화의 본고장으로 천제를 올리고 전 국민이 왕과 더불어서 즐겁게 신명풀이 놀이를 했는데 그 정서가 폭발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한류문화는 문화의 정신이 없다. 역사정신이 전혀 없다.

역사를 만드는 힘, 영성 창조력.

역사 원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한류문화를 가지고는 새로운 인류문화를 열수 없다.

역사문화근원을 되찾고 깨닫는 그 순간부터 진정한 한국인이 된다.

진정으로 고유문화를 근본으로 해서 세계문화와 대융합할 수 있는 정신문화를 가진 인재를 길러야 한다.
  
동학은 새시대에 대한 강력한 선언을 했지만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패망 당한다.

그러고 나라를 잃은 동학군 세력은 항일독립운동세력의 주체가 된다.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민족 고유사상에 기초한 동학의 이해 없이는 몸부림치는 독립자주세력의 계보를 이해할 수 없다.

 

동학의 메시지는 앞으로 오는 새 세상은 조화문명이다.

사람이 몸과 마음과 영 속에 있는 무궁한 신의 조화, 자기 생각대로 자유자재로 쓰는 그런 세상이 온다.

새로운 생명문화를 천주님이 직접오셔서 여신다. 모든 인간이 도를 통한다. 모든 인간이 성인 부처가 된다.

1860년에 최제우는 이미 종교시대는 끝났다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무극대도의 출현을 선언한 것이다.

기존의 종교와 가르침을 가지고는 이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엄청난 선언인 것이다.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무극대도다. 이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선언을 한국의 신흥종교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등학교, 대학교, 일반, 전세계 한국문화를 소개한 책자를 보면 동학을 신흥종교다.

서양기독교를 서학이라고 하고 서학에 대응하는 주체적인 새로운 가르침을 가진 종교 동학이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지속되고 있다.

 

서학의 꿈이 수천 년 간 숨쉬어 온 동방문화의 정신을 되살린 동학에서 완성된다는 선언이었다.

동방문화의 부활, 동방 역사의 부활의 소식이다.

동학은 수천 년 간 이어진 삼신제천문화 정신의 완전한 부활을 선언한 것이었다.

동학 패망 후 동학교도들은 독립운동가로 대거 합류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태고시절 역사원형정신이 깃든 환단고기를 공부하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동학의 정신이 근본적으로 왜곡된 근저에는 조선이 그렇지 뭐 하는 식의 외래 사대주의 일색으로 흘러오면서 우리 전통문화를 스스로 비하했던 원인이 크다. 

중국은 동산취 원형제단이 83년 전에 홍산에서 150미터 제단 원시피라밋인 총,묘,단이 발굴되면서 삼황오제는 신화가 아니고 실제역사로 바뀌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세상,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덕치의 이상모델이 되는 성왕 요임금과 같은 때, 단군조선시대가 있었다.

환웅시대, 단군시대. 이때를 동이라고 한다.

동이문화는 천단을 쌓아놓고 천신상제님께 제를 올리고 다신이면서 유일신 문화권이 있었다.

  
산해경을 보면 흰옷 입은 사람들 사는 곳에 백색광명의 雄常(웅상)이 있다. 근데 그 문화를 해석을 못한다.

그 웅은 환웅할 때 웅자다. 배달국 통치자 환웅의 웅으로 그 분의 정신은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정신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동방의 진정한 최초의 왕이자, 대제사장 그 분의 은혜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항상 임재해 있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몽골에도 항상 삼신의 가르침 홍익인간, 제세이화.

가장 큰 산, 가장 큰 나무를 성령이 감응을 하는 나무라고 해서 웅상이라고 한다.

이걸 중국도 한국 사람도 모른다. 내 몸과 마음이 신단수가 될 때 그 때 잃어버린 역사문화를 다 찾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일연 스님의 고조선기에는 단군조선이 있고 그 전에 뿌리가 되는 환국 배달 신시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환인과 환웅이라고 하는 역사시대가 있었다.

조선왕조를 패망시키고 통치를 할 때 일본이 환국 배달 조선을 영원히 없는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특별 지시를 했는데 일왕 특명으로 3인이 발동을 했다.

환국을 없애면 배달환웅과 조선단군도 신화나 없던 인물도 만들 수 있었다.

 

일연이 환국은 제석신의 나라다. 인도신화 신의 나라다. 인드라의 나라다.

이렇게 주석을 붙이니까 일연 스님이 자기 생각으로 주석을 붙인 것이 역사왜곡의 근거를 제공 했다.

그런면에서 삼국유사는 고대사 복원 실마리와 왜곡의 근거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일연이 환국을 불교 제석신의 나라라 했으니까 조선인들 너희들도 따라라.

이 논리에 세뇌가 돼서 단군신화를 거침없이 얘기하고 있다.

한국은 제조상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다. 오늘의 한국의 정신이 이렇게 타락했다.

한마디로 제 뿌리를 부정하는 나라다.

 

『小學(소학)』에 建學立師 以培其根 以達其支라. 학교를 세워 스승을 두어 그 뿌리를 북돋아서 가지가지가 뻗도록 한다라고 했다.

한국은 고대사가 왜곡이 되면서 근대사의 위대한 출발 동학의 핵심사상을 동시에 보지 못하는 두 눈이 실명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한민족은 뿌리를 잃은 민족이면서 동시에 미래도 잃고 헤매이고 있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역사문화를 잃고 타이타닉호처럼 침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학을 단순한 근대 새시대의 출발로 보려는 근시안적 안목은 동학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민족 정체성과 고유정신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소치다.

굳건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뿌리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의 융성이 일어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 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 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 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본 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본 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 집順菴集』「동사 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 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 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 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 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 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 단군제에 소련 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 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의)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 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 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