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읽고-이덕일

진실의 역사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읽고 - 이덕일

사마천 사기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자.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사마천 [송미자세가宋薇子世家]》 사기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나라도 동이족 나라이거니와  중화사대주의자들인 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미천 사기에는 고조선은 중국의 은나라에서 봉한 제후국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 은나라의 제후인 기자가 평양에 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자조선설은 허구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북한 평양이 기자조선의 도읍도 아니다.

(사실은 기자를 봉한 사실이 없는 것이다. 제후국으로 봉하면 신하는 당연한 것인데 신하로 삼지못했다고 앞뒤가 안맞는 기록을 하고 있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 屬幽州(漢書 地理志)
낙랑군-무제원봉삼년개.망왈낙선, 속유주
☞낙랑군은 무제원봉 3년에 열었는데 낙선군이라 말하였고 유주에 속하였다.(유주는 현재 북경이다.)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括理志)
고려치평양성 본한낙랑군왕험성 즉고조선야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時朝鮮王滿據之也(사기정의)
고려치평양성,본한낙랑군왕험성, 즉고조선야,시조선왕만거지야
☞고려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인데 곧 고조선의 땅이다.

 

樂浪郡故朝鮮國也 在療東(후한서 광무제본기)
☞낙랑군은 옛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療東君 秦置 屬幽州요동군진치 속유주(한서지리지)
☞요동군은 진나라때 설치되었고 유주에 속한다.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한서 지리지)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는데 패수의 동쪽이다. 이것이 험독이다.

 

王險城在樂廊君浿水之東왕험성재낙랑군패수지동(사기조선열전)
☞왕험성은 요동군에 있는데 패수의 동쪽이다.

 

應召注 地理志療東險瀆縣 朝鮮王舊都응소주 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구도(응소주 사기조선열전 주석)
☞후한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 때 인물인 응소는 험독현에 주석을 달면서.

지리지를 인용해서,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지다”라고 했다.

즉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은 창려현에 있었고 패수의 동쪽이며 왕험성의 서쪽에 패수가 흘렀다는 뜻이다.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창려현의 서쪽을 흐르는 험한 강은 지금의 난하다.

곧 지금의 난하가 패수가 되는 것이고 이 강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다.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의 원리에 의해 삼조선체제로 국가를 운영했는데 바로 번조선의 수도가 왕험성(험독)이다.

결코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중국 사서에도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사학자들은 고조선을 마치 족장 시대로 기술하고 위만이 조선을 침탈하며 철기문명이 전해져서 조선이 크게 번창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사기 조선열전)
집해서광왈 창려유험독현야(사기집해주석)
☞서광이 말하길, 창려에 혐독현이 있었다.

 

浿水療東塞外패수요동새외(사기 조선열전)
☞패수는 요동의 새외에서 나온다.

 

長岑縣屬樂浪君 其地在療東장잠현속낙랑군 기지재요동(후한서 최인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長城所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起태강지리지운 낙랑수성현유갈석산 장성소기(史記 夏本記)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遂城,秦築長城之所起也수성 진축장성지소기야(晉書 지리지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에서 쌓은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水經注,絫縣碣石山 枕海有大石如柱形 世名天橋 絫縣古城 在昌驪縣西南(大東地志 방여총지)

수경주 류현갈석산 침해유대석여주형 세명천교 류현고성 재창려현서남
☞수경주에는 류현 갈석산은 바다에 기둥처럼서있는데 세상에서는 천교라한다. 류현은 고성인데 지금은 창려현 서남쪽에 있다.

 

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五君十一縣:龍城,廣興,定荒,屬昌黎君(수서 지리지)

수성구왈무수 후위치남영주.준영주치오군십일현;용성,광흥,정황,속창려군
☞수성현은 옛날에는 무수로 불렸다. 후위에 와서 남영주로 행정개편 되고 영주는 5군11현을 두었다. 용성,광흥,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正義 括地志云 “易州遂城 戰國時武遂城也.方城故在幽州固安縣南十七里(史記 趙世家)

정의 괄지지운 역주수성 전국시무수성야. 방성고재유주고안현남십칠리
☞괄지지에는 이주 수성현은 전국시대의 무수성이다. 그 성의 위치는 옛 유주 고안현 남쪽 십칠리에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명증하고 있는 책이 『환단고기』이다.

일본은 일제치하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의도적으로 남긴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는 신라입장에서 기술되면서 오히려 고구려를 당에 대항한 교오불손한 나라로 기술하고 연개소문을 왕을 시해한 패륜영웅으로 그렸다.

사대주의에 입각해 쓰여진 이 책은 대진국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 삭제했다.

김부식이 경주김씨로 우리의 북방사를 절단해 버린 것이다.

왜 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일천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 했는지 알아야 한다.

강력한 국풍과 다물사상을 지녔던 묘청이 패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사대주의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기록이지 우리의 고대사 기록이 아니다.

삼국유사 또한 불교적 견해로 기술했고 신화적 요소로 처리된 부분이 많다.

이로 인해 일제는 우리역사 왜곡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오히려 삼국유사의 미진한 기록을 명확히 밝힌 책이 『환단고기』이다.

 

우리나라는 외래종교와 사상이 들어오면 그들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했다.

지금은 기독교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는 철저히 신화로 치부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랜 우리 역사적 사실이 문헌고증과 유물을 통해 확연히 밝혀졌는데도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믿음이란 명목하에 독선과 고집으로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자신의 역사는 어두워도 이스라엘 역사는 줄줄 외우는 현실이다.

 

뿌리를 잃은 민족이 얼마나 번성할 것인가.

신채호는 그것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 사람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한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외래종교,외 래사상에 물들어 우리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사대주의를 이렇게 개탄했다.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역사적 시각)
오랜 기간 반란의 수괴로 이미지가 각인되었던 묘청이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에 의해서였다.

 

신채호는 망명지에서 쓴 [조선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여 조선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 년래 조선사가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묘청의 난 조선 일천년 역사의 최대사건

진실의 역사

묘청의 난! 조선 일천년 역사의 최대사건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난이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이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중화사대)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국풍사상은 크게 꺾이고  유교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묘청의 난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구조상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왕권마저 능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그리고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국풍파였던 묘청세력의 패배는 향후 1천년 사대주의가 한국사의 주류를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조선시대 친명사대노선을 주류였던 노론세력은 구한말 외세에 의존해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매국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도 한반도의 운명은 독립 세력은 밀려나고 외세 사대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가치는 미신시되거나 비하되고 축소하고 말살되었다.

이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자국역사를 비하하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식민사관을 옹호하며 오히려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를 깎아 내리고 있다.

 

지금도 외세 사대주의 식민사학자들은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국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의로운 사학자들에 대해서 “유사역사학” “사이비 역사학” “국뽕” 이란 원색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자국 역사에 테러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적 사실을 강대국과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역사를 왜곡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고조선과 북부여를 계승하여 고조선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다물이라는 이념을 국시로 썼다.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모두 사라지고 왜곡된 역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보다 우리 스스로 국력이 약화되는 과정속에서 사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중국을 높이고 우리 자신의 역사를 깎아내린 바가 더 크다.

우리나라의 혼을 말살한 대표적인 사가史家는 바로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다.

고려 인종 때 묘청, 정지상 등은 기존 지배세력인 김부식 등과 맞서며 금나라의 외세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금나라 정벌론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서경 천도를 하자는 묘청의 주장이 김부식 등의 반대로 실패를 하면서 묘청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한 달 만에 내부의 모반자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남은 무리들도 결국 김부식에 의해 1년 만에 진압을 당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금사金史에는 금태조는 신라사람 김함보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귀족 출신인 김부식은 외세에 의존해 국가안존을 유지하겠다는 신라의 사대주의 외교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역사 비평이란 그 시대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 평가는 어렵지만 우리 스스로 자주권을 내준 바와 같다.

묘청의 난 실패이후 국풍파는 주력에서 밀려나고 구한말 자주독립세력이던 동학과 독립운동세력 역시 외세에 패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사의 기득권층이 된 외세 사대주의자들은 한국의 정통 보수 세력이 되었다. 

묘청, 정지상, 윤언이등의 칭제稱帝 북벌론으로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자는 ‘서경 천도론파’와 충돌을 거듭하다가 ‘묘청의 난’을 기회로 삼아 민족의 자주적인 지향을 말살한 것이다.

김부식은 묘청을 진압하고 나서 10년 후 삼국사기를 저술하는데, 삼국사기는 대진국(발해)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안하고, 통일신라가 우리나라의 국통맥을 잇고 있는 것으로 서술하였고, 삼국시대이전은 다루지 않는 등 우리 시원역사를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자주파가 결정적으로 꺾인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려 말과 조선의 사대모화 사상과 유교중심 분위기 속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상고사를 전하는 고서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역사서 수탈 과정 속에서 환단고기와 교차 검증이 가능한 고대 역사를 언급하는 학자가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 천 년이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이 사건을  ‘낭가․불교사상 대 유가’, ‘국풍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한판 전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결국 김부식은 묘청을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벼슬도 높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외세에 의존해 국가의 안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이 나라의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결국 국혼과 자주 역사정신을 잃은 우리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서서, 종국적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결과가 되었다고 단재는 한탄하고 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유학자들은 ‘괴승의 반역질’이라고 매도했으나 그런 모습을 통해 당시 유학자들도 또한 김부식이 가지고 있는 사대모화의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기자를 은인으로 여기는 등 중국을 숭배하며, 우리 문화와 역사를 스스로 감추고 숨기려 하였다.

그 결과 우리의 본래 역사는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단재는 일제에 몸을 의탁한 친일파를 비롯하여, 나라를 일본에 팔았던 조선 유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역사학 또한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이렇듯 심각한 역사 왜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사대주의, 식민사학이 주류인 한국 역사학계에서 단재 신채호에 대한 거부감은 상상이상이다.

 

얼마전 뉴라이트 계열의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공개학술세미나에서 “단재 신채호는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이고, 세자로 말하면 또라이”라고 말한 사실은 학계에서 다 아는 사실이다.

국가 예산을 250억씩 매년마다 받아서 쓰는 사업단장의 말이다.

뤼순감옥에서 쓸쓸하게 옥사한 단재 신채호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화룡(畵龍) 천 년에 진룡(眞龍)이 강림(降臨)이라. 나중에 청룡, 황룡이 들끓어 올라 인성(人城)을 쌓는 이로운 자리니라.” 하시고

“집 안 새(鳥)가 봉(鳳)이 될 줄을 누가 알까. 참된 줄을 알면 네 차례가 오겠느냐.” 하시니라. (道典 3:304)
 ☞천자문화의 종주였던 동이東夷, 『양서』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동이국왈조선(東夷國曰朝鮮)"이라 기록하고 있다.

“동이의 나라는 조선이다.”

그리고 천자라는 말은 중국 한족이 먼저 쓴 게 아니다. 

우리 한민족이 먼저 썼다는 사실이 중국  후한시대의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는 천자제도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

 

용龍은 천자를 상징한다.

본래 칭제건원으로 고려 초 자주적 연호를 썼던 천자국天子國이던 한민족이 천여년 동안 중화 사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중국 연호를 쓰면서 주권을 상실했지만 천년이후 천자문화의 종주권을 회복한다는 말씀이다.

바로 천자문화의 종주국이었음을 여실히 밝혀주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그러나 유교사대노선을 걸었던 조선에서 감추어서 전할 수밖에 없던 사서가 안함로(신라:579~640)에서 이맥(조선:1455~1528)까지 천년에 걸쳐 기록되고 마침내 1911년 계연수에 의해 합본이 되어 『환단고기』로 엮여진 것이다.

비로소 한국은 천년의 어둠을 뚫고 역사문화의 종주국의 위상을 회복되고 남북통일이 이루고 주역에서 말한대로 동북간방東北艮方인 한반도에서 인류역사가 결실하는 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時節花明三月雨요 風流酒洗百年塵이라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철 꽃은 내 도덕의 삼월 비에 밝게 피고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노라. (道典 8:44)
☞일제시대 이후 역사문화가 완전히 뿌리 뽑힌 지 백년세월이 지나야 역사가 회복되는 운을 맞이해서 한민족의 광명문화가 드러남을 의미한다.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표절의혹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
◉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의혹에 대한 반론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들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환단고기가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 국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교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는 700년이고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 왕의 13세손’이라 하였다.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이러한 부정확한 내용을 비판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부정한 『신당서』의 기록, ‘가언충의 고구려 900년 유국설留國說’을 근거로 할 때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 200년을 삭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요동을 시찰한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올린 보고 중에 “『고구려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팔십 먹은 장수에게 망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한 대목을 가리킨다.

‘고구려 900년’은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고 오가의 공화정을 폐한 BCE 232년에서 고구려가 망한 CE 668년까지를 뜻한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그 진실이 명쾌하게 밝혀진다.

환단고기의 기록으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의 내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북부여기」·「고구려국본기」를 통해 고구려 제왕의 초기 혈통계보가 천제자天帝子인 제1세 해모수(BCE 239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주몽(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으로 정립됨으로써, 고구려 900년 유국설이 입증되는 것이다.

삼성기 상 원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扶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사 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이라하시니 是爲高句麗始祖也시니라. (삼성기 상)
⇒해설 :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 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삼성기』 상)


즉 광개토대왕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광개토대왕비에 정확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부여 4세+고구려13세를 더하면 광개토 대왕이 17세손임을 밝혀주는 유일한 사서는 바로 환단고기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오히려 환단고기를 통해서 완벽히 광개토대왕 비문의 해독이 가능해졌다. 결코 조작된 위서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는 데에 그치지만, 『환단고기』는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 기록의 본래 진실까지 담고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900년 유국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현現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이순근은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라는 구절이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의 내용과 유사하므로, 『환단고기』는 박은식의 책을 베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기존에 전수되어 내려오던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를 묶어서 1911년에 발간되었고,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1915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역사관을 전개하기 위해 댓구적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베낀 것이란 말인가.

오히려 『한국통사』의 문장이 ‘옛사람(古人)’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라와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형식이므로 박은식이 다른 역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원문 자체를 분석하지 않고, 글의 전체 논리 흐름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유사한 한 구절을 떼어다가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원문은 이렇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망할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라[古人云 ‘國可滅, 史不可滅’, 蓋國形也, 史神也](박은식, 『한국통사』 서문).

이때 박은식이 인용한 ‘옛 사람의 말’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또 『환단고기』 범례에 ‘낭가’라는 말이 나온다.

위서론자들은 ‘단재 신채호가 처음 사용한 낭가라는 말을 환단고기 서문을 쓴 계연수가 따온 것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그 후에 성립됐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사실 『환단고기』는 낭가 문화의 원형인 삼랑三郞과 그 이후의 낭가 맥을 최초로 전해 주는 책이다.

 

이순근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논리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광용 또한 “교리체계에서도 환인(하느님)의 조화, 환웅(예수)의 교화, 단군(성령)의 치화를 생각나게 하는 삼신(삼위)일체론 부분은 … 기독교에 대한 단군신앙의 교리적 대응에서 나온 것이다. 또 영혼, 각혼, 생혼의 성삼품설聖三品說이 보이는 부분도 『천주실의』에서 마테오리치가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군세기』의 삼신일체 사상과 삼혼 논리가 명나라 때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말한 성삼품설聖三品說을 흡수한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환단고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서 신관의 중심 언어인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란 무엇인가?

‘조물주로서 얼굴 없는 하나님인 삼신과 한 몸이 되어 직접 우주 만유를 낳고 다스리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말한다.

비인격적인 삼신만으로는 이 우주에 어떠한 창조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 질서의 주권자이신 삼신일체상제의 조화손길이 개입될 때 비로소 천지만물이 창조되고 변화한다.

삼신일체상제, 이 한 마디에는 조물주가 어떤 원리로 우주를 다스리는지 그 해답이 담겨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位格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말하는 동방의 ‘삼신일체상제’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또한 마테오리치 신부가 말한 성삼품설의 영혼·각혼·생혼은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의 삼혼설에서 말하는 영靈·각覺·생生과 용어는 같으나 그 의미와 사상적 배경이 다르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삼신설이나 삼혼설은 고대 동북아 문화의 우주론, 삼신관을 바탕으로 한 ‘삼수 원리’에 토대를 둔 것이고, 생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이것을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던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하면서 수용한 것이다.

 

반면 마테오리치 신부의 성삼품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혼설에 토대를 둔 것이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서 말한 “영각생靈覺生 삼혼三魂”은 삼혼칠백三魂七魄의 삼혼을 말한다.

 

위서론자들은 삼신, 칠성 문화, 용봉 문화, 천지 광명의 환단 문화에 대한 기초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전통 문화의 기반인 삼신 우주관에 대해 치밀한 문헌 고찰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의식 자체가 없고,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지성과 우주론이 결여된 자들이다.

원전 자체를 체계적으로 읽지 않고, 그 가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논리를 만들어 아전인수 격으로 부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불순한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동방의 오랜 전통문화와 한민족의 숨겨진 원형역사가 담긴 환단고기를 이단과 사이비로 몰고 갔다.

무당, 민족사학, 샤머니즘, 오방낭 등을 거론하면서 민족종교와 민족사학을 도매급으로 사이비로 매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통문화를 사이비나 미신으로 매도한 것은 일제 강점기이후 민족종교 말살정책의 일환이였으며 해방이후에는 개신교계의 세력 확장 전략이었다. 

 

특정종교와 언론이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바탕으로 타문화, 타종교에 배타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며 동방문화와 역사를 배척하고 타도하려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국정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나오기 전부터 ‘환빠교과서’라고 엄청난 음해를 하는 여론몰이를 하더니만 뚜껑을 열고 보니 정작 실린 것은 찬란했던 우리의 상고사 환단고기 내용은 한 줄도 없고 여전히 식민사학 논리를 고수하며 친일 뉴라이트 역사관과 식민사학을 더욱 공고히 뿌리를 내리도록 기술을 하였던 것이다.

최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는 일본 극우 단체들의 지원금이 국내 유수대학과 일본 유학파 출신들에게 지원하여 신친일파를 만드는 정책이 상당히 성공하였다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의 극우교과서를 추진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한국의 뉴라이트 단체와 상당한 친선교류를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식민사학자와 외래사대주의, 그리고 자학사관자들이 매도하는 『환단고기』는 국정교과서 농단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와 음해를 당했다.

자국 역사를 어떻게든 깍아내리려는 이들은 일본 극우 단체의 자금을 받고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찬란하게 실존했던 한국의 고대사는 기술도 하지 않으면서 언론을 통해서 국정교과서는 환빠교과서로 여론몰이를 했다.

이들은 교활하게 민족사학을 매도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반영했다.

뉴라이트는 오히려 이전의 친일식민사학자들보다도 한술 더 떠서 친일을 미화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성공기반이 친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 사건은 한국사학계가 식민사학이 주류임을 다시 한 번 입증을 한 셈이다.

유사역사학vs.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도종환 의원

진실의 역사

유사역사학 vs. 식민사학 쟁점 팩트 체크 7가지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인터뷰들을 인용)

 

1. 도종환 의원을 유사역사학 신봉자로 몰아부치는 목적은?
▷ 도종환 반대세력이 노리는 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교과서 국정화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와 연관된 한국사 정통성과 대한민국 정통성을 통합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을 지닌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2. 동북아역사지도는 도종환 의원의 압력 때문에 취소되었나?
▷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근본 목적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양대 역사 침탈, 즉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사군을 지금의 평양으로하고, 독도를 빼버림으로써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철저히 유린하였기에 동북아역사재단 내부 재심사 결과에 의해 폐기된 것이다.

3.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다?
▷ 국가주의는 국가권력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희생이 전제된다는 관점이라면, 민족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주체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근대사의 동력은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독립운동을 우리가 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데 민족주의가 아니면 통일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다.


4. 유사역사학의 굴레를 씌워서 몰아내기
▷ 역사학의 본질은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데 있다. 다양한 해석은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역사학의 특징을 부정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 독재다.

국민들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학자들이 강요 할 수 없는 시대가 돼 버렸다. 그런데 자기네들 이론을 반대하면 ‘환빠’로 매도한다.

특히 이덕일씨 주장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반발이 도종환 의원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5. 한사군 평양설은 정설이다?
▷ 한사군 연구는 끝난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서로의 학설을 존중하면서 격조 있게 연구를 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 본다.

고대사의 일부 연구자들이 한사군 연구는 국내설로 귀착되었다는 주장은 '역사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역사학 자체를 부정하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양설이 다수설로 볼 순 있다. 그러나 정설이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조선후기 영조대의 『동국문헌비고』에 한사군의 영역이 요동까지 뻗쳤다고 나와 있는데, 관찬 사서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설이었다는거다.

패수 압록강설을 주장하지도 않은 정약용을 내세워 한사군 국내설을 강화 하였지만, 정약용은 정작 패수 대동강설 주창자였다. 정약용의 주장대로라면 한사군 국내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6. 단군을 인정하지 않는 주류사학
▷ 역사학의 기본은 민족의 근원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한다. 학계 주류는 ‘고조선 국내설’을 주장하고 단군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군을 인정하지 않으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대한민국은 현대에 새로 출발한 국가에 불과하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진보적’ 역사학은 남북통일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지 퇴행적 역사관이 아니다. 이는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으로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7. 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 고대사 하는 분들을 막을 세력이 국내에 전혀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걸린 거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다고 하니까 이들이 겁을 먹은 거다. 혹시 자기네들한테 불이익이 될까봐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난 거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를 언급하자 그것도 역시 두려움이 있는 거다. 자기네들 주장이 권력에 의해서 제거될 두려움이 있는 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틀에 갇힌 주류 강단사학이 가야가 포함된 ‘4국시대’의 도래로 위기에 처한 셈이다.

학문 용어로 성립될 수 없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안(정준)씨 등의 행위는 마치 일제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대종교를 ‘유사종교’라는 라벨을 붙여 탄압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