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운요호 사건

진실의 역사

운요호Unyo(雲揚)號 사건


“일본 사람이 3백 년 동안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와 모든 부강지술(富强之術)을 배워 왔나니 너희들은 무엇을 배웠느냐. 일심(一心)으로 석 달을 못 배웠고 삼 년을 못 배웠나니 무엇으로 그들을 대항하리오. 그들 하나를 죽이면 너희들은 백이나 죽으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 - 도전 5편 4장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말한다.

300년 전이면 16세기 무렵이다.

 

일본은 16세기부터 네덜란드와 통상을 하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을 통해 조총鳥銃(화승총火繩銃)을 수입하여 군대를 조련한 것도 1543년, 그 무렵이다. 이때부터 부국강병이라는 국가 어젠다Agenda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維新은 그 꿈을 이루는 근대화 개혁의 시발점이다. 유신으로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고 난 1870년대부터 일본 조야朝野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불을 뿜듯 일어났다. 말 그대로 이웃 나라 한국을 정복하여 힘을 기르고 그 힘으로 대륙으로 진출하자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조선은 어땠을까?

관료들은 고루한 유교 이념에 매몰되어 서로를 난정亂政이나 사도邪道로 낙인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쟁은 상대방이 죽고 사라질 때까지 집요하게 계속됐다. 연산군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필두로 벌어진 네 번의 사화가 모두 그 참혹한 결과물이다.

70여 년에 걸쳐 거듭된 사화로 인해 조선은 인재의 씨가 말라버렸다. 이러고도 나라가 기울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척화斥和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문을 닫기에 급급했다. 그 바탕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서열과 양반과 상놈을 차별하는 지배층의 신분 제도가 서양 문명에 의해 침식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은 신분제의 벽에 갇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국제 장님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관리들은 힘없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서로 경쟁하듯 토색질에 여념이 없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으니 요샛말로 ‘도대체 이게 나라냐?!’는 푸념이 나올 법 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포함외교砲艦外交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개국)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그들이 미국에게서 배운 방법을 그대로 써먹는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운요호(雲楊號) 사건이다. 운요호는 일본이 영국에서 수입한 배다. 전장 35미터이고 배수량은 249톤으로 1869년에 취역한 군함이다. 160㎜ 포 1문과 140㎜ 포 1문을 탑재하여 근대식 화력을 갖췄다.

1875년 9월 20일 함장 이노우에가 이끄는 운요호는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난지도에 도착하였다.

이노우에는 일본군 수십 명을 데리고 담수 보급의 명목으로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다. 이때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 수병은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일본군은 모함으로 되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영종진永宗鎭(오늘날의 영종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과 격전을 벌여,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기도 다량 탈취하였다. 그리고 주민에 대한 방화, 살육을 하고 퇴각하였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나타나,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 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6년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대륙 침략의 단초端初였으며 신호탄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사하기 일보 직전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환자와도 같았다. 과연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을 나라는 누가 될 것인가? 일본이냐 러시아냐, 아니면 저 멀리 영국일까? 미국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국제 정세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서 결판날 문제였지 당시 조선의 선택지는 제로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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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갑오동학농민전쟁

진실의 역사

근대사 갑오동학농민전쟁

 

“전명숙(全明淑)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고 상민(常民)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 주고자 하여 모든 신명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느니라. 전명숙은 만고(萬古)의 명장(名將)이니라.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어나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한 자는 만고에 오직 전명숙 한 사람뿐이니라.”
- 도전 4편 11장

 

사진은 전봉준全琫準(전명숙全明叔) 장군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시점은 1895년 2월 27일 (이하 양력)이고 장소는 서울이다. 서울의 일본 영사관에 갇혀 있던 전 장군이 심문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한다. 압송에 참여한 일꾼들의 심드렁한 표정에서 이번 행차가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들이 아직 겨울 추위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실패한 거사의 모든 책임을 지는 패장이건만 그의 기상은 여전히 세상을 뒤흔드는 혁명가의 그것이다. 아직 체념하기에는 분노가 너무 컸을까. 아마도 참혹하게 죽어간 동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부족에 대한 한스러움도 되씹고 있었으리라.

 

혹시 몰락해 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선천 상극의 세상, 모든 것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천도 섭리를 원망하고 있었다면 너무 사치스런 추측일까?

 

1894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 아마도 근대사에 이 사건만큼 우리 민족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 비극도 없을 것이다.

동학은 1870년대 후반부터 경상·충청·전라의 삼남 지방에 뿌리를 내렸다.

열강들의 침입, 중앙 정부와 지방 수령의 탐학으로 조성된 불안하고 원망 어린 사회 배경을 타고 동학은 농촌과 지식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 갔다.

 

종교 운동으로 시작한 동학이 사회 변혁 운동으로 돌변하도록 불을 놓은 인물은 단연 탐관의 대명사 고부 군수 조병갑이다.

1894년 2월 전봉준은 1천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아전들을 처단하고 양곡을 몰수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사실상 혁명의 시작이었다. 잠시 진정되는 듯했던 혁명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다시 폭발했다.

 

1894년 4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든 농민군들은 이후 황토고개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인근 고을을 점령해 나갔다. 5월에 전주 감영을 점령하고 6월 초순에는 전라도 일대가 사실상 농민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정부와 농민군은 휴전 교섭을 벌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점점 불안하게 꼬이고 있었다. 청군이 아산만을 통해 들어오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일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청·일 양국군의 대치 상태는 드디어 7월 25일 전쟁으로 비화됐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부당한 내정 간섭에 분개한 농민군은 이해 10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했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反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남접과 북접의 연합으로 수십만으로 불어난 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에 이르렀다.

 

약 1주일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곳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이후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에 쫓겨 금구, 원평으로 후퇴했다. 국토의 구석으로 내몰린 생존 병력은 일·관군의 소탕 작전에 지리멸렬하게 되고 결국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된다. 1895년 4월 23일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년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한때 60만에 달했던 동학농민군들 중 30만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면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농민군들은 애국적이고 애족적인 동기에서 거사했지만 당시의 시대 과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혁명 전략도 정확하게 세우지 못했다. 결국 외세의 개입과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예정된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일찍이 동학은 1860 경신년 4월 초 5일 경주 사람 최제우 선생이 천상의 상제님과 문답을 통해 도통을 받고 창시하였다.

이후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 그의 외침은 민초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다시 개벽’ 사상으로 세상의 변혁을 꿈꿨고, ‘무극대도’가 다스리는 ‘오만 년’ 조화 세상을 염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학의 핵심에는 ‘시천주侍天主’가 있다.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을 모신다’는 이 메시지는 너무나 큰 파격이기에 오히려 민중들의 의식에 접속되지 못했다. 천주님이 누구신지, 천주님은 언제 어디로 오시는지, 왜 천주님이 오셔야만 하는지 등 천주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문화 운동으로 채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천주에 대한 이해 부족은 이후 전개된 동학 운동의 치명적 한계였다.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는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도전 5:205)”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상제님은 전명숙 장군의 정신만은 높이 평가하셨다. 동서양 창업군주와 명장들의 반열에서 전명숙을 제일 첫머리에 놓으신 것이다. 또 그를 천상 조화정부造化政府의 조선 명부대왕冥府大王에 임명하시어 신명으로나마 후천 선경 건설에 역사하게 하셨다.

 

상제님은 그가 잡힌 피노리에 직접 가시어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그의 한을 풀어 주셨다. 사명기는 임금이 각 영營의 대장에게 내리는 지휘기다.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왕정王政을 바로 세우고자 거사한 그에게 왕의 신임을 상징하는 사명기가 없는 것은 천추의 한이었다.

상제님께서 직접 사명기를 꽂아 주심으로써 동학혁명은 상제님의 천명으로 후천개벽의 문을 열어 놓은, 천도혁명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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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지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진실의 역사

을미지변乙未之變,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弑害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8장

작전명 ‘여우사냥’이 시작됐다.

1895년 새벽 5시경 광화문 앞에 일단의 일본인 낭인浪人들이 일본군 수비대, 조선 훈련대와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새벽 3시경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아소정我笑亭)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어 궁으로 향했다. 대원군과 훈련대를 끌어들인 것은 향후 사건을 조선인들에 의한 반란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들이 노리던 목표는 조선의 왕비 민씨(사후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추존, 이하 ‘황후’로 칭함)였다.

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후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황후에게 바쳤다.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계산된 연극인 셈이다.

 

또한 일본은 고무라의 딸을 황후의 양녀로 들여보냈는데 이는 황후의 얼굴과 궁궐의 지리를 익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는 사건 발발 20일 전에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를 대신하여 이노우에가 추천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가 1895년 9월 1일 부임했다. 행동 대장 이노우에의 주도하에 10월 3일 공사관 밀실에서 을미지변乙未之變의 구체적 실행을 위한 모의가 이뤄졌다.

 

낭인 일행이 도착하자, 광화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는 경비병과 순검들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은 함성을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을 향해 돌진했다. 궁을 지키던 300~400명의 시위대가 총격전을 벌였으나, 이미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흉도들은 건청궁까지 오자 대오를 정렬하여 합문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으며, 낭인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마침내 건청궁의 안채 곤녕합坤寧閤에서 황후를 찾아냈다. 흉도들은 황후를 내동댕이친 후 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 흉도들은 자신들이 죽인 여인이 황후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황후와 비슷한 용모의 세 궁녀들도 살해했다. 이들은 이미 황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여러 장 들고 있었고, 나중에는 고무라의 딸을 대동하여 황후인지를 확인하였다. 그것도 미심하여 최종적으로 태자를 불러 황후의 죽음을 확인했다.

 

「고종실록」에는 황후가 죽은 시각은 묘시卯時라고 되어 있다. 대략 새벽 6시경이었다고 한다. 황후의 시신은 그날 아침 궁에 들어온 미우라 공사에 의해 재확인되고, 그의 지시에 의해 화장되었다. 아예 증거를 인멸하기 위함이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으로 운반한 다음 장작더미에 옮겨 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타다 남은 유골은 날이 밝은 뒤 훈련대장 우범선이 궁궐을 순시하다가 발견하여 연못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어떤 일본 측 보고서에 의하면 흉도들은 황후의 시신에 능욕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문 앞에 나와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우리 할아버지 대에 나라의 국모가 살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인류 역사를 전쟁이 반복되어 온 ‘피의 목욕탕’이라고 한다지만 일본이 저지른 을미년의 만행은 동서고금에 그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국가 간에도 도덕률이 존재한다면 일본의 범죄는 배은망덕의 극치에 해당한다.

 

일본이 이렇게 대담한 사건을 저지른 배경은 무엇일까?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하여 청의 요동반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895년 4월 일본의 중국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일본에 압력을 넣어(삼국간섭)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한다. 이를 지켜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 대안 세력으로 러시아를 선택하고 이해 8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 친러 정책을 추진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공들인 조선을 자칫 러시아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속에 폭력으로 정국을 뒤집어 놓기 위해 직접 황후를 시해하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을미지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일본의 흉계는 실패하고,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닥친 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서기관 등 사건에 개입한 일본인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음 해 1월에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석방된다. 을미지변 이후 친일 세력이 주도한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고 을미개혁乙未改革이 실행된다. 태양력太陽曆 사용, 단발령斷髮令 등이 이때 공포됐다.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만행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 각처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다음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俄館播遷)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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