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한민족의 일본 개척사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태일太一문화


『환단고기』에 나오는 한민족의 일본 개척사

 

일본 고대사는 한마디로 한민족사의 연장입니다.

일본 열도를 향한 한민족의 이주·개척의 물결과 문물 전수는 조몬繩文 문화(BCE 13000년 전~BCE 300년전)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약 1만 2천년 전에는 황해가 육지였고 일본도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한반도인이 육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후쿠오카현 일대에서 발견되는 세석기細石器가 시베리아와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유형과 동일하다는 사실로 입증됩니다.

한국인의 일본 개척사, 그 첫 기록을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①소시모리의 후손, 협야후의 삼도점거
戊申十年(무신십년)이라 豆只州濊邑(두지주예읍)이 叛(반)이어늘
命余守己(명여수기)하사 斬其酋素尸毛리(참기추소시모리) 하시니라
自是(자시)로 稱其地曰素尸毛리(칭기지왈소시모리)오 今轉音爲牛首國也(금전음위우수국야)라.
其後孫(기후손)에 有陜野奴者(유협야노자)가 逃於海上(도어해상)하야
據三島(거삼도)하고 僭稱天王(참칭천왕)하니라. -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조


재위 10년 무신(단기 161, BCE 2173)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곳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犂의 목을 베게 하셨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불렀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소머리 나라[우수국]가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인물이 있는데, 바다를 건너가 삼도三島를 점거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하였다. - 환단고기 완역본 본문 112쪽

 

甲寅三十八年(갑인삼십팔년)이라.
遣陜野侯裵반命(견협야후배반명)하사 往討海上(왕토해상)하시니
十二月(십이월)에 三島悉平(삼도실평)이러라. -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조
재위 38년 갑인(단기 1667, BCE 667년,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반命을 보내어 해상의 적을 토
벌하게 하셨다. 12월에 삼도三島를 모두 평정하였다. - 환단고기 완역본 본문 160쪽

 

소시모리는 『일본서기』에서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지명으로 나타납니다.

일본의 국조신 아마테라스의 아우인 스사노素盞鳴가 과도한 야심을 품고 난동을 피우자 주민들이 단결하여 그를 그의 본국인 신라(당시에는 고조선이었다)로 쫓아냈습니다.

 

『일본서기』는 스사노가 이때 ‘신라국에 내려와 소시모리라는 곳에 살았다[降到於新羅國. 居曾尸茂梨之處]’고 전합니다.

일본 왕가의 뿌리와 연관된 소시모리 추장의 이름을 지명으로 변형하여 그들의 역사책에 심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도 일본에는 ‘소머리’라는 뜻의 우두牛頭라는 성씨가 있고 우두신牛頭神을 모신 신사를 ‘소머리데라牛頭寺’라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우수주가 원래 한반도 지명임을 밝히고 현재 강원도 춘천에 남아 있는 우두산牛頭山이 옛적의 ‘소시모리牛首國’였음을 시사합니다.

오늘날 이곳을 조상의 땅이라 하여 찾는 일본인이 많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초대 천황 진무가 큐슈 섬 일향日向에서 출발하여 일본 열도를 평정하고 BCE 660년에 천왕으로 등극하였다고 말합니다.

BCE 667년으로 기록된 단군세기의 배반명 참칭 사건과 불과 7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두 사건이 사실 동일사건입니다.

 

『일본서기』를 따르면 진무 왕의 어렸을 적 이름이 협야狹野였다고 합니다.(※협야라 하는 것은 어렸을 때의 이름이다. 뒤에 천하를 평정하고 8주를 다스렸다[所稱狹野者, 是年少時之號也. 後撥平天下, 奄有八洲]) 비록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협야후와 협야는 같은 동일 인물입니다.

 

일본 천황가의 시작이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언파불합의 웅습평정
戊午五十年(무오오십년)이라 帝遣將彦波弗哈(제견장언파불합)하사 平海上熊襲(평해상웅습)하시니라. - 단군세기 35 세 사벌 단군조
재위 50년 무오(단기 1611, BCE 723)년에 임금께서 장수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 위의 웅습熊襲(구마소)을 평정하셨다. - 환단고기 완역본 본문 158쪽


③ 의려국 왕의 일본 정벌
正州(정주)는 依慮國所都(의려국소도)니 爲鮮卑慕容외所敗(위선비모용외소패)하야 憂迫欲自裁(우박욕자재)라가
忽念我魂尙未泯(홀염아혼상미민)하니 則何왕不成乎(즉하왕불성호)아.
密囑于子扶羅(밀촉우자부라)하고 踰白狼山(유백랑산)하야 夜渡海구(야도해구)하니 從者(종자)가 數千(수천)이라 遂渡(수도)하야 定倭人爲王(정왜인위왕)하니 自以爲應三神符命(자이위응삼신부명)이라 하고 使群臣獻賀儀(사군신헌하의)하니라. -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의려국 왕이 선비 모용외에게 패한 뒤 핍박당할 것을 근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때 문득,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리오?’ 라는 생각이 들어, 은밀히 아들 부라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삼신의 부명에 응한 것이라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하례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 환단고기 완역본 본문 678쪽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인 야마토大和 정권을 연 사람들은 부여계입니다.

 

1921년 기다 사다기치喜田貞吉(1871~1939)는 “부여는 한반도에서 고구려·백제·신라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4세기에 일본열도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일본의 기마민족설을 최초로 주장하였습니다.

 

이어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는 동북東北 부여계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열도로 들어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야마토大和 지방에 야마토 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騎馬民族征服王朝説’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태백일사의 기록입니다.

의려국은 일명 연나부 부여입니다.

 

고구려 3세 대무신열제가 동부여를 멸망시킨 후 동부여 3세 대소왕의 종제를 연나부에 안치하였는데, 대소왕의 종제가 그 후에 자립하여 백랑산(요령성 객좌현)에 이르러 정착하였습니다.

 

그 후손 의려왕이 선비족 모용외의 침략을 받아(285년) 패하여 추종자를 이끌고 바다 건너 고대 일본을 건설하여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의려왕이 곧 일본서기에 나오는 15세 오진應神왕입니다.

삼신의 부명에 응했기에 응신應神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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