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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베트 역사③

티베트 역사③

진실의 역사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중국 전쟁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였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13세 툽텐 갸초였다.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고 판단한 툽텐 갸초는 즉시 행동으로 나섰다.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 국가 건설에 나섰다. 같은 해 음력 10월, 라싸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1천 명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이듬해(1913) 1월 중국군과 중국 교민들은 모두 라싸를 떠났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라싸로 귀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귀국 즉시 달라이 라마는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났다.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곧이어 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 티베트·중국 전쟁이다. 이 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1918년 제2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티베트군은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참도를 포위 공격하여 3개월 만에 점령했다. 티베트군은 기세를 몰아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중국 쓰촨 성으로 진격했다. 양국은 1918년 12월 영국의 중재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금사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 간에 무력 충돌이 잦았다. 193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갑자기 입적했다. 이듬해 제3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1939년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티베트 정부와 종전 협정을 체결했고 금사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전세영동을 찾다
1935년,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전세영동轉世靈童, 즉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비밀순방단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해 가을 비밀순방단이 도착한 곳은 북부 티베트 서녕 아래 탁최達澤라는 마을이었다. 20가구 남짓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들이 찾은 곳은 탁최 마을의 최종체링曲炯才仁·쇠남초索南措(또는 데끼쩨링德吉才仁) 부부의 집이다. 비밀순방단은 부부의 넷째 아들 라모된줍拉莫頓珠을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확정했다. 바로 이 아이가 현재 전 세계인이 ‘달라이 라마’로 부르고 있는 인물이다. 법명은 땐진 갸초丹增嘉措.

 

1940년 2월 22일,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라싸의 포탈라 궁에서 정식으로 등극했다. 중일전쟁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즉위식이 끝난 뒤에도 중국 사절단은 철수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강압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였다. 1949년 10월 1일 중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당시 청해에 있던 10대 빤쩬 라마 오이키 칼쩬은 중국 정부의 수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티베트를 향한 발톱을 숨기지 않았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다섯 달 뒤, 중국인민군 제18군(총사령관 장국화張國華, 정치위원 담관삼譚冠三)은 티베트와의 국경 금사강을 넘었다. 며칠 뒤 중국 정부는 참도에서 티베트군 5천7백 명을 전멸시켰다고 발표했다. 이듬해(1950) 5월, 중남해中南海에서 중국과 티베트 대표단은 17조협약十七條協約이라 불리는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티베트평화해방협약中央人民政府和 西藏地方政府關於和平解放西藏辨法的協議」을 체결했다. 현 중국 공산당 정부와 티베트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그해 9월 9월 중국인민군 3천 명이 라싸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티베트에 겔룩 시대가 끝나고 중공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달라이 라마, 히말라야를 넘다
티베트는 신앙의, 종교의, 불교의 나라다.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중국과 티베트가 과거 역사에서 보여 주었던 그런 관계일 수는 없었다. 1954년 달라이 라마와 빤쩬 라마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나타났다.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이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은 당시 청년 달라이 라마가 종교에 대해 안심할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마오쩌둥에게 인간적 매력마저 느끼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달라이 라마의 기쁨은 불과 몇 시간도 가지 않았다. 마지막 회견에서 마오쩌둥은 종교는 독毒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듬해(1955) 귀국길에서 달라이 라마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미 조국 티베트는 없고 중국 공산당 치하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티베트에는 이미 공산주의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성한 사원은 비어 갔다. 1965년 티베트 자치구가 탄생했다. 자치구 최고지도자는 달라이 라마였으나 이미 이름뿐인 자리였다.

 

한때는 중원 대륙을 호령하였던 티베트인들이다. 그들은 쉽게 지배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1955년 공산주의 개혁의 강요에 지친 암도와 캄의 티베트인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승려들조차 무기를 들었다. 곳곳에서 게릴라전이 일어났다. 1956년 베이징은 캄에 15만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티베트 저항군은 수없이 죽어 갔다. 티베트인들도 항거의 깃발을 꺾지 않았다. 중부 티베트에서 전면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1958년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긴박해졌다. 중국은 “티베트를 반동(달라이 라마와 그 추종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아니, 엄포가 아니라 결행이었다. 1958년 3월 16일과 17일 사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달라이 라마는 측근과 캄빠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밤중을 이용해 몸을 피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히말라야 너머 인도였다. 네루 인도 수상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달라이 라마 일행을 정치적 망명자로서 보호해 주었다.

 

달라이 라마가 라싸를 탈출한 지 3일 뒤인 20일부터 22일까지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불바다가 되었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죽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에 따르면 2천 명에서 1만 명에 이른다고 썼다. 4천 명이 체포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 이후 많은 티베트인이 정치적 동기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적어도 8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달라이 라마를 따라 인도로 혹은 네팔로 떠났다. 당장에 갈 곳이 없는 티베트인들은 유엔 난민기구와 인도 정부에서 세운 난민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티베트인들은 갑작스럽게 바뀐 인도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결핵과 이질, 풍토병 등 질병으로 죽어갔다. 달라이 라마는 동포들이 겪는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기자 회견을 자청하여 강압에 의해 체결된 「17개조 협의안」은 무효임을 선언했다. 유엔에서도 중국의 티베트 정책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인도 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다람살라 북쪽 맥그로드 간즈를 제공해 주었다. 1960년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 주州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 정부亡命政府가 수립되었다.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티베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자의든 타의든 티베트인들도 섞여 있었던 홍위병紅衛兵은 소위 ‘구체제’의 유적들을 거침없이 파괴했다. 홍위병에게 ‘반동분자와 미신’의 표적이 된 것은 각종 사원을 비롯하여 성곽, 서책, 조각상, 그림, 탑 등이었다. 6천여 곳에 달했던 티베트의 사원과 사찰들은 1976년 이후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물·유적들은 뜻있는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걸고 감추어 두었던 유물과 곳간 등으로 위장해 숨겼던 사찰, 사원들이다.

 

1975년부터 중국 정부는 티베트 중부에 중국 한족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한족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은 티베트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티베트에 대한 특별경제조치가 취해졌다. 티베트인에게도 어느 한도 안에서 자율결정권이 주어졌다. 많은 죄수들이 풀려났고 티베트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1982년 중국 헌법 제35조에 의해 국가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며, 티베트에 대한 외국인 출입이 허가되었다.

 

1989년 달라이 라마는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인권 및 세계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수상 당시 행한 연설을 통해 티베트의 국가적, 문화적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중국의 억압 정책들을 지적하고 이에 맞서는 티베트의 투쟁은 정당하며 폭력은 더 큰 폭력과 고통을 가져오므로 비폭력 독립 운동을 지속해 나갈 것임을 주창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2008년 3월, 라싸에서는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항쟁이 있었다. 1959년 시작된 티베트 독립 운동(티베트 봉기)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일으켰고, 이것이 확대되어 티베트 독립 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이 항쟁은 잠시 잠잠했던 티베트 독립 운동에 불을 붙였다.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에 나섰다. 국제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을 중심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압박이나 국제 여론에 고개를 숙일 중국이 아니었다. 개방정책 이후 중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으로 몸집을 부풀린 상태다. 오늘날 티베트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서는 찬반으로 엇갈린다. 평가하는 이에 따라서 달라이 라마 14세가 주창하는 비폭력 독립 운동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 또한 쉽게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티베트 고원을 향해 귀를 열어 준 이들은 듣고 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랫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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