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읽고-이덕일

진실의 역사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읽고 - 이덕일

사마천 사기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자.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사마천 [송미자세가宋薇子世家]》 사기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나라도 동이족 나라이거니와  중화사대주의자들인 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미천 사기에는 고조선은 중국의 은나라에서 봉한 제후국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 은나라의 제후인 기자가 평양에 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자조선설은 허구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북한 평양이 기자조선의 도읍도 아니다.

(사실은 기자를 봉한 사실이 없는 것이다. 제후국으로 봉하면 신하는 당연한 것인데 신하로 삼지못했다고 앞뒤가 안맞는 기록을 하고 있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 屬幽州(漢書 地理志)
낙랑군-무제원봉삼년개.망왈낙선, 속유주
☞낙랑군은 무제원봉 3년에 열었는데 낙선군이라 말하였고 유주에 속하였다.(유주는 현재 북경이다.)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括理志)
고려치평양성 본한낙랑군왕험성 즉고조선야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時朝鮮王滿據之也(사기정의)
고려치평양성,본한낙랑군왕험성, 즉고조선야,시조선왕만거지야
☞고려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인데 곧 고조선의 땅이다.

 

樂浪郡故朝鮮國也 在療東(후한서 광무제본기)
☞낙랑군은 옛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療東君 秦置 屬幽州요동군진치 속유주(한서지리지)
☞요동군은 진나라때 설치되었고 유주에 속한다.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한서 지리지)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는데 패수의 동쪽이다. 이것이 험독이다.

 

王險城在樂廊君浿水之東왕험성재낙랑군패수지동(사기조선열전)
☞왕험성은 요동군에 있는데 패수의 동쪽이다.

 

應召注 地理志療東險瀆縣 朝鮮王舊都응소주 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구도(응소주 사기조선열전 주석)
☞후한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 때 인물인 응소는 험독현에 주석을 달면서.

지리지를 인용해서,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지다”라고 했다.

즉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은 창려현에 있었고 패수의 동쪽이며 왕험성의 서쪽에 패수가 흘렀다는 뜻이다.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창려현의 서쪽을 흐르는 험한 강은 지금의 난하다.

곧 지금의 난하가 패수가 되는 것이고 이 강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다.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의 원리에 의해 삼조선체제로 국가를 운영했는데 바로 번조선의 수도가 왕험성(험독)이다.

결코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중국 사서에도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사학자들은 고조선을 마치 족장 시대로 기술하고 위만이 조선을 침탈하며 철기문명이 전해져서 조선이 크게 번창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사기 조선열전)
집해서광왈 창려유험독현야(사기집해주석)
☞서광이 말하길, 창려에 혐독현이 있었다.

 

浿水療東塞外패수요동새외(사기 조선열전)
☞패수는 요동의 새외에서 나온다.

 

長岑縣屬樂浪君 其地在療東장잠현속낙랑군 기지재요동(후한서 최인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長城所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起태강지리지운 낙랑수성현유갈석산 장성소기(史記 夏本記)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遂城,秦築長城之所起也수성 진축장성지소기야(晉書 지리지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에서 쌓은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水經注,絫縣碣石山 枕海有大石如柱形 世名天橋 絫縣古城 在昌驪縣西南(大東地志 방여총지)

수경주 류현갈석산 침해유대석여주형 세명천교 류현고성 재창려현서남
☞수경주에는 류현 갈석산은 바다에 기둥처럼서있는데 세상에서는 천교라한다. 류현은 고성인데 지금은 창려현 서남쪽에 있다.

 

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五君十一縣:龍城,廣興,定荒,屬昌黎君(수서 지리지)

수성구왈무수 후위치남영주.준영주치오군십일현;용성,광흥,정황,속창려군
☞수성현은 옛날에는 무수로 불렸다. 후위에 와서 남영주로 행정개편 되고 영주는 5군11현을 두었다. 용성,광흥,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正義 括地志云 “易州遂城 戰國時武遂城也.方城故在幽州固安縣南十七里(史記 趙世家)

정의 괄지지운 역주수성 전국시무수성야. 방성고재유주고안현남십칠리
☞괄지지에는 이주 수성현은 전국시대의 무수성이다. 그 성의 위치는 옛 유주 고안현 남쪽 십칠리에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명증하고 있는 책이 『환단고기』이다.

일본은 일제치하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의도적으로 남긴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는 신라입장에서 기술되면서 오히려 고구려를 당에 대항한 교오불손한 나라로 기술하고 연개소문을 왕을 시해한 패륜영웅으로 그렸다.

사대주의에 입각해 쓰여진 이 책은 대진국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 삭제했다.

김부식이 경주김씨로 우리의 북방사를 절단해 버린 것이다.

왜 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일천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 했는지 알아야 한다.

강력한 국풍과 다물사상을 지녔던 묘청이 패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사대주의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기록이지 우리의 고대사 기록이 아니다.

삼국유사 또한 불교적 견해로 기술했고 신화적 요소로 처리된 부분이 많다.

이로 인해 일제는 우리역사 왜곡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오히려 삼국유사의 미진한 기록을 명확히 밝힌 책이 『환단고기』이다.

 

우리나라는 외래종교와 사상이 들어오면 그들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했다.

지금은 기독교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는 철저히 신화로 치부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랜 우리 역사적 사실이 문헌고증과 유물을 통해 확연히 밝혀졌는데도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믿음이란 명목하에 독선과 고집으로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자신의 역사는 어두워도 이스라엘 역사는 줄줄 외우는 현실이다.

 

뿌리를 잃은 민족이 얼마나 번성할 것인가.

신채호는 그것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 사람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한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외래종교,외 래사상에 물들어 우리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사대주의를 이렇게 개탄했다.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역사적 시각)
오랜 기간 반란의 수괴로 이미지가 각인되었던 묘청이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에 의해서였다.

 

신채호는 망명지에서 쓴 [조선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여 조선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 년래 조선사가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그들 비판의 상당 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에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자구字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라고 하면서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그 숱한 인명, 지명, 연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세기적인 대천재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일축하였다.

 

천안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김삼웅은 “『환단고기』가 비록 내용과 용어의 일부가 후세의 것이라 해도 아직 책 자체가 완전히 위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한다.

 

윤내현 교수는 『환단고기』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가 아직 불충분함을 토로한다.

『단기고사』,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에는 47명의 단군 이름이 실려 있는데, 아직 이 책들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나 그 내용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가 충분하게 되어 있지 않다(윤내현, 『고조선 연구』, 331쪽)라고 지적하며 환단고기 내용자체를 연구조차 하지 않으려는 현사학계를 비판하고 있다.

『환단고기』가 주류 강단사학에서 위서로 몰리고 있던 1993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박창범고조선 13세 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五星聚婁] 현상을 컴퓨터로 재현하고 실제 역사 사건으로 증명했다.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 박사도 이 오성취루 현상이 사실이었고 고조선도 실제로 존재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BCE 1733년에 5행성이 저녁 하늘에 나란히 관측됐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 발견됐다.

이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나도 소프트웨어를 돌려봤다.

그 결과 단 1년의 오차도 없이 BCE 1733년 7월 저녁 서쪽 하늘에는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 순서로 5행성이 늘어섰다. 여기에 달까지 끼어들어서 7월 11~13일 저녁에는 글자 그대로 ‘우주쇼’를 연출했다.

이러한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BCE 1733년, 우리 조상들은 천문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트집을 잡는 근대 용어 문제도 『환단고기』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사실 인류 문화사에 전하는 경전의 고본을 보면, 그 시대 전문가나 학자에 의해 정서가 되면서 글자가 추가되거나 부분적으로 윤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뒤에 뛰어난 대가가 나오면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글자도 바로잡고 문맥도 바로잡는다.

이때 교정한 사람이 살던 당시의 언어로 교정이 되면서 새로운 판본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문화 발전사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사의 수많은 고전, 유교, 불교, 기독교 경전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전수 되었다.

그럼에도 환단고기에 유독 이런 잣대를 대는 것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기위한 음모에 불과하다.

 

『환단고기』 또한 전해지는 과정에서 연대나 일부 내용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환단고기』의 전체 내용, 즉 천지 광명 역사관, 원형 문화의 틀은 훼손된 게 아니다.

과거 동서 문화의 고본이 내려오면서 추가되고 변형된 것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하다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을 작업한 사람들은 근세 사람이 아닌가. 그 가운데는 불과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이처럼 턱없이 위서론을 전개하는 것은 그들이 신교 문화와 신교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인류 시원역사가 워낙 기존 역사서와 달라서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어떤 학자가 위서라고 바람을 넣으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처럼 ‘글쎄 그런 것 같다’하고 대개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만다.

 

윤명철은 『환단고기』가 진서냐 위서냐 하는 것을 떠나서, “이 책이 한국의 사회 사상계 혹은 대중적인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현상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환단고기』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영향력, 역기능과 순기능을 점검하고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역사발전의 긍정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진지한 모색을 해야 한다”라고 한다.

송호수, 안창범, 고준환 등도 『환단고기』의 모든 내용을 다 조작된 것으로 불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는 고대 한중일 삼국의 관계, 북방 유목민족의 발흥 등을 다루는 정치경제사에서 언어, 문자, 음악, 의식주 등을 다루는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각종 주제를 담고 있다.

또한 『환단고기』에는 동북아 원형 문화의 인간론, 신관, 자연관, 역사관을 전해 주는 신령스러운 이야기가 꽉 들어차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환단고기』는 단순히 인간 중심의 역사서가 아니라 ‘천지 광명의 삼신문화 역사서’이다.

때문에 비뚤어진 의식으로는 환단 시대의 시원 문화와 창세 역사가 밝히는 대도의 세계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

고대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현대의식으로 고대문화를 해석해서 고대역사와 문화를 왜곡함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시대의 문화정신, 종교, 정치, 사회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바른 역사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원을 비난하는 고대사학자들 - 이덕일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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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원을 비난하는 고대사학자들 - 이덕일②


이병도가 최태영의 권유대로 과거를 반성하고, 이를 그의 제자들이 받아들였다면 지금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지금 한국의 사학자들 대부분은 매국사학자라는 비난 대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역사학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니뽄사(일본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한국사는 니뽄사의 지방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연구를 제안하자 고대사 연구자들이 대거 비난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간 가야사를 빙자해 임나사를 연구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다고 나오고,

『삼국사기』는 서기 77년(탈해 이사금 21년)에 신라의 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모두 서기 1세기에 가야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사를 빙자했지만 실제로는 니뽄사를 했던 고대사학자들은 4세기에도 가야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설혹 존재했어도 아주 조그만 동네국가들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2005년만 해도 한일역사연구공동위원회처럼 국민세금으로 ‘쓰다 선생님 만세! 이마니시 선생님 만세!’를 외쳐도 모두가 한 통속이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동북아역사왜곡특위의 국회의원들과 나를 비롯한 역사학자들, 그리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이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겨레 21」 편집장 길윤형이 이런 매국사업을 비판한 국회의원들과 역사학자들,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국뽕 3각연대’라고 거품 물고 비난한 것이다.

정확히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계 형사의 인식과 일치한다.

정치가(독립운동가),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후손들이야 말로 일제 고등계 형사들이 기를 쓰고 죽이려던 존재들이 아니었나?

매국사학자들은 이병도가 매국사학을 추종할 때만 태두로 모신다.

감히 '쓰다 소키치' 선생님, '이마니시 류' 선생님을 넘어서려 하면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문영은 역사학계가 스승에게도 대든 사례로 든다. 희한한 머리구조다.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의 출처와 『환단고기』
학부 출신의 이문영이 교수 출신의 매국사학자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따온 것이다.

그가 고안했다고 하지 않고 따왔다고 하는 이유는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용어를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조선총독부 만세가 가득 차다 보니 조선총독부식으로 사고하게 된 듯하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여기에 천도교, 동학교, 단군교, 대종교, 보천교, 증산교 등의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꼽아 탄압했다.

또한 미륵불교, 불법연구회 등의 불교단체도 ‘유사종교’로 꼽았다.

지금 매국사학에서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하면 학위가 있어도, 없어도 ‘유사사학자’로 모는 방식과 완전히 같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계시다. 천황폐하와 조선총독 각하들은 영원히 우리의 앞길을 지도하신다!”는 충성선언의 무한반복이다.

 

이문영이가 나섰는데 『환단고기』에 대한 비난이 빠질 수 없다.

이문영은 「한겨레 21」에서 “이덕일은 초창기에는 약하게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주장했지만 최근 세계환단학회(2016년)에 나가서 <환단고기>의 역사성을 주장하기까지 했다.”라고 글의 끝을 맺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나를 『환단고기』 추종자로 몰기 위해서 광분한다.

그러나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범례에 따르면 ‘홍범도, 오동진’ 두 독립운동가가 출간자금을 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진위 논쟁은 앞으로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오랜 시간을 두고 검토할 문제지만 매국사학자들처럼 『환단고기』를 보는 자는 다 죽여야 한다’고 거품을 물 책은 아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내 생각은 추후 자세히 밝힐 것이지만 한두가지만 미리 말하겠다.

매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가 지 애미를 잡아먹었는지, 지 애비를 잡아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극도로 저주한다.

박노자도 「한겨레 21」과 인터뷰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떤 책이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진위판정은 다양한 역사학적 방법론을 사용해 『환단고기』를 교차검증한 후에 내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1911년에 편찬되었다는 『환단고기』에 수천년 전의 내용이 적혀 있으면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서 검증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매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검증 자체를 거부한다.

학문의 다양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일제가 한 세기 전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대하는 자세와 같고, 유신, 5공정권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대하는 자세와 같다.

2016년에 세계 환단학회에서 기조강연을 부탁하기에 나는 기조강연보다 논문을 써서 발표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논문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문영은 역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학문적 분석을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역사학계의 학문적 분석을 하나만 살펴보자.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잠청배(潛淸輩)’라는 용어가 나온다.

『단군세기』는 고려말 공민왕 때 이암이 썼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물론 실제 그런지는 더 검증해야 한다.

그런데 『환단고기』 위서론자인 박광용 교수는 ‘무서운 아이들’의 본거지인 <역사비평(1992)>에 실은 「대종교 관련문헌에 위작 많다」는 논문에서 ‘잠청배’라는 용어를 위서의 근거로 들었다.

박광용은 이를 “‘청에 내통한 무리(潛淸輩)’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이 서술은 1894년 이후에야 가장 적절하게 맞는 개념이다”라고 비판했다.

잠청배를 ‘청에 내통한 무리’라고 해석해 놓고 위서의 근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민족사학자였던 임승국은 한단고기(1986)의 번역·주해에서 이를 “잠(潛)이나 청(淸)과 같은 무리”라고 해석했다.

잠청배는 고려 중후기 때의 간신인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을 뜻한다는 것이다.

1986년에 잠청배의 뜻을 풀이한 주해서가 나왔고, 꽤 많이 팔렸건만 읽어 보지도 않고 1992년에 덮어놓고 비판하다가 큰 망신을 당한 것이 이문영이 말하는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역사학계의 학문적 결론이란 것이다.

지금 『환단고기』를 보는 자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주창하는 학자들 가운데 『환단고기』를 정독해 본 사람은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매국사학자들이 공부 안 한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다.

“왜 저 사람들은 공부 안 할까요?”

“공부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배운 것이 틀렸다는 내용이 나오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자신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나요?”

“평생 안 하던 공부 지금 와서 하겠어요?”

 

이처럼 공부 안 하는 학자들, 한국사를 빙자해 니뽄사(일본사)를 한 학자들이 자신들의 밥 그릇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에 언론카르텔이 가세한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그러니 언론의 영향력이 계속 추락하는 것이다.

매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밥줄이니 끝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 조선, 경향, 매일경제, 한국일보도 매국사학이 자신들의 밥줄인가?

수많은 독자들, 수많은 광고주들 가운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아직도 조선총독부 만세를 외치는 저들의 역사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금 살을 베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독자들은 카르텔 언론들의 역사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보도 내용도 무조건 부인하게 될지 모른다. [한가람 연구소 이덕일 박사님 글 펌]


세계 강대국 치고 자국의 민족사를 바탕으로 해서 국가를 통합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도 다민족 국가지만 미국의 건국정신인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다민족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중국, 일본 등 유럽의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사학계는 자국사를 깍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어 식민사학의 노예로 전락해 자국의 역사에 테러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민족사를 빗대어 ‘국수주의’와 '국뽕’, '환빠’라고 맹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의 식민사학이 무너질 것을 방어하기 위한 매국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치 평생 어미 말을 안 듣던 청개구리가 강가에 제 어미 무덤을 만들어 놓고 비 오는 날 떠내려갈까 봐 미리 요란하게 우는 것과 유사합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국익을 해하는 식민사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유사역사학’, ‘사이비 역사학’은 본인들 스스로이면서도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독립운동하며 나라를 지킨 민족사학을 유사역사학이라는 여론몰이를 하는 이들을 이제는 역사의 정의로 준엄하게 심판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 자들이 민족사학자인 이덕일 박사를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법정에 고발하고 이에 대해 정부에서는 유죄판결을 내렸다가 항소심 2차공판에서 위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무죄선고를 받았는데 바로 이들이 새 정부 적폐청산 대상 제1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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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과 유사역사학 - 이덕일①

진실의 역사

이문영과 유사역사학 - 이덕일

 

무슨 소설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칭 소설가였던 이문영이 「한겨레 21(2017. 6. 26)」에는 자신을 ‘역사작가’라고 소개했다.

「한겨레 21」의 청탁을 받고 너무 기뻐서 인터넷에 글을 남겼는데, 유사역사학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청탁하면서

“이런 기사를 내보내면 역풍 엄청납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한겨레 21」이 처음부터 마음먹고 독자들과 싸우려고 기획했다는 뜻이다.

단군 죽이기를 마음먹고 특집으로 꾸밀 정도면 순간의 일탈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역사관 수호가 신념이라는 뜻이다.

이문영은 “그런 건 무섭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단다.

 

내 주위는 대부분 책 깨나 보는 사람들인데 아직 이문영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이문영이 소설가로서는 밥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역사관 수호의 전위대로 나서니 『매일경제』에서 연재지면을 주고 「한겨레 21」에서도 청탁을 한다.

역시 대단한 카르텔이다.

당초 「한겨레 21」에서는 학사출신의 이문영이 아니라 그럴듯한 대학의 교수를 필자로 섭외했을텐데 모두 내뺐을 것이다.

도종환 후보자를 맹비난하던 ‘한국고대사학회장 하일식, 윤내현 교수가 자신의 뒷자리를 준 단국대 심재훈, 『조선일보』에서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닉네임을 붙여준 기경량’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청문회에 불러 멍석을 깔아주었다.

그러자 모두 학회 핑계를 대며 도망갔다.

이문영이 그간 소설 인세로 몇 푼을 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소설을 본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봐서 소설가로 먹고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국사학 전위대로 나서니 인생에 반전이 일어났다.

이 신문, 저 신문에서 지면을 주고 고대사학회는 한성 백제박물관에 초청해 강연 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리 계산하나 저리 계산하나 남는 장사다. 그러니 그는 전위대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래서 적반하장은 이문영의 특징이다.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을 ‘유사역사학자’라고 비판하는 것으로 ‘조선총독부는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계시다’를 되뇌이면서도 『매일경제』에 때로는 ‘심산 김창숙이 그립다’ 운운의 글도 쓴다.

물론 김창숙이 실제로 살아 있다면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죽이자고 달려들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이병도는 침묵하고 문정창, 박창암은 비판하고.
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했던 인사들을 극우파나 쿠데타 동조세력으로 모는 것은 이문영의 특기다.

이문영은 광복 후 민족사학에 전념했던 문정창에 대해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이사관)을 지낸 일제 부역자”라고 비판했다.

문정창이 일제 때 관료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광복 후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반성하고, 남은 평생을 사재를 털어 일제가 왜곡한 한국사 바로잡기에 바쳤다.

이문영은 이 사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자유』지를 창건한 박창암 장군에 대해서는 간도특설대 출신이자 5·16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박창암 장군이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계속 촉구하다가 박임항·김동하 장군 등과 반혁명사건으로 체포되어 숱한 고문을 당한 끝에 1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는 사실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질이 안 좋다.

 

반면 자신이 추앙하는 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모른 체한다.

이병도가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스승들과 함께 한국사를 난도질한 장본인이란 사실은 일단 제외하자.

이병도는 이승만 정권 때 인간백정으로 불렸던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 방첩대장(중장)의 묘갈명을 썼다.

이 묘갈명에서 이병도는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고 칭송했다.

김창룡이 반 이승만 세력을 용공으로 몰아 하도 많이 죽이자 군부 내 양심세력인 허태영 대령이 1956년 처단하고 사형 당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아버님이 허태영 대령을 참군인이라고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병도는 거꾸로 김창룡을 칭송한다. 이병도가 김창룡을 칭찬한 이유가 있다.

이병도는 광복 직후 진단학회에서 쫓겨났다가 1950년의 6·25사변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김창룡의 반 이승만 세력 숙청은 곧 자신의 재기의 발판이었다.

그래서 1954년 진단학회 이사장으로 복귀한다.

이병도는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기관지 『최고회의보』 창간호에 「5·16군사혁명의 역사적 의의」라는 글을 써서 쿠데타를 칭송하고, 학술원 원장 등 각종 요직을 꿰찬다.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국정자문위원에 이르기까지 이병도는 친일, 독재 미화의 삶으로 일관했다.

이런 이병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문영은 반성의 삶을 살았던 문정창, 박창암의 전력만 극력 비난한다.

 

* 매국사학의 진정한 스승은 여전히 일본인 식민사학자들.
지금 매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 대다수는 문정창, 박창암 등과 아무런 상관없다는 사실도 모른 체 하고 덮어 씌운다.

일제 고등계 순사 앞잡이 수법과 유신, 5공 때 용공조작 수법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정체성이 같은 「한겨레 21」에서 원고 청탁을 했을 것이다.

지금 매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과 시민들 대다수는 80년대 이후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로서 문정창, 박창암이란 이름도 몰랐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사학계 대다수가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일이관지하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고대사도 비판하고, 이승만·박정희 정권도 비판한다.

‘조선총독부는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계시다!’는 고대사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근현대사는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고대사는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이른바 짝퉁 진보 근현대사학자들의 분절적, 쪼가리 역사인식도 웃기는 짓거리로 본다. 

이문영의 웃기는 자화자찬은 한 둘이 아닌데 그 중 하나가 이병도의 제자들이 이병도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건이 있다.

이문영은 한국 역사학계는 스승에게도 반기를 들 수 있다는 사례로 설명한다.

 

서울법대 학장이었던 최태영 선생이 이병도를 만나서 1차사료를 가지고 설득하자 이병도가 단군을 인정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그러자 그 제자들이 최태영이 협박했다는 등 이병도가 노망났다는 등 비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일화이다.

이것이 이문영의 머리속에는 한국 역사학계는 스승에게도 대들 수 있는 사례로 둔갑한다.

이병도의 제자들이 이병도를 비판한 것은 이병도가 조선총독부 역사관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이병도가 광복 후에도 한국사를 빙자해 니뽄사(Nippon History:일본사)를 하는 매국사학자들의 태두로 추앙받은 것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한다는 전제 내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병도가 총독부 품을 벗어나서 단군을 인정하려고 하자 그 제자들이 이병도를 짓밟고 직접 진짜 스승인 쓰다 소키치와 이마니시 류 선생님의 품안으로 안긴 사건이다.

이병도는 ‘니뽄사’의 큰 틀 내에서 고대부터 근대까지 니뽄의 식민지였다는 ‘한국지방사’를 관리하는 중간관리자지 최고 책임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과장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창한 쓰다 소키치는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건국됐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병도는 8대 고이왕(재위 236~286) 때 건국되었다고 100년 정도 끌어올렸다.

그래서 국정 국사교과서나 검인정 교과서는 모두 백제는 3세기 후반 건국했다고 적고 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임나는 가야의 별칭’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한 홍익대학교 김태식은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운영했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이 되어 고이왕 건국설을 부인했다.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서기전 18년 온조대왕이 건국했다고 볼리는 만무하다는 사실은 이제 이 문제에 관심 있는 국민들은 다 눈치 챘다.

김태식은 고이왕이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은 “후세 백제인들의 고이왕 중시 관념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다.

이 시기 백제의 발전 정도는 좀 더 낮추어 보아야 할 것(김태식,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2005년)”이라고 주장했다.

서기전 18년 건국이라는 『삼국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서기 3세기라는 이병도도 틀렸고, 서기 4세기 중반에 건국했다는 쓰다 소키치 선생님이 맞다는 것이다.

서울교대 임기환은 「동북아역사지도」 문제로 국회 동북아특위 진술회가 열렸을 때 이에 대한 견해를 묻자 ‘학계의 견해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답변해서 여야의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백제는 4세기 중반에야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세금 47억으로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는 4세기에도 한반도 남부에는 신라도, 백제도, 가야도 그려놓지 않은 것이다.

반복하지만 5개월의 수정기한을 주었는데도 독도는 끝내 그려오지 않았다.

이런 지도사업을 중단시켰다고 「한겨레 21」에서 조선, 경향, 한국과 함께 입에 거품을 물고 맹비난하는 것이다.

[한가람 연구소 이덕일 박사님 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