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옥'에 해당되는 글 2건

  1. 환단고기 천자 문화①
  2.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③

환단고기 천자 문화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 천자天子 문화

 

옥웅룡

1984년 중국 요녕성 우하량에서 적석총을 발굴하던 도중에 한 쌍의 옥룡玉龍이 출토되었습니다.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인류사 최고最古’인 홍산문화의 일부입니다.

 

서로 대응하는 모습의 C자형 옥룡은 면밀한 검토 후 웅룡熊龍으로 명명됐습니다.

이른바 옥웅룡玉熊龍입니다.

풀이하자면 옥으로 만든 곰과 용 모양의 형상물입니다.

옥과 곰, 용의 의미가 이 유물의 문화·역사적 가치를 해석하는 키워드입니다.

 

옥은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상징합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옥을 ‘오덕五德을 갖춘 아름다운 돌’이라 하였고,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역』 「설괘전說卦傳」에서는 팔괘의 첫째인 건괘乾卦의 성격을 옥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옥이 하늘의 빛깔과 하늘의 신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홍산문화 유적지 전체에서 옥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들이 대부분 죽은 자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가장 성스러운 보석이 놓였다는 것은 고인故人의 신분이 특별한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곰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는 것이 『삼국유사』의 ‘일웅일호一熊一虎’입니다.

바로 곰을 토템으로 섬기는 웅족熊族을 말합니다.

 

지금의 강단사학계에서는 일웅일호를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로 해석하여 엄연한 실존역사를 신화의 세계로 날려버렸습니다.

홍산인들이 곰을 얼마나 신성시 했는지는 우하량의 여신묘 터에서 여신상과 함께 곰 소조상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여신과 곰은 당연히 『환단고기』의 웅녀군熊女君으로 연결됩니다.

역사의 기록이 현실의 유물로 증명된 셈입니다.

 

용은 동북아에서 경이롭게 모셔지는 동물로 봉황과 함께 천자天子를 상징합니다.

역대 황제와 왕들이 정복으로 곤룡포衮龍袍를 입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상징하는 청와대의 문장紋章은 봉황입니다.

용과 봉에 대한 숭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용 모양의 옥기를 죽어서까지 소장했다는 것은 이 대형묘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제사장(화이트 샤먼)이자, 왕의 신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천자天子가 그곳에 묻혔다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까운 나만기 유적에서 옥쇄玉璽로 추정되는 BCE 4500~BCE 3000년 경의 옥인장玉印章이 발굴되어 그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이며, 홍산문화 유적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의 것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단 시대 배달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다.

홍산문화는 환단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환국·배달·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264쪽)

 

☞ 홍산문화 우하량에서는 무려 BCE 3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적석총[塚], 신묘[廟], 대형 원형제단[壇]을 모두 갖춘 동북아 최고最古 문명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5,500년 전에 이미 종교를 중심으로 제정일치의 국가조직을 갖춘 상고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이라 불리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문명보다 1~2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으로서, 인류 제천祭天문화의 고향이요, 동서양 피라미드, 거석문화의 원조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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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③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세계 최고最古의 옥玉 문화】
6천여 년 전에 벌써 국가 단계의 복잡한 문명을 일구었다는 사실도 인류의 창세사를 다시 쓸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홍산문화가 세계인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문화이다. 
  
특히 발해연안 지역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에 ‘옥玉’ 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신령 령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가운데 ‘입 구口’ 자 3개)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는 뜻이라 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자인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 바로 옥인 것이다.

중국의 고증학자 왕궈웨이王國維의 해석에 의하면 ‘예禮’ 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 자 위에 두 개의 옥[曲]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즉 예라는 것은 ‘옥을 바쳐 신을 섬기는 것’이다. 요컨대 선사 시대의 석기와 토기는 생활용품이었지만, 옥기는 신을 섬기는 예기로 제작되었다(이형구·이기환, 같은 책, 156~157쪽).
  
이형구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발해연안 고대 문화 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옥문화입니다. 고대인들의 신앙적인 마음에서 옥을 선호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하는 옥의 특징을 보면, 용 신앙이라든지 새 신앙이 우리 민족, 동이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영덕 강구면 오포리에서 나온 곡옥을 보면, 그 모양에 입이 있고 구멍도 나 있어서 어떤 사람은 태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누에 같다고도 하지만 저는 용이라고 봤습니다.

홍산문화 대릉하 유역에 적석총이나 석관묘에서는 약 20센티미터의 옥이 나오는데 고리에다 끼워서 가슴에 걸었던 것으로 이 또한 용의 형상입니다.

“한국의 곡옥은 용의 변천일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용신앙의 기원하면 중원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만리장성 너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최초의 용의 형상화뿐 아니라 중국문화의 원류가 중원이 아니라 동북지방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이다.”

부장품이 나온 31기의 묘 가운데, 신석기 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는 단 한 점도 없이 옥기만 발굴된 묘가 26기나 된다.

특히 제2지점 21호 묘의 남성 인골은 옥으로 옷을 해 입은 듯하다. 옥거북, 옥베개, 옥패玉牌, 옥벽玉璧 등 무려 20점의 옥 장식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신을 치장하고 있다.

제5지점 중심 대묘에 누워 있는 남성 인골은 양 귀 밑에 옥벽, 가슴팍에 옥장식, 오른팔에 옥팔찌, 양손에 옥거북이 치장되어 있었다. 신령한 거북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죽어서도 신과 소통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자 정치적 수장으로 간주된다.

 

부장품으로 옥기를 사용한 것은 옥이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서 옥을 ‘오덕五德을 갖춘 아름다운 돌’이라 하였고,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고 하였다(君子比德於玉焉(『예기』「빙의聘義」). 그리고 『주역』 「설괘전」에서는 팔괘의 첫째인 건乾괘의 성격을 옥으로 표현하였다(건은 … 옥이다[乾, … 爲玉] 『주역』「설괘전」).

그 까닭은 옥이 하늘의 빛깔과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천상의 수도를 옥경玉京이라 불렀고, 옥경에 거하며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을 옥황상제玉皇上帝라 부르며 모셨다. 

그래서 홍산인들은 옥을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 신과 소통하는 신물, 천제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흔히 고대를 석기-청동기-철기의 3단계로 구분한다. 하지만 발해연안 영역에서 옥기로 뒤덮인 수천 년의 유적지가 대량 발굴됨에 따라 중국학자들은 청동기 이전에 옥기 시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대 동북아의 옥은 홍산문화보다 더 오래된 흥륭와문화(BCE 6200~BCE 5200)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내몽골 자치구의 오한기敖漢旗에 위치한 흥륭와촌에서 세계 최초의 옥결玉玦(옥 귀걸이)이 발굴되었다. 이 옥결에 사용된 옥은 요동반도의 수암에서 나온 수암옥岫岩玉이다. 수암은 흥륭와촌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진 곳으로 압록강에서 멀지 않다. 당시 만주의 동쪽에서 난 옥을 서쪽으로 가져가 옥제품으로 가공할 만큼 만주의 동서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옥결이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의 옥결은 그 외양이 흥륭와문화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BCE 6천 년경부터 요서, 요동, 한반도가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 문화가 후대의 홍산문화에서 더욱 다양하고 화려해진 점은, 하나의 연속된 문명이 3,4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옥기 유물을 보면 재질은 수암옥(청황옥青黃玉)이 대부분인데 그 색상은 천연 옥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료와 같은 것으로 채색을 한 것도 있다. 검은색의 흑피옥도 출토되었는데, 흑피옥은 중국의 신석기 유적에서는 출토된 바가 없다.
  
요컨대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의 것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단 시대 배달 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다.

시베리아과학원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도 홍산문화의 독자성에 대해 “홍산문화는 중원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중원문화가 홍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용 문화에 대하여 “중국의 용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기록을 보면 북방 이민족 가운데 용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도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용봉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홍산인이었다.

중국에서는 요하지역에서 발견된 이 유적을 ‘신비의 왕국’또는 여신상이 발견되어 ‘여왕국’이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이었다는 요하문명은 그동안 부단히 고조선 영역이라고 주장되던 곳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단군조선보다도 빠른 기원전 3,000년~3,500년경에 이미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민족사로 본다면 문헌기록상 배달국에 해당하는 시기다. 중국은 그동안 황하유역에서 태어난 선진 문화가 각지로 전파 됐다는 황하 중심문화를 기본정설로 고수해 왔었다. 

그러나 만리장성 밖에서 기원전 3000~3500년전에 요하지역에 고대국가가 존재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중국은 이를 근거로 그동안 전설속의 인물이던 삼황오제를 중국의 실존역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조선이 실재했냐 아니냐, 논쟁을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는 우하량 지역의 신비의 왕국을 중국 시원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하량 지역 즉 요령지역은 그동안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이 되어 동이족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곳이었다.

이런 유물들이 나온 지역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던 터이며 이런 유물들은 고조선의 표지 유물들이다.

이런 홍산 유적이 우리 고대사임일 밝혀주고 있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다. 홍산문화는 환단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환국·배달·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왜 홍산문화를 알아야 하는가
이렇게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인류사 최고最古’인 홍산문화를,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2~3천 년 앞선 황하문명의 원류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황하문명의 원 뿌리가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중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 난처함을 다민족 역사관으로써 해결하였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모두 중국의 문화와 역사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면서 중국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앞서는 세계 최고最古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린다.

환단 시대의 한민족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둔갑시켜 이제 경제대국에서 문화대국까지 꿈꾸는 것이다.

홍산문화를 황하 문명의 뿌리라 하여 자기네 문화로 둔갑시켰지만, 심정적으로는 동방 한민족 문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2000년대 후반, 우하량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를 놓아 유적지를 은폐하였다. 홍산문화가 밝혀질수록 중국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에 불리해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유적을 파괴한 것이다.
  
중국이 미래의 중심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때, 환단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명에 대해 침묵하거나 우리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지배해 온 거짓 역사의 미몽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시원 역사와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한민족의 원형문화를 회복하여 웅대한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환단고기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