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올바른 역사관이란?① - 이홍범박사

진실의 역사

올바른 역사관이란?① - 이홍범박사

 

강력한 선진민족의 공통점은 자기에 맞는 가치관을 추구하는 목적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힘을 미치는 것은 민족국가라고 봅니다.

선진국가의 공통점은 민족국가를 완성한 나라입니다.

미국은 민족국가를 완성했습니다. 일본, 독일, 영국, 러시아도 마찬가집니다.

반대로 식민지 독립하지 못한 국가는 민족혁명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민족혁명 성공국가는 자주 민족 통일을 완성한 국가들입니다.

그 나라 고유한 민족국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통합 국제관계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개인 자유의 실현입니다.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야마토의 이상을 건설하는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렇게 민족이 통합돼서 국가를 만들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반고, 삼황오제 그들의 고유한 역사정신에 기초해, 소위 중화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뭉쳐진 국가입니다.

한족의 중화역사관에 기초해서 타민족을 중화로 동화시키면서 중국을 통일시키면서 국제관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독일, 영국, 러시아도 민족 통일 혁명을 완수했습니다.

이들의 통합을 저해하는 방해하는 요소는 식민사관이었습니다. 역사는 자아투쟁 중심으로 세웠습니다.

 

언제나 강력한 민족은 역사의 진실에 기초하던지 아니면 신화적으로 허위적인 역사를 만들다던지 그래서 강력한 자신들의 역사정신에 기초하여 민족을 통합해서 타민족과 경쟁해서 세계를 팽창 정복해갔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서 국가 종교로 선포된지 게르만에 의해 로마가 붕괴됐습니다.

그때 오거스틴의 신학적 역사관을 가지고 게르만 카톨릭을 살렸습니다.

독일적 기독교가 식민사관과 투쟁을 해서 영광스런 독일의 고유한 역사에 기초하여 통합기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민족들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그들의 역사관으로 남의 민족 역사관을 파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족은 멸망하고 피부색만 남아서 피지배 민족으로 하락했습니다.

오늘날 조국의 현실을 볼 때 어떠한 현실에 처해 있다고 보십니까.

하나의 민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공통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8천만이 뭉쳐야 하는데 남북이 외국의 적과 싸우는 적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근대적 민족이 형성이 되지 않았고 우리역사에 기초한 공통의 역사관 정립이 안됐다는 것입니다.

아직 민족자아가 미완성된 상태입니다. 분열 대립 투쟁하는 상태입니다.

식민사학이 일신과 일파의 권익을 의해서 민족 권익을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아직 근대 민족국가 정립이 안 되고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역사관이 들어와서 한민족의 정신을 분열투쟁 시키고 있습니다.

공통의 가치관과 이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극적으로 나타난게 남북문제, 종교가치관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걸 통합하는 최선의 방법은 민족자아를 확립해서 통일 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뭉치는 게 최선의 방법이란 게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 우리 역사 정신을 가지고 뭉쳐야 합니다. 그 역사정신의 핵심이 홍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외세는 민족이 철저히 분열할수록 한민족을 간섭하고 다스리기 쉽습니다.

대표적인게 일제 식민사관, 중화 식민사관 그리고 다양한 외세 종교역사관이 ‘단군은 신화다’해서 한민족 민족사관을 파괴해서 자주 민족통일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걸 못하게 하는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귀중한 역사관을 가지고 민족 자주와 통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홍익 역사관으로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사건건 반대하면서 민족사관을 패배시키는 세력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세력이 소위 식민 강단사학입니다.

외래 식민사관이 방해하고 파괴하고 그러면 결국 약한 민족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역사투쟁, 역사전쟁에 있습니다.

군사경제는 쉽게 알아보지만 보이지 않은 역사관은 역사 통찰력이 없으면 보기가 어렵습니다.

외래사관이 구원이든 사랑이든 평화든 경제번영을 사용하고 실증적인 용어를 들고 나오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밑에 흐르는 진리정신을 통찰하기 쉽지 않습니다.

 

위대한 민족만이 역사정신권력을 만들어 세계사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천만 민족을 통합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한다면 영광스런 조국통일을 이루고 세계 선진대국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는 주동세력이 미약했기에 민족혁명을 지금까지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동학이 민족을 통합시키고 외세를 타파하려 노력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실패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력 부재, 국제사회 흐름 간파하고 지혜롭게 활용하는 국제적 협력을 함께하면서 결국 자주 독립 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게 동학정신을 계승한 참동학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지 않은 훌륭한 분들이 역사 중요성에 강조를 하고 많은 고귀한 분들이 역사 연구를 발표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이런 역사 연구에 기초해서 실질적 역사권력의 힘을 가지고 현실차원의 경제발전 자주독립 통일을 할 수 있는 막강한 민족역량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상당수 강단사학자들은 학술대회를 통해서 계속 민족사학을 파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중요한 이론은 실증주의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외래에서 들어온 실증사관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역사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진리고 재야사학은 실증주의에 기초를 하지 않고 비과학적인 사이비다'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료, 일본의 사료에 기초해서 '단군은 신화다, 환단고기는 위서다.' 이게 실증주의의 결정적 문제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중국이 귀중한 역사사료를 없앴기 때문에 중국, 일본이 제공한 역사사료를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전래되는 전설, 신화, 고고학적인 자료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환단고기』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서가 파괴돼서 전승된 수많은 전설의 기록이 『환단고기』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역사, 한자 역사, 주역을 모르고는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강단사학자들은 한자 해독 역량이 약하고 주역周易과 역학易學이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자 실력과 역학 실력이 선행돼야 하는데 한국의 강단사학계, 하버드를 포함한 국립대학은 역사연구에 선행된 역학, 주역을 가르치는 것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실증주의 역사관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흑이다, 백이다. 청이다, 홍이다. 창조다, 신화다는 둘이 아니다, 하나다.

이런 걸 이해하지 않고 한국인의 역사정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강단사학의 결정적 연구 문제점은 외래에서 온 이원적 3차적 연구를 벗어나지 못했고 일본, 중국이 만든 식민사학에 기초해서 이게 진실이다 그러고, 재야사학의 진실된 역사사실은 거짓이고 위서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촛불 정치혁명이 일어났듯이 식민사학 청산혁명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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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진실의 역사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친일 후손들은 선대가 물려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에 힘입어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선대의 신산한 삶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의 할아버지인 친일파 이명세 등에 의해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쫓겨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창숙 선생의 첫째 아들 김환기는 아버지와 함께 상해 망명길에 올랐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불과 19살이었다.

둘째 아들 김찬기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몇 차례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이후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망명하였으나 망명 도중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 31살이었다.

셋째 아들 김형기는 다행히 살아남았으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고 생활이 곤궁했다.

말년의 김창숙 선생이 이명세 등에 의해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축출당하고 여관 방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때, 셋째 아들 김형기가 자동차 운전사를 하며 부친을 부양했다.

이 당시 세상 사람들이 심산의 아들이 운전사 노릇을 한다고 비웃자, 김창숙 선생이 아들을 위해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두 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셋째 아들에게 조차 변변한 경제적, 사회적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었으리라.

 

아들에게
내 아들이 차를 끈다고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고 조롱하네.
다시 그 아비를 비방하여
거짓 꾸밈 잘하게
자식을 가르쳤다 이르네.
비웃고 헐뜯은들 무엇이 상심하랴.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라.
가정의 생계를 돌보는 이 없다면
하루아침 당장에 망하고 말 것이라.
옛적에 연암(燕巖)공은 전을 지어 기렸다.
예덕(穢德)선생을 너희들 조금도 슬퍼하지 마라.
천한 직업 그것이 바로 천직(天職)이니라.

 

《독립운동가 후손은 4분의 3이 월 소득 200만원 이하》
한국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조사를 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모임인 광복회 회원 6,381명 전원을 대상으로 생활 실태 조사를 한 것이다.

조사 응답자는 1,115명으로, 뉴스타파가 조사한 친일 후손의 전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조사에는 독립 유공자 1대가 58명, 자녀 대인 2대가 469명, 손자 대인 3대가 509명, 증손자 대인 4대가 53명 참여했다.

 

독립 유공자 가족들은 ‘사회적 무관심’과 ‘경제적 빈곤’을 토로하고 있었다.

복수 응답으로 ‘과거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44.6%가 ‘사회적 무관심’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러나 33.9%가 ‘생활의 어려움’을, 33.3%가 ‘연금 승계가 끊길 우려’를 지목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기에 이런 설문 결과가 나왔을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월 개인 소득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50만원 미만이 10.3%, 50~100만원이 20.9%, 100~200만원이 43%였다. 2015년 3분기 기준으로 2이상 평균 소득이 월440만원 남짓이고 4인 가구 최저 생계비가 166만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실질적 소득을 따지고 보면 빈곤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한 자산 역시 국민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70% 이상이 자산 2억원 미만이었다. 다산 5천만원 이하가 28.3%였고, 5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21.1%, 1억원 이상 2억원 미만이 20.9%였다. 2013년 기준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가구당 순자산 3억 3,085만 원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친일 후손 1,177명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 그것도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다.

이같은 결과는 주관적 계층인식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응답자 중 자신이 ‘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이 73.7%을 차지했다.
친일 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조적인 인생행로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학력의 차이였다.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학력이 중졸 이하인 사람이 40%나 됐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 4.7%, 초졸이 22.8%, 중졸이 12.8%였다.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25.7%로, 전체적으로 고졸 이하가 3분의 2이다. 66%에 달한다.

 

친일파 후손 1,177명 중 학력 전수 조사에서는 서울대 출신이 268명으로 22.8%였다. 연대는 68명, 고려대 51명으로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1,177명의 친일 후손 중 유학을 다녀온 비율은 27%였다. 이 수치는 일반인의 유학비율과 비교하면 150~300배에 이른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이들은 부가 대물림 되었다. 당대 누구 못지않은 지식인들이었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배움의 가치를 잘 알았을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지하에서 자신의 후손들과 친일파의 후손들을 비교해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정의가 구현될 리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는가.

그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 속에 매국행위를 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가르쳐 온 것밖에 더 되는가.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정부가 건국 되었음에도 국가에서 예우는 못할망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렸다. 

친일파와 매국노가 성공하는 세상이라면 누가 올바른 정의와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기회주의자와 사대주의자가 성공의 표상이라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국법이 흔들린다.

 

한국사학계의 현주소도 위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 강점기시절 친일과 일본유학을 발판으로 식민 역사학계의 대두가 된 이병도는 2,3세대 제자들을 길러서 대학과 국사편찬위, 한국학 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포진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유롭게 역사연구를 하지만, 민족사학은 '유사사학', '사이비사학'이란 매도와 모멸을 당하면서 정부지원은 커녕 자기 돈을 써가며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사학이 정통사학으로 자리 잡고, 민족사학이 사이비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후에 사가들은 한일 병탄이후 100년사를 친일 100년사로 기록할 것이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섰다. 이제는 지난 묵은 티끌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친일과 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