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뉴라이트'에 해당되는 글 4건

  1. '대통령과 종교'를 읽고
  2.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3.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4.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2

'대통령과 종교'를 읽고

진실의 역사

'대통령과 종교'를 읽고
뉴라이트, 한기총, 대형교회는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들은 이명박 당선을 기원하는 ‘대선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개최하고, 이명박의 각종 비리 의혹이 터질 때마다 노골적으로 변론을 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지 않는 사람은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는 극언까지 했었다.

이명박 당선의 일등공신은 단연 뉴라이트와 한기총이다. 한기총의 수뇌 대다수가 뉴라이트 중심세력이다.

 

한기총은 보수기독교와 대형교회의 대변자 역할을 해왔다. 개신교인은 대체적으로 보수경향이 강하다.

이명박의 분명한 종교적 성향은 취임초부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명박 정부의 장관 16명 가운데 10명이 개신교 신자였고 불교신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청와대 수석비사관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으로서 폭넓은 인사수용이 아닌 종교 편향적 색채가 분명했던 것이다.

 

이명박은 소망교회 출신이고 대다수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도 개신교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통령은 기독교계만의 대통령이 아니다.

그가 장로 출신이라 해도 다를 바 없다. 정권 창출과 정권 수호과정에서 발휘한 막강한 종교권력을 바탕으로 개신교는 입법과정과 정치현안에도 적극 개입을 했다. 특히 기독교의 이권과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준 자신감과 오만함을 바탕으로 도를 넘어 정권퇴진운동을 주도했다.

개신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공개적으로 개신교에 SOS를 요청하는 정치인도 등장을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김진홍 목사가 주도하는 ‘뉴라이트연합’이 있었다.

개신교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선교방식은 대중들로부터 ‘안하무인 종교’, ‘무례한 종교’, ‘속 좁은 종교’라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공공장소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식의 일방적 선교를 하면서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부산집회에서는 ‘범어사’가 무너지게 해주십시오, “할렐루야” 하는 기도까지 나왔다. 이게 예수님의 뜻은 아니었다. 예수님을 이용한 자신들의 잘못된 믿음을 절대적 진리로 착각한 오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소위 소망교회 인맥들이 대표적 인사라인이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개신교인을 중용하면서 이른바 ‘교회인맥’이 또다시 부상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랑의 교회 인맥’이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항간에서는 소망교회는 ‘지고’, 사랑의 교회는 ‘뜨고’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사랑의 교회 신자가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교회인맥의 정부 참여는 대형교회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국정농단을 한 최순실도 2000년 이후로 기독교로 개종하여 여러 강남의 대형교회를 다니며 인맥을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남 순복음 교회, 소망교회, 광림교회를 다녔다고 최순실 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강남의 대형교회를 다니면서 몇천 단위 헌금도 하고 교회를 리모델링 해주었다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알려진 바와 같이 사이비 무당, 영세교 등으로 언론화한 이면에는 한국사회 대형교회의 권력과 종교간의 유착된 의혹의 눈길을 돌리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박근혜는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고 있지만 ‘종교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개신교인이 대거 중용되는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12명 중에서 개신교인은 8명에 달했지만, 불교와 천주교는 1명도 없었다. 청와대의 3실장, 정무수석, 홍보수석, 교육문화수석, 고용복지수석, 외교안보수석 등이 전부 개신교인이다. 내각인선도 개신교 인사가 압도적이다.

어떤 사람을 임명하든 개신교인이 다수 선정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았다.

기독교 단체의 정교유착이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종교편향적 인사를 보여 왔던 것처럼 박근혜 정부도 지나치게 특정종교로 기울어졌다는 분석과 함께 신중한 인사가 필요하다는 불교계의 우려 섞인 지적도 있었다.

무종교인 박근혜 대통령이 인위적으로 기독교계 인사를 중용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기독교계의 정계진출과 이들이 인맥을 총동원해서 정교유착과 국정개입의 의도적 전략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석비서관 중에 불교신자가 1명도 없어서 무교인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이 청불회 회장을 맡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개신교는 국회 입법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차별금지법은 지난 2007년, 2010년 두 차례 입법이 추진되었지만 무산되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제동을 걸고 나선 곳은 다름 아닌 보수 개신교였다.

보수개신교가 문제 삼은 조항은 종교, 사상, 성적 지향의 차별금지 조항이다. 개신교는 이법이 통과하면 타종교나 이단을 비판하거나, 종북세력을 비판할 수 없고, 교회에서 동생애를 죄라고 가르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미 기득권화되고 보수화된 교회권력을 완전히 뿌리내리고 타 종교나 자신들의 이념과 다른 단체의 행동을 억압하겠다는 의도가 농후한 것이다. 

 

이 법이 보수개신교의 반발이 워낙 거센 상황이라 제정 여부는 미지수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막강한 권력과 기득권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경제전문가의 지적이 많다.

2010년대에 들어서 교회의 파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교인감소와 대형교회화되면서 대출로 지은 교회건물에 대한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의 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교회 세습에 대한 논란도 개신교 이미지와 신뢰도들 추락시키는 요인이다.

권력화된 교회, 종교단체의 국정개입. 희한한 것은 ‘개신교의 중용현상’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오히려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오히려 청와대 수석의 개신교 비율은 이명박 정부 때보다도 더 높아졌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뉴라이트적 사관을 반영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제작을 주도했던 권희영 교수가 '한국학 중앙연구원 원장'을 역임했고, 김구는 건국의 공로자가 아니라고 공식 석상에서 주장한 이인호 교수 역시 'KBS 이사장'직을 역임했고,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주창했던 박효종 교수 역시 '방송통신 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승만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나 야곱과 꼭 같다고 주장한 류영익 교수 역시 '국사편찬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개신교 대세현상의 지속이었던 것이다.

이미 개신교 자체가 권력화 돼있고 이런 측근들이 포진된 상태에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이 지속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발생한 최순실 사건이 과연 사이비 종교, 영세교 최태민 목사의 후계자인 최순실의 무당짓으로만 보이는가.

그리고 박근혜 탄핵과 더불어 대형교회가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며 부패정권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뉴라이트는 자신의 종교세력을 기반으로 대통령을 만들어주고 그 대가로 정부 요직을 선물 받은 것이다.

종교와 권력의 정교유착은 정경유착 이상으로 끈질긴 관계다. 《'대통령과 종교' 책 참고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진실의 역사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한국에는 어찌 보면 진정한 보수가 없다.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주세력은 친일파였고 그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내내 친미주의자로 전향되었다.

일본은 자신의 고유정신에 기초하여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고유문화에 기초해 선진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우리의 전통가치를 멸시하고 배척하였다.

외세를 등에 업은 사대주의 세력들은 우리 전통가치를 미신과 근대화란 미명하에 쌍그리 부셔버렸다.

정의보다는 개인적 시세의 이로움에 밝은 이들에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묘청의 난 이후 사대주의자들이 천년 역사의 대권을 잡으면서 우리고유의 정신문화, 역사문화는 무시되고 처절히 파괴되고 말았다.
  
일제 침략기를 거쳐 해방이후 한국의 주요 권력을 잡은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친일행위를 철저히 숨기고 조선인 800만이 학살된 일제시대를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우리선조 8백만이 무참히 살육되고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해방된 조국에서 왜 그들의 역사학을 고수하려하는가.

자신의 민족을 무능하다고 비하하고 가해자를 찬양하는게 말이 되는가.

이는 자기 집안에 도둑이 들어서 강제로 훔쳐간 것을 재산을 간수 못해서 뺏겼다고 하는 것과 같다.

 

뉴라이트는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을 하기까지 한다. 그도 그럴만하다. 역사와 전통가치가 파괴된 한국인에게 외세 식민사대사상이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기때문 아니었겠는가. 한국사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외세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한국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지금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일제에 의해 한번 죽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지만 부일세력이 주권을 잡으면서 오히려 정부의 위정자들에 의해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들의 명예와 신원은 아직도 복원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이런 나라에 위기가 온다면 누구나 나라를 위하는 것보다는 기회주의자가 되어 매국노 편에 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란 것을 국가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의를 바로 세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근원적 사건은 단재 신채호의 지적처럼 묘청의 난 이후 유교 사대주의자들이 국권을 쥐면서 우리 스스로 유교이념에 어긋난다고 한민족 정통역사와 문화를 이단과 사문난정으로 몰아버렸기 때문이다.

유교 국시인 조선시대 세조, 예조, 성종 때는 사서수서령이 내려지고 우리 고유사서를 소장하면 목을 벤다고 왕명을 내렸으니 누가 우리 역사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조선중기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친명 사대사상은 더욱 고착되고 이 사대주의자들이 결국 나라를 일본에 파는 매국노가 된다.

 

결국 명이 강하니 명에 붙었다가, 일본이 강하니 일본에 붙고, 미국이 강하니 미국에 붙으면서 물타기로 천년의 권력을 누리면서 강건한 선비정신의 국풍파 민족주의자들을 정치적 정적으로 몰아서 숙청한 것이다.

사대파와 국풍파의 천년전쟁 중이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장 정채산의 명언처럼

"나는 다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입니다.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 위에 올릴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독립군은 시세의 이로움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쉬운 길을 선택했어도 됐을 것이다.

남들이 왜 그리 험난한 길을 가냐고 할 때도 그들은 그런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안중근의 명언인 見利思義처럼 말이다. 이익을 볼진대 의로운지 생각을 하라.

그러나 친일파는 그렇지 못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국난의 위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얼룩진 반역의 역사를 매듭 짓고 고유의 민족역사정신에 기초한 민족 대화합과 한민족 통일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사대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영원히 사대주의를 지향할 수는 없다.

이제 100년의 일제의 잔재를 떨고 분연히 일어날 때이다. 결국은 자주 독립국가로서 역사와 문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진실의 역사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고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시대가 개막되었다.

이어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그 당시 국제적인 정세를 보아 한민족의 운명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3년간 한국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분단은 더욱더 골이 깊어져 쉽게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현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친미적인 단독정부를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 민중으로부터 가로챈 과거 일본인 재산을 고스란히 친일파와 이승만 정부에 넘기게 된다.

친일 경력을 소유하고 있던 대다수 친일파들이 해방 후 골수 친미파로 전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였을 적에는 한결같이 열렬한 반미투사로 활약하던 자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 정부 수립과정에서 가장 큰 과오는 친일 매국노 청산을 하지 않고 등용함으로써 후에 한국사가 불의의 역사가 전개되도록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기득권을 획득하면서 오히려 친일역사를 옹호하고 합리화해갔다.

특히 역사부분에서는 친일 식민사관은 세계보편주의 사관으로 둔갑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학자들의 역사관은 “국뽕”이나 “환빠”라는 모멸을 당하면서 사이비 역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비방하는 재야사학•민족사학에서도 환국•배달의 역사까지 교과서에 들어가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사료나 유물 검증이 가능한 단군조선사는 복원해서 가르쳐야 한다.

특히 단군조선에 대한 사료는 충분히 고증이 가능한데도 오히려 단군조선을 고증하는 사료나 유물이 나오면 이들은 상투적으로 “학계에서 교차검증결과 위서나 위증으로 판정 났다.” 라고 확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언론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

이들이 사료를 부정하는 방법은 유물고증이라는 방법인데 그 유물도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그 시대 유물이라는 확실한 고증도 되지 않은 것이 부지기수임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제국주의 친일사관이 더 세계주의 사관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 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미,소,중,일 같은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고유의 역사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역사관을 정립했던 것일까.

유대인들이 인구수는 적어도 전 세계의 모든 분야를 장악한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바로 그들의 뿌리역사를 철저히 가르치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 고난을 이겨온 조상들의 삶과 지혜, 신앙의 힘에서 희망을 품고 미래를 열어나가기 때문이다.

과거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통일한국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위해서 반드시 식민역사관은 반드시 털어내야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진 주권국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식민사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과거의 강대한 역사와 찬란한 역사가 21세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의식 속에는 통사적 역사가 단절돼 있다. 이런 자들이 역사학자를 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고 뿌리 없는 식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들은 자신들의 식민사관이 무너질까봐, 자신들만의 학문 카르텔을 형성하고 온갖 언론매체를 통해서 민족사학을 죽이기에 여념이 없다.

『아시아 이상주의』 저자인 이홍범 박사는 이런 한국의 식민사학계를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한국은 한국 사람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상당수 식민사학자들이 왜 사사건건 한민족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신화고 위서다 ’라고 합니다. 국수주의라고 말합니다.

자기 민족의 역사 파괴를 합니다. 유대인은 역사정신 권력을 가지고 위대한 유대역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그러기 위해서 대학에서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권력, 독립을 가르치는 길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사학은 친선 한일을 통해 간접, 직접적으로 역사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강단의 식민사학계열을 연구해보면 한중일간의 학문교류, 한일 친선, 한중 친선, 종교사랑 실행, 아름다운 용어를 사용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우리 학계와 역사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강단의 식민사학 학계가 얼이 빠져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국이 되려면 역사가 독립이 돼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지배하지 못하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강단식민사학계가 그동안 뭐를 했냐. 이겁니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국가 민족의 번영의 문제이기 때문에 용기 있는 역사혁명의 횃불이 필요합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친일반미투사에서 친미분자로 변신하는데까지는 그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필요치 않았다.

익히 알다시피 해방직후 친일파들은 그들의 엄청난 죄과로 인해 민중의 엄청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은 파산 상태에서 이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미군의 진주덕분이었다.

미군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친일파들을 건져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미국의 반공노선에 적극 협조하면서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세탁하게 된다.

 

오늘날 뉴라이트는 김진홍 목사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기위해 보수기독교 단체를 주동으로해서 결성한 단체다.

일제강점기가 “하나님이 준 축복이다”라고 하여 오히려 김구, 안중근, 신채호, 윤봉길,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제국주의 질서를 흔든 좌파세력 내지 테러리스트로 비하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조국은 일본이었던가 보다.

오직 자신들의 논리와 다르면 빨갱이와 좌파로 모는 극열분자들의 뿌리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민족반역자들이었던 이들이 해방 후에 친일 청산이 되기는 커녕 반공노선에 합류하면서 수많은 민중과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좌파로 몰아서 숙청하고 이승만 정부의 개국공신으로 둔갑을 했다.

이들은 오로지 사리사욕에 의해서 미국을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들을 계속 자신들의 주위에 거느린 채 충성스런 하수인으로 부려먹기 위해 이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적당한 권세와 부를 안겨다줌으로써 이들을 구워삶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서로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이로부터 부정부패가 이들 매국노 집단의 본격적 속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권력 있는 자리는 미국으로부터 던져지는 온갖 특권을 가장 손쉽게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정부패와 권력이 결부되어 출세를 위한 경쟁이 더욱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장기집권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은 이러한 부도덕성을 바탕으로 했기에 당연히 온갖 불법과 사기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정의 세력에 대한 폭력 깡패의 고용과 유권자 매수가 서슴지 않았고, 유세장은 폭력배의 기습을 받아야 했다. 자신들의 부패와 불의에 항거하는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교사한 운동이라고 매도를 하였다.

이승만은 시민들의 불의에 대한 항쟁을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기회를 주는 것이니 거기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신의 잘못은 고칠 생각이 없었다. 항상 잘못은 민중의 몫이었다. 폭력으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고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폭발을 하자 미국은 표면에 드러난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기로 작정하고 이승만의 사임을 종용한다.

이승만 정권에서 오직 침묵과 굴종만을 강요받았던 이 땅의 민중들은 얼어붙었던 가슴을 뜨거운 투쟁의 열기로 녹이며 저항의 기세를 높여갔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유와 인권을 향유하는데에는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민중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반성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과거가 어찌 되었던 한국현대사가 걸어온 길이었다. 한민족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역사의 인물도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보는 성숙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교훈 삼아서 미래에는 정의의 역사를 지향해야 한다.

역사가 플럼J. H. Plumb은 『과거의 종말The Death of the Past』에서 “과거의 착취와 구속력에 대한 해방 선언이 과거의 종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왜곡된 과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바로잡힐 때, 그리하여 진정으로 과거의 종말이 올 때, 오늘의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바르게 보고 희망찬 미래를 창조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주의 침략의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 식민사학과 그 후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단군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유는 조선은 자가발전의 능력이 없으므로 외세의 지배와 문물전수를 통해 발전되었다는 제국주의 논리를 강변하기 위해서였다.

뉴라이트 역사관도 매 마찬가지다. 기독교 들어오기 전 한국은 미개사회였다가 기독교가 들어오고 선진사회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래서 일제시대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을 문창극이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는 말 그대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니 과거 수천년 전 기독교가 없을 때, 서양보다 더 강대한 단군의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애써 삭제하려 한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과 뉴라이트 역사관은 동색이다. 자국의 역사를 일제와 미국의 입장에서 기술을 하고 자국역사를 폄훼를 하고 자기 조상에 테러를 가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삼국사기 기록이 위배되었으므로 무조건 일본서기는 옳은 역사책이고 식민지 국가의 역사책은 조작된 것으로 몰아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야마토 왜를 지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이 기록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므로 거짓기록이라고 우겼다.

일제는 1916년 총독부 주재로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면서 한국사를 반도내로 축소시켰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비장의 사료를 강탈해서 단군관련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렸다.

이렇게 몰수되어 태워진 사서만 20여만 권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강대국인 일본(?) 미국에는 굴종적이었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에도 자신의 민족과 민족사를 폄훼했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서기만 믿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행동은 성경의 구약창세기는 무조건 믿으면서 우리의 역사서는 위서라고 몰아붙이는 행동과 같다.

이미 모세의 홍해설화는 역사적 대차비교를 한 결과 허구임이 밝혀지지 않았던가. 성경의 모세기적으로 기록된 애굽왕은 버젓이 천수를 누리고 늙어 죽었고, 하물며 접시물에 빠진 사실조차도 없으니 말이다. 이집트의 왕과 병사가 다 죽었다면 국가위기가 와야 함에도 멀쩡히 태평하게 역사가 지속된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과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조선사편수회는 학문조직이 아니었다. 식민지배의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가공한 것이다.

그런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식민사학 논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강단사학에선 단군을 신화라고 폄하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한국사의 시작을 서기 3세기 이후로 끌어 내리고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사이토 총독의 교육시책이다》

1.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2.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춰내 그것을 확장해서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3.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의 사적과, 일본의 인물,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지금 한국인은 사이토의 전략이 적중했음을 알게 된다. 자국 국민이 자국역사를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하다고 폄훼를 하고 일본 미국의 지배를 감사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니 말이다.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매국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후유증은 우리역사와 혼을 잃는 결정적 치명타를 안겼다. 해방 후 식민주류사학자들은 이중적 처신으로 생존해 왔다. 총론에서는 식민 사학을 비판하는 척하고 각론으로 들어가서는 식민사학 일색인 것이다.

박은식은 일제가 단군 조선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는 조선인이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인이 조선사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이웃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한국사를 자국과 외래 종교 성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왜곡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 한국학 연구소에 10억을 주고 한국 상고사 6권을 영문으로 간행했는데 한국의 송호정, 여호규 등 식민사학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는 학자들만 선발해서 편찬했다.

그런데 한결같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일색이다. 이를 보고 우당 이회영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식미사학 해체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식민사학자들이 지금까지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사 또는 한국 문화의 발전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타율성론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는 내적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정체성론이다.

한민족은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없으므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타율성론은 일본인에게는 한국사를 멸시하게 만들었고, 한국인에게는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다. 곧 식민지배가 한국인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15일 한국인 중에서 해방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이들이 한국고대사를 장악해서 자기 멋대로 주무를지를 누가 알았겠는가?

겉으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속으로는 지지하는 이중적 행보가 이들의 실체다.

윤내현교수가 고조선에 대한 시각을 중국의 고대 1차 사료에 근거해서 반박하자 식민사학계는 윤내현을 재야사학자라고 매도했다.

자기해석하고 다르면 무조건 이단이 되고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 되고 재야로 몰리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지키기 위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유사역사학, 사이비사학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자신들의 역사관과 다른 이들에 대하여 온갖 음해를 가하고 있다.

 

특히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인 한사군에 대해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 그 당시에 기록된 1차 사료에는 한사군의 위치를 하나같이 遼東요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 안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그동안 식민 사학자들은 중국 고대 사료가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한 것처럼 사기를 쳐왔다.

 

이병도는 우봉이씨로 항렬로 따지면 이완용의 손자뻘이다. 할아버지는 국토를 팔아먹고 손자뻘 되는 이병도는 역사를 팔아먹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병도가 한사군을 그리 강조한 이유는 일제 식민사학은 정체성론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고대 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간주하고 정복자인 한나라에서 철기 문화가 전래돼서 조선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철기가 전래되었다는 1차 사료는 전무하다. 고조선이 미개사회였다는 것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정신은 일본 극우파이면서 겉으로는 민족사학자로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식민사학자인 이기동 같은 인물이 비난하는 인물은 식민사학을 비판한 학자들이고, 거꾸로 칭찬하면 식민사학을 옹호하는 인물들이라고 보면 100% 들어맞는다.

역사학계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집단이라면 조선총독부의 시각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일정한 세를 형성해야 마땅한데 현실에서는 그런 예를 찾기 힘들다.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을 적대하는 학자들은 바글바글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진출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조폭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식민사학의 태동배경은 학문이 아니라 식민 지배를 위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왜 피땀 어린 국민 세금을 지원해서 이들을 지켜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