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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역사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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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의 종교와 신앙


고유의 신교 신앙 뵌뽀本敎
오늘날 외국인들에게 티베트는 불교와 달라이 라마의 나라로 쉽게 다가올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 티베트에는 고유 신앙인 신교神敎가 있었다. 이를 ‘뵌뽀本波(本敎)’라고 한다. 일종의 정령 신앙이고 샤머니즘이다. 티베트인 조상들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믿었다. 주술을 외우고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사를 지냈다. 티베트 역사 곳곳에는 그들이 흑마술黑魔術을 쓴 흔적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티베트에는 뵌뽀 무당들이 굿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뵌뽀에서는 이 세상이 하늘·땅·지하 삼계三界가 있으며, 거기에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질병을 관장하는 용신龍神, 자연재해를 관장하는 땅의 신 등등. 뵌뽀는 교파 출현 시기에 따라 정령 숭배 신앙 뵌뽀, 융드롱(한자 ‘만卍’ 자를 지칭하는 티베트어) 뵌뽀, 신新 뵌뽀로 구분할 수 있다. 제6대 왕인 다크리 짼뽀 시기에 전장 지역에서 귀신과 교통한다는 무당이 스스로 교파를 만들었다.

 

이 시기의 뵌뽀는 원시적인 자연 숭배 단계였다. 융드롱 뵌뽀는 외지에서 온 신자들이 만든 교파였다. 이들은 신령을 대신하여 무당이 존재하고 특히 조상 숭배를 행한다는 점에서 정령 신앙 단계에서 발전한 신앙 형태를 하고 있었다. 신 뵌뽀는 7세기 불교 전래와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뵌뽀에서는 자체 경전을 제작, 보급했다. 대부분 불교 경전을 겉모습만 바꾸어 뵌뽀 경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뵌뽀 창시자는 셴랍 미우쩨로 알려졌다. 그는 뵌뽀 신자들에게 불교에서 석가모니와 같이 신성한 존재다. 그가 역사적 인물인지는 아직도 의심을 받고 있다. 뵌뽀 경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 삼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뵌뽀의 최고 신령을 스승으로 모시고 뵌뽀 교리를 공부했다. 공부를 끝낸 삼 형제는 셴라 오카르 신神(뵌뽀 최고의 신. ‘흰빛의 지혜의 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오른손에 갈고리를 들고 코끼리 위의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에게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3단계의 교리 과정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끝나면 불교의 부처에 해당하는 큰 스승이 된다고 했다. 삼 형제 중 첫째는 1단계 수련을 끝냈고 불교의 전세불前世佛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둘째는 2단계 수련을 끝내고 불교의 현세불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뵌뽀 창시자 셴랍 미우쩨이다. 셋째는 3단계 교리를 익혔다. 그는 미래를 관장하는 미래불이 되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셴랍 미우쩨의 수호신이다. 신은 셴랍 미우쩨로 하여금 장중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기원전 5세기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온 셴랍 미우쩨는 뵌뽀를 창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장중 왕국과 토번에는 신교 형태의 다양한 뵌뽀가 있었다. 셴랍 미우쩨는 이러한 원시적 뵌뽀를 통일하여 융드릉 뵌뽀를 만들었다.


티베트 불교는 ‘종파불교’
불교가 티베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였다. 중국의 불교 전래보다 600년이 늦고 한국의 불교 초전初傳(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보다도 약 300년이 늦었다. 티베트는 불교 발상지 인도·네팔과 인접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래가 늦은 이유는 두 지역(티베트와 인도·네팔)을 가로막고 있는 히말라야의 설산 고봉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베트의 나라 세움이 그만큼 늦어진 탓도 있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두 갈래 길이었다. 7세기 중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해진 중국계 불교와 인도·네팔계 불교가 그것이다. 중국 불교가 조금 앞서 전래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티베트인들은 늦게 전해진 인도 불교를 채용했다. 불교는 티베트에 도입된 이래 몇 차례에 걸친 탄압 운동도 있었으나 곧 뿌리를 내리게 된다.

 

티베트 불교의 국교화를 이끈 왕은 제38대 임금 티송데쩬(742∼797)이다. 티베트 불교에는 한국인(신라인)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37대 임금 치데죽짼(재위 705∼754)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진흥책을 썼다. 750년 인도와 당나라로 불경을 구하는 외교 사절단을 동시에 파견했다. 인도로 간 사절단은 히말라야를 넘지 못하였다. 상시桑喜를 단장으로 하는 당나라로 간 사절단 5명은 장안에서 『금강경』, 『도간경稻芉經』 등 불경 1천권을 입수했다. 귀국하는 길에 상시 사절단은 쓰촨四川 성 성도成都에 있는 정중사淨衆寺에 들렀다.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가 바로 당시 정중사 주지로 있었던 무상無相 김화상金和尙(684∼762)이다. 그는 고국 땅에서 까마득히 잊힌 존재였으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는 태산북두처럼 높이 떠 있는 인물이다.

 

무상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확하게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의 셋째 왕자였다. 그는 728년 당나라로 건너갔다. 장안에 도착하여 당 현종唐玄宗의 인도를 받아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다. 이후 쓰촨 성 자중현資中縣 덕순사德純寺(寧國寺)로 가서 당대의 큰 선사 처적處寂의 제자가 되었다. 무상은 2년 동안 처적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 12년 동안 용맹정진했다. 743년부터 20년 동안 정중사 주지로 있으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당나라 인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숭앙받는 큰 선사였다.

 

토번 왕국 외교 사절단 상시 일행은 정중사에서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무상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떠나는 상시 일행에게 무상대사는 앞으로 토번 왕국에 인도 불교가 흥왕할 것을 예언하며 불경 세 권을 선물로 주었다. 상시 사절단 가운데 셀랑拔(塞囊)이 당시 일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무상사 주지 큰 스님을 ‘니마尼瑪(‘태양’이라는 뜻이다)’라고 적었다. 후학들은 고증 끝에 ‘니마’가 무상대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상대사와 하직하고 상시 일행은 756년 라싸로 돌아왔다. 치데죽짼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뒤를 이은 임금이 티송데짼이었다.

 

티송데짼 이후에도 몇 차례 불교 탄압이 있었으나 결국 불교는 티베트를 상징하는 종교로 큰 뿌리를 내렸다. 티베트 불교는 843년 고대 티베트 왕조 분열 후 약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전전기前傳期와 후전기後傳期로 구분된다. 전전기는 ‘국가불교’, 후전기는 ‘종파불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사상 및 종파 역사를 소개할 여유는 없다. 티베트 역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한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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