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 점령

진실의 역사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을 점령하다.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치명적 독버섯 중의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李丙燾이다.


이병도는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후예로 태어났다.

보광학교와 일본인이 운영하던 불교 고등학교를 다녔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후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한 국내 최초의 대학 출신 역사학자이다.

일본 유학은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병도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廣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요시다를 꼽았다.

이병도가 서양사를 전공하려다가 한국사로 방향을 바꾼 계기는 바로 요시다가 쓴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이었다.

요시다는 일본이 조선 국권 강탈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

이병도와 그의 선후배 한국 유학생들은 요시다에게,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지’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다는 “단시일엔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 50년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드시 동화가 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고 한다. (김정희,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사관’, 『청산하지 못한 역사』 3집)

 

이병도는 요시다 후임으로 온 쓰다 소우키치 밑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국사를 연구해 보겠다는 뜻을 굳히고, 쓰다의 지도 아래 역사 연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쓰다의 소개로 동경제국대학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를 만나 사적인 지도를 받았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는 실증사학을 창시한 랑케의 제자 리스L. Riess를 초빙하여 창설한 학과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실증사학이 일본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케우치는 만주를 일본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만철조사부라는 기관에 학문적으로 참여한 제국주의 사학자이고,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도록 추천하였다.

이병도가 제국주의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데에서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학문적 연구를 시작했다.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함께 고려 이전 시기를 담당했고 자연히 주로 고대사를 연구했다.

그런데 이병도는 “우리 사회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 시대로 들어온 일종의 변칙적 발전”을 하였다고 확신하였다.

한사군 이전은 미개사회이고 한사군이 우리나라에 철기 문화를 전래한 이후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고, 고려 시대까지도 낙후한 도참사상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문명이 중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니,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연구 결과를 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결과는 모두 일본 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고대사를 부정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병도는 와세다 대학 동창,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과 함께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만들었다.

그 주요 구성원은 조선사편수회 활동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단학회도 일본의 논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해방 후 이들이 국사학계를 주도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백남운白南雲(1894~1979)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安在鴻(1891~1965)과 정인보鄭寅普(1893~1950) 같은 민족사학의 거목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였다.

해방 이후 이병도의 주요한 근거지는 ‘국사편찬위원회’였다.

이병도는 신석호, 김상기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 양성에 앞장섰고, 국사편찬위원회 창설에 일등 공신 노릇을 했다.

 

그런데 광복 후 국내 사학계를 이처럼 식민사학자들이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 배경도 작용하였다.

일본이 물러가고 이 땅에 들어선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이 친일파 관리와 학자를 기용한 것이다.

미군정 3년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숙청 건의를 묵살하고, 심지어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 국회에 설치한 반민특위反民特委 의 활동도 무산시켰다.

해방 후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렇게 친일파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국내 사학계도 이병도 일파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2차대전이 종결된 후 나치에 협력한 사람 70만 명을 체포하고, 1만 8천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중국도 중일전쟁 당시 일본에 협력한 민족반역자 십 수만 명을 총살하거나 처벌하였다.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역시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자국의 친일파를 청산하였다.

무려 35년 동안 일제의 악랄한 지배를 받은 대한민국은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하기는커녕, 친일파를 등용하여 출세의 기반을 만들어 준 유일한 나라이다.

이병도 후손들은 3대 동안 11명의 교수진을 배출하며 말 그대로 황금계보를 이으면서 서울대총장 ,문화재청장등을 역임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심각한 부패는 이런 부도덕성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이기백, 김철준, 변태섭 등 2세대 사학자를 양성하였다.

2세대는 노태돈, 이기동 같은 3세대를 양성했고, 3세대는 송호정으로 대표되는 4세대를 배출하였다.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서 교편을 잡아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 교사를 대거 양성하고 있다. (김종서, 『신화로 날조되어 온 신시·단군조선사 연구』, 72~74쪽)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쓰다의 조선사 이론에 조선 후기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이론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노론사관이란 한국 학계가 조선 후기사를 인식하는 사관을 말한다.

노론의 뿌리는 광해군을 명나라의 배신자로 몰아 축출하고 그 대신 인조를 앉힌 서인들이다.

서인이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남인에게 역모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주동자 그룹이 노론이다.

조선 멸망 때까지 거의 늘 정권을 장악한 노론의 상당수가 일제의 조선 침탈에 협력하였다.

이 노론 출신의 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 한국 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노론사관은 또 다른 사대주의 사관이다<한겨레신문>,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2009. 7. 18)

그들은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는 무조건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역사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이병도의 호를 따서 두계斗溪학파라 불리는 그들의 파렴치하고도 부끄러운 일화가 있다.

1979년 충북 중원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데 비문의 여러 부분이 풍상으로 마모가 심해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였다.

이병도는 이 비석 앞면 상단의 잘 보이지 않는 제액題額을 건흥建興 4년이라 판독하였다. 

다른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이병도는 “오매불망 끝에 꿈에 건흥 4년이 나타났다”라고 답했고, 제자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아니라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실제 사건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건흥은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이다.

건흥 4년이 장수왕의 재위 4년이라면, 이때는 CE 416년이다.
이것은 스승이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이 그것을 말릴 수 없고, 더욱이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학계의 풍토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이다.

 

자신들의 견해에 도전하는 무리들은 재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면서, 이병도의 말도 되지 않는 ‘현몽’ 논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그 제자들의 학문적 양심이다.

역사가가 정확하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다.

그러나 한국의 국사학계, 특히 두계학파는 그러지 못했다.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우리나라 사학계,특히 고대사 학계를 장악했다.

친일파와 독립투사

진실의 역사

친일파와 독립투사
한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 사대파는 바로 친일파였다.

이들은 조선에 지켜야 할 좋은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유일한 살 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선진국인 일본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도왔으며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열렬히 일본에 충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친일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 동화되기를 거부했으며,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주적 조선인만의 나라를 만들려 일본과 친일파와 맞서 싸웠다.

그들이 바로 독립투사였다.

 

500년을 넘게 이어져 온 조선왕조는 1910년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두고 여려가지 주장이 있으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구한말 조선 무렵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 일본과 결탁한 친일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대적인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계몽기관이자 언론사로 알고 있는 ‘독립협회’‘독립신문’은 사실 일본과 결탁한 친일조직이었다.

애초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자체가 일본 외무대신과 주한 일본 공사같은 일본의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단체였으니 짐작할만하지 않은가?

일본이 제공한 자금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일본을 열렬히 찬양하는데 열을 올리며, 조선인들 사이에 친일여론을 퍼뜨리는데 주력을 다했다.

고종34년(1897년) 114호자 《독립신문》에는 “사악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난 것은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베푼 은혜”이며,

고종35년(1898년) 별호에는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라는 논설이 실렸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국 국방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2척의 군함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려는 계획을 세우자 “세계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 무엇하러 군함을 들여 오는가? 군대는 그저 도적떼나 평정할 정도의 소규모만 있으면 된다”라고 극렬히 반대했다.

《독립신문》의 논지대로라면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쓸만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고, 자주 국방을 위한 국비 증강도 하지 말아야 했던 셈이다.

아울러 독립신문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의병들을 가리켜  비도匪徒(도적떼)라고 모욕을 하는가 하면, 조선 침략에 열을 올리는 이토히로부미와 내통하던 이완용을 불세출의 천재이자 애국자라고 찬양을 했다.

이런 《독립신문》이야말로 친일 사대주의 언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립협회 역시 친일 행각으로는 독립신문에 뒤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일본과 대립하자 독립협회는 반러시아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종황제를 압박했다. 

고종이 러시아의 협조를 받아 4000명의 장교와 3만명의 병사로 조직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조선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의도를 품은 일이 아니냐며  협박을 했다.

독립협회는 연일 러시아를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고종을 몰아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말로는 ‘독립’을 내세웠으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사실 일본에 종속되기를 원한 위선적인 친일파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보낸 첩자이면서 고종의 측근이었던 배정 같은 경우도 있었다.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아버지가 역모에 휘말려 죽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그의 첩이 되면서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조선을 증오하여 반드시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실행하게 된다.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상류층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친분을 쌓고 뛰어난 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서 그의 측근이 되는데 성공한다.

조선 지배층 깊숙이 침투한 배정자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고급 정보들을 전부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고종이 일본의 손길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던 일이 도중에 무산된 것도 배정자가 그 사실을 알고 일본 공사관에 정보를 전해주어, 일본이 손을 써서 고종의 망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려 밀사들을 보냈던 헤이그 밀사사건도 배정자의 밀고로 인한 내부 기밀 누출로 인해서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배정자처럼 자발적인 친일 사대 매국노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친 일진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약 40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일진회는 독립신문처럼 친일 여론을 퍼뜨리는 한편, 회원들에게 군사 훈련도 시켰는데 이는 일본군을 도와 항일 의병들과 싸우는 전투에 적극 가담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들이야말로 구한말에 활개치던 가장 악독한 친일 사대 매국노들이었다.

일본에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동참한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아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면서 "장차 50년 후, 일본에 조선인 출신 재상이 나올 줄 누가 알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게 조선 권력층 내부에 일본과 내통하는 친일파가 가득 했으니, 조선이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항일 의병들이 무기들 들고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고 해도, 친일파가 그 정보를 모조리 일본에 보고하는 상황이니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정신병자나 패륜적인 악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형세의 이익을 계산한 이들은 “조선은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 빨리 망해서 일본에 흡수하는 일이 옳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확신범들이었다.

구한말 배웠다는 상류층 위정자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초들은 의병으로 거사를 하여 독립투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깨어있는 지식인 중에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지사들도 많았다.

또한 무지렁이 민초들 중에도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하여 친일을 서슴지 않고 한 자들도 많았었다.  

 

오늘날 친일파와 가장 닮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은 이래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 하는 대로 본받아야 한다”라며 세계주의를 가면 쓰고 자국 혐오와 사대주의적 발언을 일삼는 지식인이다. 만약 이들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했다면, 아마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열렬한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까. 『자주파 VS 사대파』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식민학자 거두 이병도 참회의 글

진실의 역사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식민학자 거두 두계 이병도 참회의 글

-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이병도 박사가 죽음을 삼년 앞둔 시점에서

평생 자신의 학설을 뒤집고

단군 조선의 실재를 인정한 기사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당시 사학계의 거두였던 두계 이병도의 이 참회기사는

조선일보 특집기사로 1면에 실릴만큼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식민사관과 친일파들에게 의해 숨겨졌던 한민족의 고대사가

해방 후 세상에 처음 드러났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단군신화' 운운하며 강단사학은

우물 안 개구리마냥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실증적 존재가 있는데

그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마흔 일곱 분 단군이 2096년 단 동안 다스린

고대 한민족의 전성기를 가졌던 고조선을

아직도 신화라 치부함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