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이승만'에 해당되는 글 2건

  1.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2.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진실의 역사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고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시대가 개막되었다.

이어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그 당시 국제적인 정세를 보아 한민족의 운명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3년간 한국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분단은 더욱더 골이 깊어져 쉽게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현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친미적인 단독정부를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 민중으로부터 가로챈 과거 일본인 재산을 고스란히 친일파와 이승만 정부에 넘기게 된다.

친일 경력을 소유하고 있던 대다수 친일파들이 해방 후 골수 친미파로 전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였을 적에는 한결같이 열렬한 반미투사로 활약하던 자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 정부 수립과정에서 가장 큰 과오는 친일 매국노 청산을 하지 않고 등용함으로써 후에 한국사가 불의의 역사가 전개되도록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기득권을 획득하면서 오히려 친일역사를 옹호하고 합리화해갔다.

특히 역사부분에서는 친일 식민사관은 세계보편주의 사관으로 둔갑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학자들의 역사관은 “국뽕”이나 “환빠”라는 모멸을 당하면서 사이비 역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비방하는 재야사학•민족사학에서도 환국•배달의 역사까지 교과서에 들어가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사료나 유물 검증이 가능한 단군조선사는 복원해서 가르쳐야 한다.

특히 단군조선에 대한 사료는 충분히 고증이 가능한데도 오히려 단군조선을 고증하는 사료나 유물이 나오면 이들은 상투적으로 “학계에서 교차검증결과 위서나 위증으로 판정 났다.” 라고 확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언론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

이들이 사료를 부정하는 방법은 유물고증이라는 방법인데 그 유물도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그 시대 유물이라는 확실한 고증도 되지 않은 것이 부지기수임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제국주의 친일사관이 더 세계주의 사관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 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미,소,중,일 같은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고유의 역사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역사관을 정립했던 것일까.

유대인들이 인구수는 적어도 전 세계의 모든 분야를 장악한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바로 그들의 뿌리역사를 철저히 가르치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 고난을 이겨온 조상들의 삶과 지혜, 신앙의 힘에서 희망을 품고 미래를 열어나가기 때문이다.

과거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통일한국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위해서 반드시 식민역사관은 반드시 털어내야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진 주권국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식민사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과거의 강대한 역사와 찬란한 역사가 21세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의식 속에는 통사적 역사가 단절돼 있다. 이런 자들이 역사학자를 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고 뿌리 없는 식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들은 자신들의 식민사관이 무너질까봐, 자신들만의 학문 카르텔을 형성하고 온갖 언론매체를 통해서 민족사학을 죽이기에 여념이 없다.

『아시아 이상주의』 저자인 이홍범 박사는 이런 한국의 식민사학계를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한국은 한국 사람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상당수 식민사학자들이 왜 사사건건 한민족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신화고 위서다 ’라고 합니다. 국수주의라고 말합니다.

자기 민족의 역사 파괴를 합니다. 유대인은 역사정신 권력을 가지고 위대한 유대역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그러기 위해서 대학에서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권력, 독립을 가르치는 길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사학은 친선 한일을 통해 간접, 직접적으로 역사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강단의 식민사학계열을 연구해보면 한중일간의 학문교류, 한일 친선, 한중 친선, 종교사랑 실행, 아름다운 용어를 사용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우리 학계와 역사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강단의 식민사학 학계가 얼이 빠져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국이 되려면 역사가 독립이 돼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지배하지 못하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강단식민사학계가 그동안 뭐를 했냐. 이겁니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국가 민족의 번영의 문제이기 때문에 용기 있는 역사혁명의 횃불이 필요합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친일반미투사에서 친미분자로 변신하는데까지는 그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필요치 않았다.

익히 알다시피 해방직후 친일파들은 그들의 엄청난 죄과로 인해 민중의 엄청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은 파산 상태에서 이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미군의 진주덕분이었다.

미군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친일파들을 건져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미국의 반공노선에 적극 협조하면서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세탁하게 된다.

 

오늘날 뉴라이트는 김진홍 목사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기위해 보수기독교 단체를 주동으로해서 결성한 단체다.

일제강점기가 “하나님이 준 축복이다”라고 하여 오히려 김구, 안중근, 신채호, 윤봉길,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제국주의 질서를 흔든 좌파세력 내지 테러리스트로 비하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조국은 일본이었던가 보다.

오직 자신들의 논리와 다르면 빨갱이와 좌파로 모는 극열분자들의 뿌리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민족반역자들이었던 이들이 해방 후에 친일 청산이 되기는 커녕 반공노선에 합류하면서 수많은 민중과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좌파로 몰아서 숙청하고 이승만 정부의 개국공신으로 둔갑을 했다.

이들은 오로지 사리사욕에 의해서 미국을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들을 계속 자신들의 주위에 거느린 채 충성스런 하수인으로 부려먹기 위해 이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적당한 권세와 부를 안겨다줌으로써 이들을 구워삶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서로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이로부터 부정부패가 이들 매국노 집단의 본격적 속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권력 있는 자리는 미국으로부터 던져지는 온갖 특권을 가장 손쉽게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정부패와 권력이 결부되어 출세를 위한 경쟁이 더욱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장기집권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은 이러한 부도덕성을 바탕으로 했기에 당연히 온갖 불법과 사기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정의 세력에 대한 폭력 깡패의 고용과 유권자 매수가 서슴지 않았고, 유세장은 폭력배의 기습을 받아야 했다. 자신들의 부패와 불의에 항거하는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교사한 운동이라고 매도를 하였다.

이승만은 시민들의 불의에 대한 항쟁을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기회를 주는 것이니 거기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신의 잘못은 고칠 생각이 없었다. 항상 잘못은 민중의 몫이었다. 폭력으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고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폭발을 하자 미국은 표면에 드러난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기로 작정하고 이승만의 사임을 종용한다.

이승만 정권에서 오직 침묵과 굴종만을 강요받았던 이 땅의 민중들은 얼어붙었던 가슴을 뜨거운 투쟁의 열기로 녹이며 저항의 기세를 높여갔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유와 인권을 향유하는데에는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민중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반성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과거가 어찌 되었던 한국현대사가 걸어온 길이었다. 한민족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역사의 인물도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보는 성숙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교훈 삼아서 미래에는 정의의 역사를 지향해야 한다.

역사가 플럼J. H. Plumb은 『과거의 종말The Death of the Past』에서 “과거의 착취와 구속력에 대한 해방 선언이 과거의 종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왜곡된 과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바로잡힐 때, 그리하여 진정으로 과거의 종말이 올 때, 오늘의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바르게 보고 희망찬 미래를 창조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진실의 역사

남북 분단과 6.25로 인해 부흥을 맞이하다.
일제는 패망했지만 우리 민족의 온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일본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지배한 미국과 소련은 삼팔선을 그어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공산정권과 자유정권(반공)을 세워서 분할 지배했다.

소련의 영향하에 세워진 북쪽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북한 정권은 기독교 교회가 가진 토지와 재산 등을 몰수했다.

수많은 이북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북한의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밀려 내려왔다. 그들은 수많은 반공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그 유명한 서북청년단도 북한의 박해로 재산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쳐 온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된 단체였다.

월남으로 늘어난 기독교 신도들 덕분에 남한의 기독교 신자 수는 해방 이후에 더욱 늘어났다.

이들 반공 청년단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극렬한 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제주 4.3사건과 1950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때 무고한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아서 수십만명이나 학살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을 했다. 그들의 이념에 반대되는 자들은 좌익시 되었다.

이러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관은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 성향으로 드러났다. 

중세 마녀사냥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노예사냥 및 중남미 원주민 학살이 자행된 이유도 이런 분명한 선악논리로 인해 타문화를 제거 내지는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에는 남한 기독교인들도 한몫을 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의 젊은 남자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된 조직이었다.

기독교와 반공을 외치며 폭력으로 좌익을 탄압하는 반공 청년단들은 당시 남한을 세계 반공 전선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는 미국과 남한 정부에게 아주 훌륭한 도구였다.

이런 이유로 미군과 한국군은 제주 4.3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반공 청년단을 무장시켜 좌익 탄압을 위한 보조 무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 청년단들은 거칠고 난폭한 면이 많은데다 살인, 강간도 서슴없이 자행을 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정치 깡패로 나서면서 국민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래서 훗날 1961년 5.16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구악 일소를 외치자 반공 청년단들은 정권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자진 해산했다. 청년단 중 상당수는 목사가 되어 개신교로 흡수되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이 강경한 반북정책을 옹호하고 북한을 공격해서라도 공산정권을 무너뜨리자는 강한 반공 성향을 보이는 이유도 그들 중 상당수가 반공 청년단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재산(적산)을 미군이 몰수했다가 대부분을 기독교 교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해방 직후, 재산을 급격히 불리면서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말 그대로 기독교에게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보수 개신교계에서 일제 강점기는 하나님의 뜻이며 축복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는 기독교 성장의 토대를 깔아 주었다. 일제 강점기는 그야말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기회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일제 강점기에 대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을 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기독교 부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미국이 적산을 한국의 기독교 교회에 넘겨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일부 기독교 성직자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서 미군과 말이 통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미국의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미군은 한국 기독교에 정보 제공의 대가 겸 이해관계에 철저히 따를 하수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의 적산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1979년 1월 8일 미국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인 리처드 홀부르크는 주한 미국대사인 윌리엄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민주화 시위에 나선다면 그들은 더 이상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이는 한국의 여러 기독교 단체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대가로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약 3년 동안 한국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이 와중에 미군에게 잘 보여 출세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갔다.

특히 미군이 만든 한국군에서는 영어를 잘하고 개신교를 믿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개신교가 강세였다.

한국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때도 바로 미군정 시기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기독교는 또 한 번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미국이 보낸 식량과 구호물자가 대부분 기독교 교회를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분배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옥수수 가루라도 얻으려면 교회로 가서 개신교 종교 행사에 참여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기독교 신자 수는 급증했다. 식량을 나누어 주는 교회에 고마움을 느끼고 또 그런 일을 하는 기독교에 호감이 생겨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해방 직후, 전체 인구의 고작 3퍼센트에 머물던 기독교 인구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증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를 전부 합치면 12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한국 전체 인구인 5천만명의 약 24퍼센트에 해당한다. 인구 대비로 따지자면 필리핀과 동티모르를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한국만큼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는 없다. 지금은 해년 20만명씩 줄어드는 추세다.

 

정리하자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따른 결과였다.

많은 조선인은 세계를 주도하던 강대국인 미국을 동경했고, 그런 미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발달된 문물의 혜택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미국이 믿는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만약 미국이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를 신봉했다면, 지금 한국 곳곳에는 교회대신에 모스크가 가득하지 않았을까?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중국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사상인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유교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자주파 VS 사대파』